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김말란 (증언자-배용종)
이름: 관리자
2013-09-16 10:18:21  |  조회: 2312


050503B 김말란 / 2005. 5. 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말란), 사진2(증언자:배용종)

피랍자
성명: 김말란
생년월일: 1932년 5월 5일생(경북 성주 출생)
당시 주소: 서울대병원 기숙사 거주 중(본가: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면 대황 2동)
피랍일: 1950년 9월 초
피랍장소: 서울 종로구 소격동 165 서울대 의과대 부속 제 2병원
직업: 적십자 간호학과 2학년 재학 중 (비상시 간호사로 차출됨)
직계가족/부양가족: 형제 6남매, 조카 배용종
외모 및 성격 : 보통 키에 날씬함.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배용종 (1932년생)
관계: 조카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피랍자 김말란(당시 19세)는 언니의 근무지였던 서울대 병원 기숙사 머물러있다가 본인도 간호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민군 간호 보조사로 불려나감. 이후 9.28 수복 직전 인민군 부상자를 북송 해야 한다는 상부 지시가 내려 와 의사와 간호사 몇 명과 함께 중환자 후송에 차출됨, 김말란씨 납북 일주일쯤 후 조카 배용종과 언니 김을란도 병원에서 단체로 납북, 강원도 근처까지 갔다가 배용종은 기회를 보던 중 폭격 때문에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탈출함. 언니 김을란도 폭격 상황에서 탈출했으나 피랍자 김말란씨 소식은 알 수 없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6.25를 당해서 그 당시엔 부속 병원 뿐만 아니라 전 의료 기관에 상부에서 지시가 있었습니다. ‘피난 가지 말고 다 대기해라. 특히 병원은 전쟁이 일어나 국군부상자를 위해 치료를 해야 하니까 어떤 직원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남김없이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어요.그래서 피난을 못했죠”

그러다“ 9.28 인천 사건이 오기 전에 병원에서 ‘중환자를 이북으로 후송 시켜야 한다’는 인민구의 지시가 있었어요. 그래서 병원 당국에서 앰블런스 차 하나에 의사 몇 명 간호자 몇 명 보조원 몇 명 해서 환자 후송을 시켰어요. 경환자들은 그대로 두고, 그때 막내 말란이 이모님이 중환자 이송하는데 차출이 된 거에요.”

전쟁 당시 상황

< 서대문 적십자 부속 간호전문대에 재학 중이던 피랍자는 조카(증언자)와 함께 서울대병원 간호 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언니의 병원 기숙사에 거주 중이었음, 6.25 발발 후 당시 의료 계통 직원들은 상부에서 부상자 치료를 위한 비상 근무 명령을 받아 피난이 어려웠음. 나중에 인민군들이 병원에 들어오면서는 의료인들이 의복을 위장해 살리려 했던 국군 부상자를 색출, 여러 명을 부상당한 채로 지하실로 끌고가 단체로 학살하는 등 피해와 공포가 심했음. 피랍자의 조카 배용종은 의용군에 해당하던 나이 대라 반동으로 몰리며 위험을 겪었으나 1차로는 다행이 피했고, 학교로 불려갔던 친구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이 많았음>

