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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최 준 (증언자-최광석)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4:39  |  조회: 1941


050523A 최준 / 2005. 5. 2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최준), 사진2(증언자:최광석)

피랍자
성명: 최 준
생년월일1910년 4월 14일생(평북 영변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137
피랍일1950년 9월 13일
피랍장소: 서울시 동대문구 제기동 137(자택)
직업: 대광 중고 교사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4남매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코도 코고 서양사람 처럼 생김.

증언자
성명: 최광석(1933년생)
관계: 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피랍자의 장남 최광석이 대광고 2년 시절, 의용군으로 잡혀갈 것을 피해 여기저기 피신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기동 자택으로 다시 들어옴. 피랍자 최준도 인민군의 눈을 피해 매일 밤늦게나 집에 들어오던 시절 9월 13일. 동회장 백운현의 밀고로 박상길이란 사람이 자택으로 찾아와 동대문구 정치 보위부로 피랍자 최준과 장남 최광석을 연행. 월남한 기독교 장로라는 이유로 피랍자를 심하게 고문, 폭행함. 이어 장남 최광석을 취조하며 당시 재학 중이던 대광고의 반공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밀고하면 아버지를 풀어줄 것이라 유인하며 9월 17일 석방시킴. 피랍자는 그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명예회복,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동사무소 회장인데 백운현이라는 그분이 밀고해서 잡혀간 거였어요. 그리고 나하고 우리 아버지를 잡아간 사람은 박상길이라는 사람인데, 마포 형무소에서 출옥한 사람이에요. 6.25 나고 6월 28일 서울을 뺏겼을 때 서대문형무소하고 마포 형무소에서 나온 사람이 악질로 사람 많이 죽이고 때리고 했어요. 그 놈이 날 끌고 간 곳은 조그만 취조실인데 때리는 것도 있고 물 바께스랑 고문 도구들이 있었요. 저는13살이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 어머니 따라서 월남 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아버지 죄 명이 월남한 기독교인 이라는 거였어요. 기독교 장로로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김일성장군을 욕했느냐는 건데.”

“저한테 큰 밥그릇이 있어요. 아버지 만나면 그 밥 한 그릇을 드리고 싶은 거 그거 하나 밖엔 없어요”

직업 및 활동

< 1919년 평북 연희전문대 학생 때 독립 운동을 하다가 투옥돼 복역. 출옥 후 주기철 목사와 여러 해 종료 활동을 하다가 순덕 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해방 후 인민군의 압박이 심해 월남, 수원 상일 중학교 교감으로 재직. 이 때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대동 청년단부단장을 겸함. 납북 직전에는 대광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동대문구 계몽 단장 및 각 학교 웅변부장을 맡아 함>

Q : 납북되기 전의 활동은?
A : 아버지는 1919년 기미년 독립만세 때 평안북도 영변에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었는데 독립선언서를 이북에 가져가서 선생님들과 같이 독립만세를 불렀죠. 투옥돼서 1년 형을 받아서 8개월 27일을 복역하시고 나오셨어요. 나오시고 그 후에 마산 문창 교회 주기철 목사님과 여러 해 동안 같이 종교 활동하시다가 마산에 있던 학교가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인 관계로 문을 닫아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모교인 순덕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다가 해방을 맞았어요. 해방 직후 공산당의 시달림을 받으시고 심지어 인민재판까지 받았습니다. 백학식 목사님과 같이 월남해서 수원 상일 중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이셨어요. 수원 상일중학교에 있으시면서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대동청년단 부단장을 했어요. 수원사람들이 옛날에 많이 깍쟁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외부사람이 부단장을 했으면 상당히 실력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그 후에 납북되기 직전에는 신설동에 있는 대광 고등학교에 오셨는데, 그때 당시 서울시의 동대문구 홍보단장을 맡았어요. 국민 계몽 운동, 남조선의 단독정부가 왜 필요하다는 등의 서울시 동대문구 계몽단장으로 활동하고 학교의 각 중고등학교 변론부장, 웅변부장으로 있어서 이런 이유 때문에 납치되는데 큰 역할을 했어요. 인민군이 우리 아버지가 뭘 했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동회장이 동사무소 회장인데 백운현이라는 그분이 밀고해서 잡혀간 거였어요. 그 동회장을 우리 어머님이 잡았습니다. 그분이 신당동 중앙시장에서 도장을 파고 있어요. 치안대에 넘겼는데 그 후 1.4후퇴 때 돌아와보니까 그 사람 사위가 경위가 돼서 나와서는 월북했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그 사람을 잡았는데 그 사람을 살려줘서 보내주고 지금까지도 원수 갚는 게 제 일념입니다. 공산당 죽이는 게 소원이에요.

