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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민봉기(증언자-민명순, 민경윤, 민순희)
이름: 관리자
2021-09-16 15:10:01  |  조회: 134
190411B 민 봉 기 ( 閔鳳基)

생년월일: 호적상 1914년 8월 10일
출생지: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547
당시 주소: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고모리 547
피랍일: 1950년 8월 5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사, 벌목
학력/경력: 마을 청년단 대장
직계/부양가족: 부, 배우자, 자녀 3남 2녀, 둘째 남동생 내외, 조카딸 2
명, 막내고모
외모/성격: 평범한 체격 / 순하고 착한 성격

증언자
성명: 민명순(1934년생), 민경윤(1941년생),
민순희(1944년생)
관계: 여동생, 차남, 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전쟁 전 산에서 수상한 사람을 만나 경찰서에 신고하고 동네 사람을 풀어 잡은 공로로 표창장을 받은 적
이 있었음.
• 동네 좌익이 빨치산 잡은 사람이라고 밀고해서 빨간 완장 찬 사람이 집 대문 안으로 들어와서 잡아갔음.
• 외사촌 오빠가 덕정리에서 인민군이 집 쌀로 밥을 해가지고 오라고 해서 가지고 갔는데 학교 같은 건물에
사람이 빽빽하게 들어 있는 곳에서 납북자를 보았고 납북자가 춥다고 옷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 갖고 갔
는데 인민군이 빼앗았다고 함.

직업 및 활동
<벌목과 농사일을 함. 마을일을 보며 청년단 대장으로 활동함.>
문_ 당시 아버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요?
답_ (민경윤) 학교는 안 다니셨고, 서당 다니셨어요. 그래도 옛날에 집에서 쓰는 그런 정
도 말은 잘 하셨죠. 추문같은 건 잘 쓰셨어요. 동네에서는 그래도 글 좀 아시는 걸로 되
어 있어서 동네일도 보셨어요. 청년단 활동을 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때 살기가 다
어려웠잖아요. 우리 집 앞에 산이 있었는데, 벌초 허가를 받아서 나무를 해다 서울에 팔
았어요. 그 당시에는 산판이라고 했어요. 산을 다 깎는 거요. 차가 없을 때니까 우마차
에 장작을 해서 서울로 끌고 가서 팔았죠. 아버지 형제 분들이 일을 하고, 우리 집안의
한 분은 소를 끌고 여기서 팔고 하면서 생활하셨어요.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육 남매 중 장남 역할을 하셨어요. 그리고 당시에 할머니가 병환 중이셨대요. 그리고 막
내 고모를 낳고 돌아가셔서 아버지가 작은 할아버지까지 다 챙기면서 동생들하고 다 같
이 사셨대요. 옛날에는 가난했는데 분배 받은 땅도 없었고 그냥 일만 하신 분이래요. 엄
청 고생만 하시다가 6·25 터지자마자 그렇게 붙들려 가신 거죠.
문_ 당시 같이 살던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답_ (민경윤) 대가족이죠. 우리 아버지가 가장이었어요. 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어요.
우리 아버지 동생들이 다섯 명, 그리고 우리 어머니하고, 혼자되신 할아버지하고 손자
들 해서 대가족이 모여 살았죠. 그 당시에 열 식구가 넘었어요.
(민순희) 붙들려 가기 전까지 우리 아버지가 육 남매를 낳았는데, 오빠 위로 언니가 하나
죽었어요. 다른 식구는 다 있었고요. 작은아버지네 딸 하나 있었던 것 같아요. 큰고모,
둘째 고모가 시집을 갔었고요. 그렇게 살고, 그 후에 6·25가 나서 피난을 갔는데, 가다
가 제일 막냇동생도 죽었어요.
문_ 6·25전쟁 나기 전에 동네에 어떤 일이 있었나요?
답_ (민경윤) 제가 알기로는 동네 청년들이 산에 가서 일을 하잖아요? 샘물 있는데 수상
한 사람이 물을 먹으러 왔는지, 그러다가 잠이 들었는지 하여튼 수상한 사람이 있었대
요. 그 사람이 짚신 한 켤레, 미숫가루 한 보따리에, 고의적삼 한 벌 싸서 짊어지고 있었
대요. 이북에서 온 사람인데, 빨치산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을 경찰에 신고
하고 동네 사람들을 풀었어요. 그래서 같이 그 사람을 잡았는데, 지금 우리 생각에는 그
래도 간첩이면 촌사람들한테 잡힐 건 아닌 거 같은데, 어쨌든 잡아서 우리가 경찰서에서
표창을 받은 걸로 기억을 해요. 전쟁 중에는 어머니가 그것 때문에 잡혀갔다 해서 그 표
창장을 감추고 그랬던 생각이 나요. 그걸 나중에 소각을 했을 거예요.
(민순희) 빨치산을 잡았다고 포천 경찰서에서 표창장을 탔대요. 엄마가 그렇게 얘기한
것 같아요. 청년들이 빨치산을 잡아서 청년 대장한테 끌고 가서 포천 경찰서로 데려갔다
고 들었어요.

