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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유정열(증언자-유지순)
이름: 관리자
2017-03-16 13:27:46  |  조회: 1402

유 정 열( 柳貞烈)
2016. 4. 21.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917년 6월 12일
출생지: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두교리 용대골
당시 주소: 충북 음성 대소면 부윤리 149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23일 (음력)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직계/부양가족: 조부모님, 부모님, 고모, 삼촌, 배우자, 1남 1녀
외모/성격: 얼굴이 둥글고 넓적하며 삭발머리.


증언자
성명: 유지순, 정인복
관계: 장녀, 사위
증언성격: 간접증언


직업 및 활동
<6남매의 맏아들로 농사짓고 삼>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아내 답_ 제 이름은 유지순 이고요. 생년월일은 1944년 10월 2일. 납북된 분은 아버
지세요. 제가 장녀고 다섯 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39살에 일찍 갔습
니다.
남편 답_ 저는 정인복 이고요. 유지순의 남편이고 납북자의 사위입니다. 생년월일은
1942년 8월 24일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아내 답_ 아버지 성함은 유(柳) 정(貞)자, 열(烈)자 이신데 생년월일은 1917년 6월 12
일 생으로, 출생지는 경기도 안성군 이죽면 두교리 용대골입니다.
문_ 아버님이 전쟁 당시 어디에 거주하셨는지?
아내 답_ 충북 음성군 대소면 부윤리 영골이라는 마을에 살았어요. 번지는 149번지입
니다.
문_ 납북자의 당시 직업과 출신 학교는?
아내 답_ 농사 일을 하고 살았죠. 학교는 그 당시에 못 다니신 것 같아요.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아내 답_ 아버님이 6남매의 맏아들. 그러니까 삼촌도 고모도 계셨고. 처음에 다 같이 살
다가 이미 첫째 고모, 둘째 고모, 둘째 삼촌은 결혼해서 분가한 걸로 알고, 막내삼촌,
막내고모는 미혼으로 두 분은 결혼하는 걸 제가 보았어요. 6·25 전쟁이 발발한 다음해
에 삼촌은 봄에 결혼하시고 막내고모는 그 해 겨울에 결혼을 하셨고. 저희 할머니는
아버님께서 끌려가시고 난 뒤로 지병이 악화되셔서 다음 해에 바로 돌아가셨어요. 그 전
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어머니, 아버지, 저희 남매들, 8명의 대식구가 살
았죠.
문_ 6·25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아내 답_ 전쟁 전에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죠. 동네도 시골치곤 꽤 큰 편으로 100여
호가 넘었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6·25전쟁이 터지면서 정신이 없었겠
죠. 제가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피난 온다고 집안의 아주머니, 할머니 오시는 것도 보고
210 2부 증언자료 211
방에 끼어 앉아서 날밤도 새우고 밤에 비행기 소리만 나면 문을 담요로 가리고 그런 것
이 조금씩 기억이 나요. 그리고 피난 가야 된다고 옷도 입히고 그랬는데 할머니가 병환
으로 갈 수가 없어 못 갔어요.
남편 답_ 그것은 6·25전쟁 때 기억이 아니고 1·4 후퇴 때 기억이에요. 그 당시엔 겨
울이라 피난도 일부는 가고 일부는 못 가고. 인민군이 주둔할 무렵이라 비행기 폭격할
때는 불빛이 있으면 폭격을 당하니까 그걸 가리고 그랬어요. 그 주변 지역이 거의 다 그
랬어요.
아내 답_ 아버지가 끌려가신 다음엔 우리 집 뒤로 담 너머 길이 있는데 동네 분들이 ‘지
순 아버지 오셨어요?’ 하고 저를 만나면 그렇게 조그만 소리로 물었어요. 아버지 언제
오시냐 아마 그런 위로로 살았을 지도 몰라요. 죄 없이 끌려가셔서 못 돌아오시는구나
하고 한탄만 했지요.
문_ 남편 분은 전쟁 전에 분위기가 어땠는지 아시나요?
남편 답_ 그 때 6·25전쟁이 발발한 이후에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니까 분위기는 특별한
건 없었는데 전쟁이 나면서 순수하게 몇 대를 이어 살아온 사람보다는 외부에서 뜨내기
가 와서 살게 되잖아요? 그래서 분위기가 험하게 되었어요. 우리 처갓집 동네가 그렇다
는 건 아니고. 그 분들이 인민군들 하고 접촉이 빨리 되나 봐요. 그 지역에 살았었으니
까 지방 빨갱이 소리도 들리고 온 마을이 인민군(공산당)의 점령 하에 그들의 앞잡이 역
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그리고 끌려갔다는 것이 징발되어 간 거나 마찬가지에
요. 당시에는 인민군들이 점령하고 있을 때라 이장이나 구장, 반장들이 동네에서 유지
역할을 하는 거죠. 그 분들한테 너희 동네에서 몇 명 끌어 와 하고 명령을 한 거였어요.
시골 농사짓는 분들은 인민군들의 사상 같은 걸 몰라요. 공산당의 일반적인 개념만 알기
때문에 동네에서 차출되는 개념으로 데리고 갔죠. 그 당시에 젊은 분들은 도망을 다녔어
요. 가족들이 다 있으니까 피난을 못 가고. 그런 상황에서 이장이나 구장들에게 이런 사
람들을 통해서 동네에 몇 사람 데려와 이렇게 하니까 그 중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 간 거
죠. 그 당시 젊은 분들이 한 번씩 다 차출이 되어서 끌려갔는데, 가다가 도망을 왔어요.
도피를 해서 다시 집에 와서 숨어 있었죠. 경우에 따라서는 밭에 가서 위장해서 숨어 있
기도 하고 시골의 벽장이나 그런 데 가서 숨어 있고 그런 식이었어요.
문_ 피난은?
남편 답_ 그 당시에는 아무도 못 갔어요. 우리 마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이 다 인
민군이 점령을 했으니 갈 곳이 없어 못 갔죠.
아내 답_ 할머니가 편찮으신 것이 동기가 되기도 했고.
남편 답_ 1·4 후퇴 때는 피난이라는 용어가 있었는데, 6·25전쟁 때는 그런 말도 없었
어요. 한 순간에 전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에.


