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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병호(증언자-김인환)
이름: 관리자
2021-09-16 15:07:40  |  조회: 343
김 병 호 (金秉浩)
생년월일: 1908년 2월 8일
출생지: 을지로 6가
당시 주소: 서울 성동구 황학동
피랍일: 1950년 7월 1일
피랍장소: 신당동
직업: 우마차 조합 이사장/동장, 민보단장 등
직계/부양가족: 모, 배우자, 자녀 6남 2녀
외모/성격: 운동을 즐김

증언자
성명: 김인환(1932년생)
관계: 자녀
증언성격: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친구분들과 함께 마소 우마차 조합을 만들어 이사장으로 활동했음.
• 해방 후에는 황학동의 동 회장, 대동청년단·민보단·향보단 단장으로 적극 활동하였고 보도연맹원들을
교도 차 데리고 있었음.
• 피난을 가던 도중에 광장교가 끊겨 못가고 다시 돌아와 작은댁에 은신한 납북자를 지방좌익들이 반동이
라고 바로 내무서에 고발하여 7월 1일 납치당함.
• 납북자가 없는 집에 내무서원들이 들어와 반동 집이라고 빨간 딱지를 다 붙이고 집에 있는 선풍기, 라디
오 등 물건들을 다 가지고 감.
• 지청천 장군이 국회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선거 운동을 도왔음.

직업 및 활동
<우마차 조합 이사장으로 통장, 대동청년단장, 민보단장, 향보단장 등으로 왕성하게 활
동함.>
문_ 아버지는 당시 무슨 일을 하셨으며 기타 사회적 활동이 있으셨나요?
답_ 해방 이후 서울에는 그 당시 운송 수단으로서 우마차들이 많았어요. 그 당시에 트럭
이라는 게 보기 힘들거든요. 우마차를 운영하시는 분들, 마소 우마차 운반 조합이라고
친구분들하고 같이 조합을 결성을 해가지고 거기 이사장을 맡고 계셨죠. 우마차 조합 이
사장이었어요. 그래서 우마차 분들의 말과 소의 사료 공급도 해줬죠. 또 친구분 한 분이
수의사였어요. 그래서 같이 가축 병원일도 했었죠. 돌봐주고 하면서요. 주로 어려운 우
마차 분들이 왔었어요.
사회적으로 활동도 많이 하셨어요. 젊었을 때부터 그 땐 부장이라고 했어요. 지금의 통
장 정도. 동네를 열심히 보시고, 그 다음 해방돼서 황학동이 생겨가지고 황학동에 동회
장도 하셨어요. 또 대동청년단에 단장, 민보단장, 6·25 당시에는 향보단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제 기억으로는 향보단장하시고, 동네일을 열심히 보셨습니다. 대동청년단 하셨
다가 그 다음에 민보단장 하셨어요. 그 다음에 향보단장 하셨고요. 한꺼번에 다 한 것은
아니고, 끝에 가서는 향보 단장 하신 거죠. 처음에는 청년단장하셨다가. 청년단은 그냥
청년들 모임이고. 민보단은 동네를 위해서 경찰과 관계되어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이에
요. 둘이 조금 다르죠. 정치적으로는 지청천 장군이라고 계셨어요. 이청천 장군이 지청
천 장군으로 성을 바꾸셔 가지고, 유명하신 분인데 만주군인이셨어요. 그분이 성동구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셨을 때, 선거 운동을 도와드렸죠.
문_ 이외에 다른 사회 활동도 하셨나요?
답_ 그때는 세상이 험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가지고 소위 우린 어렸을 때 그냥 공산주
의자들을 빨갱이라고 불렀어요. 요즘은 빨갱이라 하면 싫다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하여
튼 활동들이 많았고 그러니까 걔들에 대항해서 싸우고 제지했어요. 걔들이 경찰서에 넘
어가서 보도연맹으로 전향하면 걔들을 받아서 다시 또 데리고 6·25전까지 데리고 있었
죠.
문_납북 당시 같이 거주하던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답_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저희 8남매였습니다.

