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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광래(증언자-김귀래)
이름: 관리자
2021-09-17 13:00:19  |  조회: 277
190429B 김 광 래 ( 金廣來)

생년월일: 1930년 11월 20일
출생지: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142번지
당시 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석현리 142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15일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진천군 청년단 훈련 계장
학력/경력: 초등학교 졸업
직계/부양가족: 부모, 3남 4녀 중 장남
외모/성격: 활달한 성격에 목소리가 좋고 한문에 능함

증언자
성명: 김귀래(1934년생)
관계: 동생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1차 모집 때는 나가지 않고, 2차 때 집 후면 광에 숨어있던 것을 내무서원이 발견하여 납치됨.
• 국가에서 시행하는 군사교육에서 진천군 청년단 훈련 계장을 함.
• 진천 상산국민학교에 이북으로 보낼 의용군을 모아 놓고 지역주민들에게 급식 책임을 할당하며 증언자도
지게 지고 가서 학교 교실에 바글바글 갇혀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피랍자 이름을 부르자 피랍자와 사촌,
당숙이 동시에 나와 면회하려는 순간 감독자가 총으로 제재하여 도망옴.

직업 및 활동
<초등학교 졸업 직후 국가에서 시행하는 군사교육에서 진천군 청년단 훈련 계장을 함.>
문_ 형님의 직업이나 사회적 활동을 말씀해주세요.
답_ 국민학교 다니다가 해방되니까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시켰어요. 군사훈련 교관교육
을 먼저 받았어요. 우리 형님이 진천군 대한청년단 훈련 계장을 했어요. 목소리가 좋고
활발하니까 그렇게 시켰나 봐요.

