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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창희 (증언자-김동일)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1:57  |  조회: 2344


050516A 김창희 / 2005. 5. 16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창희), 사진2(증언자:김동일)

피랍자
성명: 김창희
생년월일: 1919년 9월 22일생(평북 삭주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
피랍일: 1950년 8월경
피랍장소: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직업: 금창 사진관 운영
직계가족/부양가족: 모, 배우자, 자녀 2남 1녀
외모 및 성격 : 미남형, 얼굴 왼쪽 뺨에 동전 크기의 점이 있음

증언자
성명: 김동일(1941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6.25 사변 나고 피난을 가지 않고, 남영동에서 운영하는 사진관을 출퇴근 하던 중 8월경 출근을 한 후로는 소식 없음. 납북자의 어머니가 사진관을 가 봤지만 사람이 없었음.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다가 53년 먼 친척 뻘 되는 강조식씨와 과거 북한에서 월남해 알고 지내던 김여택씨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김창희씨를 봤다고 전해줌. 포로 교환 과정에서 북한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됨. 김창츼씨는 평북 삭주 출신으로 해방 이후 월남한 상태였고, 가정 형편이 풍족한 편이었으며 사진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명단 확인 및 생사확인








“할머니가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후에 누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그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 반란이 심해서 이북으로 갈 사람 이북으로 가고 남한 갈 사람 남한으로 가구 그때 갈린 거야. 아버님이 반란 때 돌아가신 게 아니시라면 반반씩 나눌 때 그때 실려서 가신 게 아닐까 싶어. 포로교환이라고 해서 휴전 당시 때 그런 게 있었어.”

“집안에 남자가 없고 친척도 없고 여자만 있었어. 한 가장이 없으면 숙대밭이 되는거야. 다들 그럴 거야. 그때는 아주 살기 힘들었고.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직업 및 활동

<사진관을 운영하면서 연예계 사람들과도 친분을 쌓으며 활동적으로 생활함.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편이었음>

Q :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A :. 사진관를 경영하고 있었어요. (청년단 활동이나)그런 것은 없었고 그 당시에 사진과 연결이 되어 있으니까 연예인들이. 연극계, 영화계 사람들하고 접촉해서 어울려 다녔다는 것은 기억나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당시에 남춘, 황해, 독고성. 박노식 같은 분들하고 연관이 있었어.

Q : 집안형편이 어떠했나?
A : 괜찮았어. 사진관 경영하는 게 상당히 풍족했어. 괜찮았어.

납북 경위

<6.25 사변 나고 피난을 가지 않고, 남영동에서 운영하는 사진관을 출퇴근 하던 중 8월경 출근을 한 후로는 소식 없음. 납북자의 어머니가 사진관을 가 봤지만 사람이 없었고, 이후 전해들은 소식을 통해 납북된 것으로 추정함>

Q: 어떻게 피랍 당하셨는지?
A: 그때가 6.25 사변 나고 7.8월경쯤에 여름 방학 때인데 한 8월경에 할머니가 그 당시에 내가 성동구 중앙시장 근방에 살았거든. 그때에 아버지는 사진관을 용산구 남영동에 금창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출퇴근하셨어. 아버지가 하루 이틀 안 들어와서 할머니가 사진관에 다녀 오시더니 문을 잠궈 놓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아무래도 잡혀간 것 같다”고 하신 것을 들었어. 그건 기억이 나. 한숨 섞인 얼굴로 그랬던걸 기억하지. 그 외는 잘 몰라.
Q : 주위사람들이 납치당한 경우가 많았나요?
A : 네. 의용군으로 납치된 사람들이 많았어요. 의용군이라고 그랬어. 인민군이 무조건 잡아가는 의용군이었지. 내 생각에는 나이 17.8세면 의용군으로 다 잡아갔어. 그리고 밤에 소방훈련이 심했어. 불을 키지 못했어. 밤에는 불을 무조건 꺼야지 켜지 못했어. 9월28일에 인천상륙하고 올라갔다 내려 오는 게 1.4후퇴인데 그때 많이 내려갔어. 우리도 피난 내려갔지.

