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윤태경 (증언자-윤명식,윤창식)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3:25  |  조회: 2195


050518B 윤태경 / 2005. 5. 18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윤태경), 사진2(증언자:윤명식 윤창식)

피랍자
성명: 윤태경
생년월일: 1909년 11월 27일생(서울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교남동 137-2
피랍일: 1950년 9월 1일
피랍장소: 서울시 서대문구 교남동 137-2 (자택)
직업: 국회의원 감찰위원회 정보과 직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5남매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마른편, 침착하고 온순함

증언자
성명: 1.윤명식(1939년생) 2.윤창식(1941년생)
관계: 1.장녀. 2.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국회 감찰위원회 정보과에 재직 중이던 피랍자는 전쟁이 나고 여기저기 도피 생활을 하시다가 50년 8월 31일 아들의 생일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러 집으로 들어옴. 그 다음날 아침 곧바로 런닝 차림으로 내무서원들에게 포박당해서 연행되어감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 확인 및 명예회복. 북측과의 대화에서 납북 사실 확인 및 적극성을 보여 줄 것.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운영 지원 요청










“ 9월 1일 주무시다 말고 런닝 차림으로 팔을 양쪽 옆에 끼고 갔어요. 그냥 옷도 차려 입지 못하고 나가셨어요. 내무서원이 데려갔어요.”

“저는 경기여중 1학년 때 납북인사 가족 모임의 가두방송을 했어요. 교복입고 마이크 잡고 승용차 위에 타고 가두방송하고 했어요. 학교 끝나면 마이크 붙잡고 방송하고.”


직업 및 활동

<국회 감찰위원회 정보과에 재직 중>

Q : 피랍자의 납북되기 전의 직업?
A(윤명식) : 교육 위원회 장학지도 학무를 보셨다가 국회 감찰위원회에 계셨죠. 정보관. 아주 희미한 기억이에요.

Q : 아버님의 납북 전 단체 활동?
A (윤명식): 그건 잘 모르겠어요. 국회 감찰위원회의 정보관으로 있으시면서 뇌물 같은 게 들어오면 어머님이 반환 하시기 바쁘셨어요. 어머님도 집에 안 계시고 일하시는 분이라서 일하시는 분이 그걸 받아 놓고는 해서 아버님 호령이 떨어지면 나 데리고 그 집 찾아서 갖다 주셨어요.

납북 경위

<전쟁이 나고 여기저기 도피 생활을 하시다가 50년 8월 31일 아들의 생일에 저녁식사를 같이 하러 집으로 들어옴. 그 다음날 아침 곧바로 런닝 차림으로 내무서원들에게 포박당해서 연행되어감>

Q: 어떻게 납북 당하셨는지?
A(윤명식) : 8월 31일이 동생 생일인데, 계속 피신하고 다니다 동생 생일에 저녁 같이 하자고 해서 8월 31일에 오셨어요. 그때 저녁만 하고 가셔야 했는데, 집에서 주무셨던 거죠. 9월 1일 날 아침에 덮쳐서 모셔갔던 거죠. 납치되던 해는 1950년도 9월1일 날.

Q : 피난은 안 가셨나요?
A(윤명식) : 제 기억에 아버지는 짐을 싸서 바로 피난을 가셨다가 얼마 있다 다리 끊어지고 (못 내려가시고) 돌아오셨다가 다시 나가서 여기저기 집을 전전하며 피난을 했어요. 그러다 8월 31일에 동생 생일 한다고 오셨다가 하루 저녁 주무시고 9월 1일 주무시다 말고 런닝 차림으로 팔을 양쪽 옆에 끼고 갔어요. 그냥 옷도 차려 입지 못하고 나가셨어요. 내무서원이 데려갔어요. 그래서 그때 주무시다 말고 아버지가 옷이나 입고 나가자고 하셨는데 옷 입을 것도 없다고 하면서 잠깐만 여쭈어보고 금방 오실 거니까 그냥 가자고 해서 그냥 가셨죠.

Q : 아침에 찾아와서 뭐라고 하셨나요?
A(윤명식) : 그건 잘 모르죠. 시끄러워서 잠을 깨서 보니까 낯선 사람 둘이 와서 아버님 데려 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옷 좀 갈아입고 가자’니까 ‘금방 오신다’고 하면서 데리고 가셨어요. 어린 마음에 금방 오시나 보다 생각을 했죠. 그런데 그렇게 데리고 가셨어요.