Q : 그럼, 아버님이 납북되시기 전에 활동?
A : 대동청년단 부단장. 부회장을 했다는 거죠.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인데 남로당 같은 데서 대모가 많았어요. 그게 있을 때는 사복 경찰이 대문에서 지켜주고 그랬어요. 나가서 무슨 활동을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납북 경위

<장남 최광석이 대광고 2년 시절, 의용군으로 잡혀갈 것을 피해 여기저기 피신했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기동 자택으로 다시 들어옴. 피랍자 최준도 인민군의 눈을 피해 매일 밤늦게나 집에 들어오던 시절 9월 13일 박상길이 자택으로 찾아와 동대문구 정치 보위부로 최준과 장남 최광석을 연행. 월남한 기독교 장로라는 이유로 납북자를 심하게 고문, 폭행함. 이어 아들 최광석을 취조하며 당시 재학 중이던 대광고의 반공활동을 하는 학생들을 밀고하면 아버지를 풀어줄 것이라 유인하며 9월 17일 석방시킴. 피랍자는 그 이후 소식을 들을 수 없고, 수복 후 시체를 찾으러 갔으나 찾을 수 없었음>

Q: 어떻게 납북 당하셨는지?
A : 그때 당시 저는 대광 고등학교에 5학년 그러니까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어요. 의용군에 해당되기 때문에 친척집에 숨어있었어요. 피해있다가 불편해서 다시 동대문구 제기동 고려대학교 앞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때 아버님은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늘 아침에 나갔다 저녁에 돌아오시는데 그 날은 잡으려는 정보를 알았나 봐요. 학교 선생님 댁에도 가고 해서 최선생 잡으려고 다닌다 하니까 날 피신시켜줄라고 낮에 집으로 돌아와서 “야, 광석아, 빨리 도망가야 된다” 했는데 금방 사복한 사람이 따라 들어왔어요. 그래서 저하고 아버지하고 동대문구 제기동 우리 집에서 붙잡혀 갔어요. 그때는 묶여 가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묶지도 않았어요. 그때는 데려간 곳이 지금의 기독교 방송 뒤로 들어가는데, 저는 간판을 보지 못했는데. 동대문구 정치 보위부라고 써져 있었대요. 9월 13일 붙잡혀갔는데 저희 아버지가 들어가면서, 동대문구 정치 보위부, 언덕길인데 지금은 기독교 100주년 기념관 위에서 보면 제가 잡혀가는 길이 다 뻔히 보여요. 길옆에는 코스모스가 좋더라구요. 가면서 그때 아버지가 공산당을 잘 모르시고 여기가 정치 보위부다 하면서 우리는 관계된 곳이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수원에서 대동청년단에 관계는 했지만 지금은 대광 학교 교사이기만 하니까 그랬는데 거기에 들어가니까 선교사들이 쓰던 건물이었어요. 양옥집 두 채가 있는데 그 아래채로 붙잡혀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긴 방에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가 앉아있어요. 거기는 밤에 누워도 하나 가뜩. 앉아도 하나 가뜩. 국군 장교인 듯 하는 사람이 다리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드러누워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 제정신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다 죽은 심정이었죠. 그 사람들이 다 납북자들이에요. 서로 말도 안하고. 아버지랑 기대어 앉아있었는데. 해가 질 무렵에 아버지를 먼저 불러냈어요. 새벽에 돌아오셨는데, 그때는 아버지가 무명으로 양복을 해 입었어요. 그런데 옷이 다 찢어진 것도 아니고 다 닳아서 헤지고, 고문을 당하신거에요. 