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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황규창(증언자-황선재)
이름: 관리자
2016-12-13 12:30:04  |  조회: 1378


피랍인
생년월일: 1896년 6월 23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동학리 113
당시 주소: 서울 특별서 성동구 신당동 140-14번지 2/12
피랍일: 1950년 7월 1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고향영농조합 전무이사, 국회의원 선거위원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6남매(8남매 중 장남, 장녀는 출가), 외삼촌, 사촌형님 2명 
외모/성격: 175cm의 큰 키에 호감을 주는 인상. 온화하면서도 의지가 강함.


증언자
성명: 황선재(1939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영농조합 전무이사이자 국회의원 선거위원장이었던 피랍인은, 6․25 발발 이후 숨어 지내다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사택과 붙어있던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보다가, 장총을 매고 차를 타고 온 젊은 사람들 대 여섯 명에게 끌려감. 
- 9․28 수복이 되기 전, 8월 말이나 9월 초 즈음에 겨울이 오니까 두꺼운 솜 든 옷을 해 오라는 연락을 받고, 당시 정치보위부로 사용되었던 국립도서관 건물로 어머니가 찾아가서 아버지에게 솜옷을 갖다 드리고 면회를 했음.
- 미국에 살던 증언자는 경제인으로 초청을 받아 1990, 1991년에 두 차례 북한을 방문하였고, 미국에서의 아는 통로를 통해 납북되신 아버지를 찾아달라고 신청하고 필요한 자료와 함께 돈도 제공해 주었지만, 자진 월북자만 있을 뿐 납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만을 받음.


“우리 아버님이 피해 계셨는데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이제 나오셔도 된다고, 나와서 정리할게 있으니까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저희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해서 우리 아버님이 7월 1일에 나오셨어요. 나와서는 아들집, 외가댁을 쭉 돌아보시고 저녁 때, 한 다섯 시쯤 됐을 때  집에 오셔서 서류 같은 것을 아궁이에서 태우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녁을 잡수시고 사무실에 나가서 직원들이랑 같이 만나서 이야기 하셨죠. 그러던 중에 차 두 대가 오더니, 사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 두 세 명이 딱콩총(소련식 장총)을 매고 내리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집에 왔다가 아버지 사무실에 계시다고 하니까 그리로 가서 아버님을 끌고 갔지요.”


 직업 및 활동

<피랍인은 고향영농조합 전무이사이자 국회의원 선거위원장이었음. 경찰에 재직 중이던 이복형 또한 6.25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음>

문_ 아버님 출신학교는 어디셨죠?
답_ 그게 확실치가 않아요. 그 상업학교를 나오셨다고 했는데 정확히 어디인지는 제가 더 알아보는 중이에요.

문_ 당시 아버님의 직업은요?
답_ 아버지는 고향영농조합 전무이사로 계셨습니다. 그 고향영농조합 자리가 현재 기업은행 자리 그대로 있습니다. 똑같은 자리에요.

문_ 다른 사회활동도 하셨나요?
답_ 1950년 5월 30 국회의원 선거위원장을 하셨습니다. 선거위원장은 중립적인 인사가 맡아서 하잖아요. 그래서 위원장을 맡으셨던 거죠.

문_ 아버님의 외모나 성격은 어떠셨어요?
답_ 우리 아버님은 키가 크셨고, 한 175cm정도쯤 되셨을 겁니다. 온화하셨고, 호감이 가는 외모셨지요. 사회생활을 오래하셔서 카리스마도 있고 의지가 분명한 그런 분이었었지요.

문_ 납북 당시 가족들 상황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답_ 큰 형은 1913년 생, 그러니까 당시에 서른일곱이었지요. 출가해서 따로 살았고요. 그 다음 누나 분이 계셨는데 출가 하셨고요. 그 다음에 둘째 형님은 경찰에 적을 두고 계셨어요. 그런데 그 형님도 6.25 전쟁 터지고 나서 행방불명이 됐습니다. 위에 세 분은 이복형님들이었고요. 그 다음이 저희 형님 1934년생, 그 다음 제가 39년생이고, 제 동생이 42년생 여자입니다. 그 다음이 45년생, 그리고 막내가 47년생 이렇게 됩니다.