납북 경위
<6·25 이후 동네 좌익 한 명이 아버지를 지목하였고, 빨간 모자와 완장을 찬 사람이 대
문 안으로 들어와 잡아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민명순) 농사짓다가 돌아오셨어요. 논에 갔다가. 음력 6월 초였어요. 6·25나고 나
서죠. 오빠가 베 고의적삼 입고 일하다 들어왔는데 잡아간 사람이 한 5리 정도에 살아
요. 그 사람이 둘이 와서 하나는 대문 앞에 서 있고, 하나는 들어와서 오빠를 잡아갔어
요. 그 둘은 동네 사람이었는데, 청년단이었죠. 오빠가 아는 사람이었어요. 빨간 모자
를 쓰고 완장을 차고 있었어요. 집 대문 안에 들어와서 잡아갔어요. 가자고 그냥 끌고
갔어요. 당신이 이렇게 잘못했으니 가자고.
(민순희) 동네 청년 네 명이 붙들려갈 적에, 우리 작은아버지도 이웃에 사는 친척 같은
청년, 그 윗동네 사는 청년, 이렇게 네 명, 다섯 명이 같이 갔어요. 아버지를 제일 먼저
붙들어가고, 그 다음에 같이 간 거죠. 한날 붙들려 갔는지는 모르겠는데, 빨치산 잡은
사람들을 다 데려간 거예요. 우리 아버지가 저 사람은 외아들이라서 보내 달라고 사정을
했대요. 나만 책임자니까 나만 붙들어가라고. 네 사람 중에 우리 아버지만 이북으로 끌
려가시고 다른 분들은 나왔어요.
문_ 당시 동네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_ (민명순) 난리죠. 동네에서 의용군도 끌려가고, 누구네 붙들려가고, 청년들도 붙들
려가고 가서 안 온 사람 많아요. 6·25 전엔 재밌게 살았죠. 8·15 해방되고 잘 살았어
요. 전쟁 나고 피난 갔다 온 후에는 본 게 글쎄, 벼 이삭도 가서 세고, 여자들도 모아서
훈련시키는 거였어요. 애들 엄마가 나와서 나를 뒤로 오라고 그러더라고요. 저한테는
시누이죠. 그때 젊은 애들 몇 사람 불러다 놓고 그렇게 교육을 시켰어요. 논에 가서 벼
이삭도 세고, 이렇게 다녔어요. 그 동네에 머슴 살던 사람이 동네 사람들을 동원해서 교
육시켰어요. 저는 그때 열일곱 살이었어요. 그때 똑똑하지 못했죠.

납치 이유
<청년단 대장 활동 당시 마을 근처 산에서 빨치산을 잡은 일로 경찰서에서 표창장을 받아
납북된 것으로 추정함.>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민명순) 오빠를 데려간 청년단이 빨치산 잡은 게 잘못이라고 하더라고요. 방아다
리에 있는 놈이 찔러서 잡아갔어요. 말하자면 동네에 상놈이라고 막일하고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얼굴은 나는 몰라요. 아랫동네에 살았으니까. 그 사람이 와서 대문간에 서서
‘저 사람이다’라고 해서 붙들어갔어요.

