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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정기 (증언자-김남주)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0:39  |  조회: 2267


050510A 김우종 / 2005. 5. 10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우종), 사진2(증언자:김남주)

피랍자
성명: 김우종(아명: 김정기)
생년월일: 1909년 2월 10일생(강원도 영월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효자동 138-5호
피랍일: 1950년 8월 4일
피랍장소: 서울 중구 충무로 2자 서울 전기㈜ 사무실
직업: 서울 전기 주식회사 사장, 대한 청년단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9남매
외모 및 성격 : 키 175cm, 안경 착용, 온화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남주(1939년생)
관계: 5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1950년 8월 4일 11시경 충무로 2가 사업장에서 근무하던 중 정체 불평의 남자 2인이 찾아와 물건을 찾다가 없으니까 사장님 좀 뵙자고 하고 나간 후 바로 인민군 서너 명이 사무실로 들어와 피랍자의 양쪽 팔을 잡고 끌고 감. 그날 밤 12시경 인민군 3명이 피랍자를 태우고 자택으로 찾아와와 반동인 증거를 입수하기 위해 집안을 수색하고, 모든 가구에 딱지를 붙였음. 장성한 아들들을 데려가려 했으나 미리 피신해 실패하고 돌아감. 그리고 납치 다음날 인민군들이 찾아와 회사에서 트럭 5대, 자택에서 1트럭 분량의 재산을 탈취해 감. 이후 피랍자는 서대문 형무소까지 잡혀갔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고, 자녀들을 잡으러 계속해서 집을 찾았으나 다행이 석 달을 숨어서 버팀. 나중에 피랍자의 조카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음. 피랍자는 당시 대한 청년단에도 관여했었고, 서울 전기 주식회사 사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산업 박람회에서 감사장을 받는 등 사회적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생사 확인 및 유해 송환



“당시 12살이었습니다. (인민군이) 6월 27일에 서울 들어와서. 제가 효자동 살 때인데 전 그때 잘 모르죠. 그 사람들이 “너, 국기 그려봐” 하길래 태극기를 그렸죠. 5학년 때이니까 그랬더니 구둣발로 사정없이 치고 아무 무자비한 놈이에요.”

“점심 무렵에 민간인 두 사람이 가게로 와서 전구를 찾더라구요. 용량에도 없는 전구를 찾길래 없다고 하니까 나갔어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인민군이 서너 명이 들어와서 사장을 찾아요. 아버님이 나가시니까 그대로 양쪽 팔 잡혀서 끌려나가신 게 다에요.”

전쟁 당시 상황

<전쟁 발발 직후 효자동에는 인민군들이 젊은 사람들을 의용군으로 데려가기 위해 집을 자주 찾아와 협박하고, 어린 아이들에게 총을 겨누고 폭행을 일삼는 등 횡포가 심했음>

Q :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사셨던 곳이 어디셨나요?
A : 효자동.

Q :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주변 분위기?
A : 살벌했죠. 우리가 끌고 가는 것도 다 보고. 대중 앞에서 구타하는 것도 많이 목격했고. 저희들도 그때 초등학교 5학년 때지만 인민군한테 많이 맞았어요.

Q : 당시 나이가?
A : 당시 12살이었습니다. 많이 맞았어요. (인민군이) 6월 27일에 서울 들어와서. 제가 효자동 살 때인데 전 그때 잘 모르죠. 그 사람들이 “너, 국기 그려봐” 하길래 태극기를 그렸죠. 5학년 때이니까 그랬더니 구둣발로 사정없이 치고 아무 무자비한 놈이에요. 인민군이 총을 겨눈 것은 한 세 번이에요. 9.28수복되고 좌익 하던 놈들 청와대 앞에 쫙 엮어서 묶어 놨을 때 군인들이. 거기 있던 피난 못간 국민들이 몽둥이 가지고 막 쳤어. 지금도 여기가 치밀어 올라와요. 빨갱이라면 김대중 정권 때부터 아주 진짜 못마땅하다고. 저 사람들이 빨갱이의 본질을 몰라. 당해보지 못하면 정말 몰라요. 아무리 그래도 변하지 않아요.