납북 경위

<7월 1일, 사택과 붙어있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던 중에, 소련식 장총을 매고 사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에 의해 끌려감. 피랍인의 부인이 국립도서관 건물에 구금되어 있던 피랍인에게 겨울옷을 가져다준다는 명목으로 면회한 바 있음> 

문_ 아버님이 납북돼 가시는 걸 직접 보셨나요?
답_ 네, 직접 봤습니다. 저는 정확하게 7월 1일로 기억합니다. 당시 제가 12살, 만으로는 11살이었지요. 

문_ 어디에서 납북이 되셨지요?
답_우리 집이요. 지금 기업은행자리인데, 나중에 9.28 수복 때 전부 다 타 버렸습니다. 사무실 뒤에 사택이 붙어 있었어요. 당시에 아버님은 피해 계셨는데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이제 나오셔도 된다고, 나와서 정리할게 있으니까 나오시라고 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저희 아버지한테 연락을 취해서 우리 아버님이 7월 1일에 나오셨어요. 나와서는 아들집, 외가댁을 쭉 돌아보시고 저녁 때, 한 다섯 시쯤 됐을 때  집에 오셔서 서류 같은 것을 아궁이에서 태우시더라고요. 그리고 저녁을 잡수시고 사무실에 나가서 직원들이랑 같이 만나서 이야기 하셨죠. 그러던 중에 차 두 대가 오더니, 사복을 입은 젊은 사람들 두 세 명이 딱콩총(소련식 장총)을 매고 내리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집에 왔다가 아버지 사무실에 계시다고 하니까 그리로 가서 아버님을 끌고 갔지요.

문_ 그 사람들이 납치해 가면서 한 말은 없었나요?
답_ 그건 제가 기억을 못하겠어요. 아버지를 사무실에서 끌고 나와서 차에 태우는 걸 제가 정확히 봤지요. 

문_ 아버님도 끌려가시면서 특별하게 말씀하신 건 없었나요?
답_ 아무 말씀도 하신 게 없습니다. 어머니한테도 아무런 말씀도 못하셨죠. 그럴 기회도 없었어요.

문_ 납치 상황을 직접 보신 분은 또 누가 있어요?
답_ 나는 밖에 있으면서 전부 다 봤는데 우리 어머니는 집안에 계셨으니까 못 보셨을 거예요. 사무실에서 이렇게 끌고 갔으니까. 집에 들어와서 말을 남기고 그럴 것도 없이 그냥 잠깐 물어볼게 있다면서 별 일 아닌 것처럼 모셔 간 거죠. 그래서 끌려간 곳이 성동구 내무서라고 했고, 거기가 지금 성동 경찰서인 걸로 기억해요. 아버지 회사 직원들이나 집에 있던 형님이 내무서에 찾아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상황은 제가 어렸으니까 잘 모르죠.

문_ 혹시 아버님 잡혀 가실 때 옷차림 같은 것 기억하세요?
답_ 아, 기억나지요. 여름철이기 때문에 회색 비슷한 얇은 여름 양복을 입고 계셨어요.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누군가 사다준 허리띠를 차고 계셨어요. 비닐 같은 걸로 만든 비치는 투명한 거요. 그 허리띠를 차시고 양복 입은 그대로 끌려 가셨지요.
한 가지 중요한 것은, 9․28 수복이 되기 전에 아마 8월 말이나 9월 초쯤이 될 것 같아요. 우리 어머니한테 연락이 와서, 이제 겨울이 오니까 두꺼운 솜 든 옷을 해서 아버지한테 가져다 달라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솜옷을 갖다 드렸습니다. 아버지 면회도 하시고. 을지로 국립도서관 자리 있잖아요. 거기에서 아버지 면회했다고 그렇게 들었어요.

문_ 아버님 납치해 간 사람들 중에 군복 입은 사람들은 없었어요?
답_ 하나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안나요. 그 사람들은. 제가 어렸고, 호기심이 있기는 했지만 약간 겁도 먹었고 해서….

