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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왕영덕(증언자-왕영식)
이름: 관리자
2021-09-24 16:27:40  |  조회: 60
190709A 왕 영 덕 ( 王永德)

생년월일: 1917년 8월 15일(음력)
출생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11번지
당시 주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11번지
피랍일: 1951년 2월 1일(음력)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훈장
학력/경력: 한학, 정치 집회 활동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1남 2녀
외모/성격: 엄한 성격의 원칙주의자

증언자
성명: 왕영식(1941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이전부터 남쪽을 동경하고 인민군보다 국군에게 적극적, 호의적임.
• UN군이나 국군에게 정보를 전달한 것을 아버지의 먼 친척 형님이 고발하여 몇 번의 조사를 받음. 이에
이북체제가 되면 피신을 하고, 인민군이 퇴각하면 다시 반공활동을 했음.

직업 및 활동
<농사를 지으셨으나 대대로 서당을 하여 주로 훈장 활동함. 집회 활동도 많이 다니셨다고 함.>
문_ 아버님의 직업을 말씀해주세요.
답_ 농업 쪽에서 종사하셨는데, 실질적으로는 훈장을 주로 하셨어요. 학교는 정확히는 잘 모르고, 대대로 한학을 하셨어요. 저희 증조할아버님부터 한학을 하셔서 쭉 할아버님, 아버님 다 한문 공부를 하셔서 다 서당을 운영하셨어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아버지가 대한청년단을 하셨던 분들이랑 많이 어울려 다녔다고 하시더라고요.
문_ 다른 활동은 하셨나요?
답_ 내가 기억하기에도 굉장히 엄하시고, 아주 원칙주의자셨어요.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나 인근 마을에서도 우리 아버님을 굉장히 무서워하시고 그랬어요. 그리고 장애 가진 사람들이 많이 우리 집에 드나들었어요. 옛날에 벙어리라 그러나요? 청각 장애자. 많이 드나들었어요. 사정을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보듬어 주는 건 우리 아버님밖에 없다. 이래서 자기네들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와서 우리 아버님하고 상의를 했어요. 그런 거 해결해주고 그러신 분이 저희 아버님이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분들이 우리 집에 많이 드나들었다고. 동네에서 모르는 분이 없었어요.
우리 동네가 한 삼십 가구 정도 되는 왕 씨 집성촌이었는데 고려 태조 왕건의 영정하고 열여덟 명의 충신들이 있어요. 정몽주 뭐 이런 충신들 사당이 동네에 있습니다. 임진강변에. 그래서 굉장히 고려시대에 유명한 동네였었고, 자연스럽게 왕 씨 집성촌이 되었고 다른 성들은 거의 다 머슴들 그런 사람들이었죠. 그 외에는 다 왕 씨.