납치 후 소식

< 먼 친척 뻘 되는 강조식씨와 과거 북한에서 월남해 알고 지내던 김여택씨가 53년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김창희씨를 봤다고 직접 전해줌. 이후 포로 교환 과정에서 북한으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

Q : 할머니가 직접 찾으러 다니셨던 일은 없으셨나요?
A : 글쎄. 할머니가 여기저기 알아보니까 후에 누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고. 내가 많이 옆에서 지켜봤지.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이승만이 석방시킬 때가 1953년도 알고 있어. 난동이 있어서.

Q : 아버님이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있었던 것이 53년도라고 생각하시나요? 찾아가보셨나요?
A : 들었던 얘기는 53년도에 들었어. 아버님께서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찾아가지는 못하고 들었던 얘기가 그랬어. 난리가 벌어져서 많이 죽었어.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이 할 수 없이 막 석방 시켰던거야. 이승만이 석방 시킨거야. 난동이 벌어졌어.

Q :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만났다던 분은?
A : 돌아가셨겠지. 아버지 나이 때인 분들은 다 돌아가셨지. 그분들이 얘기한 거니까. 거기에서 만났다 어쨌다 그런 거니까. 그 당시 포로 수용소에서 반란이 심해서 이북으로 갈 사람 이북으로 가고 남한 갈 사람 남한으로 가구 그때 갈린 거야. 내가 한참 후에 재작년에 포로 수용소에 한번 가본적 있어. 옛날 복원된 곳에 가본거지. 아버님이 반란 때 돌아가신게 아니시라면 반반씩 나눌 때 그때 실려서 가신 게 아닐까 싶어. 포로교환이라고 해서 휴전 당시 때 그런 게 있었어.

Q : 몇 년도에 그 분께서 아버님을 보셨다고 하셨나요? 그 소식을 알려준 성함은? 알고 지내신 분이셨나요?
A : 그게 1953년도이지. 김여택이라고 아버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돌아가셨어. 아버님하고 포로 수용소에서 같이 있었어. 이북에서부터 같이 알고 내려온 사람이었지. 친척은 아니고 의형제 맺은 분이셨어. 날 장가도 보내고 친하게 지낸 분이었어. 돌아가신 지 3.4년 됐어. 극진히 형을 모시고 날 늦게 만나서. 6.25사변되고 20년 후에 만난 거야. 할머니가 어떻게 알아서.

Q : 생사확인 의뢰서에 의하면 1967년도에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만났다가 헤어졌다고 그렇게 얘기해놓으셨다고 적어놓으셨는데 몇 년도인가요?
A : 그럴 거야. 67년도 일거야. 잘 모르겠어. 먼 친척. 그런데 먼 친척은 아니고 삼촌 그랬지.

Q : 강조식씨. 김여택씨가 직접 찾아오셔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뵈었다고 말씀해 주셨다는 게 맞나요?.
A : 응.

Q : 잠시 만난 후 헤어졌다는데 그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이북사람들이 많았나봐요?
A : 주로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았었나 봐. 반공포로라고 해서 70~80% 이북사람이었어. 이남사람들은 드물었을 거야.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가장이 납북되어 어머니와 배우자 자녀 세 명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 호떡 장사, 떡 장사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자녀들이 교육을 받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음>

Q : 어떻게 지내셨어요?
A : 그때는 안정이라는 게 없고 정말 힘들었어. 비참했어. 보통 사람들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어. 그래도 할머니가 힘써서 전쟁 끝나는 해에 중학교를 들어갔으니까. 학교 들어가면서 할머니가 3.4년을 힘써서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1학년. 2학년 다니면서 그만뒀어. 학비내는 게 힘들었어.

Q : 생계는 어떻게 했나요?
A : 장사했지. 안 해본 게 없어. 그런데 그게 괜찮은 장사는 아니고 호떡 장사하고. 떡 장사하고. 남의 집에 가서 식모도 하고 그랬어. 매일 그렇게 연명해가고.

Q : 자녀분들은 모두 어떻게 지내셨나요?
A : 난 학교 졸업하고 군대 가고. 여동생 결혼하고. 세월 흐르다 보니 70년대쯤 되니까 자꾸 나아지지. 괜찮지.

Q : 할머님과 어머님 돌아가셨나요?
A : 할머니는 벌써 돌아가셨지. 그때 나이가 70쯤 되셨고 그래서 70년대쯤 돌아가시고 어머님은 7년 전에 돌아가셨지. 할머니 힘이 컸지. 전부다 고생이 많았어. 생활이 힘들었다고.