납북 경위
<피난을 가다 다리가 끊겨 되돌아 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작은댁에 피신해 있던 중 끌
려감.>
문_ 당시에 동네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_ 그때 우리 동네는 아주 평화로웠어요. 대로변이래도 이웃이 전부 친해가지고, 아버
님이 그렇게 사람한테 잘했으니까요. 어렸을 때 보면 동네 어른들끼리 모여서 놀러도 가
시고 모이시고 했어요. 이웃하고 친하게들 지내시더라고. 빨치산들이 내려오고 그런 건
없었죠. 완전 대로변에 집이 있었으니까요. 대로변 뒤 쪽 동네가 전부 황학동이었거든
요.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걔네가 1950년 6월 28일 날에 들어왔는데 벌써 27일 날은 이미 포 소리가 나요.
그래서 안 되겠다, 피난을 가야겠다고 대충 짐을 싸서 아버지하고 가족들하고 나왔는
데, 그 당시 이천에 저희 이모님이 사셨어요. 그래서 우선 거기로 가자 그렇게 마음먹고
나왔는데 광장교, 지금의 천호대교죠. 광장교를 건너려는데 가니까 다리가 벌써 끊겼
다.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되돌아왔어요. 아버지한테 작은댁이 있었어요. 그래서 거기
에 피신해 계셨죠. 걔네들은 더 잘 알죠. 작은댁이 어디 있다는 것 까지. 아버지만 거기
에 피신을 가셨어요. 거기가 신당동인데, 집이 서울 운동장 뒤에 있었어요.
문_ 언제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7월 1일에 납북되셨어요. 연행돼서 가시는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 했어요. 작은댁
어머니가 말씀해주셨어요. 빨갱이들이 고발을 해서 내무서에 일러가지고, 반동이라고.
걔들이 고발을 해서 붙잡혀갔습니다. 피난을 갔었는데 그 곳을 걔네가 알거든요. 그래
서 찾아가서 잡아가지고 내무서로 같이 갔어요. 그런데 이제 아버님은 끌려갔으니까 어
디 갔느냐 하고 사방으로 찾는데 을지로 입구에 그때 식산 은행이라고 있었는데, 거기가
그때 영보 빌딩이라고 있었어요. 거기가 정치 보위부 본부에요. 거기 끌려가서 구속되
어 있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동네 어른 몇 분이 같이 가서 면회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
죠.

납치 이유
<납북자의 반공 활동으로 인하여 이를 잘 아는 지방 좌익들이 인민군의 서울 점령 직후
86 2부 증언자료 87
반동으로 내무서에 고발하였을 것으로 추정함.>
문_ 왜 납치 되셨을까요?
답_ 동네 빨갱이들은 더 잘 알죠. 작은댁이 어디 있다는 것 까지. 빨갱이들이 고발을 해
서 내무서에 일러가지고, 반동이라고. 걔들이 고발을 해서 붙잡혀갔습니다.