문_ 그 사람들이 위압적으로 가족들한테 겁주고 이런 것은 없었어요?
답_ 그런 것은 없었지만 우선 총 들고 집에 나타나면 겁을 먹었지요. 차 두 대로 대여섯 명 됐으니까. 다 겁나는 거죠.


납치 이유

<납치 이유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으며, 피랍인이 선거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으므로, 누군가의 앙심을 사게 되어 밀고를 당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

문_ 아버님이 납치되신 이유를 혹시 들으셨나요? 
답_ 여러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기로는, 그 당시에 국회의원에 출마한 사람들 중에 이청천이라는 분이 당선이 되었어요. 제가 조사를 해보니까, 그 분이 제헌 국회의원이었는데 전국에서 제일 많은 표를 받고 당선이 됐더라고요. 처음에는 한 3만 표를 받은 걸로 기록에 나와 있어요. 그런데 두 번째 선거 때, 우리 아버지가 선거위원장 하실 때는 만 표로 확 줄었어요. 그래서 간신히 당선이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분이 좌파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들었고요.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이청천이라는 분이 아버지한테 앙심을 품었다는 그런 풍문을 들은 적이 있어요. 아버지가 선거위원장 한 거랑, 그 사람이 간신히 당선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 당시에는 뭐 몰랐죠.


납치 후 소식

<옷을 가져다주면서 잠깐 면회한 이후로 피랍인에 관한 소식은 전혀 들은바가 없음. 구금 후 풀려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해 피랍인들이 겪은 일반적인 상황을 미루어 추측할 뿐임. 경찰관이었던 피랍인의 둘째 아들은 근무 수행 중 사망, 피랍인의 처남은 전사>

문_ 아버지가 잡혀 가시고 난 후에 찾는 노력을 하신 게 있으세요?
답_ 우리 어머니가 계속해서 알아보셨죠. 당시에 아버지와 같이 잡혀가셨던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이 8월 초 쯤에 풀려났었어요. 그러다가 8월 말쯤에 그 사람들이 모조리 도로 잡혀갔지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애당초 풀려나신 적도 없고 계속 구류 상태였죠. 우리 어머니가 면회 갔다 오셨을 때 아버지랑 무슨 말씀을 나눴느냐 여쭤 봤더니,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문_ 감금당해서 어떻게 지내고 계셨다는 말씀은 없으셨나요? 고문당한 흔적이 보였다든지요.
답_ 그런 것은 없었던 것 같아요. 면회도 그 옷 갖다 줬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죠. 잠깐 동안 말할 시간이 있어서 했을 뿐, 그런 구체적인 것들을 말할 시간은 전혀 없었대요. 그런데 당시에 같이 붙잡혀 갔다가 풀려나온 사람들 말로는 ‘너희들은 부르주아 자본 착취범들이고 그동안 얼마나 호화롭게 잘 먹고 잘 살았느냐.’ 하면서 평상시에 구둣발로 차고 담뱃불로도 지지고 그랬다고 들었죠. 직접 아버지한테 들은 이야기는 아니고요.

문_ 신고를 많이 하셨던데, 신고는 누가 다 하셨어요?
답_ 저희 큰 형님이 다 하셨을 거예요. 저는 열 서너 살 밖에 안됐으니까.

문_ 어머니가 면회 가시고 그 이후의 소식은 전혀 못 들으신 거예요?
답_ 전혀 못 들었죠. 그래서 도망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을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찾아가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문_ 경찰관으로 근무하셨다던 둘째 형님도 행방불명 되셨다고 했는데 그 분에 대한 소식도 전혀 없어요?
답_ 전혀 없어요. 6.25사변 나기 전에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고 하고 나가셨거든요. 그리고 6.25 사변이 났어요. 그런데 낙동강 쪽에서 경찰 업무를 보다가 죽었다는 소문만 들었고 확인한 건 없어요.
우리 아버지가 고향에서 성공했다 하는 분이니까 우리 외삼촌도 저희 집에 와서 살았고, 사촌 형들이 둘씩 와 있기도 하고, 열 두 명 이상 되게 살았었어요. 대식구지요. 우리 외삼촌은 6․25사변 나기 몇 달 전에 징집당해서 군대를 갔어요. 광주에서 훈련 받고 있다가 6․25사변 나니까 참전하러 용산에 와 있다고 전화가 한 번 왔었어요. 그 이후로 그 분도 소식이 없어졌는데, 나중에는 전라도 어디에서 전사하셨다고 통지가 왔지요. 사촌 형님이 또 한 분 계셨는데 그분도 군인이셨어요. 6․25 나던 일요일에 비상이라고 그래서 귀대한다고 나가셨지요. 그런데 그분은 나중에 수복 후에 살아 돌아오셨죠.


