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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심홍택(증언자-심기성)
이름: 관리자
2016-12-13 15:29:54  |  조회: 1707


피랍인

생년월일: 1904년 경

출생지: 함경남도 단청군 단청읍

당시 주소: 종로구 원남동 마로구 262-245

피랍일: 1950년 7월 24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공무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7남매)

외모/성격: 깔끔하고 옷을 잘 입음. 쾌활하고 술을 좋아함. 붓글씨를 잘 쓰고 문필력이 있음.

   

증언자

성명: 심기성(1927년생)

관계: 차남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 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함경도 외해진면에서 국민학교 교장직을 수행하다가 인민군 보안대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자 피신을 위해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

- 1948년부터 재무부의 경기도 재산관리청 초대 총무부장 역임.

- 1950년 7월 24일 새벽 5시에 무장한 인민군 보위대 10여 명이 집으로 들이닥쳐 옷과 신발을 챙길 시간적인 여유도 주지 않고 오라로 묶어 끌고 가면서도 뒤돌아보거나 말을 하려 하면 몽둥이와 장총의 칼로 찌르면서 끌고 갔음.

- 납치된 다음날 7월 25일, 동대문 경찰서로 찾아간 납북자의 부인은 복도의 시체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하고, 그 후로 납북자의 소식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음.

- 아버지의 납치에는 사소한 일로 원한을 품은 동네 이웃의 밀고가 있었던 것임을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고, 증언자는 그 밀고자를 신고하여 체포되게 함.

 

직업 및 활동

<서울 중앙중학교에서 공부하던 당시 3·1 운동 가담죄로 일제의 요시찰인물이 되자 고향인 함경도로 피신하여 외해진면에서 국민학교 교장으로 일하였음.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활동을 하였는데, 이 단체가 반공의 성격을 띄게 되면서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 또다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자 서울로 월남하였고, 1948년도 말쯤 재무부의 경기도 재산관리청 총무부장으로 초대 임명을 받아 재직하였음>

문_ 아버님의 생년월일이 언제지요?

답_ 주민등록이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지금 아버님 생년월일이 확실히 나온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납북이 되고 나니까 일단 사진부터 다 태워버렸어요. 제가 군대 갔다가 와서 보니까 관계된 것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저하고 아버지하고 연차가 23년차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1904년경이지요.

문_ 당시 아버지가 사시던 곳은 어디시죠?

답_ 아버지가 5대 독자입니다. 아버지가 친척이 없어요. 논마지기 좀 가지고 있고, 귀하게 자랐어요. 시골에서는 조금 있는 집 같으면 자식들을 서울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서울 중앙중학교에 다니셨습니다. 귀한 자식이라고 해서, 외할머니가 함경도 단청에서 서울에 오셔서 서대문에서 하숙을 치면서 아버지를 키우셨죠. 서울 서대문, 홍은동 가까운 곳에서 살았습니다.

문_ 서대문 홍은동에 사시다가, 납북 당시에는 어디에 계셨어요?

답_ 그렇게 공부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죠. 돌아가서 10월에 외해진면이라는 곳이었는데, 거기에서 학교 교장생활을 하셨어요.

문_ 6·25때는 어디에 계셨어요?

답_ 6·25때는 아버지는 일찍이 혼자서 먼저 월남을 하셨어요. 요시찰 감시 인물로 지목이 돼서 보안대에서 수색 지명을 받은 상황이니까 피신을 해서 서울에 오셨지요. 서울에 와서 산 곳이 바로 원남동 262번지였습니다.

문_ 그곳에는 어떤 연고가 있어서 가게 되셨어요?

답_ 아버지가 처음에 서울 오셔서는 남대문 시장 쪽에 고향 사람들 사는데 끼어서 사셨어요. 형님은 형님대로 월남을 하고 나는 나대로 각각 월남을 했으니까 우리들을 만나지 못하고 그 곳에서 사셨지요.

