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최시철 (증언자-전재임,최상동)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5:40  |  조회: 2329


050524A 최시철 / 2005. 5. 24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최시철), 사진2(증언자:최상동 전재임)

피랍자
성명: 최시철
생년월일: 1923년 음력 6월 9일(음) 강릉 박월리 출생
당시 주소: 강릉군 성덕면 박월리 199
피랍일: 1950년 8월 15일
피랍장소: 강릉군 성덕면 박월리 199(자택)
직업: 농업
당시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외모 및 성격 : 키가 작음. 밝은 성격

증언자
성명: 1.최상동(1944년생) 2.전재임(1922년생)
관계: 1.아들 2.배우자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피랍자는 지방 좌익을 피해 집 안 다락에 숨어 지내다가 음력 7월 초하루 지방 좌익의 몇 차례 방문과 수색 끝에 발각되어 잡혀감, 병력 확보를 위해 의용군으로 강제로 투입 시킴. 이후 동네 사람들로부터의 곱지 않은 시선으로 어려움을 당한 것은 물론 같은 전쟁 피해자임에도 정부에서 외면 당함. 피랍자의 아들은 해외취업 불가, 공무원 시험 합격이 안되는 등 연좌제 피해도 적지 않았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정부의 책임 자각 및 피랍자 생사 확인










“동네에서도 굉장히 보이지 않은 따돌림, 마치 내가 북에서 이남으로 와서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어렸을 땐 그랬어요. 지금은 담담하지만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없는데 끌려가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고 그랬는데도 다른 애들은 "우리 아버지는 군인 갔는데 너희 아버진 인민군에 갔잖아. 우리 아버지하고 적대 관계 아니냐?” 하고 놀리고. 그런 삶을 살아온 거죠.”

납북 경위

<음력 7월 초하루 지방 좌익을 피해 집 안 다락에 숨어 지내다가 몇 차례 방문과 수색 끝에 발각되어 잡혀감, 당시 인근 지역에서는 인민군에 협조하지 않은 청년을 잔인하게 죽이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일들이 있었음>

Q : 납북되던 상황?
A(전재임) : 붙잡아가려고 그러지. (남편이) ‘어린 새끼들. 부모. 동생들이 많은데 내가 떠나길 어디를 가느냐’ 하면 (납치자는) ‘나라가 있고 국가가 서야 부모 동기가 서고 자식이 있지, 나라 없는 자식이 어디 있겠냐?’ 그렇게 말하니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공산주의에 고통 받은 건 말도 못해요. 내 친정 동생 3형제가 군대로 가서 잡혀가고, 그 집에는 사무실을 차려놓고 법석거리고 우리 부친이 그게 꼴 보기 싫어서 속을 태우다 세상을 떠나고. 또 나를 붙잡아다가 대가리를 흔들어 놓는다는 소리를 맨날 하고. 그렇게 살았어. 동네에서 그 지랄을 하던 놈들이야. 나라가 서야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다며 지랄하던 놈들이 죽기는 먼저 죽더라고. (남편은) 자꾸 사람 뒤지려고 오니까 안 붙잡히려고 그 다락에서 멍석에 파묻혀 있다가 저녁이면 나와서 식사를 하고, 어디를 꼼짝을 못하고 그랬어. 그러다 끝에는 그렇게 잡혀갔지. 안 잡혀 갈수가 없었어.

Q : 완장을 찬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맞나요? 잡혀가던 날짜는?
A(전재임) :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 7월 초 하룻날 갔어. 음력.

Q :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데리고 갔나요?
A(최상동) :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아버지가 숨어 있는 곳이) 아궁이 있는 옆에 소 외양간 위에 다락을 만들고 그 위에 멍석을 둘둘 말아서 얹어 놓았어요. 지금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자꾸 (아버지를) 찾고 집을 뒤지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옆 동네에 낯이 익은 사람이 파란색인지 빨간색인지 광목 완장을 차고 와서는 아버님 함자를 부르면서 ‘나와라. 나와라.’ 해요. 우리 조부님이 없다고 하면 또 다른 청년 집을 뒤지더라고. 인민군 모자도 아닌데 무슨 작업복 모자를 쓴 사람이 와서 뒤졌어요. 방문도 열어보고 부엌에도 가보고 그랬단 말이야. 가면서 안 오면 반역이라고 하든가. 반동이라고 하든가. 처형된다고 하고. 아마도 동네에서 동원이 안되고 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지막으로 잡혀갔어. 얼핏 기억나는데 우리 밑에 집에 논이 있고 그 밑에 밭에 소를 놔두는 데가 있는데 저녁에는 마구간에 두고 낮에는 거기에 매어놓는데, 거기에다가 누군지는 몰라도 청년 하나를 묶어놓고 1미터 이상 되는 대나무 끝을 날카롭게 만든 죽창을 가지고 시범적으로 죽인다 하면서 공포감을 조성하고 그랬었어.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진짜 소를 때려 잡아 먹기도 했어요. 아버지는 계속 다락에 숨어계시고, 어머니가 밥도 위로 올려드리고 그랬어요. 언제 올 지 모르니까. 저녁이면 내려오셨는데 그래도 밤새 바깥에 경계가 되고. 그런데 결국 밤인가 새벽인가 끌려가신 거에요. 할아버지, 양 할머니, 어머니는 내다 보시기만 하고 어머니는 어른들이 다 계시니까 어머니가 어떻게 할 수 없었고. 안 가면 죽는다는 생각과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에 갔다가 전쟁 마치고 온다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끌려가는 길을 따라갔는데 ‘내가 어떻게 하든 일주일만 되면 어떻게 빠져 나오든 올 거야’ 이 소리 한마디만 하시고는 못 왔어.