Q : 총 겨눔을 당한 때는?
A : 제가 50년 7월 .여름이니까. 애들이랑 청와대에서 놀고 있었어요. 풀들이 이렇게 자랐는데 오라고 하니까 저희는 잘 모르죠. 총을 파당 쏘더니 기어나갔더니 “꿇어”그래요. 개머리판으로 치는 거에요. 아버지 피랍되셨을 때 개머리판 맞았고. 태극기 그렸다가 묵사발되고. 그 외에도 말도 못하게 당했어요.

Q :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계속해서 젊은 사람들을 의용군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집을 찾아 왔다고 했는데) 어머님은 폭행은 안 당하셨나요?

A : 뭐. 어머님은 대꾸도 잘 안하고. 제일 많이 맞은 게 저희 셋째 형과 저하고. 반항을 많이 했으니까.

Q : 협박은 없었나요?
A : 협박 정도가 어디 있어요. 죽인다는데 뭐라 그래요. 형들 어디 갔냐고 불라는데 이런 거 맞는 것은 예상했었어요. 밤낮 똑같은 대답만 했어요. 그냥 나가서 식량 구하러 나가서 연락이 안 된다.

Q : 몇 차례나 왔나요?
A : 하여튼 아버지 납치 될 때 까지 그랬으니까 8월 4일까지니까 한 한 달. 이삼 일에 한번씩 와서. 사실 동네빨갱이가 너무 무서웠어요. 전부 사정을 다 아니까. 후에 알고 보니까 그 놈들이 전부 찔러서.

Q : 지방 좌익들의 이름은 기억이 나나요?
A : 우리 윗집에 살았던 사람이 일본 이름으로 가네하라 라고. 일본 이름만 알아요. 앞잡이 해서 동네사람들 끌고 갔어요.

Q : 그 이후에 그 사람들 소식을 들으셨나요?
A : 네. 그 후엔 전혀 듣지 못했어요. 그게 마지막 소식이었어요. 1.4후퇴 때 내려갔는데 그 동네에 있던 좌익들 중 한둘이 서울에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납북 경위

< 1950년 8월 4일 11시경 충무로 2가 사업장에서 근무하던 중 정체 불평의 남자 2인이 찾아와 물건을 찾다가 없으니까 사장님 좀 뵙자고 하고 나간 후 바로 인민군 서너 명이 사무실로 들어와 피랍자의 양쪽 팔을 잡고 끌고 감. 그날 밤 12시경 인민군 3명이 피랍자을 태우고 자택으로 찾아와와 반동인 증거를 입수하기 위해 집안을 수색하고, 모든 가구에 딱지를 붙였음. 장성한 아들들을 데려가려 했으나 미리 피신해 실패하고 돌아감. 그 이후 피랍자는 서대문 형무소까지 잡혀갔다는 소식만 들을 수 있었고, 자녀들을 잡으러 계속해서 집을 찾았으나 다행이 석 달을 숨어서 버팀. 나중에 피랍자의 조카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음>

Q : 아버님이 납치되던 상황은?
A : 1950년 8월 4일. 저희 가게가 충무로 5가 5층 건물인데 아래층은 영업장이고. 2층이 사무실. 사장실, 3.4.5층이 창고로 썼는데. 점심 무렵에 민간인 두 사람이 가게로 와서 전구를 찾더라구요. 용량에도 없는 전구를 찾길래 없다고 하니까 나갔어요. 그리고 조금 있더니 인민군이 서너 명이 들어와서 사장을 찾아요. 아버님이 나가시니까 그대로 양쪽 팔 잡혀서 끌려나가신 게 다에요. 직접보지 못했고 친척들이 봤어요. 거기 나가있던 사촌누이가 거기에 나가있던 집으로 연락해서. 사태가 좋지 못하니까 그날 올지 모른다고 형 셋은 범에 오면 담 넘어서 인왕산으로 내뛸 요량으로 있었는데 밤12시쯤 넘어서 대문을 두드리 더라구. 도망가는 시간을 끌기 위해 형들은 담 넘어 뛰질 못하고 급하니까 지붕으로 피신했고. 10분 늦게 나갔더니 인민군이 나한테 권총을 들이대 더라구. 딱 보니까 지프차가 앞에 있더라구. 뒤에 아버님이 계시길래 “아버지” 하고 뛰어가니까 권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쳤어. ‘아버지’ 소리 듣고 아버지도 나오려다가 아버지도 주저앉고. 전 맞고 끌려 들어오고. 뭐. 들어와서 뒤지기 시작하는데 다 뒤졌어요.