납북 경위
<각 동네마다 동네 구장이 차출할 인원을 배정해 놓아서 아버지가 끌려감. 끌려간 장소도
모르고 이후 아무 소식 없음>


문_ 납치 시기는?
아내 답_ 날짜가 음력으로 1950년 7월 23일. 그래서 나가신 날로 저희가 제사를 지내
고 있어요.
문_ 납치 장소와 방법은?
아내 답_ 집에서 마을 이장이 이 마을 몇 명 데려오라는 식의 명령을 하니까 그 중에 한
사람으로 아버지가 끌려가신 거에요. 차출된 거죠. 우리 아버지가 그 때 나이가 몇 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그 동네 누구도 갔다가 도망쳐서 오다가 돌아가시고, 어느 분도
그렇게 도망치다가 돌아가시고 몇 분이 그랬다고 그러는데 저희 아버지도 도망치다가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뿐,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문_ 납북자가 남긴 말은?
아내 답_ 특별히 한 말이 없으셨던 것이 아마 말문이 막히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 얘기
로는. 아버지가 나가면서 소 들여 매라고. 그 소리 밖에 못 하고 말문이 막혀서 가셨다
고 제가 들은 기억이 나요. 다른 건 듣지 못했는데, 어둡고 경황이 없으니까 소만 들여
메라고 모기 소리 같이 하고 갔다고. 인사도 못 하고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문_ 아버님이 다시 못 돌아오실 거라는 걸 아셨을까요?
아내 답_ 그것까진 모르죠. 본인도 그렇게 까지 생각은 안 했는 진 모르겠어요.


납치 후 소식
<어디로 끌려갔는지 모르고 아무 소식이 없음>


문_ 가시고 난 다음에 어디 갇혀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셨는지?
아내 답_ 그러게요. 그냥 도망쳐서 오시려나 하고 기다렸죠. 다른 분들도 도망쳐서 오다
가 돌아가셨다, 총살당했다 이런 소리만 들리니까. 우리도 아버지가 도망치다가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았나, 근심, 불안, 초조하게 언제나 오시려나 오매불망이었죠