납치 후 소식
<정치보위부 본부에 구속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증언자가
의용군 징집대상자 모이는 곳에 갔다가 도망친 후 삼개월 숨어 지내는 동안 동네 정치보
위부 지부에 한 번 끌려갔다 옴.>
문_ 납북 후 찾아보았는지요?
답_ 영보 빌딩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갔는데 보지 못하고 돌아왔어요.
문_ 남겨진 가족들에 대한 위협은 없었나요?
답_ 저는 당시에 19살이었어요. 피난을 갔다가 돌아왔는데 내무서에서 반동 집이라고
해서 빨간 딱지를 전부 다 붙이더라고요. 그냥 막 들고 가죠. 사무실에서 쓴다 이거죠.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겠으니까 식량은 다 먹고 식구는 많은데 어떡해요. 살 수가 없잖아
요. 뭘 먹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나갈 수도 없고. 황학동 동네인데 ‘전부 모여라’ 그래서
모여가지고 의용군 나가라고 하데요. 우리 형은 다른 데 또 피신 가 있었고. 형은 명동
에 있는 고모네 집 가서 피신해 있었어요. 나는 집에 있었고. 그런데 내가 붙잡혀 가면
어머님하고 애들하고 동생하고 어떡해요. 그래서 슬슬 담을 넘어가서 도망 나왔지요.
그래서 집으로 왔는데 그후로는 저는 3개월 동안 집 바깥에 못 나왔어요. 아, 몇 번 나
왔는데 그거는 또 정치부인지 뭐인지 누가 와요. 그래서 가자 그래요. 끌려간 게 장충동
뒤에 신당동 큰 일본 집인데 데리고 들어가면서 뭐 물어보고, 청년이니까 말하자면 포섭
을 시키는 거라. 정보를 얻어내려고. 그래서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와서 보고를 하고,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와서 말해라. 그러니까 유인하는 거죠. 젊은 사람한테서 정보
가 나올 것 같으니까 좋게 대접을 해줘요. 그러고부터는 제가 가지를 않았어요. 거기를
딱 한 번 가보고… 거기가 정치 보위부 분신이래요.
나는 이제 거기 파견 나와 있는 보위관한테 불려갔다가 와 가지고는 일절 집에서는 못
나왔어요. 그러고 저희 집 구조가 대로변에 2층 건물이에요. 2층 건물인데 그게 우마차
조합 사무실이고 뒤는 창고고 그리고 이 쪽 옆으로 집인데 우리 문을 열면 그 옆에 집의
문하고 통해요. 그래서 거기도 이제 젊은 애가 있었거든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그
러니까 이제 우리 집 두드리면 내가 그 집으로 가고. 그러니까 들어와서 아무리 찾아도
없잖아요. 그 다음에 그 집 가서 두드리면 그 집에서 또 우리 집으로 오고. 그렇게 피해
다닌 게 3개월이에요.
문_ 납북 후 소식은 들었나요?
답_ 중간에 누가 집으로 찾아왔어요. 와서 김병호 씨 아시냐고 물어보더라고요. 같이 끌
려가던 사람들 다 뿔뿔이 헤어지지 않습니까. 또 돌아오다 뿔뿔이 헤어지고. 그래서 이
제 다시 모이고 가는데 그 사람은 그냥 죽은 척하고 거기서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라고
요. 걔들은 급하니까 뭐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간 거죠. 그래서 가다가 그 사람은 거기
서 살아났다 그러더라고요. 그 당시 성북구에 국회의원도 하시고 아주 체육인으로써 유
명한 서상철 씨라고 있었어요. 아버님하고 친구분인데. 원래는 우리 아버님도 스포츠
맨이에요. 두 분이 같이 거기 계신 거를 봤다고 했어요. 말해준 분이 누군지는 모르겠
어요. 그냥 말하고 가셨어요. 그때 아, 북으로 갔구나 라는 걸 알았죠. 제 생각으로는
아마 붙잡혀 가실 때 돌아가시지 않았나 해요. 어떻게 하던지 소식이 오게 되어 있거든
요. 그렇지 않아요? 계셨으면 어떻든 연락이 올 텐데 안 오는 거예요. 거기서 연락이 와
야 아, 사셨구나 하고 뭘 하죠.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를 ‘아, 이분은 가실 때 희생되셨구
나.’ 가다가 죽이고 가고 그랬거든요. 저들 가다가 따라오지 못하고 그러면 그냥 죽이는
거죠. 그래서 그냥 그 시대에 희생당하시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소식이
없지 않나…