저는 1947년도에 월남을 했는데, 원산-철원 쪽으로 월남 코스를 잡았다가 거기에서 인민군들한테 붙잡혔어요. 제가 어리니까 경찰서에, 당시 보안서에 끌고 가서는 물 떠오라는 잔심부름 같은 것들을 시키더라고요. 그런데 어린애니까 경계가 허술해서 도망을 칠 수가 있었어요. 도망을 쳐서 거꾸로 평양으로 올라갔어요. 그랬다가 개성쪽으로 내려와서는 개성에서 다시 월남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족이 각각 월남을 했어요. 아버지가 월남한 다음에 자리 좀 잡혔다 해서 남은 동생하고 어머니가 아이들 끌고 내려와서 결국은 원남동에 다 모여서 살게 된 겁니다.

문_ 외해진에서 교장선생님을 하고 계셨는데, 왜 요시찰 인물이 되신 거죠?

답_ 일제 때부터 주요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3.1운동 때 중앙중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시위운동에 가담해서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문필력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학교 동창회 서문 일을 학교에서 봤어요. 그러다보니까 3.1운동 추진문, 선언문을 쓰셨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요시찰인으로 해서 체포령이 내려졌던 겁니다. 서울에서부터 3.1운동 선언문, 운동에 대한 방침 같은 것을 주도한다고 해서 그래서 시찰요인이 됐지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서울에서 피신하려고 이북 고향으로 가셨지요.

고향으로 가서 당시 국민학교 교장 선생을 했지요. 8.15해방이 되고서는 공산당이 이북 정부를 세웠으니까 이북에서도 다시 시찰요인이 되었지요. 아버지는 함경도 단청에 있으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했어요. 그것이 남한에서 김구 선생이 몸담으셨던 단체입니다. 그 당시에는 이승만 박사 단체와 김구 선생 단체가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김구 선생 쪽으로 해서 거기서 활동을 했는데, 인민군 보안대에서 반동 역적으로 몰리게 되었고 그래서 또다시 남하하게 되었어요.

문_ 남한에서는 뭐하셨어요?

답_ 남한에서는 우선 자식들 찾았고,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가족들이 또다시 뿔뿔이 흩어지고 그랬습니다. 친척들도 다 어려워서, 아버지가 남한에 내려왔는지도 모르고, 서로 찾으려고 수소문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서울에서 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동창회가 있으니 동창생을 찾아갔어요. 그 분들이 요직에 많이 있었거든요. 당시 초대 동아일보 사장이라고 제가 기억을 합니다. 그분하고 중앙중학교 동기동창으로 만나게 되니까 ‘나 이북에서 내려왔는데 일자리가 없고 잠자리도 없다.’ 면서 그 분한테 공무원으로 들어가서 아무 거라도 하겠다고 부탁을 하셨나 봐요. 서류를 구비해 가지고 지원을 했고, 마침 재무부의 경기도 재산관리청의 총무부장으로 초대 임명을 받았던 거지요. 1948년도 말쯤 될 거에요.

문_ 다른 사회활동은 안하셨어요?

답_ 김구 선생을 늘 존경하셨으니까 그분의 단체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종로구 단장을 하게 됐어요. 위원장이지요. 정치권에 출마할 계획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사무실을 마침 종로구 원남동 큰길가에 얻었어요. 공무원으로 자리를 잡으셨고, 형님과 저도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가족이 원남동에 모여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 보이로 쓰레기 처리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거 해갖고 장래가 있겠느냐, 내가 공무원 임시직으로 있다가 기회를 봐서 학교 공부를 더 해야지.’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 총무부에서 임시직 공무원으로 근무를 했었지요. 어느 날 우연히 보니까 육사모집 광고가 붙었더라고. 그러니까 계장, 총무계장하고 서무계장하고 관리계장이 시험을 한번 쳐 봐라, 지원해 봐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바로 을지로 6가 국민 학교에 가서 (지금은 그게 시립병원이지요) 거기에서 시험을 쳐서 다행히 합격이 되었고 육사 9기생, 육군 소위가 된 것입니다.

문_ 아버님의 외모하고 성격은 어떠셨어요?

답_ 아버님은 매우 깔끔하고 깨끗하셨습니다. 옷도 잘 입으셨고. 매우 쾌활한 편이셨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요. 친구들하고 농담도 잘 하셨고 상당히 쾌활하고 대인관계 폭이 넓었지요. 또 붓글씨를 잘 쓰셨습니다. 책도 많이 읽으시다 보니까 명언을 붓글씨로 써서 설날, 특히 옛날에는 정월 초하루에는 1년 동안의 자기의 결심, 각오 같은 것을 정장을 해가지고 붓글씨로 썼거든요. 그것을 저한테도 가르쳐 주셨어요.