남은 가족의 생활

<1·4후퇴 이후에 피난을 갔다가 서울에 다시 돌아온 가족은 피랍자의 부인이 구멍가게를 운영하여 생계를 이어갔음>

문_ 아버님 납북되시고, 나머지 가족들은 여전히 그 곳에서 사셨나요? 아니면 피난을 가셨나요?
답_ 거기는 다 타버렸으니까 재산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요. 어머니하고, 당시 네 살 난 여동생하고, 저랑 바로 밑에 동생이랑 같이 우리는 서울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해서 살았죠. 형들은 경기도 안성 고향에 농토가 좀 있는데다가, 우리 아버지 동생 되시는 분 작은집도 있고 해서, 그리로 피난 가서 있었지요. 저는 어머니랑 1․4후퇴하기 전까지 서울에 쭉 있었지요. 그러다가 1.4후퇴 때 경기도 안성으로 피난 갔다가, 전쟁 끝나고 다시 올라왔죠.

문_ 안성까지만 피난 가셨나 봐요? 더 남쪽으로 안 내려가신 거네요?
답_ 안 내려갔지요. 1․4후퇴 때 피난 갔다가 다시 올라왔지요. 근데 그 당시 중공군이 거기까지는 안 들어 왔었어요. 중공군이 용인, 오산까지 가고 그 밑에는 안 갔어요. 그 당시 37도선 방어라고, 유엔군이 북위 37도선에서 중공군을 방어 했어요.

문_ 어머님이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어머님이 옛말로 행랑대라고 하는 걸 운영하셨어요. 옛날에 사대부 집에 보면 기와집에 행랑채가 따로 있잖아요. 그 행랑방을 하나 허물어서 조그마한 구멍가게를 내서 우리 어머니가 보따리로 남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가 이고지고 오셔가지고, 반찬도 팔고 하는 구멍가게를 운영했습니다. 큰돈은 못 벌었겠지만, 애들 등록금을 버신 거죠.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죠.

문_ 어머님이 혹시 생존해 계신가요?
답_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요. 우리 어머님은 재실로 들어오셨으니까 아버님과 나이 차가 좀 났지요. 2006년도에 97세로 돌아가셨어요.

문_ 어머님이 생전에 아버님에 대한 말씀도 많이 하셨나요, 생전에?
답_ 그럼요. 제가 기억하는 것은 전부 다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인데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리 아버님은 11살 때 고아가 돼서,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의 본처는 돌아가셨고, 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는데, 재혼하고 몇 년 안 돼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새 할머니가 애도 하나도 못 낳고 졸지에 청상과부가 된 거죠. 저희 아버지는 그 당시에 12살쯤 되셨고요 종손이셨었어요. 그래서 칠촌 할아버지 되시는 당숙 댁에서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셔서 공부를 하셨고, 상업학교 졸업하고 금융조합에 취직을 해서 서기보부터 시작해서 전무이사까지 하셨죠. 해방될 때 고랑포읍이라는 곳에서 금융조합 이사를 하셨어요. 해방이 되니까 금융조합에서 일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니까 우리 아버지가 진급을 빨리 하셨죠. 그래서 1년 마다 이사를 해서 화성 갔다가, 용산 갔다가 다시 신당동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6.25를 겪은거죠.
아버님이 효자였다는 말씀도 많이 하셨죠. 새 어머니를 잘 모셨으니까요.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하고 나갔다 오면 꼭 절을 하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왜 안하느냐고 하셨으니까요. 자기 관리가 철저하셨던 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일본 사람들한테도 신용을 얻어서 출세했던 것 아닌가 싶고요. 이북 사람들이 보기에는 친일파일 뿐이었겠죠.