Q : 뭘 찾으시던가요?
A : 딱 보니까 어머니 말씀이 산업 박람회 때 이승만 대통령 때 감사장 받았던 거 찾으려던 것 같아. 반동이라는 증거. 그래서 어머님이 꿈추려 화장실에 갔다 넣으신 것 같아. 전부 뒤져서 안 나오니까 딱지 붙이고 나가더라구. 한 두어 시간 뒤졌어. 그러고 간 다음 형들은 지붕에서 내려와서 그 다음부터는 불안하니까 전부 수소문해서 알아보니 알아볼 방법이 없더라구. 또 들이닥칠 것 같아 준비하고 있는데. 그 날밤에 또 들이 닥쳤더라구. 저희 지붕에서 보면 일본 적산가옥이 있었는데 거기가 인민군 내무서원들이 있는 집이었어, 옛날엔 오시래가 있었어요. 오시래 앞에 장롱을 놓고 오시래 앞에 공간이 있었는데, 그 옆에는 평평이 요만큼 들어가는데, 옛날 장들이 베니아인데. 그 속을 뜯고 그 속으로 전부 들어가고 옷을 다시 넣고 그 안에 숨는데 그날 밤에 그 놈들이 오자마자 지붕으로 올라가는거에요. 어디 갔냐 하길래 사변 나고 얼마 안 돼서 쌀 구하러 나갔다 했더니 어제 지붕에 있는 거 봤다 그래요. 우린 모른다 했더니 소란치고 내일 또 올 테니까 기다려라 그러고 갔어요. 그 다음날 여기에서 활동하던 빨갱이를 앞장세워서 한 트럭 다 싣고 갔어요. 집안 살림살이 다 가지고 갔어. 여기 있던 빨갱이들이 악질이더라구. 밥그릇, 숟가락은 두고 가야하지 않겠냐 했더니 밥그릇, 숟가락만 두고 다 가지고 갔어. 석 달 동안 전부 거기에서 숨어서 지냈어.

Q : 뭐라고 하면서 데리고 갔나요?
A : 아무 말도 없이 데리고 가버린 게 다에요.

Q : 그 사람들이 어디에서 나온 사람들인지? 집으로 다시 온 사람들은?
A : 인민군이야. 제복입고. 군복입고. 군용 지프차 타고. 집으로 다시 온 사람도 제복입고 온 사람이에요.

Q : 잡으러 온 이유는?
A : 그 나이 때가 인민군으로 끌고 갈 수 있는 나이이니까. 그래서 형 셋과 누이 해서 넷이 숨어있었던 거죠. 오시래 속에서.
Q: 다른 가족 분들도 납치를 당했다던데??
A : 그 후에 사촌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갔는지 행불 돼서, 그 당시 경기 중 다니던 사촌들이 의용군으로 끌려간 것 같아요. 사실 생사도 모르니까요. 정부에서는 자진해서 따라갔다느니 그런 얘기를 하는데 그 얘기는 정말 억울해요.

납치이유

<피랍자는 당시 대한 청년단에도 관여했었고, 서울 전기 주식회사 사장으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산업 박람회에서 감사장을 받는 등 사회적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음>

납치 후 소식

<납북되던 중 도망한 피랍자의 친구를 통해 평양 인근까지 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고, 이 후로는 소식 전무>

Q :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아세요?
A : 저희 동네에 6.25가 터지니까 윗집도 좌익이고 한 네 다섯 집이 좌익이고. 사정해서 물어보니까 서대문형무소로 간 것까지 가신걸 알았어요.

Q : 면회는 시도해 보셨나요?
A : 찾아가 보니까 면회를 시켜주지 않으니까. 당시 납치된 사람들은 다 서대문형무소로 갔다 하는 것만 확인이 됐어요.