납치 후 소식
<서대문형무소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함.>
문_ 납치 후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들었나요?
답_ (민명순) 붙들려갔다가 나온 사람들이 오빠가 서대문형무소에 있다는 얘기를 해줬
어요. 그런데 저희가 오빠를 찾으러 갈 형편이 안 됐어요.
(민경윤) 왜냐하면 젊은 남자들은 다 피했잖아요. 반공 구덩이 파 놓고 들어가고 숨어 다
녔어요. 낮엔 숨어있고 밤에는 뭘 얻어먹고 가고 그랬죠. 인민군한테 잡혀갈까 봐요. 다
각자 자기 살기 바빴지. 그리고 면회라는 것도 몰랐고 그냥 그렇게 지냈어요. 그동안 집
나간 이후로 그 여름동안 아무 연락을 모르고 살다가, 외사촌이 덕정리에서 아버지가 지
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 집에 일부러 오셔서 얘기를 해 주신 거지요.
(민명순) 나중에 외사촌이 덕정리에서 오빠를 본 얘기도 해줬어요. 인민군이 와서 그 집
쌀로 밥을 해달라고 해서 가져갔대요. 거기가 덕정학교인가 그런데, 사람이 그 안에 빽
빽이 있는데, 거기서 오빠를 봤다더라고요. 옷이 새카매져서. 머리는 이만큼 길었더래
요. 외사촌 이름이 만금인데, 만금아 나 옷 좀 가져다 달라, 추워 죽겠다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옷을 가져가니까 인민군이 탁 쳐서 빼앗았대요. 그래서 못 입었을 거라고 그랬어
요. 그 밖에는 확실한 게 없어요. 더 이상 듣지도 못하고 그래서 맨날 한탄강 가다 죽었
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남은 가족의 생활
<이후 큰아들까지 사망하여 증언자가 가장이 되어 할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하며 지냄.>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민경윤) 6·25사변 나던 날 별내 넘어서 육사 넘어서 청량리 신설동에 아는 집이 있
어서 그 집에서 같이 26일, 27일 저녁을 났어요.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나니까 인민
군이 다 들어오고 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 거죠. 지금 생각하면, 저희 아버지가 잘못
될 줄 알았으면 집에 안 가고 다른 데로 갔으면 멀쩡했을 텐데, 그냥 촌사람 마음에 집
에 가야 농사 짓고 먹고 살 테니까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그렇게 된 거죠. 우리는 전부
따라다녔죠. 열 살때쯤이에요. 여름을 거기서 났어요. 저는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어서
동네에서 이북 교육을 받았어요. 9·28 때 군인이 다시 들어왔잖아요? 들어와서 한 몇 달
간 잘 살았어요. 그러다 1·4 후퇴 때 다시 겨울에 피난을 간 거예요. 한강 얼음 위로 건
너갔죠. 그런데 가다가 큰형이 사라졌어요. 군인이 너 이렇게 가다가 죽는다고 해서 군
인을 따라가 학도병이 된 거예요. 그래서 대구까지 갔어요. 대구 가서 학생들의 사설조
직 같은 데가 있었던 모양이에요. 거기 군인들도 많이 가고 그런 거죠. 군복도 입고, 거
기서 피난을 하고 완전히 수복이 되었을 때 형이 돌아왔어요. 그때 형 나이가 열다섯 살
인가 열여섯 살인가 그럴 거예요. 형은 다시 고등학교 다니다가 병으로 죽었어요.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민경윤) 생계는 그냥 우리 할아버지가 농사짓고 일을 하시고 해서 나눠 먹고 그랬
죠. 여자들은 학교도 안 보내고 남자라고 저는 그래도 우리 삼촌들이 보태줘서 학교 간
신히 다녔고 그랬어요. 저는 이후에 군대 갔다 와서부터 동네에서 쉽게 얘기하면 농촌
일도 하고 동네 이장도 하고 그런 걸 했죠. 그러다가 70년 서른쯤에 직장생활도 했죠.
농협에서 일했어요. 지금은 여기 동생하고 저하고 둘만 살아있어요.
(민순희) 6·25때 환갑이셨는데, 그냥 있는 땅에서 연명만 하고 산 거예요. 나도 학교를
안 보낸대요. 그런데 고모가 셋째 삼촌한테 나도 학교 못 갔는데, 얘도 까막눈 만드냐고
해서 셋째 작은아버지네 가서 양조 국민학교 조금 다녔어요.
(민명순) 나는 초등학교 문 앞도 못 가본 사람이었고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활동은 하셨나요?
답_ (민경윤) 못했죠. 아버지 그렇게 되고 몇 해 있다가 형이 갔다가 죽었지. 그래서 우
리 집에서는 그런 거 할 여력이 없었죠. 큰형이 죽으니까, 뭐 할 여력이 없어요. 그 다음
이 저인데,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때 나는 중학교 다니고 그럴 적이라 해본 적이 없
고, 찾으려고 할 수도 없었고 소문도 못 들었고요. 다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나중에
이산가족 찾기도 안 했어요.
문_ 정부에서 지원해 준 것이 있나요?
답_ (민명순) 지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감시만 당했죠.
호적 정리
<주변을 통해 자꾸 조사를 하여 나중에 실종으로 처리했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민경윤) 정보과에서 알게 모르게 조사를 했어요. 친척들이 군대가고 또 어떤 때가
되면, 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은 없었는데, 자꾸 제3자를 통해 조사를 하더라고요. 그
래서 후대 자손들도 군대가고 그럴 때 신원조회하고 그러면 걸릴까봐 실종신고 처리했
어요.