남은 가족의 생활
<9.28수복 때 인민군 패잔병들의 은신처가 된 동네는 국군의 포사격으로 다 불타고 형과
증언자 모두 제2국민병 징집영장이 나와 형은 군대를 가게 됐고, 증언자는 서울에서 군
서기로 근무 중 1.4후퇴로 대전으로 후퇴 명령을 받아 가족과 헤어졌음. 피난 중 어머니
와 동생 세명이 희생됨.>
문_ 남은 가족의 생활은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저는 삼개월 있다가 불행하게도 9월 27일 포병 선봉대가 서울에 금호동 그 쪽으로
건너서 포병이 올라와 가지고 있는데 162번지라는 데가 전부 초가집촌이에요. 거기 후
퇴하는 패잔병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인민군 패잔병들이 거기로 전부 숨어들었
어요. 누가 거기 정보를 준 거래요. 저기 인민군들이 많이 있다. 숨어 있다 거기. 거기
는 초가집이니까 집집이 들어가서 먹고 뭐 이러고 도망갈 참이죠. 그러니까 그 정보를
듣고 거기서 포를 날린 거라. 그러니까 거기가 불이 나버리니까 서풍이 불어가지고는 그
래서 우리 집 다음다음까지 다 타버린 거야. 27일 날이죠. 겁이 나고 펑펑 터지고 그러
니까 몸만 뒷문으로 해서 가족들이 다 상왕십리 쪽으로 피했죠. 나중에 와보니까 다 타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거라. 숟가락 하나도 없고. 형제는 아홉 명이나 되는데. 원래 동
네서 아버님이 인심이 좋았으니까 바로 길 건너에 계신 분이 자기 집을 한 채 빈 거를 내
줬어요. 그래서 전부 거기로 들어갔죠.
설상가상으로 형이랑 저 앞으로 입대하라는 서류가 왔어요. 어린 동생하고 어머니밖에
없는데 둘 다 가면 누가 돌봐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친척에 용산에 정은지구 헌병대장으
로 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수도사 헌병대장 하다가 거기로 발령 와서 거기 가서 ‘우리
아들 둘 다 나가게 생겼는데 하나는 어떻게 좀 할 수 없냐?’ 해가지고, 그래서 저를 남기
고 형은 군대에 갔어요. 나는 서울에 있어도 집에 못 있었어요. 군에 하여튼 군 서기로
라도 근무를 하니까요.
그러고 얼마 안 있다가 부대에서 1.4 후퇴 명령이 내리지 않습니까. 근데 저희 사촌 큰
형이 이제 그 당시에 수복되면서 육군 대위로 들어왔어요. 그래서 나를 데려가려니까 나
는 안 간다. 아버지가 돌아오실 거로 생각을 한 거죠. 내가 가면 어떡하냐 애를 두고 어
떻게 가냐. 그래서 큰집 가족만 대구로 가고, 나는 이제 부대가 대전으로 이동하게 됐어
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에 와서 어머님한테 ‘나는 대전으로 내려갑니다. 내려오시면 대
전으로 오십쇼.’ 근데 이제 안 내려오시다가 이제 애들 둘이 우리만 여기 있으면 죽는다
고 하시다가 늦게 내려오셨어요. 그런데 애들하고 할머니하고 오니까 자꾸 쳐져서 바로
중공군이 밀려 내려오는 수원 쪽에서 전쟁 가운데에 들어가게 됐어요. 원래 집이나 대전
집에 있었어야 되는데, 한 가운데 갇히게 된거죠. 그러니까 거기서 어머니하고 동생 둘
하고 막냇동생하고 넷이 거기서 희생이 됐어요. 그리고 이제 할머니하고 누이동생 하나
는 거기서 부상을 당했는데. 저도 나중에 들은 얘기죠. 부상을 당했는데 미군이 그냥 치
료를 해서 대전 병원에 이송을 시켜줘서, 할머니하고 여동생하고 살았대요.
거기다가 우리 고모님이 혼자서 독신으로 잘 사신 분인데도 동생 집안이니까 고생을 하
는 걸 보고, 그 집을 버리시고 우리 집에 와서 같이 피난을 나오신 거예요. 피난 오는데
막내 남동생이 오줌 마렵다고 하니까 그러다가 서로 헤어졌어요. 고모님은 걔 하나만 업
고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걔는 또 살렸어요. 걔는 가족을 다 잃어버리고 살긴 살았
는데 가족은 다 죽었어요. 이렇게 혼자 방황하다가 어떻게 했는지 혼자 서울에 다시 돌
아왔어요. 서울 돌아와서 갈 데가 없는데 우리 동네에 중국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 중국
집에서 아이고, 우리 집 와 있으라고 해서 뭐 음식점이니까 먹고 있었죠. 근데 뭐 그냥
밥 먹기는 그러니까 심부름 시키면 심부름 하고, 그래서 하나가 살았어요. 할머니하고
다른 (동생) 소식은 모르죠. 나중에 수복되고 와서 3년 후에 소식을. 제가 대구에 있을
때 돌아가신 건 알았어요. 소식은 들었어요. 근데 뭐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
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뭐 갈 수도 없고, 그냥 저는 생 불효자식이 된 겁니다. 아버
님은 납치당하시고, 어머님은 시신 하나 못 챙기고, 평생을 살아와서 그게 한이 돼가지
고. 왜 나한테만 이렇게 비참한 게 오나.
형은 군에 가 있으면서 또 그 소식을 들어가지고, 죽는다고 그냥 막 총질 하더래요. 죽
으려고 들어갔는데 총알이 피해가더래요. 그 양반이 무궁화 훈장까지 받고 나와서 속이
상하니까 그냥 술만 잡숫더라고요. 그렇지 않아요? 동생들 다 잃게 되고 어떻게 자기는
감당할 수가 없고 근데 이제 살 수 있는 것 하나가 그 집터가 한 100평 됐어요. 근데 그
걸 그 당시에 누가 연탄 공장을 한다고 세를 달라고 그래서 세돈 받아서 술만 잡쉈죠. 그
러니까 이제 폐인이 되신 거죠. 안 되겠다 해서 동네에서 57년도 인가 55년도에 나와서
일이 년 방황하다가 결혼을 했어요. 근데 무슨 뭐 할 게 있어야죠. 공터에 연탄 공장 그
세 받아서 겨우 생활하고, 그래서 형은 그거로 인해서 결국은 후두암이라는 병에 걸려서
60세도 안 되어서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후에 가게 터를 만들어가지고 세를 좀 주고 살았어요. 또 5·16이 나면서 저는
대한중석이라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됐어요. 거기 들어가게 됐고 그게 인연이 되가지
고 25년을 근무를 했습니다. 아닌 말로 제가 중학교밖에 못 나왔어요. 그래 가지고는
헌병 대장이라는 사람이 이종 매형이에요. 그래서 이제 그 양반이 헌병 차관까지 하다가
대한중석에 그 양반이 가게 됐어요. 그래서 같이 거길 가서 취직이 됐고. 그 양반은 뭐
1년 만에 나왔는데 저는 거기서 하여튼 성실하게 일을 해서 10년 만에 계장이 됐죠. 20
년 만에 과장 하고, 거기 서울대도 아니면 들어오질 못하던 데에요. 나는 임시직으로 들
어가서 다시 시험 쳐서 1급 되고, 그래 가지고 성실히 근무한 기간 돼서 이직되고 그랬
죠. 그런 세월을 보냈습니다. 25년을.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가 준 도움은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없죠.
문_ 이산가족 찾기 신청은 하셨나요?
답_ 이산가족 신청은 안 했어요. 납북자 가족은 이산가족에 안 낍니다. 해도 되지도 않
고. 두고 나와서 헤어졌다 이러면 이산가족이 되지만 아니 쟤들이 붙잡아 갔는데 데려갔
다고 하겠습니까?

