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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용무(증언자-김영은)
이름: 관리자
2016-12-13 14:59:08  |  조회: 1843


피랍인
생년월일: 1889년 9월 13일
출생지: 전남 무안군 몽탄면
당시 주소: 서울 만리동
피랍일: 1950년 9월 27일(양)
피랍장소: 자택
직업: 변호사, 국회의원
직계/부양가족: 5남매
외모/성격: 준수한 외모와 가정에 충실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영은(1937년생)

관계: 4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피랍인은 일제시대 당시 독립운동가들을 무료 변론해주던 변호사였으며, 건국 후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음.
- 6․25 발발 후 서울을 빼앗긴 직후 좌익에 의해 서린동 성남호텔로 끌려가 억류되었으며, 이후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 9․28 서울 수복 하루 전에 북쪽으로 끌려감.
- 북한에서 억지로 대남방송에 이용당하며 살다 결국 1957년 4월 18일 사망하였음.

“6·25가 나자마자 인민군이 들이 닥쳤어요. 우리 집에는 인민군은 아니고 그 때 빨갱이들이 들이닥쳐 아버지를 모시고 갔죠. 그런데 어디로 가신지도 몰랐어요. 감히 물어보지도 못했어요. 그러다가 우리는 집에서 쫓겨나 친척 집에 있다가 서린동 성남호텔에 계시다는 연락이 와서 면회를 가끔 갔어요.”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친척 중에 좌파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버지를 모시고 청계국민학교 뒤에 있는 한옥으로 와서 우리하고 몇 일 지냈어요. 마음대로 다닐 수 없었고 감시를 받았지요. 그러다 9·28이 되고 밀리니까 아버님을 데리고 이북으로 간 거예요.”


직업 및 활동

<해방 전에는 변호사, 미군정기에는 대법원장이었으며 건국 후 1,2대 국회의원이었음>

문_ 납북 당시 가족이나 자녀분은 몇 명 정도 되셨나요?
답_ 아버지하고 다섯 남매가 만리동에 살았어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9남매였는데 위에 네 명은 결혼하고 나가서 살았지요. 저는 딸로는 넷째였고 전쟁 당시에는 14살이었어요. 

문_ 피랍되신 분은 어떤 일을 하셨지요?
답_ 보성전문학교 졸업 후 일본에 있는 중앙대학 법과를 졸업하였어요. 그리고 고등고시에 합격하셔서 변호사가 되셨어요.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들 무료 변론을 많이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해방 후 군정시대에는 대법원장을 하시다가 대한민국이 수립되고서는 1,2 대 국회의원을 하셨어요.


납북 경위

<전쟁 발발 직후 집으로 들이닥친 좌익 인사에 의해 끌려가 안재홍씨 등 유력 인사들과 함께 서린동 성남호텔에 감금당하였음. 이후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9․28 서울 수복 직전 북한으로 끌려감>

문_ 납북 당시 상황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답_ 6·25가 나고 며칠 되지 않아서 서울에 인민군이 들이닥쳤어요. 그리고 바로 사복 입은  빨갱이들이 집에 들이닥쳐서 아버지를 모시고 갔어요. 처음에는 어디로 가신지도 몰랐죠.  어린 우리들이 감히 어떻게 알아봐요.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친척집에 있는데 얼마 있다 서린동 성남호텔에 계시다는 연락이 와서 가끔 면회를 했었어요.

문_ 거기에는 아버님 혼자 계셨습니까?
답_ 여러 사람이 같이 있었어요. 제가 정확히 기억은 못하지만 정부의 요직에 있는 분들을 모셔다 놨더라고요. 안재홍씨 같은 국회의원들이나 우리 사돈 되는 배상기씨 같은 경제학자들도 계셨어요.

문_ 아버님이 성남호텔에 계속 계셨나요?
답_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친척 중에 김영택이라는 좌파 성향의 사람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아버지를 모시고 당시 청계국민학교 뒤에 있는 한옥으로 왔어요. 거기서 우리하고 며칠 지내고 있는데 9·28 서울 수복이 되면서 밀리니까 아버님을 모시고 이북으로 갔어요.

문_ 그 집은 어떤 집이었지요?
답_ 어떤 집인지 모르는데 비어있었어요. 아무튼 비어있었고 우리만 거기 있었어요. 살림살이는 없고 방만 그냥 있었어요. 물론 아버지는 누가 감시하고 있어서 자유롭게 돌아다니지 못했어요. 그 친척도 수시로 와서 아버지를 보고 갔어요.