Q : 6.25전쟁 때 서울대 병원에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병원의 분위기와 상황이 어땠나요?
A : 6.25 전쟁이라는 것은 그 당시의 이북 김일성이 적화통일을 하기 위해서 불시에 남침한 것입니다. 그 당시 대한민국으로서는 그러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고 지금은 캐나다에 이민 가 있는 김을란 큰 이모님은 서울대학 부속병원 제1.2병동 중 중앙청 옆 소격동 195번지 제2병원 간호부장으로 재직 중에 있었습니다. 6.25를 당해서 그 당시엔 부속병원뿐만 아니라 전 의료 기관에 상부에서 지시가 있었습니다. ‘피난 가지 말고 다 대기해라. 특히 병원은 전쟁이 일어나 국군부상자를 위해 치료를 해야 하니까 어떤 직원이라도 한 사람이라도 남김없이 비상근무를 해야 한다’는 명령이 있었어요. 나는 그 당시에 서울에 와서 이모님 기숙사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학교를 다녔고, 납북 당한 말란 이모님도 서대문 적십자 부속병원 간호기술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을 못 가고 큰이모님 기숙사로 피신을 한 거죠. 당시 6.25가 발발해서 일산에서 국군부상자들이 후송되어서 병원에서 치료되고 있었어요. 중환자 경환자 해서 받았는데, 당시 6.25 전쟁으로 38선 터지고 순식간에 밀리고 있었지 않습니까? 직원들은 피난을 못 가고 부상자가 치료하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일부 부상자들은 개인으로 피난을 가고 중환자들은 갈수가 없어서 국가에서도 대피시킨다는 어떤 대책도 없어서 병원장의 지시로 살려주기 위해 한의를 입혀서 일반 환자실에 섞어서 입원을 시킨 거죠. 그런데 새벽에 인민군이 왔어요. 그 때 공포라는 것은 말을 못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겁니다. 원장도 그렇고 그 윗사람들도 전부 절절 매며 따라다니고 그랬어요. 그리고 병실을 시찰했는데 국군 중환자를 입원시킨 게 문제가 되잖아요. 결국 그 사람들이 어떻게 중환자가 입원한 걸 알아가지고 중환자를 한의복 입힌 채로 서울대학 제2병원 지하로 데려가서 따발총을 쐈어요. 직원들은 총소리만 나면 또 ‘누가 죽었나 보다’ 하면서 가슴이 덜거덕거렸고 공포가 점점 쌓였어요. 국군(부상자)들을 모조리 모아 지하실로 데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소리가 난 거니까 분명히 거기 가서 죽인 거죠.

Q : 배용종씨 나이도 의용군에 해당됐는데….
A : 내가 직접 목격한 것은 ‘나는 어린 학생이니까 괜찮겠지’ 하고 한번 병원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어요. 병원 밖으로 나가면 개천이 있었어요. 그 개천에 거기 가보니까 민간인이니 군인이니 시체가 엄청나게 많았어요. 인민군이 모자에 별도 달고 완장을 달고 따발총 들고 왔다 갔다 해서 우리 민간인들은 다니지 못했어요. 그러다 따발총 든 사람이 저를 불렀어요. “학생동무, 여기 6.25 전에 총독부 있는 장소가 어디 있습니까?”하고 물어요. 저는 하도 겁이 나니까 “예, 바로 저기입니다.”하고 가리켰어요. 그리고 ‘동무는 뭐 하는 사람이요?’ 물어서 저는 ‘학생이요’ 하니까 ‘어디 사는 사람이냐?’ 그러대요. 전 그 당시에 솔직히 다 얘기했지. 그러니 ‘동무는 반동 분자구만’ 하길래 아니라고 하면서 겁이 나서 병원으로 도망을 쳤어요. 그래서 그 당시 큰이모한테 얘기하니까 ‘너 큰일 난다고 너 그러다가 끌려간다’고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 당시에 인민군 들어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 방송으로 학생들 전부 등교하라고 했어요. 저도 학교를 가고 싶으니까 나가볼까 해서 큰 이모한테 얘기했더니 큰 이모가 깜짝 놀라면서 너 거기로 나오라고 하는 것은 전부 잡아다가 인민군 의용군에 보내려는 거니까 너 죽으려면 나가라고 해서 안 나간 거죠. 그런데 그 뒤에 알고 보니까 전부 인민군 의용대로 끌고 간 거였어요.

납북 경위

< 피랍자 (당시 19세)는 언니의 근무지였던 서울대 병원 기숙사 머물러있다가 본인도 간호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민군 간호 보조사로 불려나감. 이후 9.28 수복 직전 인민군 부상자를 북송 해야 한다는 상부 지시가 내려 와 의사와 간호사 몇 명과 함께 중환자 후송에 차출됨, 김말란씨 납북 일주일쯤 후 조카 배용종과 언니 김을란도 병원에서 단체로 납북, 강원도 근처까지 갔다가 배용종은 기회를 보던 중 폭격 때문에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탈출함. 언니 김을란도 폭격 상황에서 탈출했으나 >