Q : 아버님에 관한 얘기를 들으셨던 게 많으셨을 텐데.
A : 아버지가 이북에서 내려온 2대 독자였어요. 아버지 얘기를 하시면서 할머니 자꾸 울어요. 6.25사변 나서 아버지 생각하는 게 10년 되더라구. 그 후는 날 믿고 사니까 아들 겸 손자 겸 그렇게 살았어. 아버지 생각나서 많이 오셨어. 어머니도 애들 데리고 살면서 많이 우셨죠. 그 당시에 다들 미망인이었어. 전사하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 29에 과부가 돼서 그랬으니까 그런 분들이 많았지.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 신고는 하셨나요?
A : 그런 건 없었어. 정부에 신상 비슷한 거 적어가는 건 있었어. 그 외에 특별히 관청에 신고를 하는 건 없었어. 먹고 살기 바쁜데 그런 거 신경 쓰겠어? 그 당시엔 납치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서, 많아서 구태여 새삼스럽게 그러는 건 없었어,

Q : 언제 정부가 신상명세서를 적어갔나요?
A : 전쟁 후에 어머니가 그러셨고. 제 호적에는 아버지가 살아계신 걸로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이북에서 넘어오면 실향민이라고 해서 사망 신고를 안 했죠. 그래서 살아계신 걸로 되어 있어요. 대부분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다 그럴 거야.

Q : 도움을 받았던 것은?
A : 그런 건 전혀 없지. 여기도 내가 찾아 온 거지. 적십자사에 갔다가 여기 찾아 온 거지. 아버지 생사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내가 보기엔 술 담배 안 하시고 활발하시기 때문에 명이 길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하는 거지.

연좌제 피해

<없었음>

호적정리

<미정리>

정부에게 바라는 말

<납북자 명단 확인 및 생사확인>

A : 바라는 것. 6.25사변이 50년이 넘었는데. 납북자 명단이나 생사확인 빨리 해야 되요. 되긴 되는데 너무 늦으면 나중에 2세 되면 얼굴을 몰라. 그때 통일이 되야 소용이 없는 거야. 이건 통일이 아니고 생사확인 하려는 거야. 5.6년 되면 나도 죽는 거거든. 얼굴을 모르니까 방법이 없어. 이제 아버지를 만나면 얼굴을 기억하지. 시간이 촉박해. 할 바엔 빨리 해야지. 생사확인 빨리 해야 되는거 아니야? 그런 게 있어서 빨리 해야 돼. 2세가 넘으면 끝이야. 내 아들들 둘인데. 서른 일곱 살. 서른 두 살인데 얼굴을 몰라. 난 10년 못살아. 내 여동생은 예순 두 살 인데6.25를 몰라. 6.25전쟁 이라는 거 자체를 몰라.

A : 집안에 남자가 없고 친척도 없고 여자만 있었어. 한 가장이 없으면 숙대밭이 되는거야. 다들 그럴 거야. 그때는 아주 살기 힘들었고 가장이 없으면 고생을 무척 했을거야. 눈물을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전쟁은 있어서는 안되고 50년이 넘은 상태인데 되도록이면 빨리 소식 좀 알았으며 하고. 조금 더 넘으면 되고 가치가 없는 거야. 가치가 있으려면 살아있을 때 봐야 되는 거야. 가치가 없으면 되면 뭐해. 건강하게 만날 때까지 살아계셨으면 하는게 바람이야. 아버님이 꼭 살아계실 것 같아. 그분이 살아 계셔도 가정을 가지고 계실 거란 말이야. 씨는 같은 형제일거 아냐. 나중에 알고 지내야지. 혹시라도 형제끼리 같은 가정을 갖게 되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게 아니야.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버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빠른 시일내에 좋은 소식이 있어서 아버님하고 상봉하는 게 꿈에 그리던 거야. 흘러가는 50년을 밤을 새도록 얘기하는게. 꼭 건강해서 만나는 게 소원입니다. (눈물)자꾸 어쩔때는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 할머니하고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더 많이 고생하신 것 같아 가슴이 아파요. 아버지 만나면 전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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