납치이유

<병력 확보를 인함>

Q : 무슨 이유로 데려갔는지 아세요?
A(최상동) : 병역의 의무라고 했어요. 가다가 죽었든지 이북에도 채 못 가고 죽은 것 같아.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여기에서 막 후퇴하면서 원산쯤에 가서 다 전멸했다고 하더라고요

납치 후 소식

<소식 없음>

Q : 소식을 들으셨나요?
A(최상동) : 전혀 듣지를 못했어. 어디로 떠났는지 몰라. 같이 갔다가 돌아온 분의 얘기에 의하면 학교에 일단 집결을 해서 하루 정도 있었대요. 그곳에서 머물면서 부대배치도 했겠죠. 제가 보기에는 짐꾼이나 그런 걸로 끌려가지는 않은 거 같고, 아무래도 전쟁 방패막이로 가지 않았나 생각돼요. 의용군이라는 말 있지. 인민군이 아니라 ‘의용군, 아주 의롭게 전쟁을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이미 적화가 되어 있다. 그러니까 국방의 의무를 해라’하는 식으로 다 설득을 시킨 것 같습니다.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 폭격이 심하고 거주 지역에서 교전이 있어 피난을 두 차례 떠났다가 돌아옴. 이 과정에서 집을 모두 불타 피랍자의 큰어머니도 돌아가심. 가진 농토가 없어 피랍자의 아내가 집안 어른들을 모시며 생선장사 등 행상을 하다가 서울로 와서 30년간 공장 근무를 하며 가정을 꾸려감>

Q : 아버님 납치 당하시고 어떻게 지내셨는지?
A(최상동) : 초등학교 다닐 때는 동네친구들한테 왕따를 많이 당했어요. 왕따를 당한 게 학도병 간 사람들은 후에 사람이고. 그 당시엔 다들 의용군으로 갔는데 후배 아이들한테도 동네 친구들이 농담이라도 ‘넌 통일되면 북으로 갈 사람이잖아.’ 라고 해서 맘이 찢어지게 아팠어요. 뒷집은 삼형제가 아군으로 가서 우리 어머니한테 상처를 많이 주셨습니다. 둘은 죽고 하나는 얼마 있다 죽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한테 우리 아들 셋 다 나라에 충성했는데 농담이라도 당신 남편은 빨갱이라는 거야. 그 사람들은 해마다 연금타면서 갈림길이 다르다 보니까 후에 살아오면서도 그 고통은 오래 가더라고요. 연금타면 자랑스럽게 그러시고.

Q : 납치 이후에 피난은 가셨나요?
A(최상동) : 폭격이 심해서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어요. 7살이었는데 눈이 많이 왔습니다. 우리 큰 할머니는 못 가시고 집을 지키겠다고 계시고 이분은 할아버지의 형수님이셨어요. 할아버지 짐 보따리 위에 제가 타고 우리 어머니는 두 형제를 업으시고 갔어요, 갔다가 돌아와보니까 인근 지역에서 교전이 있었나봐요. 우리 마을이 논가로 다 마을인데 전부가 다 폭격대상이었어요. 산 집은 괜찮았는데 빈집은 다 불타버렸어요. 저희 집은 완전히 불타버렸는데 그 당시 정황은 진짜 참혹했어요. 피난 다니면서도 못 느꼈는데 와서 보니 시체들이 전부 벌건 실탄을 감아서 아군은 바가지를 썼고요. 적군은 괴뢰모를 썼어요. 그런 사람들이 따발총을 메고 실탄을 감고 철통을 매고 할아버지랑 찾는데 아군이 7명인가 인민군이 11명인가 더 많았어요. 열 다섯 여섯 구를. 할아버지 우시는 것을 처음 봤는데, 큰 할머니가 불에 타셨다는 거야. 집이 탔으니까. 할아버지가 우시고.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랑 둘이서 내가 7살이었는데도 제가 다리 부분을 들어서 우리 집 밖의 논 위에 깊이깊이 파서 그곳에서도 묻었어요. 그리고 여러 시신을 치우는 걸 삼촌들 오시고 동네사람들이 거드는데 우리 앞 논 건너편 산 있는데 거기에 겨울이라 팔 수가 없어서 돌 대충 파고 넣고는 돌을 쌓았어. 그런 시신들을 어느 가족들이 어떻게 찾겠어요. 못 찾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아버지도 이렇게 돌아가셨겠지 생각하는 거에요. 찾을 방법이 없겠구나 싶어요.