문_ 아버님에 대한 추억이 있으세요?
답_ 그럼요.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때 담임선생이 과외를 해 주셨는데, 저녁 때 과외 끝나고 오면 우리 아버님이 마중을 나오셨어요. 시간 되면 기다리고 계셔서 같이 걸어왔지요. 그러면 친구들이 제가 별명이 황씨니까 황소 그러면서 놀리면 ‘쟤들이 뭐라고 그러느냐.’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쟤들이 나를 놀린다.’고 말씀드리면 ‘그러지 말라고 그래라.’ 하셨죠.
우리 여동생들이 아버님 들어오시면 막 좋아하고 안기고 그랬는데, 다 받아 주셨죠. 그런데 큰 형님들은 아버님을 굉장히 무서워했죠. 주위에 있는 젊은 사람들이 아버님을 무서워했어요. 가정에 들어오시면 자상하신데 밖에 나가시면 엄하시고 그랬지요.

문_ 아버님이 납북되시고 난 뒤에, 정부의 도움 같은 것은 없었나요?
답_ 그런 건 일체 없었죠. 납북자 피해 신고하라고 그런 거 몇 번 있었어요. 그 때마다 우린 열심히 신고했죠. 그 이후로 후속조치는 없었고요.


연좌제 피해

<증언자가 미국 유학차 신원조회를 했을 때 아버지 납북 사실로 인해 경찰 특별 조사를 받았으나, 피랍인이 연로하여 무사히 통과됨. 이외 피해 사실 없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받으신 적 없으세요?
답_특별히 당한 것은 없는데, 제가 68년도에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신원조회를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납북됐다고 하니까 경찰관한테 특별 조사를 받았죠. 그런데 그 당시 우리 아버님이 벌써 70세가 훨씬 넘었으니까 괜찮겠다고 그냥 통과가 돼서 더 이상 복잡한 일은 없었죠.


호적정리

<사망으로 정리>

문_ 아버님 호적은 정리가 되셨나요?
답_ 사망으로 정리 했어요. 작은아버지가 했을 거예요.


정부에 바라는 말

<건국에 공로가 있는 납북자의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충혼탑을 세우고 명예회복을 해야 함>

문_ 지금 정부나 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답_ 저는 금년 7월 27일 KBS 파노라마라는 프로그램을 봤는데, 물론 그 억울한 사람들 중에는 빨치산의 딸인 소설가 한 분의 사연도 있던데, 그 분이 자라면서 어려움 당한 것도 참 안타까운 노릇이죠. 아버지가 빨치산이라고 해서 딸도 빨치산인건 아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을 잘 보살펴 줘야지 되는 건데. 저를 제일 화나게 한 것은 우리 아버지는 묘소도 없고, 어디에다가 비석이라도 세워드리고 싶어도 세울 데도 없다는 것이죠. 4·3사태 때 죽은 사람들 묘소나 탑은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 줬더라고요. 그 당시에는 어렸지만, 역사를 돌이켜 보면, 4·3 사태는 완전히 반란이었거든요. 그 사람들은 남로당으로 인해 반란을 일으켜서 제주도를 장악했던 케이스라고요. 그런 사람들을 저렇게 대우 해주고, 대한민국 건국의 공헌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은 보상은 못해줄망정 이름 석 자 새겨준 탑이 하나 없으니까요. 그냥 땅 속에 묻혀 버리듯이 어느 길거리에 묻혀 있는지 백골을 찾을 수도 없는데 그렇게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는 거라고 생각하죠. 그래서 늦었지만 반드시 명예회복 뿐 아니라 적어도 충혼탑 하나라도 세워줘서 그 이름이 거기에 새겨져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처음에는 먹고 살기가 바빠서 그런 생각을 차마 못했지만 이제 특별법도 통과 됐으니까 생각해 보는 겁니다. 빠른 시일 내에 해야죠. 우리 형님도 벌써 80살이 다 됐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께 특별히 하시고픈 말씀이 있으신가요?
답_저도 자식을 낳고 기르다보니까, 그렇게 강제로 끌려가면서 어린 자녀들 생각하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지 알겠어요. 문명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산가족 상봉도 이번에 또 연기한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들 실망과 사연들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아직도 의식구조가 아프리카의 야만인 수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의 기본권을 이해를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죠.

