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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조순종(증언자-조광남)
이름: 관리자
2016-12-13 11:58:32  |  조회: 1361



피랍인
생년월일: 1920년 7월 20일
출생지: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530번지 72호
당시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530번지 72호 (경춘 한옥마을)
피랍일: 1950년 8월 21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조선활판주식회사 사장, 청년 민보단 단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4남매)


증언자
성명: 조광남(1945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조선활판주식회사 사장이던 증언자의 아버지를 한여름 밤중에 동네 공산당원 다섯 명이 집으로 찾아와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납치해 감.    
-  증언자의 어머니는 납치된 남편이 혹시라도 돌아올지 몰라 피난을 안가고 있었고, 빨갱이들이 호구지책으로 증언자의 아버지를 월북자로 거짓 밀고하여 헌병대에 잡혀가는 고초도 겪었으나, 동네 어른들의 진정으로 풀려나게 됨.
-  아버지 납북 후 7년 만에 동생과 어머니가 하루 간격으로 세상을 떠남.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어떻게든 아버지를 찾으라는 것이었음.
-  힘들게 고학을 하면서 살고 있던 증언자를 당시 정보과 형사들이 미행하고 감시하는 일이 다반사였음. 직장생활 뿐 아니라, 결혼 당시에는 처갓집까지 형사들이 찾아가 조사하는 통에 불이익을 당했음.  


“8월이었는데, 여름밤에 돗자리 깔고 앉았다가 나는 들어가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와서는 우리 아버지 잠깐만 데려가서 조사하고 보내드리겠다고 하면서 끌고 갔다고 그러더라고요. 8월 중순인가 하순인가 그거는 내가 정확히 몰라요.
아버지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흰 고무신 신고 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냥 잠깐 갔다 오겠다고 그러시고 나가셨죠. 붙잡아 간 사람들이 동네 빨갱이들 다섯 명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다 아는 사람들이죠.”

“어머니는 임신 중이셔서 다니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희 외숙모가 대신해서 아버지가 청량리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옷 하고 가져다주러 갔는데, 아버지가 조서 받는데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이더래요. 경찰서 사람한테 외숙모가 옷 좀 전해주게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하니까 안 된다 하고 옷만 놔두고 가라고 하더래요. 그게 마지막이었대요.” 


직업 및 활동

<조선활판주식회사 사장이었던 피랍인은 당시에 활판 인쇄업계에서 독보적인 존재였고 많은 돈을 벌었음. 대한청년단, 민보단 단장으로도 활동했음>
 
문_ 아버님 출신학교는 어딘지 아세요?
답_ 몰라요, 소문에 고대 보전이라는 데를 졸업했다는 소리가 있는데 저는 당시에 여섯 살이라 너무 어렸으니까 모르죠. 

문_ 당시 아버님 직업은요?
답_‘조선활판주식회사’라고 활자판 만드는 회사 사장이었어요. 요새는 컴퓨터로 되어있지만 그 전에는 납으로 된 활판으로 인쇄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그거 만드는 곳이 우리 아버지 회사만 전국에 하나가 있었대요. 그래서 돈 많이 벌었다고 그러더라고. 당시에 부자였고, 차도 있었고 그랬어요. 돈이 있으니까 대한청년단 단장도 했고, 민보단 단장도 했고 그랬죠.


납북 경위

< 8월 여름밤에 집으로 찾아온 면식이 있는 동네 공산당원 다섯 명에 의해 피랍인은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흰 고무신 신은 채로 끌려갔음>


문_ 전쟁 나고 피난은 안 가셨어요?
답_ 큰 누나하고 작은 누나는 고모가 살고 계셨던, 지금 도룡리라는 데로 피난을 갔어요. 아버지는 발바닥에 종기가 나서 피난을 못 갔어요. 그래서 집에 있다가 잡혀가셨어요.