납북 경위
<1·4후퇴 이후 다시 피신 생활을 하며 임진강을 넘어 남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중, 어느 날 저녁 식사 후 다시 동굴로 돌아가려는데 경찰, 인민군, 민간인 대여섯 명이 와서 조사를 한 후 보내준다 하며 데려감.>
문_ 어떻게 납북됐는지요?
답_ 내가 어머님한테 들은 얘기로는 51년. 6·25 일어난 다음 해. 51년 음력으로 2월 1일. 양력으로 3월 9일. 그날 저희가 식사를, 아까 말씀 드렸던 이모님 댁에서 했었어요. 납북 전의 상황을 말씀을 드리면, 50년 6월 25일부터 51년 2월까지 한 6개월 이상
이 걸렸잖아요. 그 기간 동안에 남침도 했고, 국군이나 UN군이 밀고 올라와서 인민군들이 퇴각을 하기도 했고. 또 다시 1월 4일인가 언제 또 다시 밀고 내려와서 제 기억으로는 두 번에서 세 번 정도의 밀고 밀리는 게 있었어요. 어머님 말씀이 그때 당시 이북에 사시면서도 우리 아버님은 늘 남쪽을 동경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왜냐하면 큰 아버님이 밀무역이라고 그러나 이북에서 물건을 가져와서 남쪽에 팔고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고 남쪽 물건 가지고 북쪽 가서 팔고 그런 일을 하시는데 아버님이 많이 따라다녔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런 걸 봤는지 또 한학을 공부하시면서 그래도 나름대로는 본인이 가진 지식이 있으시니까 늘 얘기하면 아, 여기서 못살고 남쪽으로 가야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서 그러셨는지 국군들이나 UN군들이 들어오면 아주 활기가 도셨다고. 그리고 본인이 알고 계시는 정보 이런 거를 UN군이나 국군에게 상세히 전해주시고. 인민군들이 들어오면 소극적이시고, 피해 다니시고 뭐 이랬다고요. 결정적인 것은 UN군이나 국군한테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을 아버님의 먼 친척 형님이 고발을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동생 아무개(우리 아버님)가 사상이 좋지 않다.
늘 우리 어머님이. 그래도 아버님의 형님이니까 서방님이죠. 우리 어머님이 그 서방님한텐 그런 나쁜 짓을 하니까 제 명에 못 살지 어머님이 생각하시기엔 좋지 않은 걸로 아마 일찍 돌아가신 걸로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몇 번 조사를 나왔었나 봐요. 이것저것 물어보고 그러니까 아버님이 가만히 생각하시기에 이게 좋지 않은 징조로 돌아가나 보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이북 체제가 다시 시작되면 피신을 하고 마을에 안 나타나시고, 다른 데나 동굴 같은 데 피신을 하셨다고요. 그리고 인민군이 들어가면 다시 활동을 하시고.
모친 얘기로는 그게 3월 9일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날이 1.4후퇴라는 게 이북이 다시 남침해서 남쪽으로 넘어온 거 아니에요. 그래서 거기가 다시 이북체제가 된 거에요. 그래서 이북체제가 됐으니까 아버님이 다시 동굴에 피신 생활을 하시면서 집에다 말씀하시기를 아무래도 날을 잡아서 남쪽으로 임진강을 건너서 넘어가야 될 테니까 비상식량을 준비를 해라. 미숫가루나 누룽지나 이런 걸 준비를 해 놔라. 그래서 어둠을 타서 임진강을 건너는 길을 아는 사람을 섭외를 해놓았으니까 준비를 해놓아라 그리고 그날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식사를 같이 하고 그때도 어두워져서 동굴에서 나와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시고 다시 동굴로 가시려고. 식사를 막 끝내고 냉수를 드시는데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라고요. 동네 사람이 왔나 이런 생각을 하고 어머님께서 무심코 문을 열어주셨어요. 그랬더니 경찰, 군복 입은 군인하고 민간인하고. 내 기억으로는 한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더라고요. 느닷없이 들어와서 빌고 그럴 새도 없었어요. 아마 한 여덟 시쯤 된 것 같아요. 어두웠거든요. 호롱불 켜놓고 밥 먹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가족들한테 잠깐 조사만 하고 보내드릴 테니까 데리고 가겠습니다. 복장은 경찰복을 입었더라고. 군인은 인민군복. 경찰 두 명, 군인도 두 명, 민간인도 두 명 그렇게 대여섯 명이 왔던 것 같아요. 그렇게 강압적이거나 나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조사할 게 있으니까 그냥 가서 조사하고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대문을 나가면서 보니까 양쪽에서 팔짱을 딱 끼더라고요. 거기서부터는 딱 끼고 가더라고요. 나가실 때는 아무 말씀도 못하셨어요. 말씀하실 새도 없으셨어요. 동굴에 피신해 계실 때 솜바지 이런 거를 만드는 걸 봤어요. 싸가지고 나가시는 걸 봤거든요. 갖다 드리려고 했던 걸 보면 옷은 한복 바지저고리, 솜바지 입으시지 않았나 싶어요. 그 후에 아버님이 섭외하셨다는 안내원이 아버님이 경찰서에 계실 때 집에 오셨다고.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어리신데 형님과 며칠날 만나기로 했는데 날짜가 지났는데 안 오신다 그래서 왔다고요. 그러니까 아, 이래저래 해서 경찰서에 있다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어머니가. 그래서 나도 그분이 집에 온 것을 기억해요.
문_ 6·25전쟁 당시에 동네 분위기는 어떠했나요?
답_ 내가 느끼기에는 이북체제가 다 아시겠지만 통제가 심한 건 사실이었고. 한 달에 몇 번은 군인들이 와서 사상교육을 시킨다든지 그런 게 있었어요. 늘 마을의 큰집에서 모이고, 그럴 때마다 순경들도 오고 군인들도 오고 그런 게 종종 있었고. 특히 기억나는 것은 6·25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거기가 38선 근처니까 군인들, 인민군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그들 생활을 좀 알거든요. 같이 놀기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몇 개월 전부터 군인들 생활이 확 바뀌더라고요.
부식이 굉장히 좋았어요. 맨날 그냥 뭇국 같은 거로 밥을 먹던 사람들이 몇 개월 전부터는 고깃국이 그렇게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고깃국 가지고 먹다가 마을에 와서 김치하고 다른 반찬하고 바꿔 먹는 그런 게 종종 있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계획된 전쟁을 하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이렇게 군인들에게 보급도 잘해주고, 준비를 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고요. 6·25 일어나던 날도 그날 일요일이었지 않습니까.
우리 논이 소위 말하면 천수답이라고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못 내는 논인데 어쩌다 보니 다 내고 마지막으로 늦게 모를 내는 날이었어요. 그날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새벽녘에 큰 포 소리 같은 게 막 나고 그래서 포 연습 같은 거를 일찍 하나? 그렇게만 생각하셨지. 다른 생각은 안 하시고. 나가서 모를 내고 한 아홉 시쯤 됐을까 하는데 비행기가 자꾸 한 쪽으로 내려가는 거에요. 보니까 평상시엔 훈련을 하면 하다가 다시 올라가고 그랬는데 비행기가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는 거에요. 그때 우리 아버님께서 벌써 눈치를 채셨더라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때는 매스컴이 없으니까 그런 걸 알 길이 없는 거예요. 딱 직감하시더라고.
근데 몇 개월 전부터 군인들이 하는 행동이나 오늘 새벽에 포 소리나 지금 비행기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정황을 봐서 이게 일이 생겼다 그래서 일단 집에 들어갔어요.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된 건 아마 오후 세 시쯤 되어서 우리 동네가 38선 근처니까 UN군이나 국군이 북진했을 때는 국군의 지역이 되는 거고 인민군이나 중공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는 북한 체제가 되는 거에요.

