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박홍구(증언자-박신자, 박정자)
이름: 관리자
2021-09-24 16:24:25  |  조회: 197
190705A 박 홍 구 ( 朴洪九)

생년월일: 1913년 2월 24일
출생지: 경기도 용인시 원산면
당시 주소: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피랍일: 1950년 9월 23일
피랍장소: 자택
직업: 회사원
학력/경력: 동경대학, 반공 청년단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2남 3녀)
외모/성격: 올곧고 성실한 성격

증언자
성명: 박신자(1938년생), 박정자(1942년생)
관계: 자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반공 청년단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표적이 된 것으로 추정됨.
• 아버지를 끌고 간 동네 빨갱이였던 사람 두 명에게서 아버지의 소식을 직접 들음.

직업 및 활동
<대대로 지역유지였던 집안으로 7세부터 일본 유학하여 동경대를 나온 인재임. 당시 삼각지 인근에서 낮에는 직장생활, 저녁엔 마을에서 청년들 교육, 반공 청년단 단장, 교회 일 등 다양한 일을 도맡아 함.>
문_ 당시 아버님의 직업이나 사회적 활동을 말씀해주세요.
답_ (박신자) 무슨 회사인지는 모르겠는데, 회사원이셨어요. 삼각지에서 조금 더 간다고 그랬어요. 동네에서 일하고 청년단 단장이었어요. 반공 청년단. 회사에서 퇴근하면 동네에 와서 일하고 그랬어요. 일본말도 잘 하고요, 한문도 잘 아셨어요. 친할아버지가 천자문을 다 아셨기 때문에 나도 세 살부터 천자문 배우라고 여기 와서 앉으라고 그래요. 나 공부하기 싫어, 세 살인데 무슨 공부를 해 그랬었죠. 친할아버지가 학식이 많으니까 한복을 입고 아침 잡수시면 출근을 해요. 그래서 다섯 시나 여섯 시에 집에 들어오세요. 할아버지가. 삼 층에는 우리가 살고 할아버지는 아래층에 살고. 과수원을 넓게 했어요. 한 몇 백만 평 될 거예요. 지금 단국대학 지은 곳이 다 할아버지 땅이었어요. 증조할아버지가 잘 사셨어. 잘 살고 학식도 많았고. 그래서 할아버지가 옆에서 공부한 거예요. 옛날에 글 배우는 서당 가서 공부하셨어요. 아버지는 일곱 살에 일본으로 유학 가셔서 중학교도 나오고 고등학교도 나오고 대학교도 나왔어요. 그러고 스무 살 때 결혼하러 돌아오셨대요.

납북 경위
<6~8월에는 용인 외가댁 쪽으로 피난을 옮겨 다니다, 9월 20~21일 새벽 어린 아이와 아내를 보기 위해 한남동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동사무소 서기 일을 하던 인민군 위원장과 일행에 의해 잡혀감.>
문_ 어떻게 납북됐는지요?
답_ (박신자) 인민군이 내려와서 서울 점령 후에 아버지한테 인민위원회 일을 봐 달라 했는데, 거절하시는 바람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셨다고 오빠가 얘기 하시더라고요. 풀려나서 바로 고향인 용인으로 피신해 계셨는데 애들이 보고 싶으니까, 먹을 식량을 가지고 밤에 집으로 왔어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자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세요. 그래서 내가 아버지 와? 거기 할머니한테 있지 그랬더니 괜찮아 이틀 있으면 군인 들어와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서 안방에서 애들 다섯이 자잖아요. 그러면 얼굴을 막 쓰다듬고 그리고 나오세요. 엄마하고 얘기하는 건 잘 못 들었어요. 아주 소근소근 얘기해서. 엄마도 왜 왔냐 이틀 더 있지 그러니까 나를 왜 잡아가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엄마가 청년단 일하고 그랬으니까 분명히 잡아가 그랬더니 나는 아무 죄 지은 게 없대요. 그러니 난 안 데려간대. 근데 새벽에 문을 딱딱 두드려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 보고 빨리 숨어 그랬더니 나 죄 지은 거 없는데 왜 숨어 하셨는데, 우리 어머니가 문을 이렇게 열면서 누구세요 그랬어요. 그랬더니 동무 어제 밤에 온 거 알아 하면서 그냥 들어와요. 그러더니 막 찾아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왜 그래 하면서 나가시더라고. 왜 왔어 그러시더라고. 새벽인데 애들은 다 자고, 나는 아버지가 가니까 아버지 가지마, 가지마 하니까 우리 아버지가 나는 잘못한 것 없어. 청년단 일 봐 달라 그래서 했고, 동네일은 일본말도 한문도 다 잘 아니까 와서 해 달래서 한 것 뿐이야. 나 죄진 거 없다. 걱정하지 말고 자라 그러시더라고요. 근데 우리 아버지가 베옷을 입었어요. 베옷을 위아래로 입고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추워서 안 돼, 갈아입고 가 그러니까 나 잘못도 없는데 왜 나를! 나 금세 나와 이러시더라고. 그러면서 그냥 그거 입고 나갔어요. 그러면서 그냥 가자 하고 갔어요. 그러고는 소식이 없네. 그때 아버지를 잡아간 사람이 인민군위원장이었는데 저희 막냇동생의 친구 아버지에요. 그니까 아는 사람이 잡아간 거죠.