문_ 납치 당시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답_ 8월이었는데, 여름밤에 돗자리 깔고 앉았다가 나는 들어가서 자고 있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갑자기 집으로 들어와서는 우리 아버지 잠깐만 데려가서 조사하고 보내드리겠다고 하면서 끌고 갔다고 그러더라고요. 8월 중순인가 하순인가 그거는 내가 정확히 몰라요.
아버지는 집에서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흰 고무신 신고 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냥 잠깐 갔다 오겠다고 그러시고 나가셨죠. 붙잡아 간 사람들이 동네 빨갱이들 다섯 명이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다 아는 사람들이죠.

문_ 평상시에 친분이 있었던 사람들인가요?
답_ 아니 그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는 대한청년단이고, 그 사람들은 좌익 일을 하던 사람들이니까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에서 그 사람들 잡아다놓고 그러면, 아버지한테 좀 봐 달라고 하고 그러면 아버지도 그냥 훈방해서 내보내고 그랬던 사람들이에요. 

문_ 그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있었나요?
답_ 그건 모르죠. 그렇다는 소리만 어렸을 적에 들었습니다.

문_ 그 당시 목격자는 누가 있었나요?
답_ 목격자는 어머니하고 집안 식구들인데 다 돌아가셨죠.


납치 후 소식
< 피랍인의 부인은 당시 임신 중이었으므로, 증언자의 외숙모가 대신해서 피랍인이 수감되어 있던 청량리 경찰서에 옷을 전해 주러 찾아가서는 피랍인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옷을 전해주게 만나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거절하고 옷만 놔두고 가라고 했음. 그 이후로 피랍인의 소식은 알 수 없음>

문_ 납치 후에 어머님이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셨나요?
답_ 어머니는 임신 중이셔서 다니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희 외숙모가 대신해서 아버지가 청량리 경찰서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옷 하고 가져다주러 갔는데, 아버지가 조서 받는데 앉아 있는 뒷모습이 보이더래요. 경찰서 사람한테 외숙모가 옷 좀 전해주게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하니까 안 된다 하고 옷만 놔두고 가라고 하더래요. 그게 마지막이었대요. 

문_ 아버지가 붙잡혀 가신 뒤에 찾아보려고 신고하신 바가 있으세요?
답_ 아휴, 그거는 우리 어머니가 많이 했죠. 했는데도 하나도 해결된 것이 없고, 아버지 납치되신 후로는 소식을 못 들었다는 거지. 내가 어렸으니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신지는 몰라요.
아마 납북자로 신고한 건 아버지 친구가 했을 거예요. 김경하 씨라고 친한 친구 분이 있었어요. 어머니는 그 때만해도 임신 중이고 했으니까요.

문_ 아버님 잡혀가신 후에 혹시 소문 같은 것도 들은 바가 전혀 없으세요?
답_ 전혀 없었어요. 왜냐하면 동네 다른 사람들은 대개 길거리에서 그냥 잡혀가던지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집에 계시다가 잡혀갔거든. 


남은 가족의 생활

<혹시라도 피랍인이 돌아올지 모른다는 희망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았음. 그런데 동네 공산당들이 피랍인을 월북자로 밀고하는 바람에 피랍인의 부인이 헌병에게 체포되어 20일 정도 구류되었다가 주변인들의 증언과 도움으로 풀려났음>

문_ 아버님 붙잡혀 가시고 난 뒤에 어머님하고는 어떻게 사셨어요?
답_ 어머니가 그 때 청량리에서 석탄을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왕십리 식당들에다 팔면서 먹고 살았어요. 어렸을 때 참 고생 많았어요. 어머니는 혹시라도 아버지가 돌아올지 모르니 우리가 피난을 나가면 안 된다 하면서 피난을 안가고 있었어요. 나도 어렸을 때 이야기 들은거죠.
근데 또 그 빨갱이들이 자기네 살기 위해서 우리 아버지가 월북해 갔다고 신고를 한 거야. 이 집이 빨갱이다, 좌익집이다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인제 잡혀간 거야. 그런데 헌병들이 뭐를 알겠어요? 동네 어른들이 진정을 해가지고 아니다 그 사람은 잡혀간 거다, 여기에서 대한청년단 단장하고 이랬던 사람이라고 확인해 줘서 풀려났지요. 

문_ 아버님을 잡아간 그 사람들은 그 후로 어떻게 됐나요?
답_ 모르죠 뭐. 우리가 어떻게 알아요? 피난을 갔는지 도망을 갔는지 모르죠.