Q : 커 나가시면서 아버님의 그리움은?
A : 저까지는 기억이 나요. 계속 떠오르고 꿈에도 나타나고. 1952년 아버님 친구분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그 분도 납치돼 가다가 평양근교까지 가서 탈출하자고 했는데 아버님이 마음이 약해서 탈출을 못했어요. 아버님 친구분은 탈출에 성공하시고 오셔서 얘기를 하는데 그걸로 봐서 평양까지는 끌려가신 것 같아요.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납치 다음날 인민군들이 찾아와 회사에서 트럭 5대, 자택에서 1트럭 분량의 재산을 탈취해 감. 토지 문서 등이 들어 있는 금고 채로 가져가는 바람에 일산에 있는 토지를 찾지도 못하고 배우자와 9남매가 어렵게 생활함. 전쟁 당시에 형들은 잡혀서 의용군으로 끌려갈 위기에 놓인 적도 있었으나 4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도 하며 겨우 위기를 모면, 생존할 수 있었음. 이후 피랍자의 장자는 군대에서 부상을 입고 포로로 북송 됐다가 1차 포로 교환 때 돌아와 국가 유공자로 살았고, 나머지 자녀 모두 자수 성가해 어려운 형편에서 꿋꿋이 살아 감>

Q : 아버지가 납치되신 후 가족들의 생활은 어땠나요?
A: 그때 까지만 해도 잘 살았는데. 그때 이후부터는 저를 비롯해서 형제들 모두 나가서 껌팔이 담배 팔이로 살았어요.

Q : 납치 후 인민군들이 집 외에 회사 물건까지 가져갔나요?
A : 회사에 있는 기자재 다섯 여섯 트럭으로 다 가져가고 옛날에는 모든 문서를 아버지가 다 관리했는데 금고에 넣어놨는데 금고 채 다 가져갔어요. 일산 쪽에 엄청난 토지가 있는데 하나도 못 찾은 거예요. 쓰고 있는 효자동 집하고 충무로에 있는 것만 겨우 찾고 다 못 찾았는데 근자에 장조카가 수소문해서 땅을 두 어 개 찾아봤는데 그게 국유로 넘어갔어요. 소송에서 졌어요.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죠. 그렇게 해서 완전히 몰락했어요. 하나도 남김없이 다 가져갔어요. 땅 찾는데 소송한 것도 아무것도 안되더라구요. 납치되어 가서 형제들이 다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큰 형은 그 당시 제주도 훈련소로 가서 바로 전방에 투입돼서 기마전투에서 화상입고 포로로 잡혀갔어요. 이북으로 잡혀갔어요. 기마전투에서 7월 27일 얼마 전에 소대원들이 피신했는데 인민군이 아니고 중공군이라 밖에서 뭐라고 하니까 겁나서 못나가고 한참 있으니까 연기가 들고 뜨거우니까 타 죽고 저희 큰 형도 살았던 게 뛰어가다 이렇게 넘어져서 쓰러졌나 봐요. 그래서 중공군이 항복한 줄 알고 끌어내가지고. 온몸에 형편없는 화상을 입었어요. 그 몸으로 평양까지 끌려갔어요. 여름에 끌려갔으니까 형 얘기로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구더기가 말도 못해요. 구더기가 온몸에 붙어서 나뭇가지 하나 꺾어서 털고. 같이 끌려간 멀쩡한 포로가 이것 좀 해주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해주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끌려가서 포로협상 제1진으로 넘어왔어요. 여기 와서 입원 몇 달 하다가 명예제대하고 국가 유공자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죠. 저희 8형제가 다 군대 갔다 왔어요. 살기 어려웠죠. 전부다 자수성가해서 살고 있어요. 어머님은 1978년도에 돌아가셨죠. 어머님이 고생 많이 하셨죠. 하여튼 인민군이라면 치가 떨려요. 9.28수복할 때 저희 집에 와서 열 댓 명이 묵고 있었거든요. 퇴각하는 인민군이 묵고 있었죠. 동네 집에 차지해서 묵고 그렇게 퇴각을 했죠. 숨도 못 쉬었죠. 말 잘못하면 쏘고 가버렸을텐데. 어떻게 말도 못했죠. 저항도 못했지.