납북 경위

<6·25 발발 당시 재산관리청에서는 수원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으나, 총무부장이었던 피랍인은 피난 시기를 놓치고 집 마루 밑에 숨어 지내고 피신처도 이리저리 옮겨 다녔으나 7월 24일 집에 쳐들어온 인민군에게 납치됨>

문_ 아버님이 언제 납치되셨어요?

답_ 재산관리청에서 6·25가 발발하니까 수원으로 피난을 가기로 결정을 봤는데, 총무부에서 모든 것을 챙겨야 하니까 총무부장이셨던 아버지가 정신이 없었지요. 그리되다 보니까 정작 자기 식구들을 챙길 새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한강대교가 폭파 되자 피난은 완전히 좌절되고 말았지요. 아버지는 그때서야 집으로 와서 어머니하고 다투시고, 어머니는‘우리도 평양을 가야하는데 당신이 집에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된다.’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마루 밑에다 굴을 파가지고 아버지가 밤에는 거기서 잠을 자고 낮에는 올라오면서 지내셨습니다.

아버지가 가족은 생각하지 않고 국가, 회사 일만 생각을 해가지고 피난 다 놓치고 가지도 못했으니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결국에는 시골에 옮겨 다니면서 살게 되는데, 아버지가 지하에 숨어 계시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6.25 발발한지 한 달 만인 7월 24일 새벽 다섯 시에 인민군이랑 보안대라고 하는 두 군데에서 우리 집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아버님을 잡아 간 겁니다.

문_ 당시에 아버님이 납치되는 것을 목격하신 분이 누구지요?

답_ 어머니는 당연히 보셨고, 동생들은 다 보고 형하고 나하고만 못 본거지요. 그리고 웬만하면 이웃이 목격을 해야 되는데, 인민군 보안대가 들어오니까 모두 겁이 나서 나오지도 못하고 그래서 이웃에서는 본 사람이 없었지요. 당시에 외할머니가 갈 곳이 없어서 같이 사셨답니다. 그래서 그분이 봤다고 합니다.

문_ 보안대하고 인민군이 왔다고 하셨잖아요. 납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답_ 처음에는 문을 두드리고 아무런 기척이 없으니까 ‘반동분자 문열어라!’ 그러니까 안에서 아버지가 벌떡 일어났다고 그래요.‘아, 올 것이 왔구나!’ 이 한 말씀 하셨대요. 그 사람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는 몽둥이로 쳤다는데, 제 생각엔 그게 개머리판인거 같아요. 구두 신은 채로 구둣발로 들어와서는 칼을 꽃은 장총을 들고 들어와서 이부자리를 쑤시는 거예요.‘일어나 일어나!’하면서요. 문을 부숴서 쳐들어 와서는 아이들은 구석에다 몰아넣고 이불을 뒤집어 씌우더랍니다. ‘꼼짝마라!’하면서 아버지를 데리고 나갔죠. 아버지는 자다가 깨어나자마자 ‘올 것이 왔구나.’라고 하시면서 벽지에다가 바로 7월 24일이라고 그렇게 쓰셨대요. 그 다음에‘둘째 놈은 꿈에 보았다.’하고 또 뭐라고 썼냐면‘부모를 생각하지 않고, 가족을 생각하지 않으면 전장에서 이기지 못한다.’라고 쓰셨어요. 내가 그걸 여기에 가지고 오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못 찾았지요.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인민군이 보고는‘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하고서는 매를 때리기 시작했답니다. 옷을 입을 시간도 없고 글을 휘갈겨 쓸 시간 밖에 없었대요. 몽둥이로 매를 흠씬 맞아가지고, 시간적 여유도 없이 가니까 어머니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서는 옷이라도 입혀야 하지 않느냐고 그러셨대요. 그러니까 인민군 보안대 애들이 발길로 어머니 손을 차버리면서 마루를 건너서 계단으로 끌고 가서는 옛날에는 오래기라고 했는데, 오랏줄이죠, 그것으로 아버지를 둘둘 감더래요. 그렇게 오라로 묶인 채로 바닥을 내려가면서 아버지가 자꾸 뒤를 보면서 어머니한테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는데 ‘잔소리가 많다!’하면서 때리고 뒤를 돌아보면 또 때리고, 뒤에서 칼로 찔러대고 하니까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시가지로 끌려 나가갔다고 합니다. 그게 새벽 다섯 시였습니다. 속옷 바람에 맨발로 가셨지요. 옷이나 신발을 챙길 시간적인 여유가 전혀 없었답니다.