코도 새파래지고, 그러고 나오시면서 아버지가 “나는 살아나오기 틀렸다” 하시면서 가만히 얘기하시더라구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너 수원에 있었던 얘기는 절대 하지 말아라.” 그래요. 저도 그게 걸리더라구요. 그때 제 나이가 17세입니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누가 때렸냐 했나 적개심도 생겼지만 무서운 맘이 더 많더라구요. 그래서 화장실에 가는데 우리 아버지를 업고 갔어요. 양변기가 아니라서 그때 화장실에 앉지를 못하고. 무릎도 다 고문 당하시고. 말소리가 아까 가실 때하고 영 달라져서 간 말소리만 들려요. 그 다음에 제가 불려갔어요. 나하고 우리 아버지를 잡아간 사람은 박상길이라는 사람인데, 마포 형무소에서 출옥한 사람이에요. 6.25 나고 6월 28일 서울을 뺏겼을 때 서대문형무소하고 마포 형무소에서 나온 사람이 악질로 사람 많이 죽이고 때리고 했어요. 그 놈이 날 끌고 가서 조그만 취조실인데 때리는 것도 있고 물바께스랑 고문도구들이 있어요. 저는 미리 떨었죠. 저는 뭐라고 말했냐면은. 13살 때 아무것도 모르고 아버지 어머니 따라서 월남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아버지 죄명이 월남한 기독교인이라는거였어요. 기독교 장로로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얼마나 많이 김일성장군을 욕했느냐는 건데 우리아버지는 “난 그런 적 없다. 성경말씀대로 얘기한 것 밖엔 없다.” 왜 그럼 월남했느냐 하고 물어보고 얘기 도중에 하나님을 봤는냐는 얘길 하고. 그래서 아버님이 “너는 하나님이 없지만 나는 하나님이 있다” 그래서 더 맞았어요. 아버지가 제가 취조 받으러 나가기 전에 지침을 하나 주셨어요. “너는 김일성 만세 하면 해라. 그렇지만 하나님이 없다 이 얘기에는 수긍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나를 살리려고 하나님을 끝까지 부인하지 말라는 얘기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님은 순교자로 인정하고 지금도 가장 존경하는 분이세요. 그런데 저는 취조실로 끌려가서 한대도 맞지 않았어요. 저를 때릴 일도 없었지만 당시 대광 고등학교라는 곳은 이북에서 월남한 자제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목사님의 추천서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어요. 학교 설립취지가 월남한 사람이 많아서 영락교 계통으로 미국 북장로에서 원조해서 지은 학교이기 때문에 이사장님이 함경진 목사님이시고 임시정부 내무부 차장으로 있던 목사님이 교감하셨어요. 우리 대광은 혼자 와서 학교 다닌 사람이 많았거든요. 민주 청년학생연맹은 빨갱이예요. 그리고 전국학생연맹은 우익단체고. 그 외에 반공학생연맹이라는 게 있는데 대광의 거의 대부분이 반공학생 연맹에 가입해 있었어요. 여기에서도 공산당. 남로당 대모도 심하고 굉장히 많이 우익하고 대치했었는데, 돌팔매질만 했는데 대광애들은 다쳐도 습격해서 정면으로 육탄전을 한 게 대광이었거든. 그런데다 좌익 활동하다 형무소 들어간 사람들은 대광을 잡아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4월 달에 들어가서 6월 달에 사변이 났으니까 당시 저학년이고 새로 편입되어 있고 해서 반공학생연맹에 가입해 있지 않았어요. 이 놈이 잘 해주더니 9월 13일에 들어가서 9월 17일 날 저만 석방됐는데 석방시킨 이유는 “너를 석방시킬 테니, 나가서 대광 학생들이 동대문시장에 생활하고 있다. 동대문시장이 제일 피신하기 좋죠. 사람이 많고, 그래서 거기 있으니까 동대문 시장을 한 바퀴씩 돌고 누가 어디 있다는 걸 자기한테 얘기해주면 잘 보고해주면 아버지를 풀어주겠다 한 거죠. 믿지 않았죠. 