문_ 어떤 면에서 그렇게 느끼세요?
답_ 모든 사람들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훈련이 안 되어 있는 거지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교육 자체가 내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권리를 인정해주고 배려해줄 때 민주주의가 되거든요. 그것부터 가르쳐야 되는데 자기 권리 주장만 가르치니까 전부다 에고이스트가 되는 거지요. 한국 사회가 그게 문제지요. 그래서 지옥이 되는 거예요. 이산가족 상봉 신청한 사람이 아직도 20만 명이나 있는데, 나이 들어서 이제 다 죽어가는데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 주지를 못하니….

문_ 회원님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적이 없으세요?
답_ 없지요. 제가 이북을 갔다 왔어요. 1990년도, 1991년도에 이북에 두 번이나 갔었는데 미국에 있으면서 경제인으로 초청을 받아서 갔지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찾아달라고 특별히 신청을 했지요. 미국에 살면서, 거기에 통로가 있어서 북쪽에다가 특별히 조사 신청을 했는데, 찾지를 못하더라고요.  

문_ 신청했을 때 그 쪽에서 답변은 뭐라고 왔어요?
답_ 우리 인민군대에는 절대로 강제로 붙잡고 그런 사람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마지막에 서대문 형무소에 계셨던 것만 안다고 그랬더니, 아 그 분들 다 자진 월북 한 사람들이니까 그렇게 아시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생사 확인만이라도 해 달라고 서류들을 전부 다 주면서 돈도 줬죠. 내가 거의 2주일을 있었는데도 못 찾아내더라고요.

문_ 평양에 계셨어요?
답_ 평양에서 원산도 가고 금강산 해금강까지 갔었죠. 묘향산도 갔었고.

문_ 북측에서는 2주 동안 정말로 찾았을까요? 
답_ 아, 정말로 찾았죠. 나랑 같이 간 분들도 이산가족이 많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은 자기 옛날 부인과 자녀들을 만났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찾았긴 찾았는데 만나지는 못했고요. 어디 수용소에 들어 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사람은 보통 노력한 게 아니었죠. 돈도 많이 썼고요. 결국은 그 사람 못 만났어요.

문_ 회원님은 아버님 생사를 북측에서 전혀 못 찾아줬어요?
답_ 제가 그 때 느낀 건데요. 그 사람들도 전쟁 때 혼란해가지고 기록이 없어졌죠. 그리고 제가 거기에서 사업을 하겠다고 그러니까 저한테 초청이 왔죠. 제가 기계 사업을 하니까, 사업 환경을 좀 알아보려고 그 다음에 또 북한에 갔죠. 거기 시설도 보면서 쭉 많은 노력을 했죠. 그러고 나서, 비즈니스는 하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냈죠. 비즈니스를 하려면 활동의 자유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거기 한 번 가려고 하면 베이징에 가서 영사관에서 비자를 기다려야하고, 그것도 자기들 맘에 들어야 찍어주고, 무슨 행사라도 있으면 다음에 와라 잘 곳이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그냥 속수무책으로 돌아와야 하고. 장사하는 사람이 그렇게 해서 무슨 비즈니스를 해요. 투자하기는 했지만,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문_ 두 번째 북에 갔다 오시고 접으신 거예요?
답_ 네, 그 다음부터 접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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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납북자-심홍택(증언자-심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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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654
140 납북자-평수현(증언자-평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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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36
139 납북자-김용무(증언자-김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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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809
138 납북자-최순재(증언자-최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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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482
137 납북자-김규흥(증언자-김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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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72
136 납북자-권오성(증언자-권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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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25
135 납북자-황규창(증언자-황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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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77
134 납북자-신관영(증언자-신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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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601
133 납북자-김무영(증언자-김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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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568
132 납북자-박상학(증언자-박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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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20
131 납북자-조순종(증언자-조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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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2-1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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