문_ 몇 명 정도가 왔습니까?

답_ 동생들 중에 누구는 10명 넘는다고 하고, 누구는 7~8명이라고도 하고 그래서 10여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집을 포위를 하고 보초, 경계를 서는 애들도 있었을 거고, 안에 들어온 애들 포함하니까 그 정도 되겠다 하는 거죠.

문_ 무장을 했습니까?

답_ 인민군이 쏘는 장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칼을 꽂았지요. 그리고 권총도 찬 사람이 있었어요. 그게 아마 무슨 소대장쯤이야 무슨 간부 되는 장교인 것 같다고 그래요.

문_ 아버지가 어디로 끌려가셨다고 하나요?

답_ 그것이 바로 원남동 다음에 원서동이라고 있어요. 지금 말하자면 종로 5가, 4가 쪽에 4가 네거리 있지 않습니까. 4가 네거리에서 5가 쪽으로 길 건너가 원서동이라고 해서, 거기에 경찰서가 있다고 했어요. 그것이 옛날에 동대문 경찰서라고 했는데, 거기로 잡혀 간 것입니다. 우리 집 원남동에서 원서동도 그리 멀지 않지요.


납치 이유

<피랍인이 위원장으로 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 회원이 되고 싶었으나 제외되었던 한 사람이 앙심을 품고 피랍인을 밀고했다는 추측을 함. 마침 피랍인의 아들이 각각 경찰관, 국군 장교이다보니 주요 표적이 된 것으로 보임>

문_ 아버님이 왜 납치되셨는지 들으신 바가 있나요?

답_ 그게 밀고자가 마침 있었어요.

문_ 자세히 좀 말씀해 주세요.

답_ 우리 아버지가 밀고 됐다는 것을 동네 아이들이 이야기 하는 거예요. 동네 곱추라고 웬만한 사람들이 아는 남자 분이 바로 이웃에 살았어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회원들을 모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도 거기 회원으로 들어오려고 했대요. 그러니까 어떤 간부가 ‘곱추는 몸이 성하지 못하니까 단체 회원이 될 수가 없다.’라면서 거절을 했답니다. 그랬는데 마침 저희 형님은 경찰관, 저는 국군 장교고 아버지는 대한청년단 종로구 위원장이고 하니까 그 사람이 앙심을 품고 저희 집을 밀고하게 됐다는 겁니다.

문_ 두 아드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문_ 큰 형님은 철도 경비 경찰이었습니다. 8.15직후에 초급 교관으로 시험 쳐서 들어간 거예요. 저는 육군사관학교 9기였지요. 소위가 되자 전쟁 때는 춘천에 발령됐어요. 춘천 7연대 포병장교로 떨어지게 됐어요. 그래서 1950년 1월 14일에 수료해가지고 포병 교육을 약 석 달 더 받고, 3월 한 20일경인가 춘천에 도착하게 됩니다. 춘천에서 16대대라는 데에 B포대 그러니까 2중대에 있었지요.


납치 후 소식

<동대문 경찰서에서 신원 확인이 안 된 시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보초를 서던 인민군에게 시신 확인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쫓겨남. 그 이후로 피랍인의 소식은 듣지 못함>

문_ 아버님이 납북되신 이후에는 어떤 소식을 들으셨나요?