Q : 김말란 이모님은 어떻게 납치된 것인지?
A: 전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는데, 그 당시에 간호사나 직원들은 도망치다가 붙들려서 총살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하여튼 수백 명 전 직원이 파트 별 근무를 하고 그랬는데 말란이 이모는 기숙사에만 있다가 간호학교를 다녔으니까 간호보조사로 배치되어서 인민군 환자들 치료하는 일을 하게 됐어요. 당시 우리 국군은 계속 후퇴하던 때죠. 그런데 방송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유엔군이 곧 도착해서 인민군을 후퇴시킬 것입니다. 피난 가지 마시고 안심하십시오’ 계속 그런 말만 했어요. 그 와중에 우리 국군은 계속 밀리고 ‘아, 정말 이제는 인민군 세상이 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유엔군에서 한국을 돕는다 결의를 하고 미국이 지원을 나왔어요. 16개국의 유엔군이 들어오고는 인민군은 감당을 못하고 결국 후퇴를 하게 되었죠. 가만히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이모가 알려주기도 해서 기숙사에서도 유엔군이 어디까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어요. 비행기 호주 쌕쌕이가 나와서 서울 바닥에 계속 들이 쏴대고 정찰기가 나와 연막탄을 때리고, 흰 연기만 나면 그냥 들이 붙고 했어요. 용산에 폭탄이 터졌는데, 여기까지, 소격동 서울대 병원까지 울림이 왔어요. 지진이 나서 울림이 나듯이 말이에요. 그 정도로 폭격이 심했어요. 그때 병원에 인민군 환자가 거의 다 찼어요. 경환자는 조금 나으면 전방에 보내고 중환자는 이북으로 보냈는데. 그러다 9.28 인천 사건이 오기 전에 병원에서 ‘중환자가 이북으로 후송시켜야 한다’는 인민군의 지시가 있었어요. 그리고는 병원 당국에서 앰블런스 차 하나에 의사 몇 명 간호자 몇 명 보조원 몇 명 해서 환자 후송을 시켰어요. 경환자들은 그대로 두고, 그때 막내 말란이 이모님이 중환자 이송하는데 차출이 된 거에요. 우리 이모가(김을란) 책임자로 있었으니까 그 사실을 알았겠지요. 말란 이모가 그 명령을 받고 언니(김을란)를 찾아와가지고 “중환자 이송하는데 차출이 됐어요.” 하니까 이모는 “그래 뭐 어쩔 수 없다 차출이 됐으면 가야지” 했었대요.

Q : 당시 김말란 이모님 나이가 19살인가요?
A : 제가 18. 말란 이모님이 19살. 졸업반이었어요. 그때는 적십자 간호학교가 2학년에 졸업인가 했었어요. 졸업만 하면 바로 적십자 병원에 발령받는 거에요.

Q : 그 당시는 나이와 상관없이 다 데려갔다는 말씀이세요?
A : 나이고 뭐고 데리고 가는 것은 다 상관이 없었죠. 가족들도 다 데리고 가는데요 도망치면 쏴 죽이는 거고. 도망만 안치고 말만 잘 들으면 다 이북으로 데리고 가는 거죠.
특이사항
<김말란씨 납북 일주일쯤 후 조카 배용종과 언니 김을란도 병원에서 단체로 납북, 강원도 근처까지 갔다가 배용종은 기회를 보던 중 폭격 때문에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탈출함. 언니 김을란도 폭격 상황에서 탈출했으나 한 동안 만날 수 없었음>
Q : 배용종씨 본인도 납북되셨었는데, 말란 이모와는 며칠 간격으로 출발하셨나요?
A : (이모가 떠난 건)우리가 전체적으로 이동하기 아마 일주일 전 일거에요…. 학교이고 뭐고 다 가지도 못하고 있는데 병원에 있던 사람이 전부 다 끌려갔어요. 큰이모도 끌려가고 차에 타라니까 타는 거죠. 그냥 이북으로 잡고 가는 거죠. 차에서 자고, 비행기가 폭격하면 숨어있다 다시 가고. 그렇게 계속 끌려간 사람들은 거기에서 애 낳고 살고 그런거죠. 나중에 서울대 병원 간호사였던 사람들이 이산가족에 나왔는데 우리 이모는 봐도 못 찾았어요. 그냥 죽은 걸로 생각해라 라는 얘기만 들었어요.