그 후에 붙잡혀 있을 때 9월 13일에 들어가서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미군 제트기가 날아오면 방에 책상 하나에 의자 하나에 정식복장을 입은 인민군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그 놈이 얼마나 미운지 노인에게 말 막하고 그래서 밉더라구요. 그런데 인민군이 쌕쌕이가 날라오면 사람들이 사색이 되는거에요. 아버지는 정신 없지만 저는 아주 기분이 좋죠. 이게 만약에 폭격이 돼서 집이 무너지면 내가 솟아날 기분이 드나 싶어요. 그런 순간에 기도를 해요. “하나님 아버지, 여기에 폭탄 하나만 내려주세요” 했는데 저놈도 죽고 나도 죽게 그런데 하나님은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시더라구요. 박상길은 지하실로 데리고 가서 지하실에서 밥을 하는데 인가 봐요. 밥을 주는데 밀 삶은걸 주는데 며칠을 굶었는데도 먹을 수가 없어요. 하나씩 씹어야 하니까 하는 둥 마는 둥 해요. 그러고는 아버지한테 인사하고 가라고 해요. 지금 같으면 안 나온다고 해야잖아요. 거동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데, 여기 두고 나가면 아버지를 그냥 돌아가시게 하는 건데, 끌려가도 같이 가고 이런 게 딱 맞는 행실인데 아버지까지 배반했죠.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내가 나간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굉장히 기뻐하시는 거에요. 너 나가서 할머니 모시고 어머니 모시고 동생들 잘 보살피고 잘 지내라는 거에요. 눈물 밖엔 안 나와요. 박상길이 끌어내요. (눈물) 옆에 경비대 인민군이 있는데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요. 말할 수가 없어요. 미리 약속 했는데 생각만 해도 이것은 할 수가 없어요.우리 아버지한테 최후 작별인사를 하면서 원수 갚겠다. 원수 갚아드린다는 건데, 그건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서 인민군이 옆에 있어서. 제가 막 우니까 아버지가 창문을 잡고 겨우 일어서셔서 ‘사나이가 울긴 왜 우냐, 얼른 나가서 할머니하고 동생들 잘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하더라구요.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총 가지고 군사훈련도 받았었는데, 제 생각에는 나가서 낙동강 전선이든 국군이 돼서 어디든 총 가지고 이놈들을 쏴 죽이겠다 생각하고 그래서 최후 작별을 거수 경례로 하고 아버지 보면서 아버지 나하고 말이 통하죠? 원수 갚아 드릴께요. 그러고서는 돌아서 나왔습니다. 나왔는데 의용군 붙잡혀 가는 건 겁이 없어요. 그 전에 들어가기 전에는 의용군에 붙잡혀 갈까 봐 걱정했는데 그러면 국군에 빨리 갈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는 자전거포가 있었어요. 그때 9월 17일에 나와서 물을 많이 먹고 골목길로 안가고 싸이렌 소리도 들리고 비행기도 다니고 하는데 큰 길로 막 걸어서 제기동까지 지나서 집 근처 안암동까지 오니까 비행기가 무서워요. 살고 싶던지. 또 어머니를 만나고 싶더라고요. 비행기를 피할 수는 없지만 비행기가 꼭 나한테 오는 것 같아서 이리저리 숨고 해서 집으로 들어갔어요. 어머니가 나오시면서 아버지 어떻게 됐냐 그러세요. 뭐 말할게 없어서 “아버지 죽었소.” 그리고 집에 들어가 앉았어요. 그때부터는 인민군이 자꾸 퇴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는 낮에는 집에 와 있고 밤엔 옆에 빈집에서 자고 9.28수복이지만 9월 25일부터는 사대부고가 송동역, 기차역 근처에 있는 경동시장 있는데 그 근처에 사대부고가 있는데 거기에 인민군이 많았었는데, 거기에 들어가서 민간인들이 쌀이고 뭐고 다 가지고 나오고. 자제력을 잃은 거죠. 고려대학에도 많이 있었어요.