납북 경위
<7월 12일 경 마을에 인민군이 들어오며 총 5차에 걸쳐 의용군 모집을 함. 1차 자발적
모집 이후 15, 16일경 실시된 2차 모집 당시, 집 후면 광에 숨어있던 발각되어 납치됨
(마을 이장이나 일꾼이 밀고하였을 것으로 추정).>
문_ 6·25 전쟁이 나기 전후의 마을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_ 내가 강릉 김 씨인데, 우리 동네는 강릉 김 씨 자손들이 주로 살았어요. 70% 정도
되었어요. 타지인은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동네 분위기는 좋지. 다 일가 사람들이니까
요. 당시에 일본 경찰이 고장 고장에 퍼져 있었어요. 아버지가 일본말을 상당히 빨리 배
우셔서 일본 경찰들이 아버지한테 쩔쩔맸죠. 그래서 부락에 말 안 듣는 사람을 전부 가
두고 할 때 아버지가 놔달라 하면 놔주고 그랬어요. 그 정도로 권한과 재산이 있었어요.
아버지는 평생 글을 배우시고 글방 선생님이셨어요. 말하자면 그 지방에서 최고의 유지
였죠. 6·25사변이 나고 우리 동네에 인민군이 11일 만에 들어왔어요. 12일에 들어왔
는데 그때 남쪽으로 빨리 들어온 데가 우리 고장이에요. 그때 제일 주요 전선이 서울 밑
에 한강 이남이었어요. 한강 이남이 첫째 방위선이다 해서, 국군들 전부 내려가고 그랬
었는데. 물밀듯 막 몰고 내려오니까 충청북도 진천에 와서 2차 주전선을 만들어 놨어.
거기서 김석원 장군이라고 있어요. 김석원 장군이 국방경비대에 있다가 군사훈련 가르
치고 예편(예비군 편입)을 한 사람인데, 난리가 나니까 다시 입대를 해서 싸운 거예요.
인민군 많이 죽였어요. 근데 밤 나흘, 낮 나흘 싸웠죠. 거기서 인민군도 많이 죽고 국군
많이 죽고 그랬어요. 인민군들 들어오고 나서 젊은 사람들을 바로 의용군으로 보내는 거
야. 이북으로 넘겨 보내는 거죠. 7월 15일 정도였을 거예요. 그날 저녁 면소(면사무소)
앞마당에 모아 놓고 강의를 하더라고요. 시국이 이러니 협조해 달라, 이북으로 가서 뭐
든지 해야 된다 그래서 이북으로 끌고 가서 교육을 시킨 다음에 다시 인민군으로 내보내
는 거예요.
문_ 어떻게 납북됐나요?
답_ 우리 집이 신작로에서 한 100m 정도 떨어져있었어요. 면사무소 소재지 옆에 동네
맨 앞집이에요. 담 넘어 보나 사랑채에서 창으로 봐도 신작로가 다 보여요. 그래서 오늘
은 인민군이 올 것이다 예측을 했는데, 그날 안 오고 그 이튿날 새벽에 들어오더라고요.
장화소리가 덜그럭 덜그럭 나고 탱크를 몰고 들어왔어요. 그때 이미 동네에 빨갱이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이튿날 인민들을 전부 평정한다, 해방을 시킨다 이런 소리를 하면
서 내무원이라는 사람들이 사람들을 전부 소집해요. 일부는 가고, 거기서 이북에 가야
한다는 강의를 들었대요. 이틀 후에는 전부 자진해서 나오라고 했죠. 1차 모집에 안 갔
어요. 무섭잖아요. 안 가고 숨었는데 그 놈들이 집을 뒤져서 붙들어 갔어요. 집 후면에
숨었는데 이장을 하던 동네 빨갱이가 마을 사정을 다 알잖아요. 그래서 이 집 저 집 뒤져
서 둘을 붙들어 가서 면 뚝방에 세우고 말을 들을 거냐 안 들을 거냐, 의용군 갈거냐 말
거냐 이북에 가야한다고 했어요. 간다 못 간다는 소리도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까 둘을
뚝방에 세워놓고 귀 옆에 총을 쏘는 거예요. 그러니 안 가겠다고도 못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지장 찍으라 이거예요. 지장 찍으라고, 안 찍으면 죽인다 이거야. 그래서 지장을
찍고 둘 다 붙들려 간 거죠. 조병렬이라고 있어요. 형님 동네 친구분인데 우리 동네 말
고 옆동네에서 청년단장을 했어요. 그분도 붙들려 갈까봐 숨었는데 잡아온 거예요. 그
렇게 해서 다 보냈어요. 진천에 상산국민학교가 있는데, 굉장히 커요. 당시에 1500명
정도 학생이 있었어요. 이북으로 보낼 의용군을 거기에 다 모아 놓고, 우리 지역 사람들
한테 밥 보급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부락에서 쌀, 된장, 부식거리도 걷고 했어요. 우
리 고장에서 가려면 딱 20리가 돼요. 전부 지고 가서 거기 주는 거예요. 그럼 그걸 먹이
는 거죠. 각 부락에서, 각 면에서 다 나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때 집에 있으면서 형을
본다는 생각에 일도 할 줄 모르면서 자진해서 지게를 지고 갔어요. 지게 잘 지는 사람이
저를 보니까 안되겠는지 자기들이 나눠 들고 나는 가벼운 거 들고 가게 했어요. 가서 지
게를 내려놓고 보니, 학교 교실에 바글바글 갇혀 있는데 전부 머리를 박박 깎은 거예요.
그래서 누가 누군지 몰라요. 그래서 창문을 통해 ‘김광래’ 하고 소리를 막 지르니 형님이
나와요. 우리 사촌도 나오고 당숙도 나왔는데, 면회하려고 하는 찰나에 우르르 나오니
까 어떤 놈이 총을 들이밀며 죽인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지게고 뭐고 던지고 뛰어서
도망갔어요. 그때가 마지막이에요.