Q : 거의 같은 경로로 올라 가셨을 텐데. 가시는 길에 폭격 받은 차량은 못 보셨어요?
A : 많이 봤어요. 차량 수 십대가 잿가루가 됐어요. 그뿐만 아니라 길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어요.

Q : 올라가서 간호사나 의사들 시체는 못 보셨어요?
A : 시체로 봐서는 간호사인지 의사인지 모르겠지만 시체는 많이 봤어요. 전 매일 도망칠 생각만 했어요. 죽기 전에는 도망을 친다. 저희 큰 이모도 ‘도망칠 기회가 있으면 도망을 쳐라. 낮이면 태양보고 밤이면 북두칠성을 보고 도망을 치면 산다. 우리는 죽더라도 네가 살면 되니까 고향에 가면 되지 않느냐?’는 얘기를 했어요.

Q : 뭐라고 하면서 데려가던가요?
A : 환자 후송. 후방으로 후송. 병원을 옮기는 거죠. 차에 싣고. 그 후에 알고 보니까 전부 이동을 한 거죠. 비행기가 어디 가만히 둡니까? 비행기로 병원이고 뭐고 다 폭격을 해 가지고. 지상은 폭격으로 난리가 나는 거죠. 비행기만 뜨면 차고 뭐고 다 섰다가 비행기가 안보이면 이북으로 가고 그랬죠. 저는 강원도 어느 지역까지 끌려갔어요. 제가 탄 차도 의사나 간호원. 직원들이 타고 간 거죠. 어느 날 새벽에 차가 다시 출발하려고 했는데 정찰기가 날아왔어요. 그리고는 빙빙 돌다가 연막탄을 탁 때리니까 흰 연기 나자 마자 비행기가 날라오는 거에요. 그리고 쏴대는 거에요. 차 안에 있던 사람은 맞아 죽는 거에요. 아니면 도망가는 거죠. 그 쯤에 저도 도망치는 거죠. 어릴 때 우리 이모가 ‘네가 도망을 치더라도 북으로 도망치면 안 된다. 남쪽을 향해서 도망쳐야 산다’는 교육을 받았어요. 그 당시 남쪽이 어딘지 분간을 못하죠. 아침에 날이 새자마자 ‘이쪽이 남쪽이겠다’ 하고 그냥 도망을 친 거죠. 도망가니까 인민군이 따발총으로 들이쏘고 그랬어요. 그래서 더 많이 맞아 죽었을 거예요. 그 당시에 나 뿐만 아니라 그렇게 끌려가다가 후퇴하다 도망가던 살아 뛰어나와서 국군이 나오면 만세 부르고 그랬죠.

납치이유

<김말란은 간호사였기 때문에 인민군 부상자 치료를 목적으로 납북, 중환자 북송에 차출당함>

납치 후 소식

<없음>

Q : 북으로 올라가시면서 이모님에 대한 소식을 들으셨나요?
A : 저는 내려와서 바로 군대로 가서 집에는 2년 몇 개월 만에 돌아갔어요. 고향에서는 제가 죽은 줄 알았는데 나중에 제가 군에 있으면서 출장간 사람에게 소식을 들려주어 집에 제가 산 줄 알렸죠. 그렇지만 큰이모와 막내 이모의 행방을 알지 못했죠.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납북자의 조카 배용종씨는 입대했다가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고, 언니 김을란은 거제 수용소에서 간호 책임자로 근무함. 이후 서울대로 돌아와 간호과장으로 계속 근무하다가 캐나다로 이민. 잃어버린 가족 김말란씨에 대한 그리움이 여전히 깊음>

A : 이모하고 헤어지고 해서 어린 마음에 어디로 갈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저도 6사단에 인민군을 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들어간 거에요. 들어갔는데 그 때 서울에서 많이 학도병지원을 해서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다 인사계 상사가 어린 내가 들어온 걸 보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고, 대대본부에 배치돼서 대대장 호위 병같은 일을 했어요. 계속 북진북진 해서 이북 초산까지 갔어요. 중공군에게 포위된 적도 있어요. 그때 다행히 불발탄이 많아서 살 수 있었죠. 제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날 살려주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Q : 큰 이모님은 같이 도망친 줄 아셨나요?
A : 큰 이모도 저처럼 폭격으로 나왔대요. (돌아와서) 남쪽 포로 수용소인 거제 수용소에서 국군 치료하고 간호사 책임자로 있었는데, 계급이 소령 정도였어요. 그 소식을 후에 안거에요. 그 이모는 계속 서울대 간호과장으로 몇 년 계시다가 시립병원으로 나오셨어요.
이후에 큰 이모님은 나이팅게일상도 받으시고 캐나다에 마침 가셨다가 그 곳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셨어요. 지금도 신앙으로 지내세요. 저는 제대하고 부산으로 내려갔구요. 그런데 말란이 이모님 소식만 몰랐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호적정리