Q : 9월 13일엔 아버님과 같이 납치해 가셨나요?
A : 그 사람이 잡아가고 그 사람이 직접 취조를 했어요. 다른 정치 보위부는 보지 못하고 거기 들어가서는 인민군 정복 입은 몇 사람 보고 취조는 박상길, 제가 본거는 저녁때 지프차에 네모난 츄레라를 달고 다녔거든. 츄레라가 높지도 않아요. 그런데 사람이 낮으면 보여요. 그런데 사람을 눕혀서 실었나봐요. 보이지도 않아요. 취재 갔다 봤는데. 묶인 채로 꾸겨넣더라고요. 그게 어디로 데려가는지는 모르고 그게 아마 납북자가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9.28 수복돼서 저하고 어머니하고 안암동 뒷산으로 미아리로. 시체가 막 많았어요. 시체가 막 썩어있고 옷도 시꺼멓게 썩어있고. 거기를 우리 어머니하고 삽 하나 들고 (아버지)찾으면 묻어 드릴려고 찾아 다녔습니다. 시체를 이렇게 보니까 무섭더라구요. 나는 잘 보지 못하고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 찾는다고 찾았는데 찾는다 찾았지만 못 찾았어요.

Q : 정치 보위부 몇 사람이 왔나요?
A : 하나입니다. 가자고 하는데 죄도 없고 하니 따라갔죠. 묶어가지도 않았어요. 내가 아주 똑똑하거나 우리 아버지도 고지식하지 않았으면 따라가지 않았겠죠. 똑똑했으면 벌써 피난갔죠. 대광 학교는 이북학생이니까 이승만 방송만 전적으로 믿거든요.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 가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가서 먹고.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계속 패주하는 탱크를 몇 대 부수고 하는 이런 방송이 나와서 그때는 공부는 안하고 그 라디오 스피커만 듣고 있는 거에요. 꽝꽝 종암동쪽으로 소리가 나도, 피난민이 와도 믿지 않는 거에요. 그래서 칠판에다가 “내일 아침 몇 시에 신의주행 급행열차가 떠난다.” 그런 게 써져 있는 거에요. 얼마나 고향에 가고 싶었겠어요. 그렇게만 믿고 있다가 다 피난 안가고 끝까지 그렇게 있었던 거에요. 나중에 너무 고요하고 개 짖는 소리만 나요. 그게 무서워서 피난간 게 종로5가까지 밖엔 못 갔어요. 저녁에는 그때까지는 국군이 나가면 막 환영하고 그러더니 6월 28일에 인민군이 들어왔어요. 밤에 비가 왔어요. 아침에 나가는데 막 환영하고 그래요. 나가보니까 인민군 탱크가 오고 탱크 앞에 오토바이 옆에 배 같은 걸 달았는데 거기에 기관총 달고. 처음 당해 보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나와서 많이 환영하더라고요.

Q : 그 이후에 일은?
A : 혹시 다시 잡으러 오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17일에 나와서 9.28까지는 좀 기간이 남았잖아요. 그때 겨우 머리를 짜내는 게 거기에서 맞아서 옆구리가 아프다 하고는 그때는 식량사정이 좋지 못해서 3개월 동안 굶고 하니까 뼈하고 피부만 남은 상태에서 어머니하고 머리를 짜 내는 게 맞아서 아파서 움직이지 못해 보고를 못한다. 그러고 누워있었어요. 대광 학교 얼굴들을 알아서 보고를 한들 우리 아버지를 보내줄지는 만무하거든요. 그래서 밤엔 누가 와서 죽일까 봐 빈집에 가서 자고.