문_ 어머니는 잡혀가신지 얼마 만에 돌아오셨어요?
답_ 거진 겨울에 잡혀갔으니까 1·4후퇴 때 수복하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잡혀간 지 20일 정도 됐다고 그런 것 같아요

문_ 그러면 회원님하고 어머님은 그 후로도 계속 피난 안 가시고 거기에 사셨어요?
답_ 네, 계속 살았어요. 어머니가 거기에서 돌아가셨어요.

문_ 어머니는 병원이 아니고 댁에서 돌아가셨어요?
답_ 집에서 돌아가셨죠. 돈이 있어야지 병원에 가죠. 화병에 돌아가셨다고 그러는데 화병인지도 모르고 바짝 말라서 돌아가셨어요.
내 동생도 죽을 때, 방 안에서 엄마는 아랫목에서 앓고 있고 내 동생은 위에서 앓고 있고 나는 가운데 앉아서 공부했는데 한번 생각해보세요. 내 동생은 심부전증이 있었어요. 5학년 때 죽었어요.

문_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신 건가요?
답_ 아니에요. 동생이 하루 전에 죽고 어머니가 충격 받으셔서 그 다음날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내 동생 화장하고 들어와서 밤에 ‘엄마, 걱정 마.’그랬는데 엄마가 설렁탕 먹고 싶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전농동에서 설렁탕을 파는 데가 없어서 청량리까지 가서 사가지고 와서 그거 떠먹여 드렸는데, 그 다음날에 돌아가신 거예요. 우리 자는 동안이라서 임종도 못 지켰어요. 19살에 결혼해가지고 34살에 돌아가셨어요. 제가 13살 때지요. 중학교 입학하고 3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나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겠지만 한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할 말이 너무 많은데 못해요. 지금은 생각도 잘 안 나기도 하고. 눈물부터 나니까.
하여튼 참 힘들었다는 것만 아시면 되요. 정부에서도 우리 같은 사람들을 보살펴 줘야하는데 빨갱이 취급을 하고 공산당원 자식으로 취급을 해가지고 되는게 없어요. 그 청량중학교를 다녔는데 졸업장도 못 받았어요. 등록금 못 냈다고 매를 어떻게나 맞았는지. 그 머리 빡빡 깎아 놨는데 혹이 이렇게 나서 다니고 그랬어요. 교복도 얻어 입고 다녔어요. 중학교 때도 교복을 헌 것을 입으니까 새 거 입은 애들이 선배인줄 알고 나한테 경례를 붙이는 거예요. 그럴 정도로 진짜 고생 많이 했습니다. 나 고생한 이야기가 슬픈 영화보다도 더 슬프죠. 한 번 생각해보세요. 초등학교 중학교 입학하고서 보통 먹을 게 없는데 그러니까 집 있는 거를 팔아서 줄여가고 또 그 집에다가 전세 놓고 방마다 전세 놔서 또 없으면 또 줄여서 가서 결혼 할 때는 집이 없었어요.

문_ 다른 가족들이 안 도와주셨어요?
답_ 우리 어머니가 채무책을 적어 놨어요. 얼마 꿔줬고 얼마 갚았고, 이런 걸 다 기록해 놓으셨는데. 이모부가 민주당에서 정치한다고 해서 정치자금이 많이 들어가서 저희 엄마가  많이 빌려 주셨었죠. 어머니 돌아가셨다니까 이모가 제일 먼저 와서 우리 어머니 머리맡에 있는 채무책을 갔다가 아궁이에다 태워버렸어요. 나는 몰랐죠. 그 큰 걸 없애버렸어요. 그러고서는 언제 우리가 너희 돈을 썼냐 이러더라고요.

문_ 이모가 전혀 안 돌봐 주셨어요?
답_ 내가 고등학교 때 부산에 가서 한 1년 있다가 이러고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서울에 올라와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그 때 학비가 6천원인가 그랬어요. 그 때 이모 나 삼천 원만 도와줘 그랬더니‘우리 애들도 못 시키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도와주냐.’더라고요. 그 소리 딱 듣고 나서부터 내가 이모를 다시 보면 개잡놈이다, 침도 안 뱉겠다 생각하고 이모네 안가요. 고등학교 입학금도 내가 내면서 다녔죠.