(박정자) 얼굴은 기억을 못하겠는데 동사무소 서기라고 알고 있어요. 같이 활동하던 사람이 있었겠지만 누군지는 모르겠고 동네에서 서기를 보던 사람이라고, 나중에 오빠한테 들은 얘기가 그래요.
인민군위원장이 6·25 때 반동분자 가족이라고 끌고 다녔던 것, 그건 기억해요.
총도 안 가져왔어. 동무 가자고 하면서 새벽에. 그래서 내가 아버지 가는 거 볼게. 여기 (집에) 가게문이 있거든요, 안방문도 있고. 가게문이 커요. 그래서 내가 아버지 잘 가 그러니까, 아버지가 그래 하면서 아버지가 뒤 돌아보면서 동생들하고 엄마하고 잘 데리고 있어. 그러더라고. 그래서 그래 그러면서 내가… (눈물 흘리며) 그래서 내가 아버지 잘 가 아버지가 알았어, 들어가라. 새벽이라 춥다, 들어가. 그래서 내가 대문을 이렇게 열고서 아버지 잘 가.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아버지하고 둘이 갔어요. 우리 집에서 이렇게 돌아가면 거기가 동사무소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서 동사무소까지 가는 것만 봤어요.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박정자) 오빠 말로는 아버지가 9·28 수복 바로 전에 피난을 가셨대요. 오빠 얘기로는 고문을 당하셨대요. 어디 끌려가셔서. 그래서 다 죽게 되셨다가 피난을 가신 거죠. 용인 쪽으로 가셨나 봐요. 그랬다가 우리 막내가 그때 5월에 출생을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백 일도 안 되었을 때고 제 여동생이 그때 세 살인가 네 살 되었고, 제가 아홉 살이고, 우리 오빠가 열한 살, 언니가 열세 살 이렇게 될 때죠. 우리 어머니 서른여섯이었고. 그러니까 우리 식구들이 애들이 고만고만한 애들이 다섯이 있으니까, 아버지가 갔다가 우리 먹을 거 양식을 사 가지고 왔다가 그날 잡혀 가셨다고 들었어요.

납치 이유
<지역 유지에 지주, 교육, 교회, 반공청년단 단장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표적이 된 것으로 추정.>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박신자) 아버지가 교회 유치원 이사장도 하셨고, 제가 유치원을 다녔을 때. 교회에도 지분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고, 그 동네에서 유지에 지주고, 이래서 잡혀갈 수 있는 요건들이 또 뭐냐면, 동네일도 보셨고, 반공단에도 계셨고 이러니까 그런 표적이 된 거죠. 

납치 후 소식
<어머니가 군인으로부터 20일 이후 마을 어귀에서 끌고 간 사람들을 모아놓고 따발총으로 쏴 죽였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함. 이후 소식은 들은 바 없으나, 세월이 흐른 후 아버지를 납치하는데 일조했던 마을의 인민군 위원장 등이 찾아와 잘못을 빌었다고 함.>
문_ 납치 후 들은 소식은 있나요?