Q : 아버지 붙잡히고 나서 피난 가신 건가요?
A(최상동) :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정월에 피난 간 거지. 1차 갔다 오니 2차 또 와서 피난 가고. 아버지는 6.25발발하면서 강릉이 제일 먼저 수복이 됐거든요. 그때 바로 징집해 갔어요. 7월 초 하룻날에 데리고 간 거에요. 그때 바로 붙잡혀 가신 거에요. 아주 초기는 아니고.

Q : (피랍자의 아내에게) 가정은 어떻게 꾸려가셨어요?
A(전재임) : 어떻게 말도 못해. 살아나간 얘기는 말로 다 못해. 집 다 태웠지. 수리도 덜 하고 갔다고 그렇고 갔기 때문에 6.25지나고 먹을게 있는가? 입을게 있는가? 이렇게 막막할 노릇이 어디 있어? 친정에 가서 숟가락 얻고, 그래도 친정은 집이 있어 남은 게 있었어. 동생이 이부자리는 없다고 해서 따로 모포로 구해서 시아버지 한 장 드리고 시어머니 한 장 드리고 애들 한 장 덮고. 시아버지 빨래를 해 드리려니, 입을 옷이 있어야지. 피난 나간 옷뿐이니 겨우 옷을 빨래 해서 옷을 다시 입혀 드리고. 이렇게 살고. 살아나간 건 말도 못해.
행상을 했어요. 농토가 없어서 농사를 못 지으시니까, 대관령 넘어서 생선장사를 했어요. 고기를 사서 소금을 치고 꽁치를 저려서 아침이면 차에 싣고 대관령 넘어서 다녔어 또 감자를 가득 이고 오니 산골지리를 내려 오고. 그렇게 먹고 살았어. 감자도 삶아 팔고 행상만 하다가 애들이 커서 서울로 올라왔어. 공장 일을 하루 종일 하면서 30년 세상 모르고 일만 하고 집을 샀어. 그렇게 고생하고 살았어.

호적 정리

<행방 불명으로 처리됨>

정부의 노력

<여러 차례 신고하고 알아봤으나 사망자 명단에도 없고 전혀 소식 없었음.>

Q : 납치 이후에 신고는 하셨나요?
A(최상동) : 어떻게 신고를 하나. 납북자라고 안하고 실향사민이라고 보고를 했지. 방북 한다고 해서. 그때 송파구인가 강동구인가 그때가 몇 년인지는 기억을 못하는데 구청에서 접수를 한다고 해서 새벽부터 구청에서 접수를 받아서 내가 1번으로 접수를 했어. 아버지의 무죄를 찾는다고 한번씩 한 게 있고 그 이후부터 이산가족이 자꾸 이슈화되어서 신고하라고 할 때마다 신고를 했고. 종로 구청에서 신고하라고 해서 신고하고 우리 협의회도 한번 뉴스에 보니까 국군묘지에도 가보고. 혹시 6.25때 전사자 명단에서라도 찾아보려고. 아버지 비슷한 이름이 있지 않을까 해서. 무연고자 다 찾아보고 울기도 많이 울고(목소리 떨림). 아무데도 가도 없고. 남들은 돌아가셨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는데 나는 그렇지도 못하고(흐느낌). 지금 소원이라면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지 생사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만나건 못 만나건 고사하고, 어머니 생전에 제사를 지내려고 해도 언제 돌아가신 줄 알아야 되니. 나간 날로 제사를 지내자니 그때는 분명히 살아 계신 거고. 막막했어요. 그래서 앞으로 어머니 묘는 합장을 안 하고, 혼자 할 거구요. 어머님은 화장을 해달라고 그러면 아버지를 찾아가마 그러시는데. 한 번의 시대의 잘못된 일로 그 평생 시련 속에 사는 것 같아요. 그 자식들까지도 대대로.