연좌제 피해
<선거 때가 되면 탐문함.>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민경윤) 동네일을 보고 그랬는데, 저한테 암암리에 들리는 소리가 선거 때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누가 와서 뭘 물어보더라 하면서 경찰들이 조사를 한다고 그래요. 우리
한테 와서 직접 물어보지 않고 와서 탐문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걸 꼭 연좌제라고 보지
는 않는데, 그 당시엔 이북으로 간 사람들이 일단 다 간첩으로 다시 넘어올 거라고 생각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계속 감시를 했던 것 같고, 그 다음에 우리 외사촌이 군대 갈 적
에 중요한 때 가면 큰외삼촌이 이북으로 갔다는 얘기가 나와서 무슨 문제가 발생을 하더
라 했죠. 상당히 기분 나빴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그냥 그런가보다 그랬는데, 우리한테
직접적인 피해는 없었어요. 나는 군대에서 그냥 일반 병사였기 때문에 비밀 취급할 때에
는 보안대에서 반드시 조사를 나오는 거야. 근데 저는 연좌제에 대한 피해는 별로 안 받
았죠. 제가 그런 일을 하질 않으니까요. 동네 이장할 때, 경찰들이 와서 조사한다, 군에
있을 때, 보안대에서 와서 조사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데, 그 사람들이 그냥 통상적으
로 하는 거다라고 생각했어요. 기분은 나빴죠.
(민순희) 큰고모 아들이 ROTC 나왔는데, 걔가 그때 그랬대요. 고종사촌이 장교로 올
라가는 데 문제가 있었나 봐요. 우리는 연좌제가 무엇지도 몰랐어요. 근데 그때 신원조
회만 십년이 걸렸대요. 억울하게 붙들려 간 건데, 자진 월북한 것과 똑같이 취급을 하니
엄마가 엄청 억울해하셨어요. 우리가 직접 손해 본 것은 없었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보상은 필요하지 않고 유골이라도 돌려받기를 바람.>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민명순) 유골이라도 봤으면 싶은 심정 밖에는 없어요. 미국에서 유골 올 때 마다 눈
물이 나더만. 그거 하나 소원이에요. 그거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요.
(민경윤) 제 생각은 그냥 어려서 일찍 그랬으니까 아버지하고 특별한 정이 없고 그냥 그
런가보다 하고 사는데, 남들은 아버지가 있어서 사회생활 하는 데 좋았겠다 싶지요. 그
렇게 불편한 건 없어요. 할아버지하고 삼촌, 고모들이 우리 많이 도와주고 해서 나는 학
교도 보내주고 해서 큰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죠. 근데 항상 남들은 아버지가 있는데 우
린 없구나 하는 생각이 있었죠. 여자들은 또 다른 기분일 수 있는데, 나는 모르겠어요.
(민순희) 우리 또래들은 다 아버지가 없어요. 그 산골에서 누가 학교를 보내요. 그래서
동창애들이 다 아버지가 없어서 그 세월은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고. 아버지 유골이라도
찾으면 싶죠. 소원이 그거에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어머니 이장할 때 아버지 유골이 없어 나무토막에 이름을 써서 합장했음. 불쌍하고 마음
이 아파 흔적이라도 찾고 싶음.>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민순희) 우리 아버지 어머니 불쌍해서 차라리 일찍 돌아가셨으면 춥지나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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