납치이유

<월남한 기독교 장로라는 이유로 심한 학대와 고문을 함. 이 외에도 최준은 교직에 몸담으면서 수원에서 다양한 반공 청년 활동을 했으며 탁월한 웅변가로도 정평이 나 있었음>

납치 후 소식

<없었음>

Q : 그 이후 아버님의 소식은?
A :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고 동대문구 정치 보위부, 기독교 기념관 위쪽이고 저쪽은 경신여고이고. 거기에서 9월 18일 날까지 살아계셨다는 것만 보고요. 제가 나간 이후에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고요.

Q : 후에 정치 보위부에 다시 가보셨나요?
A : 바로 가봤죠. 수복되자마자 가봤어요. 지하실도 보고 했는데 아무 흔적도 없고. 거기에서 헤어졌기 때문에 거기를 처음에 가봤어요. 아버지의 시체도 찾지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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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가장이 납북되어 장남은 군대에 가고, 납부자의 배우자가 빈대떡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감. 부산의 한 목사님의 도움으로 작은 판자집을 얻어 근근히 생활.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자녀들이 교육을 받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음>

Q : 납치 이후의 생활?
A : 비참합니다. 아버지가 납치돼서 전 군대를 나갔고. 저희 어머니가 다 동생들을 키웠어요. 그래서 대구로 피난 가고. 대구 있을 때 제가 제대를 했습니다. 그때 저희 어머님은 떡장사를 나가고. 또 내 동생은 버스 터미널에 나가서 뭘 파는 거예요. 과자도 팔고, 껌도 팔고. 그렇게 생각을 하던 중에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게 아니라 한번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감리교선교회에 싸울 목사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어머니가 대구에 있으면서 거기를 찾아가셨어요. 찾아가서 잘 모르겠다고 했는데 30년 전입니다. 그리고 싸울 목사님이 구제물자의 돈을 주는 겁니다. 그래서 부산으로 이사 와서 하꼬방 이라고 얇은 판자로 무허가 건물을 짓는 거예요. 살면서 싸울 목사님 도움이 50%정도 되요. 목사님이 내 동생 공부도 시켜주고. 그러고 제가 제대해서 제가 좀 벌고, 우리 어머니는 화로 갔다 놓고 빈대떡 장사로 해서 우리는 평안도 사람이라 빈대떡을 잘 해서 그렇게 생활하고. 저는 아버지가 계신 것으로 고등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입니다. 저희 동생들도 고졸이 마지막입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계속 공부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김일성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정부의 노력

< 납북 인사라는 명목으로 도움을 받은 적은 전혀 없었음. 다만 1917년 일본 보안법 위반 즉 독립 운동한 것을 근거로 독립 유공자 신청을 했는데 당시 최준이 아닌 최장부란 가명으로 활동해 증명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음. 최근 자료를 구비해 다시 제출한 상태임>

Q : 도움을 청하셨나요?
A : 정부고 개인이고 친척이고 일절 청한 적도 없지만 받아본 적도 없어요. 아버지가 안 계신 걸로 해서 생활, 생존의 위협을 많이 받았죠. 저희 동생 하나가 아파서 죽었습니다. 제대로 병원도 못 가고 약도 못쓰고 죽은 거죠. 그 후 저는 군대를 나갔죠. 군대에서는 원수를 갚는 겁니다. 훈련 며칠 받고 총 쏘는 법 배워서 전방에 배치됐는데 저는 보병 최전방만 생각했어요. 그때 까지만 해도 학교를 다닌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대재, 고졸, 고재만 불러서 장교로 뽑았어요. 그런데 저는 그거는 생각하지 않고 최전방에서 싸운 거예요.