문_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답_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지요. 망우리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었어요. 6·25가 터지고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산소를 갔어요. 망우리 맨 위에 가족묘가 있었어요, 50평짜리. 그 다음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걸 찾아야 되겠다 그래서 친구들을 데리고 여럿이 몇 번가서 찾아보니까 산소가 아니라 길이 된 산소인데 비석이 요만한 게 있었는데 그 비석에 총탄이 막 맞고 그랬어요. 비석 때문에 찾았죠. 그래서 산소를 다시 잘 만들었죠.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니까 찾아다녔는데. 아내가 우리 재산도 없는데 애한테 그거 물려줄 수 없다 정리하라 해서 몇 년 전에 정리했죠. 어머니는 홍제동에서 화장해서, 아무것도 없고요.

문_ 아버님에 대해서 생각나시는 것은 있으세요?
답_ 아니, 내가 알기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놀러 다니고 그러면 꼭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그 회사 직원들하고 진관사 놀러갔을 때 찍은 사진들에도 꼭 나는 데리고 가서 앉혀놓고 찍으셨더라고요.

문_ 어머님이 아버님을 많이 그리워 하셨을 것 같은데요?
답_ 아휴, 그럼요. 연애결혼 하셨고, 결혼사진도 아직 있는데. 아버지 회사에서 두 분이 만나서 결혼 한 거거든요.  

문_ 혹시 돌아가시면서 어머님이 특별히 남기신 말씀 없으세요?
답_ 아버지를 어떻게든 찾아라.


호적 정리

<행방불명으로 정리했음>

문_ 호적정리는 하셨어요?
답_ 했어요. 행방불명으로 신고를 했어요. 정리도 안 돼 가지고요.


연좌제 피해

<밤에 경찰이 찾아와서 아버지를 찾고, 오랜 기간 미행을 당했으며, 직장 생활에서까지 불이익을 당하는 등 심한 연좌제 피해가 있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안 당하셨어요?
답_ 아휴, 그건 말도 못해요. 밤에도 경찰이 와가지고 별안간에 들어와서 아버지를 어디 숨겨 놨지 않느냐, 우리 아버지가 혹시 간첩으로 오지 않았냐 그래서요.‘간첩으로라도 왔으면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이런 생각까지 했었어요.
내가 결혼을 했는데 그 처갓집까지 조사를 했어요. 빨갱이 집안하고 결혼했다고 처갓집에서 난리가 났죠.
제가 전농 초등학교, 청량 중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도 등록금이 없어서 못 다녔어요. 그래서 졸업도 못하고 있다가 제가 일 년 동안 부산에 가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야간 고등학교 다니고 직장생활 하면서 다녔습니다. 그 때 동네에서 친구들하고 술집 가고 그러면은 뒤에 정보과 형사들이 꼭 따라 다녔어요. 그리고 내 친구가 답십리에서 여관을 해서 거기를 들어갔다가 친구 만나고 나왔는데 거길 쫓아와가지고 형사가 ‘저 사람이 누굴 만나고 갔느냐.’고 물어봤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카운터를 보던 제 친구 아들이 ‘저분은 사장님 친구라서 사장님 만나러 들어간 거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정보과 사람들이 날 쫓아다닌다는 걸 알았죠. 그 전에는 전혀 몰랐어요. 스물 한 두 살 때까지도 몰랐어요.

문_ 언제까지 회원님을 감시한 거죠?
답_ 그 후로는 내가 경찰서에 찾아갔어요. 청량리 경찰서 정보과에 가서 일부러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혹시 그런 사람이 간첩으로라도 온다 하면 내가 신고를 할 테니까, 나 좀 쫓아다니지 말라고 했어요. 그리고 술 먹는데 경찰이 저 뒤에서 있다고 친구가 알려줘요. 그러면 내가 막 욕을 했어요. 왜 쫓아다니느냐고. 그랬더니 그냥 형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사를 하면 이사 오는 데까지 쫓아와서 그러고, 취직을 하려 해도 할 수도 없었고요.