문_ 이북으로 끌려간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문_ 서울 수복이 되기 얼마 전 새벽이었어요. 갑자기 아버지를 끌고 갔어요. 우리는 울기만 했죠.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미아리 고개를 통해 이북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미리 가서 마냥 기다렸어요. 그런데 해 넘어 가기 바로 전에 사람들이 끌려가기 시작했어요. 그냥 걸어서 데려가는 사람들도 많고 차를 타고 끌려가는 사람도 있었어요. 아쉽게도 그때 아버지를 보지 못했어요. 다만 아버지가 지프차를 타고 가셨다는 얘기만 들었어요.

문_ 마지막으로 아버님이 하신 말씀이 있으세요?
답_ 아버지가 독실한 불교 신자였어요. 충남 논산에 있는 개태사 복원을 하는데도 많은 돈을 내셨을 만큼요. 가시면서 우리보고‘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외라’고 그러시더라고요. 다른 말씀은 안 하시고요.


납치 이유

<국회의원이기도 하였지만 명망가였기 때문임>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국회의원이고 중요한 인물이니 그랬겠지요. 성남호텔에 계셨던 안재홍씨 같은 분들도 다 같이 북한으로 강제로 끌고 갔으니 말이에요.


납치 후 소식

<가족들이 들은 것은 없으며, 다만‘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에 피랍인 김용무씨의 사연이 나옴>

문_ 이후에 들은 소식은 있나요?
답_ 바로는 못 들었고 얼마 있다가 1·4후퇴 나고 우리는 어린 나이에 남쪽으로 피난을 가고 정신이 없었어요.

문_ 북한으로 납북되셨다는 소식은 어떻게 아셨어요?
답_ 아버지로부터 소식을 직접 듣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압록강변의 겨울’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거기에 납북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나왔더라고. 거기 보면 아버지가 북한 정부에서 방송하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방송도 하고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또 어린 자식들을 두고 왔기 때문에 항상 남한으로 오시길 원했대요.

문_ 아버님이 북한에서 언제까지 사셨다고 들으셨나요?
답_ 그 책에는 1957년 4월 18일에 돌아가셨다고 나와 있어요. 그리고 나중에 북한에 다녀온 사람이 ‘아버지 묘지가 평양 신미리(애국열사릉)에 있다.’고 사진 찍어왔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동생 중 한명이 정원에 묻혀 있던 폭탄에 의해 사망함. 그 후 1·4 후퇴 등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지만 다행히 친척의 도움으로 생활>

문_ 아버지 이외에 다친 가족들은 있나요?
답_ 9·28 이후에 만리동 집으로 돌아갔어요. 원래 그 집의 정원이 굉장히 넓어요. 집도 3층이었고요. 미군이 살다간 집을 아버지가 불하를 받았는지 사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주 최고였어요. 수세식 변소에 침대도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동생이 정원에서 뛰어놀다가 무엇을 발견하고 그걸 만졌나봐요. 저는 못봤는데 그게 폭발해서 얼굴이고 어디고 다 화상을 입어서 적십자 병원으로 데려갔는데 살지 못하고 갔어요.

문_ 1·4후퇴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답_ 1·4 후퇴 때는 전북 이리(익산) 외갓집으로 갔어요. 거기에 우리 이모부가 익산 남성중고등학교 이사장으로도 계시면서 국회의원이셨어요. 그분이 우리를 많이 보살펴 주셨지. 그리고 나중에 부산으로 가서 학교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어요. 만리동 집은 좀 살다가 팔고 효자동에 있는 조그마한 한옥 집으로 이사를 해서 거기서 살았지요.


호적정리

<납북되어서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처리됨>

문_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답_ 납북되어서 북한에서 돌아가신 걸로 호적정리를 했어요. 호주가 장손한테로 넘어간 것으로 되어있더라고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없었나요?
답_ 없었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신미리 묘지에 묻혀있는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와 어머니 유해와 합장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함>

문_ 정부나 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으세요?
답_ 아버지 묘가 북한에 있으니 유골이라도 모셔 와서 어머니 산소가 있는 공주 계룡산에 합장을 시켜드렸으면 하는 것이 제가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에요. 정부에서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에게 대해 혹시 하실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답_ 아버지가 안계신데 아버님한테 뭘 남겨요. 다만 인천 주안에 있는 용화사에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만년 동안 모셔놓는 데가 있어요. 그곳에 아버지를 모셔놨거든요. 가끔 가서 그 위패를 보면서 만나 뵙고 대화도 하고 그래요. 6·25가 원망스럽지 뭐. 6·25만 아니었으면 정말 아버지하고 최고의 삶을 살았을 것 같아요. 자식에 대한 사랑도 지극하셨기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건 다 들어 주셨어요.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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