<미정리>

연좌제 피해

<없었음>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확인>
A: 제가 직접 보고 피부로 느낀 당사자니까 그대로 아는 대로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이젠 기억도 상실하고 얘기도 잘 안 되요. 그런데 말란이 이모님을 찾아보겠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다가 여기 가족회는 신문에서 보고 참여하게 됐어요. 우리같이 6.25전에 공직이나 관리직에 있었던 사람들의 행방을 정부가 어떻게 해서든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전 이게 불만입니다. 민간인들, 관리직들 행방불명을 어떻게 먼저 알려줘야 합니다.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서울대 병원이라면 환자가 얼마이고, 사망자가 얼마인지 기록이 남아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 기록으로 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단체만을 믿고 어떻게든 알아보려고 합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이모님께 하고 싶은 말?
A: 살아만 계신다면 정말 감탄하죠. 살아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살아만 계시다면 모든 가족들이 얼마나 기쁘고 춤을 출 그런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살아만 계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떠날 때가 다 됐는데, 죽기 전에 말란이 이모님 소식을 알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생사라도 확인했으면 좋겠어요.

Q : 이모에 대한 그리움이 많으시죠?
A : 그 당시의 말란이 이모님이 자기 언니에게 남겨둔 말씀, 부탁이 이랬습니다. 제가 경상도에서 태어났는데 그 당시만 해도 외가가 잘 살고 우리도 못살지는 않았지만은 이모가 서울에 와 있고 외가댁으로 해서 아저씨들이 서울대 약대 다니고 연세대 다니고 해서 여기에서 공부 좀 해봐라 해서 제가 서울로 오게 된 겁니다. 말란이 이모는6.25를 당해서 그 당시 차출이 돼 가면서 “언니, 전 가다가 폭격으로 죽어도 좋다. 그렇지만 배용종은 살아야 된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큰 언니가 얼마나 걱정을 하겠느냐. 그러면서 국군이 점령하게 되면 남한 세상이 되니 어떻게든 살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났다고 해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지고(눈물) 그 당시 공포에 대해 얘기하면 캐나다 이모는 ‘이제 생각하지 말자’ 그래요. 그 당시엔 무섭고 비극이니까 잊자 그러지만 저는 살아 있는 동안에는 말란이 이모가 참 보고 싶고. 저보다 한 살 위입니다. 우리 외할머니가 나이 어릴 때 어머니를 낳아가지고 외할머니가 1년 전에 막내이모를 낳은 거에요. 그래서 서울에서 아는 친구 지간처럼 다정하게 지냈어요. 제가 서울 병원에 와서 왔다 갔다 하면 토요일마다 나와서 벚꽃나무 열매 따서 주고 그렇게 저를 아꼈던 이모에요. 그렇게 정이 들었던 이모인데….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0 납북자-윤태경 (증언자-윤명식,윤창식)
관리자
13-09-16 2195
9 납북자-권경정 (증언자-김옥분,권기영)
관리자
13-09-16 2733
8 납북자-김창희 (증언자-김동일)
관리자
13-09-16 2343
7 납북자-류인하 (증언자-류택열)
관리자
13-09-16 2067
6 납북자-김정기 (증언자-김남주)
관리자
13-09-16 2286
5 납북자-김경희 (증언자-이정림,김교현)
관리자
13-09-16 2088
4 납북자-김병기 (증언자-김용준)
관리자
13-09-16 3186
3 납북자-김말란 (증언자-배용종)
관리자
13-09-16 2311
2 납북자-김점석 (증언자-박옥련,김지혜)
관리자
13-09-16 2363
1 납북자-이성환 (증언자-김복남,이미일)
관리자
13-09-12 2235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