문_ 취직까지요?
답_ 네. 일본 오퍼상하는 회사에 다니는데 이제 일본에 가게 된 거예요. 신원조회에서 지금은 모르지만 ‘중통’이라고 해요. ‘중통이 뭡니까?’ 하고 물어봤더니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봤더니 ‘중앙정보부에서 통과가 돼야 한다.’이런 이야기야. 그래서 일본에도 못 갔어요. 나중에 그런 연좌제 없어지고 나서 갔죠. 외국도 못가고, 결혼은 했는데 처갓집까지 찾아와서 조사해 갔죠.

문_ 아버지 소식을 알고 있는 거냐고 경찰 쪽에 물어보셨어요?
답_ 했죠. 그랬는데 모른다고만 하죠.


정부에 바라는 말

<정부는 사상이 불순한 공산주의 성향의 국회의원들이 대한민국 국회에서 활개 치는 것을 용납하지 말고 제재해야 함>

문_ 아버님 납북되시고, 어머님 일찍이 돌아가시고, 힘들게 살아오셨는데 지금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건 있으세요?
답_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요새 정부에 좌익들이 너무 많은데 그걸 정부에서 인정을 해준다는 게 문제라는 겁니다. 국회의원으로서 그거는 절대 용납할 수가 없어. 젊은 사람들이 뭘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이 좌익이라는 것을 너무 모르고들 저렇게 날뛰고 있는 것을 정부에서 제재를 못한다는 건 진짜 잘못된 거라고. 나는 그게 제일 한스러워.
제가 여의도에서 직장생활을 해가지고 한 2,000명 다니는 헬스클럽에서 운영회장을 했어요. 그래서 국회의원 전영욱 씨나 김민석 씨, 김명석씨 같은 사람들까지 참 친했거든요. 그때에도 정치판에 좌익이 없었어요. 요새는 너무 많아요. 우리나라는 엄연한 반공국가인데 왜 그런 사람들을 국회에다가 두는지 나는 이해를 못하겠어요. 지네들은 고생을 안 해봐서 그런지 몰라도 공산주의국가가 어떻다는 거를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한이 너무 맺혀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그러면 마지막으로 아버님한테 영상편지 간단하게라도 해 주세요.
답_ 근데 목소리가 내가 괜찮을까요? 아버지, 참 보고 싶어요…. 그냥 살아만 계셨으면 좋겠어요. 한 번만 봤으면 좋겠어요.

문_ 아버님이 지금 살아계시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답_ 94살이요.

문_ 아버님 만나시면 뭐 해드리고 싶으세요?
답_ 원하는 거 전부. 내 것이 모자라더라도 다 팔아서라도 해 드리고 싶어요. 단 하루만이라도 행복할 것 같아요. 할 말은 너무 많아요. 고생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거예요. 너무 고생이 많았어요. 자살도 여러 번 하려고 했어요. 밥을 일주일도 굶어봤고, 자살하려고 약도 먹어 봤어요. 청량리에서 자라면서 싸움도 많이 했습니다. 보고 싶고 그리운 것 밖에는 없어요. 살아만 계시다면 좋겠어요. 나는 피난 나가면서 전부 겪었어요. 죽는 사람들도 많이 봤고 그랬는데도, 우리 아버지가 너무 고생했을 것 같아서 불쌍해요. 한이 너무 맺혔습니다.
저는 가족회에서 하시는 일이 정말 고맙고 그렇습니다. 너무 아버지가 보고 싶고 엄마의 한도 풀어드리고 싶고 아버지 오면 엄마가 고생했던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싶어요. 엄마가 너무 불쌍해요. 27살에 과부 돼서 34살에 돌아가시고 눈도 못 감으셨어요. 내가 눈도 감겨 드렸어요. 그 때 중학교 때인데도 어렸을 때 젊은 과부가 죽었다고 방에 한 사람도 안 들어 와요 그래서 나 혼자 방 안에 가서 촛불 켜고 있다가 병풍 뒤로 가서 이렇게 보면 자는 것 같고 만져보면 차고. 그런 생각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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