연좌제 피해

<해외취업 불가, 공무원 시험 합격 안됨, 청와대 직원 딸과의 혼담이 있었는데 거절 당하고,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함 >

Q : 그 이후에 정부에 도움을 청했는지요?
A(최상동) : 아니요. 연좌제 때문에 고통만 많이 받았지요. 6.25납북된 사람들이 그 당시 의용군 끌려간 사람들이 마침 아군도 학도병 징집도 되고 그러니까 의용군 사람들이 완전히 그쪽 좌익계에 물들어서 간 것처럼 이런 인식을 사회에서 우리가 받았단 말에요. 그런 건 아닌데. 친구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 색출하는데 아주 앞장서서 했고요. 지금 기억나는 게 동네사람들한테 아주 모질게 했어요. 연좌제 때문에 제가 한번은 해외를 희망을 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승인이 안 되더라구요. 또 한번은 공무원 시험을 치뤘어요. 시험성적은 괜찮았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합격이 안되더라구요. 제 생각으로는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밝혀봤자 가르쳐주지 않을 것 같구요. 아무래도 연좌제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 제 피해의식일지 몰라요. 저하고 같이 자랐던 친구가 이북을 갈 일이 있어서 가려는데 신원조회연좌제에 걸렸구요. 그런 영향을 봐서 동네 정신적인 충격. 학도병으로 간 사람들한테는 적군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보이지 않은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Q : 연좌제의 자세한 피해사례?
A(최상동) : 중요감시에 속해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언제 느꼈냐면은 제가 청와대에 식물원에 근무하시던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70년대 초에 제가 경복궁 처음으로 근무할 때인데 근무하다 보니까 청와대 식물원에 있던 직원의 딸하고 혼담얘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쪽이 신원조회를 저 몰래 했더라구요. 굉장히 불쾌했어요. 청와대 직원들은 누구나 다 한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신원 조회 후 혼인얘기가 없었다는 것은, 아무 얘기가 없다는 것은 연좌제의 영향이 아니었느냐는 거죠. 나중에 신원조회 공문을 보면 다 이상 없음으로 나오는데도 나중에 들었는데 요 감시 분류는 일반인이 알 수 없다는 거에요. 그런 걸로 영향이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들었구요. 공무원 시험 쳐서 가능했었는데 신원조회결과에서 그런 영향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하나의 피해 의식 속에서 생활을 했구요. 그 당시 공무원이 9급 공무원 시험이었어요.

Q : 동네에서도 따돌림을 받았는지?
A(최상동) : 동네에서도 굉장히 보이지 않은 따돌림, 마치 내가 북에서 이남으로 와서 사는 사람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어요. 어렸을 땐 그랬어요. 지금은 담담하지만 어렸을 때는 아버지도 없는데 끌려가는 것을 내 눈으로 목격하고 그랬는데도 다른 애들은 "우리 아버지는 군인 갔는데 너희 아버진 인민군에 갔잖아. 우리아버지하고 적대관계 아니냐?” 하고 놀리고.그런 삶을 살아온 거죠. 그 다음은 각 동장이나 경찰서장에게 강릉시에서 공문을 만들어서 아버지를 찾습니다 하고 행적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별로 반응이,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구요. 많이 찾고 싶어서 매스컴이나 국가에서나 사회단체에서 한다는 거 있으면 앞장서서 나가보고 먼저 가서 접수를 해보고 해도 어떤 기대치가 없으니까 살아있을 때만 피해 속에서 사는 것 같은데 돌아가셔도 내 육신을 어떻게 할건가도 아버지 곁에 묻어드리지도 못하고. 자식으로서 굉장히 가슴이 아파요.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면 빨리 통일이 되든, 남북교류가 되든, 생사만을 일단 알면 제사를 빨리 모셔야 겠구요. 소속도 알면 더욱 좋겠고. 그래서 시신이나 유골이 있는 부근만 안다면 망향제라도 드리고 싶어요. 참 안타까운 게 많아요.