납치 이유
<당시 청년단 훈련 계장이었고, 지역유지의 자제로 의용군 강제모집을 피하지 못함.>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청년단 훈련 계장을 하셨기 때문에 납치가 된 것 같아요. 우리 동네 17명이 끌려갔다
가 12명은 실종이 됐고, 5명은 돌아왔어요. 남로당 당수가 안성에 살았기 때문에, 진천
이 가깝단 말이야. 그래서 특히 진천이 피해를 정말 많이 봤어. 그렇게 붙들려간 사람도
많고, 빨갱이도 많고. 인민군이 1.4후퇴 때 서울 아래로 안 내려왔잖아. 그래서 그때 막
죽인 거야. 빨갱이들을 잡아다 우리 경찰들이 다 죽인 거야. 그래서 이래저래 피해가 엄
청 많은 거예요. 그 당시에 우리 동네에 72 가구가 있었는데, 극한 빨갱이는 없었어. 그
런데도 17명이 갔다가 12명이 지금까지 행방불명이야. 근데 여긴 신고도 안 해. 그 자손
이 아니니까. 끌려간 사람들이 다 의용군 나간 젊은 사람들이라 자식이 없으니까. 내가
부르짖고 해도 말로는 하자고 하고 안 해. 나는 계속 그때부터 이산가족 접수해서 물어보
자고 했지. 그러다 보니까 이산가족 상봉 추진 단체에서 진천군 대표하다가 충청북도 대
표까지 하게 되었어요. 당시 공직생활을 할 때니까 여유가 있을 때였어요.

납치 후 소식
<도망치지 못하고 평양으로 이송되었다고 전해 들음.>
문_ 납치 후 형님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붙들려간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는데, 광나루에서 폭격을 맞아서 풍비박산이 났어
요. 우리 형은 우리 사촌하고 당숙하고 동네에서 12명이 끌려갔었는데, 각자 헤어진 거
죠. 폭격을 맞으니까 그 사람들 중에 죽은 사람도 있고. 우리는 서울에 사는 가족이 있
기 때문에 서울사는 가족한테 갔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때 서울에서도 피난을 막 내려
가잖아요. 그래서 피난인처럼 위장을 해서 거기 껴서 도로 내려간 거에요, 집으로. 그
때 사촌이나 당숙이 형님에게 너는 어차피 가도 또 붙들려 올 거니까 그냥 가는 게 옳겠
다 해서 이북으로 그냥 보냈어요. 그래서 평양가서 어느 학교로 갔다는 얘기를 들었어
요. 들었는데 전혀 몰라서 중국을 가니까 한민족 중에 우리 일가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
래서 그 사람 얘기가 돈을 얼마 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아보겠다고 그래서 그 땐 돈
을 못 가져가서 다음에 준다고 했는데, 우릴 믿고서 알아본 모양이에요. 그래서 소식이
왔는데, 평양에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죠. 얘기를 들은 거
고. 얘기를 듣고 보니까 거기 가서 그래도 간부 측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남은 가족의 생활
<부모님이 무사하셨고 지역 유지로 부유한 가정이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함.>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피난을 어떻게 가. 그때 마을 사람들도 안 갔어요. 너무 시골이라 그랬죠. 그때 면
장도 마을 사람들에게 피난 가라고 그랬는데 안 갔어요. 어쩌다 한 명씩 갔지.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우리 집은 그때 일하는 사람이 셋이 있었어요. 열대여섯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아
버지가 지역 유지여서 돈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생계에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전쟁 나
고 12년 후쯤 아버지가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어서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고 나서 내
가 애들 데리고 서울 구경시켜준다고 갔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도로
내려갔죠.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형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셨는지요?
답_ 마지막으로 형님을 봤던 상산 초등학교로 우리 부모님은 가지도 않았어요. 학자고
그러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있지만 그런 데 가질 않아요. 어머니는 굉장히 노
력하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못하게 하셨죠. 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뭐가 되느냐 하셨죠.
그냥 살아 돌아온 사람들 얘기만 들을 뿐이었어요. 그래도 적십자에 신청도 하고 계속
찾으려고 노력은 했어요.
문_ 정부가 지원해 준 것은 있나요?
답_ 없어요.