Q : 그 당시 어머님의 상황대처는?
A(윤명식) : 어린 마음에 심상치 않은 게 어머님 표정보고 알고 당황해 하시는 태도를 보고 나쁜 일인가 보다 했지. 사실 그 전에도 서울에는 일가 친척이 없었어요. 어머님 8촌이 문산 살았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문산에 저하고 동생들 셋만 피신을 시키셨어요. 그런데 우리 동생이 생일이 돼서 같이 식사하자고 오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작은 아버님이 자전거를 가지고 오셔서 대바구니에 동생 둘을 싣고 가다가 다시 내려놓고 다시 돌아와서 저를 싣고 데려오고 번갈아 가면서 문산 에서 서울까지 와서 생일을 한 거에요

Q : 잡혀갈 때 폭력이나 협박은 전혀 없으셨나요?
A(윤명식) : 그 기억은 안나요. 잠결에 소리에 눈을 떠보니까 양쪽 팔을 끼고 가셨어요. 아버님이 옷 좀 갈아입고 나가자고 하셨던 얘기를 하셨어요

납치이유

<국회 감찰위 정보과 직원으로 재직 중이었음. 자택 소속 내무서원의 아들이 그 지역 유명 인사를 고발, 한꺼번에 연행했다는 후문을 들음>

A(윤창식) : 그 당시에 지나간 얘기에 아버님 납치당하신 그 날 우리 앞집 산부인과 아주머님이 잡혀가셨어요. 그런데 지나가고 나서 흐르는 얘기가 활명당 약국 아들이 전향해서 내무서원으로 들어갔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 동네 그 주위 주변 사람들이 여러 명 잡혀갔어요. 그런데 그때 얘기들이 내무서원 아들이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냐는 그 이후에 많은 얘기들이 있었어요, 그 산부인과 아들이 군대를 가서 장교가 돼서 이북으로 넘어갔어요. 어머님 찾는다고. 그런데 우리 집에 왔다 가고 했지만 그 후에 연락이 끊겠지. 그 주위 저명인사들이 같은 날 같은 시에 잡혀갔다고 얘기를 하더라구요. 지나고 나서 얘기하더라고.

납치 후 소식

<당시 국립도서관에 감금됐다고 해서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면회 어려움. 이후 형무소88호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그 쪽으로 찾아갔지만 실제로 목격하지는 못함. 이후 소식 두절 >

A(윤명식) : 아버님이 상당히 정갈하셨어요. 런닝 바람으로 나가셨다는 건 상상도 못할 얘기죠.그래서 어머니는 정치 보위부에 계시다는 것만 알고 옷이 좋지 않아서 아버님 옷 입으실 거 저한테 싸주셨어요. 그 앞에서 있다가 나오시면 옷 드리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거기서 몇 명 끌고 가는 걸 봤어요. 포박하고 가더라고. 아버님이 곱슬머리에 날씬하고 키가 크시고 해서 이렇게 끌려가는걸 봤죠. 계속 거기 있다가 형무소 88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머니가 형무소로 찾아가셨죠. 가셨는데 한 번도 본 적은 없대요.

A(윤명식) :저도 거기 계단에 앉아서 저처럼 잡혀간 아버지를 기다리시는 중학교 다니는 어떤 언니와 같이 아침마다 둘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문만 쳐다보면서 있었는데, 이쪽 건물에서 사람들 묶어서 바로 옆 건물로 옮기더라구요. 지금 롯데 백화점 자리야. 산업은행 본점이고 그 옆이 국립도서관이었어. 그 건물 그림이 이렇게 됐어요. 국립도서관인 빨간 벽돌 건물로 데려갔어. 을지로 건물 계단에 둘이 앉아서 봤었지. 그런데 이 건물에서 이 건물로 끌고 가는 것을 봤어. 우리 아버님만. 그 자리가 외환은행에서 을지로 쪽으로 내려가는 곳인 그 롯데 백화점 자리가 옛날에 한전 건물이었어. 그 한전건물 계단에서 바로 앞을 본거지. 그랬는데, 그 다음에 형무소로 가셨다고 88호에 계셨다고 통보는 해주더라고. 그런데 그곳에 갔는데 한번도 면회는 안 되더라구. 9.28 수복되자마자 또 그곳에 가셨거든. 그곳에서 많이 총살하고 그러지 않은 사람은 모시고 갔다고 해서 시체라도 찾는다고 하셔서 막내만 업고, 우리들은 보면 좋지 않다고 집에 있으라고 하고 가셔서 하나하나 다 들춰보셨다고 하더라고. 바로 그렇게 같이 넘어가신 것 같아. 집도 가깝고 해서 매일 갔는데 한번도 면회는 안되더라고요.

A(윤명식) : 88호에 통보는 누가?
A(윤명식): 그건 모르겠어요. 어머니가 그러셨다고 하시더라구요. 누가 찾아왔는지는 모르구요. 88호라고 어머님이 매일 말씀하셨어요.