정부에게 바라는 점

<정부의 책임 자각 및 피랍자 생사 확인>

A(최상동) : 그저 빨리 정말로 책임 있는 사람들의 회담으로 동족간의 아픔을 대화로 풀어서 생사라도 알고, 만약 살아계신다면 정말로 만나보고 싶구요. 그렇지 않으면 어떤 경로로든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언제 돌아가셨는지 생사라도 알게 됐으면 좋겠어요. 정부에서는 이 부분에 정말 무심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예를 들면 민주화 운동동한 사람들이 다 시대의 아픔인데도 어떤 사람들은 횡재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있고요. 어떤 사람들은 정말 비참하게 대대로 살고 있고요. 누가 득이고 손해고 있겠어요? 똑같은 아픔이란 말이에요. 우리가 자유민주주의가 살고 공산주의를 괴멸시킨다면. 그건 공산주의였으니까. 지금은 서로 남북간이 서로 공존을 인식하고 그 당시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다 같은 대우를 하고 권리를 줘야 하고 주선을 줘야 하고. 그 당시에 정부가 전쟁을 못 막은 건 정부 책임이지 국민 책임이 아니란 말이에요. 정부가 잘못한 거란 말입니다. 정부가 잘못해놓고 국민들의 피해를 몰라라 하는 것은 적반하장이지. 정부가 앞장서서 다 국민의 아픔을 다 알아줘야죠. 군대를 안 가면 국민의 의무를 다 한 게 아니라고 잡아들이잖아요. 제재를 하잖아요. 그럼 정부도 전쟁을 못 막았으면 울분의 책임 지고 보상을 해줘야지 책임을 져야지요. 당연하지요. 60년이 흘러갔는데. 우리도 정말 생사를 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루빨리. 돌아가시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최상동) : 글쎄요. 이 녹취가 이북까지 가서 아버님 귀에까지 들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저 부디 살아계시다면 건강하시구요. 건강하시다면 제가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 뵙겠어요. 그날까지 건강만 하세요(눈물). 만약에 살아계시다면 그쪽에도 가족이 계실 터 다 가족들이 수용을 하구요. 다 혈육이지 않겠습니까? 혹 어디에서든 살아계셔서 아버님의 큰 아들 상동이 목소리를 들으신다면 연락이 서로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생사만이라도 확인이 된다면 전 어떤 방법으로든 찾아 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A(전재임) : 무엇이 하고 싶은 얘기가 있겠노? 어디에서 살아 있으면 몸 건강히 살아있는지 소식이라도 알고 죽었으면. 이렇게 저렇게 고생해서 갖은 고생 다 하고. 새끼들 보고 이만치 팔십 평생을 살았는데 당신은 어디 가서 이런 허망한 세월을 보냈는지 어디 가서 살아 있는지 살아있다는 소식이라도 알고 있었으면. 자식들이라도 애비라고 찾아보지를 못하고 할말이 무슨 할말이 있소. 더 할말이 없소. 어디 가서 살아있음 소식이라도 알려주지. 당신과 내가 만나. 당신은 스물 여섯이고 난 스물일곱이고. 한 오 년 살았나 헤어지니 할말도 없고. 허망한 세월은 다 흘려 보내고. 그래도 나는 자식들 안아보고 살았는데 어디 살아있든 어쨌거나 얼른 소식이라도 알려줬으면 좋겠소.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0 납북자-신치호 (증언자-조금자,신경순)
관리자
13-09-16 2501
29 납북자-유계식 (증언자-유종근)
관리자
13-09-16 2172
28 납북자-박성수 (증언자-박제완)
관리자
13-09-16 2138
27 납북자-김경도 (증언자-김재관)
관리자
13-09-16 2119
26 납북자-이재관 (증언자-이길용)
관리자
13-09-16 2161
25 납북자-유홍목 (증언자-유영숙)
관리자
13-09-16 1855
24 납북자-유한목 (증언자-유영숙)
관리자
13-09-16 2145
23 납북자-김재봉 (증언자-김항태)
관리자
13-09-16 2579
22 납북자-안호철 (증언자-김직자,안청자)
관리자
13-09-16 2449
21 납북자-박점석 (증언자-박정선)
관리자
13-09-16 2031
20 납북자-홍남석 (증언자-홍능자)
관리자
13-09-16 2306
19 납북자-김현일 (증언자-김영희)
관리자
13-09-16 1759
18 납북자-김우순 (증언자-김형목)
관리자
13-09-16 2382
17 납북자-이종각 (증언자-이진수)
관리자
13-09-16 1981
16 납북자-윤기섭 (증언자-윤경자)
관리자
13-09-16 2682
15 납북자-박기성 (증언자-박금석)
관리자
13-09-16 2130
14 납북자-이봉우 (증언자-유정옥,이소우,이상일)
관리자
13-09-16 2508
13 납북자-최시철 (증언자-전재임,최상동)
관리자
13-09-16 2328
12 납북자-최 준 (증언자-최광석)
관리자
13-09-16 1923
11 납북자-최용준 (증언자-최홍재)
관리자
13-09-16 3151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