답_ (박신자) 아버지 가시고 난 후 어느 날, 우리 어머니가 군인들 한 60명 되나 들어오라고 하시더라고. 그러면서 아휴 수고했다 밥 먹자고 그러면서 그 사람들 다 대접했어요. 그때 군인들이 왜 이렇게 젊은 사람이 아이들을 주렁주렁 데리고 사느냐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버지 붙잡혀 가신 얘길 다 하셨어요. 그랬더니 그놈의 새끼! 그냥 그러면서 그 놈의 새끼들 당장 오라고 그래. 그래서 위원장을요 팼어요.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그냥 살게 해 주세요 그러시더라고 우리 어머니가.
(박정자) 그 후에 다른 분은 모르겠는데 골목 끝에 공교수님이라고 계셨던 분도 그렇게 끌려갔다고 하더라고.
문_ 그때 문 두드렸던 사람의 인상착의는?
답_ (박신자) 인민군 위원장. 이 사람은 아마 거기서 일했을 거예요. 이름은 잊어버렸네. 스무 몇 날인가. 어딘가에서 여기서 끌고 간 몇 백 명 되는 사람들을 쫙 세워서 따발총으로 수십 명이 그 사람들을 다 죽였다고 해요. 지금 살아있는 그 끌고 갔던 사람이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박정자) 우리 여동생의 동갑내기 친구 청자라는 애가 있었어요. 저도 같은 동네니까 알아요. 동네에서 서기 보셨다고 그래서 그분을 1974~5년도 화곡동 살 때 청자를 만났어요. 저는 아버지를 끌고 간 사람이니까 잊어버릴 수 없잖아요. 청자 얼굴을 내가 아니까, 아버지 살아 계시냐 했더니 살아 계시다고. 근데 어머니는 그분을 용서를 했어요.
(박신자) 그때 두 분이 와서 싹싹 비셨어요, 어머니께. 언제 오겠다고 그러면서 인사 왔어요. 그래서 내가 엄마 저 사람 죽여. 그 사람 보면 용서할 수 없죠. 뭘 모를 때니. 그래도 이제 묻자 살려라. 그런 엄마가 어디 있어요.
(내가) 엄마 예수 믿어도 저런 놈은 죽여야 해. 난 그냥 그 사람들이 쪼그려 앉기에 저 새끼 죽이라고 근데 우리 엄마가 시끄러워, 들어. 들으면 어때 저런 새끼는 죽어야 해.

남은 가족의 생활
<반동분자의 가족이라며 주변에서의 경계가 심했고 동네 큰 굴과 반공호 등지로 숨어 다님. 어머니가 5개월 정도 아버지 시체라도 찾아야 한다고 용인 근교를 헤매셨음. 이후 한남동 자택에 가게를 열고 생계를 책임지심.>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박신자) 우리 어머니가 6·25 때 외할머니 돌아가셨고, 여동생 죽었고, 우리 삼촌도 죽었고, 그래서 모두 우리 어머니가 그 근처에다 묻어드리고 나중에 연천 고향에다가 이장을 했는데. 그렇게 어머니가 혼나시고 외할아버지하고 이모하고 1.4 후퇴 때 피난을 가셨어요. 9.28 지나고 나서는 어머니가 아버지 찾으러 많이 나갔다 오셨던 것 같고. 그 전에는 경계가 아주 심해서 우린 피난 다녔어요. 그래서 아버지 친구분 중에 다리 불편하신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좀 도와주셨고. 방공호, 동네 뒤에 큰 굴이 있어요. 거기 들어가서 숨어서 그 아저씨가 가져다주는 주먹밥 이런 거 먹었던 기억이 있고. 거기가 아주 열악해요. 아저씨네 집 방공호 지하실에도 있으라고 해서 좀 쉴 수도 있었고. 그러고는 또 집에 폭격이 심해서 어떻게 됐나 하고 어머니가 나올 때 우리를 데리고 나왔던 거 같아요.
그때 왔다가 동네에서 또 와서 우리를 데려가고. 근데 어머니는 그때 안 계셨고 저는 혼자 갔던 거 같아요. 동네 애들 막 끌려 다녔고, 그랬던 기억이에요.
그리고 저녁 때 집 들어와서 숨었다가, 폭격이 심하면 피난 갔다가. 아버지가 오시려나 하고 기다리다가 1.4 후퇴 지나서 피난가면서 중공군, UN군하고 싸우는 통에도 또 도망갔고, 오산 거기서는 중공군을 만나서 도망가느라고 혼났고, 우리는 반동분자 가족이라 그래서 대로변으로 못 다니고 산으로만 돌아다니느라고 엄청 고생했어요. 겨울이라 아주 말도 못하게 고생했어요.