문_ 그럼 그 동네에서 도망쳐서 집까지 오신 분도 계신지?
아내 답_ 그런 분은 별로 못 본 것 같아요. 돌아가신 것 같다는 소리만 들었어요. 어느
친척 분이 도망쳐서 친척 댁으로 들려서 집에 돌아오시다가 몇 분이 돌아가셨단 소리를
들은 것 같고 돌아 오셨다는 소리는 못 들은 것 같아요. 그 이후로는 농사짓고 사니까
그런 이야기를 어린 아이들한테 누가 하질 않았던 것 같고 어머니 말씀이 너희 아버지
가 언제 오시려나, 오늘도 해가 지는구나 하고 늘 말씀을 하셨고. 제가 기억이 나는 것
이 어렸을 때, 지금도 가슴이 떨리는데 동네 무당이 그렇게 자주 들어왔어요. 그러면 어
머니는 아버지 살았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집으로 데리고 와요. 큰 함지박에다 쌀을 퍼다
놓고 점을 보는 거래요. 점보는 분이 살았다고, 언제 온다고. 그러면 그 때를 기다리면
서…. 안 오시면 또 헛수고지, 이것도 안 맞는구나 그러면서도 항상 속으셔요. 아주 우
리 어머니 점보는 것에 내가 질려 버렸어요.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은?
아내 답_ 그 당시 생각나는 것이 저희가 담배 농사도 해서 괜찮게 살았더라고요. 논마지
기도 있고 밭도 있고 담배 건조실도 있고 그래서 담배를 따면 그걸 꼬여서 걸고 아버지
가 장작불을 때서 그걸 쪄 말렸어요. 그러면 저는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거에
요. 할머니는 들녘 밭에 가셔서 동부를 따 오셔서 아버지가 구워주시면 저는 좋다고 먹
고. 늦게 낳은 딸이라 무척 귀염을 받았는데 그걸 다 못 즐기시고 가신 거죠. 그래서 아
버지와의 기억은 그렇게 담배 건조실에서 불 때면서 놀았던 기억이 나고. 담뱃잎을 꼬여
서 건조실 천장 높은 곳에 매여 다는 것을 쳐다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기억은 없는 것 같
아요. 어렸을 때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머니께서 고생 많이 하셨죠. 할아버지, 할머니
모시고 사시다가 할머니는 6·25전쟁 그 다음 해에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제가 28살
(1971년)에 돌아가시고. 어머니께서 가장으로 고생 많이 하셨죠.


남은 가족의 생활
<논밭이 있어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어머니가 두 남매를 키움.>


문_ 남은 가족의 피난, 생계, 양육 등은?
아내 답_ 어머니가 두 남매를 키우셨죠. 불쌍해서 이걸 두고 어딜 가겠냐고. 할아버지도
계셨지만 연세가 아마 그 당시에 환갑이 지나신 걸로 알아요. 제가 어렸을 때 환갑잔치
하는 걸 봤어요. 그래서 노인이 일을 잘 못 하시니까 품을 사서 농사짓고. 그러다 보니
까 어렵죠. 젊은 사람이 농사를 지어서 제대로 수확을 내야 어렵지 않았을 텐데, 품삯으
로 쌀 한 가마를 주고 스무 명을 농사지을 때 부르고. 모내기 할 때, 논매기 할 때, 벼를
베어 타작할 때, 그렇게 하다 보면 농사가 잘 안 될 때는 조금씩 쌀을 빌려다 먹더라고
요. 그래서 제가 지금 보면 농토가 적은 건 아니었어요. 조금 먼 데 다섯 마지기, 가까운
곳에 네 마지기, 밭도 1100평짜리, 400평짜리 있었는데 삼촌네 드리고 우리가 큰 밭을
가지고. 집 뒤에 바로 텃밭이 있고. 그런 기억이 나거든요.
문_ 아버지가 붙잡혀 가신 뒤 적십자사, 정부나 관청 등에 신고는?
아내 답_ 신고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구조사를 나와요. 그러면 우리 아버지가 끌려
갔다는 기록이 거기에 있더라고요. 그래서 인구조사를 나오면 그러더라고요. 아버지 오
시면 꼭 연락 해 달라고. 우리는 ‘여부가 있냐고, 제발 오시기나 하면 좋겠다.’고 그랬
죠. 우리가 학수고대 기다리는데 집에 오시면 연락 안 하겠냐고. 그런 걸 들은 기억이
나요.


정부의 노력
<납북자 가족 대상이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가족 대상에 들어 미제 헌 옷을 배급 받아본
적 이외에는 없음.>


문_ 납치 후 정부의 대처 상황 및 지원 노력은?
아내 답_ 도움 받은 건 없고 면사무소에서 배급을 준 게 한 번 있는데 미제 구호물자였어
요. 헌 옷가지인데, 한 번 받아본 것 같아요. 납북자 가족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어려운
가족이라고. 아버지가 납북되었다고 도움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오히려 받기
보다는 동네에선 안 그러지만 정부나 어디에서 북한에 끌려갔다고 안 좋게 말이 나왔죠.