Q : 아버님 보안법 위반 받은 이후에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게 된 계기?
A : 1917년 보안법 위반 했다는 거는 일본 보안법 위반 했다는 겁니다. 연희 전문대학 학생 신분으로 3.1만세 운동의 주모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이승만 때는 장 면 때 보상법이 없었어요. 박정희가 들어서면서 있었어요. 그런데 그 때 당시는 박정희가 싫어했습니다. 남로당의 빨갱이라고 그랬거든요. 이북에서 와서 빨갱이가 정권을 잡았다니 .우리 아버지를 납북됐다고 안하고, 1945년 6월 달에 돌아가신 것으로 했어요. 신고를 가호적이라는 것은 말만 하면 되니까. 동대문 구청에 대서하는 사람이 쌀가마를 놓고 대서를 해주는데 가호적도 끝까지 안 하려고 했죠. 여동생이 시외전화국에 취직을 하게 되었어요. 가호적 대서하는 분이 실종자. 행불자는 호주상속이 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돌아가신 걸로 하려면은 납북됐다 하면 돌아가시는 것으로 하려면 납북됐다 그러면은 그 공산당이 해칠까 봐. 우리는 박정희를 공산당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공산당을 미워하고 박정희가 독립유공자 보상을 해준다고 하니까 국가 유공자 보상을 해준다고 해서. 우리 어머니가 한다고 했는데 제가 하지 말라고 했어요. 박정희가 쿠데타 일으켜서 잘 보이려고 그 짓 하는 건데 하지 말라고 했어요. 그때는 사람이 보증만 하면 되는 거라 그때는 잘 아는 분이 정일용박사. 정대철 아버지시죠. 장 면 때 외무부 장관까지 하셨던 분이세요. 정일용 박사 부인이 우리 나라 초대 여성 법관. 또 그분이 고향 사람으로서 우리 어머니 친구분이셨어요. 그런 분들 보고 우리 아버지 보증 서준다면 서 준다는 거예요. 민주당 박순천 여사, 노산 이윤산 이 분들이 마산에서 우리 아버지랑 같이 교편을 잡았다는 분이란 말이에요. 유명인사라 금방 됐을 건데 전 그때 절대 하지 말라고 했어요. 요새는 안 했다는데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어요. 1919년 보안법은 3.1운동 밖엔 없다 그러니 후손이 할 일이 있으니 찾아봐라 하고 연락이 왔어요. 보훈처에는 2001년 7월까지는 전산화를 했어요. 찾기는 찾았는데 이름이 다르잖아요. 최장부라는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했는데 최준의 아들이지 최장부의 아들로 증명할 방도가 없었어요. 이걸 증명할 방법이 없어요. 지금은 제 친구 고향 친구들 밖엔 없어요. 고향친구도 다는 아니죠. 친구 아버지의 이름을 알아야 제 친구들도 제 아버지의 이름을 알죠. 저 사람이 최장부 아들이에요 라고 해줄 사람이 거의 없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의 인후 보증은 안 된다는 거에요. 자료를 찾다 찾다 흥사단에서 완전한 자료를 찾아서 3월 21일에 보훈처에 접수를 했는데 그때 눈물이 그쳤어요. 그리고 제가 예수 믿기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믿어서 70년이 넘었는데 3월 21일날 보훈처에 접수를 시키고 사무관이 정말 서류가 완벽하네요. 그 말 들을 때 기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22일만 아침부터 새벽기도를 나갔어요. 새벽기도란 저한테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새벽기도를 나가는 게 지금까지 만 2달 동안 한번도 안 빠지고 계속 나가고 있어요.

Q : 아버님 납치로 나와있는데 정부의 도움은?
A : 그런 건 전혀 없어요. 일절 없다고 들었어요.

연좌제 피해

<예비군 창설 때 갔다가 정보과에서 부친을 월북자로 매도한 적이 있었음. 그 외에는 큰 피해는 없었음>

A : 저는 당할 기회가 없었어요. 이때까지 좋은 자리에 가진 않고 개인 사업장이나 그런곳에 일해서 당할 일이 없었고 군대에서 제대하고 예비군이죠. 예비군도 창설 될 때인데, 제일 먼저 갔는데, 반공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정보과에 갔는데 상사라는 사람이 어쩌고 저쩌고 물어보더라고요. 사상에 대해 물어보더라고요. 난 제대했고 그 사람은 현역이고. 입대 전에 뭘 했는지 그런 얘기를 꼬치꼬치 힘들게 물어보는 거에요. 최전방에서 싸우지 않았는냐 하면서 우리 아버지가 공산당에 끌려갔기 때문이야 라고 하니까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유도 신문하면서 자진 월북자로, 원공분자로 만들려 하더라고요. 이게 피해라 하면 피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엔 일절 느끼진 못했습니다.