해방 전에 우리 집에 일본 사람들이 도망가면서 불을 질렀어요. 그래서 집이 홀딱 불타
서 창고가 굉장히 큰 게 있었는데, 거길 개조해서 우리가 살고 있다가 바로 6·25가 났어요. 그래서 집이 그렇게 좋은 집은 아니었어요. 그냥 개조해서 살았기 때문에. 거기에 창고가 커요. 그 앞에 가게를 만들어서 어머니가 구멍가게를 하시고. 우리 동네 근처에 미군들이 있었어요. 이태원 너머. 미군들이 가지고 나오는 초콜릿이라든가 미군 물건들을 어머니가 바구니에 이고 동대문 시장가서 팔고 동네에 필요한 걸 사서 이고 오셔서 구멍가게를 하셨어요. 그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어요.
(박정자) 옛날에는 그 동네에 가게가 하나밖에 없었고요. 수복 후에 사람들이 차츰 모이기 시작하니까 동네가 번성을 하잖아요. 근데 거기 가게가 하나밖에 없어서 장사가 잘 되었어요. 학교 다녀오면 저희는 다 구멍가게에 같이 모여서 도와드리고, 먼 친척 되는 아저씨도 와서 도와주고. 어머니가 목욕탕을 또 하나 만드셨어요. 그 옆에 땅을 만들어서 돈이 되는 걸 가지고 목욕탕도 하시고 또 불난 터에다가 동네 유지 어떤 분이랑 천막을 해서 교회도 개척하시고 치마 두른 여장부라고 별명을 붙였어요. 호랑이 할머니라고.
(박신자) 우리 어머니가 우리 애들은 공부한다 하면 미국도 보내주고 다 하신다고 그랬어요. 어머니가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가 공부를 못하게 하셨대요. 기집애라고. 할머니는 열심히 가서 책을 얻어다 주고 그러면 그냥 앉아서 공부했대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은 하셨나요?
답_ (박신자) 어머니가 아버지 시체 찾아서 묻어줘야 한다고 5개월을 용인에 가서 헤맸어요. 아버지 친구분이랑. 어디로 끌려갔는지 모르는데 괜히 거기 가서 헤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엄마, 이제 우리 다섯을 돌봐야하잖아. 거기 헤매다 엄마 죽으면 우리 어떻게 하라는 거야? 우리 다섯 놔두고 엄마 갈 거야? 내가 하도 그러니까 엄마가 밥도 안 먹고 아버지가 어디 가서 죽었는지 모르는데 내가 밥을 먹냐? 그래서 내가 이미 아버지는 돌아가셨어요. 밥 잡숫고, 이모랑 할아버지가 계시잖아. 밥은 먹어야 하잖아. 그건 엄마 짐이잖아. 그럼 밥 잘 먹어야지 그러면 어떻게 해 그랬더니 밥이 넘어 가냐고, 그래도 엄마 먹어야 해 이러면서. 어머니가 그렇게 찾아 나가시면 저는 또 언제나 오시나 그 길 건너 언덕에 가서 해가 떨어지면 한참을 한강변을 들여다보다가 오고 그랬었어요. 어머니는 그집을 떠나지 않으셨어요. 그집을 몇십 년 동안 안 떠나셨어요. 아버지가 혹시 찾으러 올지 모른다고.
문_ 정부가 도움을 준 것이 있나요?
답_ (박정자) 그런 건 전혀 없었고요.

호적 정리
<가정법원에 사망신고를 함.>
문_ 호적 정리를 하셨나요?