답_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들으려고 고향 사람들한테 아무리 물어도 알 수가 없어요. 특히 아버지가 5대 독자니까 친척이 거의 없었거든. 내가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어. 그리고 봤다는 사람이 없어. 어머니가 하는 말씀입니다만, 동대문 경찰서에서 인민군 보안대 어떤 사람이 나오면서 ‘저 복도에 시체가 있더라, 내팽개쳐진 시체가 있더라.’라고 하는 말을 들으셨대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속옷 바람에 급하게 끌려가신 것을 생각해서 무슨 옷을 입었느냐고 그 사람한테 물었는데, 그 사람 말이 ‘모포 같은 것을 덮어 씌워서 모르겠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럼 시체만이라도 달라.’면서 아우성을 치니까 보초가‘시끄럽게 왜 가지도 않고 그러느냐.’하더래요. 어머니는 앉아서 땅을 치고 울다가 ‘시체라도 보게 해 달라.’고 했는데 시끄럽다면서 보안대원 네 명이 와 가지고는 어머니 사지를 붙들고 끌어내더니 경찰서 앞 문 밖 시가지 쪽에다 내던졌대요. 그러니 결국 그 시체가 아버님이신지는 확인 못 했지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그것이 아버지 시신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문_ 그 분이 아버님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알아보려는 다른 노력이나 신고는 해보셨나요?

답_ 그런 건 못하죠. 대신에 그 밀고자는 주소를 알아가지고, 제가 신고를 해서 잡혀가게 했지요. 아마 그 사람 호되게 맞았을 겁니다. 저로서는 그것까지만 했지요.

문_ 그러면 정부나 적십자사에 납북자 신고는 하셨나요?

답_ 형님께서 하신 걸로 압니다.


남은 가족의 생활

<피랍인의 부인은 미군 부대 음식으로 장사를 하였고, 증언자가 가계에 보탬을 줌. 가족들은 피랍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살아왔음>

문_ 아버님이 납치 되시고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저희 가족의 생활은 제 봉급으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서울에 올라와서 미군 부대 음식 찌꺼기를 다시 끓여서 국에다가 밥을 얹어서 끓인 것, 그러니까 꿀꿀이 죽이죠, 그것을 만들어서 팔았지요.

문_ 어머님이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어요?

답_ 부부간에 그리 됐지만, 어머님은 나중에 혼자 살면서 우리를 키우느라고 애를 많이 쓰셨고, 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이따금씩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하셨지요.

문_ 어머님이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답_ 그게 바로 5·16혁명이 일어난 그 해니까 61년도 여름이죠.

문_ 아버님에 대한 추억이 좀 있으세요?

답_ 많지요. 아버님은 늘 집에서 떨어져 지냈어요. 서울로, 만주로 피난을 다니셨으니까. 거기서 광산업도 하고 또 나무, 목재 사업도 하고 그래서 어릴 때 광산에도 불려가서 돌 주워 망태에다 넣는 일도 하고 그랬어요. 어떤 것이 돌이고 어떤 것이 금인지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핀잔 듣기도 하고. 우리 중에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것도 아버지한테 들었어요. 어려서 일찍이 독립 정신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님에 대한 영향인 것 같아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 같은 건 없었습니까?

답_ 네 없었습니다.


호적정리

<미정리>

문_ 아버님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어요?

답_ 호적정리는 등한시하기 십상이라,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어서 못했지요.


정부에 바라는 말

<정부가 주도적으로 행정상의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지 않으면, 이 납북피해자 또는 살해자 이런 피해에 대한 대책은 묘연함.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이 사안은 자동적으로 소멸이 될 것이므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어야 함>

문_ 납북자 문제에 대해서 정부에 바라는 바가 있으세요?

답_ 정부가 주도적으로 행정적으로 큰 역할을 해 주고,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 하지 않으면, 납북피해자에 대한 대책은 묘연하지 않겠느냐 이겁니다. 결국 정부에서는 이러다가 만다 이거에요. 정권이 바뀌면 더 곤란해지잖아요. 이미 우린 그런 정부를 만나봤으니까 앞으로도 모른다 이거에요.

여기에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음 세대로 넘어가면 이 사안은 자동으로 소멸이 됩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행정지원을 적극적으로, 전폭적으로 하지 않으면 강 건너 불구경으로 끝나고 만다는 겁니다.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만약에 아버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시고 아버님께 하시고 싶은 말씀 있으세요?

답_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내가 이 정도로 안됐지요. 후원과 지도가 더 있었고, 아버지 시대 훌륭한 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으면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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