호적정리

<가호적 신고 시 사망으로 신고함>

정부에게 바라는 말

<납북자 명예회복,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A : 이젠 지쳤어요. 물론 6.25 납북자에 대한 응당한 주장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김정일은 납북자가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자진 월북. 실종자 그렇게 표현한단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북에 말 한마디 못하고 우리 가족협의회만 있지. 좀 더 당당히 있으면 있다. 사실대로 주장해 주길 바라고, 우리 아버지가 살아계시면 105살인데 생존에 계실 거라는 건 바라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고 싶고, 남에 아버지 산소가 없잖아요. 우리 아버지 유해라도 찾으면 국립 유공자 묘에 안장할 수 있거든요. 그걸 바라거든요. 유해를 찾기를 바라는 거고. 사회에 뭘 바라겠어요? 공산당 활동한 사람들이 왈가왈부한 세상에. 자유통일 바라지만 많이 생각이 좌절됐어요. 그렇게 좋으면 공산당 세상이 돼봐라. 그래야 너희들이 정신차릴 거 아니냐 싶어요. 이제는 힘도 없구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버지는 저 때문에 그런거에요. 수원에 사셨으면 한강 이남이라 피난도 가실 수 있었잖아요. 제가 중학교 다닐 때도 아주 공부를 못했어요. 그래서 아버지 있는 학교에만 제가 입학 할 수 있잖아요.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 대광 학교에 왔어요. 또 내가 의용군피해서 친척집에 가 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바람에 날 또 피신시키시려고 붙잡히신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한 장본인 불효자입니다. 또 붙여 말하자면 이건 가정사인데 저희가 1946년도에 월남해서 수원 삼일 중학교에서 자리를 잡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있으면 사택도 주고 해서. 그때는 이북에서 월남한 분이 많았어요. 그분들이 수원까지 와서 밥 하루 정도 먹고 갑니다. 아주 친한 친척들이 장인 장모까지 몇 개월 있다가 서울로 자리 잡아 갔는데, 거기에 제가 의용군 피신해 가있었어요. 그분이 외삼촌 되는데 그 외삼촌은 기술자입니다. 그 당시엔 인민군 자동차를 고쳐주었습니다. 공덕동에 살았는데, 인민군 자동차를 고쳐주어서 쌀하고 기름이 많아요. 기름이 석유처럼 있는 건데 쌀도 가마니로 가져와. 먹을게 많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아침 새벽에 출발에서 종로 3가에 남양역 사장 아버지 집에 들립니다. 라디오를 듣고 상황을 알아서 공덕동까지 걸어왔어요. 그럼 배가 많이 고프실 거 아니에요. 우리 외삼촌 댁에서는 솥에 밥을 많이 있어요. 그런데 밥을 안 줘요. 우리 아버지한테 안 줘요. 나는 “그렇게 밥이 많은데 한 그릇 주지 왜 안주나.” 그게 섭섭했던 거예요. 아버지 가시고 그 이튿날 ‘에이, 집에 간다’ 하고 집에 가려고 길을 나서요. 그때 길을 나서면 죽는 거예요. 의용군한테 붙잡히는건데 붙잡는 사람도 없고. 간다니 좀 좋았겠습니까? 의용군 붙잡히지 않으려고 이 골목 저 골목 들어가구요. 그리고 집에 온 거예요. (눈물)그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버님 제삿날도 없어요. 지금은 밥을 조금씩 잡수시죠. 저한테 큰 밥그릇이 있어요. 아버지 만나면 그 밥 한 그릇을 드리고 싶은 거 그거 하나 밖엔 없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천국에서 좋은 음식 드시고 있겠죠. 그런데 제가 드리고 싶은 건 그 밥그릇 하나 밖엔 없어요. 그거 드리고 싶어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그래서 밥그릇은… 그런 밥그릇 이젠 구하기도 힘들어요. 아버지 드시기 힘드니까 제가 동생들하고 나눠 먹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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