연좌제 피해
<북한으로 끌려간 사람들에 대해 학교 선생님 등을 포함하여 사회의 인식이 왜곡되어 상
처를 받았음>


문_ 연좌제 피해를 입으신 건가요?
남편 답_ 연좌제라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고, 의용군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의용군에 끌
려갔다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어요.
아내 답_ 의용군이라는 게 우리한테 불리한 거더라고요. 그 당시엔 몰랐지만. 의용군이
북한군이라면서요? 그 때는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고 했죠. 타의로 끌려 간 건데. 저는
그것도 모르고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군대에 간 친구들이 사친회비를 면제 받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도 6·25때 끌려가셨는데 나는 왜 그게 없지 그러고 제가 교무실에 찾아 갔
었어요. 그랬는데 동네에서는 다 끌려갔다고 안타까워했는데 교감선생님이 그거는 북
한군으로 간 건데 무슨 사친회비 얘기를 하냐는 식으로 말씀을 하셔서 큰 상처를 받았어
요. 지금 제가 생각할 때 그 선생님이 당시에 그냥 ‘네가 나중에 크면 알 거다.’ 그렇게만
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그런 식으로 말씀을 하시니 그게 뼈에 사무쳤어요. 아버지 잃고
고생하며 산다고 우리 동네에서는 위로 받으며 살았는데.
문_ 그 외에 피해는?
아내 답_ 자손들이 외국에 못 간다는 거. 동생이 살기 힘드니까 사우디아라비아라도 갈
까 했는데 못 간다는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호적 정리
<잘 모름>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아내 답_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기 때문에 정리를 안 하고 있었는데 언제 했
나…. 자세히 모르겠네요. 저 밖에 없으니까. 동생도 일찍 세상을 떴기 때문에.
문_ 그러면 어머님은 언제 돌아가셨나요?
아내 답_ 어머니도 남편 잃고 아들도 갑작스런 연탄가스 사고로 별안간 가고 충격으로 1
년 만에 급작스럽게 69세에 돌아가셨어요.
문_ 어머님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은?
아내 답_ 다른 말씀을 들은 건 별로 없어요. 살기 바쁘다 보니까 언제 오시나 소리만 숱
하게 하시고 그랬지요.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하신 게 제가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고 해도
고생하다가 끌려갔다는 소리만 기억나요. 어머님이 운명하실 때도 어느 날 갑자기, 할
머니 제사 지내고 나서 새벽에 사촌오빠한테 연락이 왔더라고요. 어머니께서 갑자기 쓰
러지셨는데 못 일어나신다고. 그래서 제가 왜 그러냐고 빨리 청주 병원으로 모셔요 그러
니까 조금 있다가 올케가 다시 전화가 오더라고. ‘작은아씨, 보건소에서 청주 가시지 말
래요.’ 보건소 소장님이 오셨다가 가시면서 어머니 객사하실까 봐 무섭다고. 그냥 집에
계시는 게 낫겠다고. 그래서 부랴부랴 집에 갔는데 여전히 코만 고세요. 저녁에 제사 지
내고 식사 하셨겠죠? 그런데 머리가 아프다 하시더래요. 그래서 속이 아플 때 평상시 잡
수시는 약을 드시더니 어지럽다고 그러셔서 누우시라고 베개를 가져다 드렸더니 우리
며느리(올케) 불쌍해서 어떻게 하냐 하고 눈 감고 코 고시는 것 마냥 계셔서 모두들 주무
시는 줄 알았대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계속 코를 고세요. 아무도 몰랐지요.
이미 숨만 쉬시는 거지. 그랬던 것이 그 날 저녁 10시경에 운명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도 조금 더 사실 거였는데 아들을 잃은 충격에 일찍 가셨죠.


정부에 바라는 말
<국가가 힘을 길러 다시는 억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없었으면 함>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아내 답_ 바라는 거는 뭐 욕심이라면 아버지가 살아오신다는 것 밖에. 지금 제가 뭘 바
라겠습니까. 저도 갈 때가 됐는데. 어렸을 때 고생한 게 한스럽지. 뭐 그 당시 어려우니
까 배급이 얼마나 나왔나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 고생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제가 나라에 바라는 것 보다는 우리나라가 조금 더 힘 있게, 그래서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나라가 튼튼해서 이웃나라에서 얕보지 않게.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아내 답_ 안타깝죠. 돌아가셔서 육신조차 없어지셨을 텐데 자식 된 도리에 찾지도 못하
고 죄송할 따름이죠. 만약 살아 계시다면 건강 잘 챙기시고 만나는 그 날까지 안녕하시
길 기도할 뿐입니다.
문_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 더 생각나신 건 없으신가요?
아내 답_ 글쎄요. 어렸을 때 이야기라 크게 생각이 안 나네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빌
었던 것이 그거였어요. 이승에서 못 다한 한을 하늘나라에서 행복한 삶 누리며 풀 수 있
으면 얼마나 좋을까. 제발 아버지 만나세요. 고생한 거 다 잊어버리고 아버지 만나세요.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동생 제사에 갔더니, 어머니가 보건소에 다녀왔는데 혈
압이 높다고 하더라고 하셔요. 저도 혈압이 높으신지 몰랐어요. 그래서 약을 드신다고
하셨는데 한 달 만에 돌아가신 거에요. 그렇게 크게 아프신 건 없었어요. 건강하진 못하
셨지만 몸 져 누우신 건 없었죠. 아버지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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