호적 정리
<재산을 정리하기 위해 납북자 신청을 해서 호적 정리하였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재산 때문에 납북자 신청을 해서 실종 선고를 받아 호적 정리했어요. 우리 그 가게
터가 개발이 돼서 처리를 해야 되는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우선 아버님의 명의
를 바꿔 놔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내가 올라와서 다 했죠. 우선 납북자 신청을 하고,
실종 선고를 받았어요. 그렇게 되니까 이제 호주가 없죠. 그래서 이제 이거를 팔았어요.
팔렸죠. 그래 가지고 이제 저희로서는 큰 돈을 받았어요. 한 삼십억을 받았어요. 땅 값
을 보상 받은 게 한 십여 년 전이었는데 그래서 이제 가게를 해서 보증금 떼 주고, 뭐 상
속세 해서 하니까 한 이십억 되더라고요. 그래서 형님은 돌아가셨지만 형님 댁이 있고,
작은댁에도 애들이 있어요. 보상을 받아가지고, 작은댁에도 애들이 남매가 있었는데 하
나는 죽고, 그냥 3억을 줬어요. 작은집에 삼억을 주고, 그러고 다섯이 똑같이 삼억 오천
씩 가졌어요. 납북자 결정은 2014년인가 2015년에 받았어요.

연좌제 피해
<연좌제 피해는 없었으나 형님 집에 아버지가 간첩으로 내려오지 않았나 하는 감시가 있
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연좌제 피해 받은 건 없어요. 그냥 놀고 있었는데 뭐 연좌제가 있었겠어요. 취직을
한다던가, 나는 군에 한 십년을 몸을 담아 있었고, 직장 얻고는 강원도 가서 바로 십여
년을 있었고. 대구 가서 이십년 있었고, 서울엔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형님이 감시를
당했다 그러더라고요. 나는 뭐 계속 객지로만 돌아다녔으니까 감시는 안 당했죠.

정부에 바라는 말
<별로 기대하는 바가 없고 시대에 희생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함.>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글쎄. 내가 생각하기에는 일반적으로 넘어갔다던가 뭐 그런데 이거는 아무리 알아
봐도 알아볼 길이 없어요. 유골이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송환도 하고 하는데, 그냥 똑같
아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데. 전쟁 통에 돌아가셨는데 어디 가서 찾습니까 못 찾는데.
끌려가다가 그냥 희생 당하셨으면 그거를 어디서 찾습니까. 근데 가서 사셨으면 무슨 근
거가 있어서 소식이라도 옵니다. 근데 그게 전혀 없는 거 보니깐 제 생각에는 아무런 그
게 없어요. 그냥 한 많은 세상이다 하고 끝내는 도리 밖에는 없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세월이 너무 흘렀기 때문에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없음.>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이제는 하고 싶은 말도 없고, 왜냐면 너무 세월이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생존
해 계신다고 해도 114세 됐는데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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