호적 정리
<사망신고 안했고, 실종신고만 하여 호적을 남겨두었음.>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아무것도 안했죠. 사망신고도 안 했고, 실종만하고 호적은 그대로 있고.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그런 건 없죠.

정부에 바라는 말
<국제적 평화회담이 이루어지며 통일에 대한 논의가 나오지만 통일이 되려면 남북의 수
준이 맞춰져야 할 것이라 생각함. 북쪽에서 주민들에게 자유와 정보를 허용해 주길 바라
고 있음.>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사실 이쪽에선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북한이 정보를 제공 안 해주는 이상 방법이
없는 거 아니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답답할 뿐이지 되지를 않아요. 전에 판문점에서 이
북서 온 세 사람이 연설을 하는데 갔어요. 연설을 듣다가 제가 반문을 한 거예요. 당신
네들은 자유 생활을 못하기 때문에 정보를 똑바로 알 수도 없는 건데, 우리나라 사람들
은 전부 까놓고 얘기하지 않느냐. 당신들도 자유의 테두리 안에서 정보를 얻어야 의용군
온 사람인지 납북자인지 아는 것이지, 그런 것을 모르는 이상 방법이 없지 않느냐. 우
리 동네 가까운 한 사람 중 납북된 사람이 이산가족 상봉을 했단 말이에요. 상봉하러 나
온 사람이 인민군 대좌더라 이거에요. 인민군 복장을 하고 나와서 남매간에 상봉을 했는
데, 대번에 남반구 새끼라고 하며 자기 누이동생을 꾸짖고 매제에게 그런 나쁜 정신으로
사니까 평화가 안 된다고 꾸짖었다는 거예요. 면회를 사흘 하는 건데, 하루만 하고 면회
를 안 하겠다 해서 사흘 갇혀 있다가 나왔더라고요. 북쪽에 있는 사람은 시작하려고 하
는데, 여기서 간 사람이 안 하겠다고 한 거에요. 계속 욕만 하고 그러는데 있을 수가 없
더래요. 바라는 것은 국제적인 남북회담이 되고 국제적으로 여론화되고 그것이 점점 발
전해서 이북에서 저 사람들도 생각을 좀 바꿔야 될 것 같아요. 저 사람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들을 바꾸게끔 만들어서 남북통일을 해야죠. 지금 이
상태로 남북통일을 하면 사흘도 못 가요. 왜냐하면 이북에서 나와서 면내에 두 사람이
숨어 살다가 등장을 했는데, 그 놈들이 얼마 안 가 면내에 유지가 되어 싸우고 하는데,
두 사람을 당할 수가 없더라고. 그만큼 달라요. 그래서 남북통일이 되려면 우선 모든 것
에 수준이 어느 정도 맞아야 하는데 지금 현 상태로 남북통일이 된다 그러면 대한민국
사람들이 이북 사람들한테 죽어요. 못 살아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소식이 없는 형에게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하고 있음.>
문_ 형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보고 싶은 우리 형님 광래에게
세월은 어언 상별한지 칠십년이 흘러갑니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 때문에 분단의 아
픔을 가슴에 안고 살았습니다. 이산가족이 무엇입니까, 무슨 원한이 이렇게도 깊습니
까? 그리고 무엇이 그리도 무서운가요? 집을 잊어서 못 오는 것이 아니던가요? 이산가
족 상봉 때마다 상봉할까 간절히 기대하였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는 남과 북이 항상 평화회담을 하고 화해 논의를 하고 세계 정상들까지도 평화 회담을
하는 때이니만큼, 내가 ‘김광래’라고 큰 소리로 외쳐주세요. 이 동생들이 마지막 기대를
하여 봅니다. 간절히 천우신조를 믿어봅니다.
동생들 귀래, 병래, 영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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