Q : 그 이후 아버님에 관한 소식은?
A(윤명식) : 그 후에 듣지는 못했구요. 아버님 생신이면 임진각 북쪽하늘 바라보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랬어요.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배우자와 자녀 5명은 1.4후퇴 때 소사까지 피난을 했다가 서울로 돌아옴. 당시 적십자사에납치 상황을 신고하면서 딸이 가두방송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송환을 요구했으나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음. 생계는 납북자의 배우자가 교직에 있으면서 절약과 헌신으로 5남매를 교육 및 양육해옴>

Q : 납치 이후 피난은?
A(윤명식) : 1.4후퇴 때 그때는 피난을 갔죠. 그때는 다 한꺼번에 피난 갔죠. 다들 어리니까. 돌 지난 동생은 등에 업고 그때는 제가 6학년이었으니까 4학년, 1학년, 4살, 돌이어서 일찌감치 피난을 가자고 해서 소사까지 걸어서 갔다 왔어요. 그곳에 한동안 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죠.

Q : 아버님 납치 이후에 따님도 많이 고생하셨을 것 같아요.
A(윤명식) : 전 어머니에 비할 데가 못 돼요. 경기여중 1학년 때 납북인사 가족 모임의 가두방송을 했어요. 교복입고 마이크 잡고 승용차 위에 타고 가두방송하고 했어요. 학교 끝나면 그거 붙잡고.

Q : 가두방송을 할 때 사람들의 관심이 있었나요?
A(윤창식) :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 당시 수복 후 생활 형편이 어려울 때니 큰 관심을 갖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냥 지나가나 보다 하지. 한 문중에 그런 일 안 당한 사람도 없고, 워낙 과도기였고 힘든 때였으니까. 그 이후에는 납북 가족들 명단 제출하라고 해서 제출했어요. 그 때도 납북 인사 가족 협의회가 있었어요. 그렇게 신고도 하고 다 했지.

Q : 아버님 납치 이후의 생계는?
A(윤명식) : 어머님이 교직에 계셨는데, 교직으로 5남매를 최고학부까지 마치게 해 주셨어요. 어머님 생활이라는 게 말을 못해요. 저희 동생이 참 효자에요. 그렇게 안 할 수가 없죠. 어머니는 5남매 공부시키시려고 옷이고 신발이고 당신 돈으로 사 입고 하신 적이 없어요. 친구분들이 다 교직에 계시던 분이라 그 분들이 신던 거 입던 거 다 입으시고 그러셨어요. 그걸 모르는 자녀들이 많은데 우리 동생이 그렇게 잘 했어요.

A(윤창식) : 어머니는 일제시대 때 경성 사범대학에 나오셨는데, 그 당시엔 한국사람이 몇 분 되지 않으셨는데, 그 중에 있던 분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분들이 많았어요. 그 당시 여성 제1호의 장학사가 다 그 동기 분이셨어요. 나오셔서 바로 교편생활 하시면서 저희 5남매를 어머님 손으로 다 키우셨어요. 남부럽지 않게 최고학부 나오면서 할거 다 하면서 그랬을 때 부모님의 고충은 말로 다 못하죠. 아버님도 배제학당을 나오셨고. 마찬가지겠죠. 자식한테 헌신적인 건 말로 다 못하죠. 특히 사랑은 진짜 헌신이죠. 그래서 다 가정을 이루고 파생되고 파생되고 해서 손자손녀 다 하면 40명이고.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 신고는 하셨나요?
A(윤명식): 대한 적십자사에서 한 번. 그리고 최근 납북인사 가족협의회에 또 하고. 거기서 가두방송을 시켰나봐요.

Q : 도움을 받았던 것은?
A(윤창식) :. 도움은 일절 없어요. 납북인사로서의 도움은 하나도 없어요. 세금을 내서 도움을 줬으면 줬지 도움을 받아본 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연좌제 피해

<납북인사 가족이라는 이유로 자녀가 R.O.T.C에 지원 당시 신원조회상으로 어려움을 겪었음>

A (윤창식): 우리 막내 동생이 R.O.T.C를 지원했었는데, 납북인사 가족이라고 해서 정말 힘들었어. 자격여건에서 많이 제재가 있더라고. 정부에서. 납북인사라고 하니까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일단 자연적인 자격에서 점수가 안 나오고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다시 신원조회를 하고.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래서 가족들이 보기에는 어찌됐든 간에 정부에서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에 이러는 것은. 본인에게는 심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들에게는 말도 못하는 두 번째 피해가 될 뻔 했더라고. 그런데 어떻게 연락을 하고 해서 무사히 제대를 했는데 납북인사 가족이라고 해서 법적으로 외려 보호해주어야 하는 가족에서 대상으로 생각하는 막내 동생에 대한 처사로 보아서는 정부의 시책이 잘못됐다고 봐요. 감시는 없었어요. 이 외에는 없었어요.