Q : 형님들은 계속 그 장 속에서 숨어계셨나요?
A: 그럼요. 다 듣고 있죠. 저희는 그거 아니었으면 형 셋 누이는 저놈들이 말하는 의용군으로 끌려갔을 거에요. 그리고 형하고 그 당시 가정교사로 있던 서울 의과대학 다니던 가정교사하고 둘이 나갔다가 붙잡혔어요. 남대문에서. 서울시 경찰국장 자리 거기에 잡아오면 무조건 의용군으로 보냈어요. 꼼짝없이 의용군으로 가게 생겼는데 저희 가정교사가 좀 독해요. 형하고 4층인데 이놈들한테 끌려가느니 아버지 납치당해 이가 갈리는데 이거 끌려가느니, 여기에서 떨어져 탈출하자 해서 4층에서 뛰어내렸는데 옛날 사과상자가 나무들이었어요. 그 위로 떨어져서 다시 뛰어내렸더니 내리고 보니 막다른 골목이에요. 나갈 구멍이 없어 들창문을 박차고 들어갔더니 노인 두 분이 있어요. 그래서 사정 얘길 했더니 그 양반이 보호해주고 있다가 날이 어두워져 밤에 나왔어요. 그 다음부터는 일절 못나갔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 납치 이후에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보셨나요?
A : (소식을 알려고)동네 좌익에게 도움을 청했고. 수복 이후에는 정부에서는 신고만 하라 하고 정부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런 것도.

호적정리

<사망으로 정리>

연좌제 피해

<없었음>

Q : 연좌제의 피해는?
A : 특별한 피해는 없었는데. 해외여행갈 때, 저희 막내가 군에 있을 때 월남파병 갈 때 그때 문제가 되더라구요. 결국은 월남을 못 갔어요.

Q : 정부에 나온 사람의 감시는?
A : 그것은 피부로 못 느꼈는데 저희 친척들은 그런 감시를 당했어요. 저희 자식들은 공직에 근무한 사람들이 없었는데 공직에 있는 다른 사촌들은 그걸 받았다고 하더라구.

정부에게 바라는 말

<생사 확인 및 유해 송환>

A: 매번 역대 정권에서 그렇지만 관심이 없어요. 최소한 생사확인만 해주면 좋겠어요. 돌아가셨음 돌아가신 날짜라도 알고. 유해라도 받았으면 좋겠는데 정부에서는 전혀 무관심이니까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좋겠어요.

Q : 더 하고 싶은 얘기는?
A : 정부에서 신경 써 주는 게 정식으로 인정해 주고 6.25납치된 사람들의 명예도 회복해주고. 지금은 거꾸로 역적 비슷하게 몰려있어요. 양민학살 그런 거 우익사람들을. 지금이 좌익정권 비슷하잖아요? 공산주의 그 사람들 우대해주니까 더 치밀어 오르죠. 실제로 이 사람들은 모르겠어요. 직권 층에 있는 사람은 색깔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공산주의 본질을 모르는 것 같아요. 정확히 아셔서 이제는 체계적으로 해서 해줬으면 하는 바램뿐입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 아버님께 하고 싶은 얘기 해주세요.
A : 정말 눈물 나죠. 아버님 납치가 마흔 두세 살 됐을 거에요. 고만고만한 애들 놓고 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아버님이 납치 당하셨을 때 9남매였어요. 끌려가실 때 맨발에 철사로 쭉 끌려서 가셨다고 하는데. 그거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아프죠. 눈물이 나죠. 자식 낳고 손주보고 나니까 더 그리움이 남죠. 지금 살아계셨음 아흔여섯이신데. 성격상으로는 살아 계셨을 것 같고. 그런 바램 이예요.

A : 아버님 저희 자식들 9남매가 다 살지 못하고 형 둘 동생 둘은 다 저 세상 가고 어머님 가시고. 남은 자식은 손주들 다 키워서 다들 잘 사는데. 아버님 같이 이 손주들 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가슴이 메이지요.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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