딥_ (박정자) 어머니가 하셨어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박정자) 연좌제요? 그런 건 잘 몰라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나라가 보호해주지 못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보았는데 국가는 납북자 문제에 대해 인정하고 답을 주길 바람.>
문_ 정부에게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박정자) 전쟁으로 인해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많은 걸요. 그런데 한 번도 우리나라 누구도 얘기를 안 했잖아요. 근데 이사장님이 시작을 해서 이게 이렇게 표면화되면서 지금 건의를 하고 있는데, 나라에선 어떤 반응도 없잖아요. 5·18이고 4·19고 뭐 난리를 치고들 해주고 야단하는데, 우리가 가만 있는다 해도 전쟁의 피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얘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나라에서 잘못한 거 아니겠어요. 국민을 보살피지 못한 거니까. 휴전 때도 이렇게 납북자들 포로들 조금 챙겨줬어야 되지 않느냔 말이에요. 가족들의 아픈 마음을 모르는 거죠. 자기가 안 당했으니까. 일본에 끌려간 사람들도 얼마나 억울해요. 나라가 잘못하는 바람에 끌려가서 고생하고. 그런 거는 그래도 지금 표면화돼서 얘기가 되고 있어요. 납북자에 대해서는 일절 말이 없잖아요. 그건 정말 누
구라도 얘기를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나
라가 지켜주지 못한 거 이런 거에 대해서 무슨 말들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 그런 바람이
에요.
얼마나 안타까워요. 쳐들어오는 걸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도 동해에 목선이 떴다는 것
도 모르는 거고. 그것도 탱크가 밀고 오는데 몰랐다는 게 말이 돼요? 지금 저는 중국도
싫어요. 아직도 우리나라를 겨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왜 그렇게 공산당들은 무서운지
몰라. 공산당들한테 너무 당해서요. 아유 1·4후퇴 때 중공군 안 내려왔으면 우리가 UN
군하고 다 통일됐어요. 저기서 막 밀고 내려와 가지고 이렇게 공산당들이 우리나라를 다
집어먹을 뻔 했잖아요. 그러니까 나라가 정당 싸움만 할 거 아니에요. 옛날에도 청나라
당쟁 때문에 우리나라가 다 망하고 근데도 아직도 정치하는 사람들 정신 못 차려서 당쟁
들 하고 앉아있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천국에서 편하게 쉬시길 바람.>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박정자) 기념관 가서 영상에다가 하나 써 놨어요. 이번에 말고 우리 식구끼리 따로
가서. 아빠 안녕하고. 천국 가서 편히 계시겠죠? 그날 만나 뵈요. 그렇게 써 놓고 왔어
요. 우리 아버지 사상이 올곧아서 거기서 협조하라고 했을 때 정말이지 뭐라도 하나 했
으면 안 돌아가셨겠죠. 근데 사상이 올곧으시니까 끝내 반대하시고 고문당하시고 끌려
가시고, 생사를 모르게 되어 버렸어.
(박신자) 아버지가 눈에 선해요. 목욕시키면 아버지가 다 하고. 우리 어머니를 그렇게
위하시고 사셨어요. 집에 유모도 있고 찬모도 있고 안팎으로 사람을 두고 아버지가. 그
리고 우리들을 끔찍이 위하고 사셨는데.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30 납북자-이주신(증언자-이영찬, 이경찬)
관리자
21-09-27 252
229 납북자-윤삼식(증언자-윤병조)
관리자
21-09-27 190
228 납북자-전상규, 전용규, 전인규(증언자-전덕자)
관리자
21-09-27 182
227 납북자-박수홍(증언자-박동화)
관리자
21-09-27 170
226 납북자-안홍모(증언자-안순일)
관리자
21-09-27 180
225 납북자-봉재석, 봉재충(증언자-이풍렬, 소명규, 봉필만,봉필회)
관리자
21-09-27 195
224 납북자-임완수(증언자-임재우)
관리자
21-09-27 162
223 납북자-임찬선(증언자-임화순)
관리자
21-09-27 187
222 납북자-양대현(증언자-양성안)
관리자
21-09-27 185
221 납북자-김현례(증언자-문대완)
관리자
21-09-27 181
220 납북자-안승우(증언자-안승범)
관리자
21-09-27 171
219 납북자-임명근(증언자-임갑희, 임용수)
관리자
21-09-27 178
218 납북자-이완중(증언자-이무성)
관리자
21-09-27 197
217 납북자-김용진(증언자-김윤길)
관리자
21-09-24 188
216 납북자-왕영덕(증언자-왕영식)
관리자
21-09-24 163
215 납북자-박홍구(증언자-박신자, 박정자)
관리자
21-09-24 196
214 납북자-정흥동(증언자-정흥산)
관리자
21-09-24 173
213 납북자-방영흥(증언자-방재흥)
관리자
21-09-24 169
212 납북자-강복만(증언자-강계화)
관리자
21-09-24 183
211 납북자-이재환(증언자-이영선)
관리자
21-09-23 189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