호적정리

<미정리>

정부에게 바라는 말

<납북 사실 확인 및 북측과의 대화에서 적극성을 보여 주고, 납북인사 가족협의회 운영 지원 요청>

A(윤창식) :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오지 말았으면 하고. 지금 정부가 북한에 많은 원조를 하는데 그만한 해답이 없어. 단지 짝사랑 하는 것뿐이고. 그 사람들이 우리를 납북인사로 인정해 주지 않고 자진 월북으로 하는 것을 보면 우리 동족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우리 정부는 우리 세금을 가지고 그 쪽에 퍼 주기만 하고 있어. 대화하자고 퍼주고. 동족이라는 건 하나도 없는데 정부는 그대로 끌려 가는 거라고. 미국 같은 나라는 전쟁 후에도 자기 동족 유해 찾는다고 수십억 들여서 하고 있는데, 우리는 살아있는 국군 포로도 인정 안 해주고 못 데려온다고. 그런데 왜 대화를 못하는지 모르겠어. 그리고 납북인사들. 분명이 납북인데 뭐가 무서워서 대화할 때 말도 못 꺼내느냐고. 정부 하는 일 보면 정말 답답해 죽겠어. 정부가 국민을 위한 것인데 가려운 걸 긁어 줘야지. 기껏해야 이산가족 만나게 해 주는거 그게 무슨 대수야. 그런데 생사도 확인해주지도 못하고. 납북 자체도 인정 안 되는 데. 그러나 개인이기 때문에 정부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지만 단지 정부 하는 일이 달라져야 한다고만 생각해. 정부에서 납북인사 관련 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국내에 그런 것을 만들 수 있는 법률도 만들고. 법적. 제도적으로 정책적으로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납북 인사협의회도 좀 더 번창해서 힘이 있는 단체가 돼야 해. 많이 홍보를 하고 계속 정부와 도 접촉하고 자생력을 갖춘 기관으로 발돋음을 해야 하는 데 그게 바로 정부에서 인정을 하고 정부에서 지원을 해 주고 해야 하는데 지금 보면 회원들 회비로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잖아. 이북의 줄 돈을 남겨서 해야 되는데 정부에서 볼 때 여기는 시끄러우니까 눈에 가시로만 생각해. 하여간 정부에서 관심을 갖고 잘못은 인정하고…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윤명식) : 어린 마음에도 아버님이 우상처럼 보였어요. 실제 나이가 95세쯤 됐을 건데 아버님 생사를 알았으면 좋겠고요. 5남매 잘 성장한 모습 보여드리고 싶고 효도 하고 싶고 그래요.

A (윤창식): 저는 어렸을 때 친구들이 ‘아버지’ 하는 소리가 그렇게 부러웠어요. (말을 잇지 못함. 눈물) 뵙는 다는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야 뵐 수 있겠고 저희 어머니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젊으셨을 때 우리 5남매 참 어렵게, 남부럽지 않게 학교도 최고학부까지 나오게 해주셨고. 얼마나 힘드셨겠어요? 이 자리가 우리 어머님이 살아계셨음 더 좋은 자리가 됐을 텐데, 납북인사 가족들 모두 다 저와 같은 입장일 것입니다. 보상을 원하는 게 아니고 생사가 어떻게 됐나. 명예회복을 바라는 거고. 아직도 정부는 좋은 해답도 없고 그 자체까지도 인정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게 안타깝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0 납북자-윤태경 (증언자-윤명식,윤창식)
관리자
13-09-16 2194
9 납북자-권경정 (증언자-김옥분,권기영)
관리자
13-09-16 2733
8 납북자-김창희 (증언자-김동일)
관리자
13-09-16 2343
7 납북자-류인하 (증언자-류택열)
관리자
13-09-16 2067
6 납북자-김정기 (증언자-김남주)
관리자
13-09-16 2286
5 납북자-김경희 (증언자-이정림,김교현)
관리자
13-09-16 2088
4 납북자-김병기 (증언자-김용준)
관리자
13-09-16 3184
3 납북자-김말란 (증언자-배용종)
관리자
13-09-16 2311
2 납북자-김점석 (증언자-박옥련,김지혜)
관리자
13-09-16 2363
1 납북자-이성환 (증언자-김복남,이미일)
관리자
13-09-12 2235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