납치 이유
<남한 체계를 선호하였고 UN군과 국군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거를 먼 친척이 고발하였음.>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늘 얘기하면 아, 여기서 못살고 남쪽으로 가야 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서 그러셨는지 국군들이나 UN군들이 들어오면 아주 활기가 도셨다고. 그리고 본인이 알고 계시는 정보 이런 거를 UN군이나 국군에게 상세히 전해 주시고. 인민군들이 들어오면 소극적이시고, 피해 다니시고 뭐 이랬다고요. 결정적인 것은 UN군이나 국군한테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을 저희 아버님의 먼 친척 형님이 고발을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동생 아무개(우리 아버님)가 사상이 좋지 않다.

납치 후 소식
<납치 다음 날 연천경찰서에서 면회한 후 이틀 후 다시 면회함. 계속 돌아오지 않자 다시 면회를 하러 갔으나 다른 곳으로 이송되었다며 만나지 못함. 피난을 떠난 수원에서 같이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을 만나 연천에서 윗쪽으로 이동을 했으며, 한 달 정도 강제노역을 당하다가 북쪽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음.>
문_ 아버지에 대한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다음 날, 모친하고 저하고 당숙하고 연천경찰서에 가서 면회 신청을 해서 만났어요. 하룻밤 새 얼굴이 벌써 퀭하시더라고요. 별 거 아니니까 조사 받으면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날 잠깐 면회하고 돌아왔고, 이틀이 지나서도 안 오시니까 나하고 어머님하고만 둘이 또 면회를 갔어요. 근데 얼굴이 더 안 좋아지셨더라고요. 그리고 아마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걱정하지 마라. 설마 어떻게 되겠니? 조사받고 나가겠지 그렇게 하고 다시 왔는데 며칠이 지나도 또 안 오시니까 그때 당숙하고 또 같이 갔어요. 한 4~5일은 지난 것 같아요. 갔는데 면회가 안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왜냐고 물었더니 더 조사할게 있어서 연천경찰서에서 다른 데로 이송이 됐다고. 어디로 갔는지 그건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자기네들도 모르니까 가르쳐줄 수가 없다고. 근데 두 번째 면회 갔을 때, 나는 잘 못 봤는데 어머님이 아버님한테서 쪽지를 몰래 받았다고 하시더라고요. 걱정하지 마라고 하면서 손 붙잡으시면서 몰래 주셨는데, 나중에 말씀하시기를 어머님이 한글을 모르셨다고 해요, 그때는. 그래서 한글을 아시는 분한테 물어보니까 아무래도 빠른 시일 안에 나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조짐을 보니까. 애들 데리고 무조건 기회가 되면 남쪽으로 가라. 내가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탈출을 해서 남쪽으로 가겠다. 그러니까 기회만 되면 가라라고 적힌 걸 주셨다 하더라고요.
어디로 갔는지도 알려주지 않을 뿐더러 소재 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건 두 번째 면회 때 (갑자기 말을 잇지 못하며 눈시울이 붉어짐) 내가 철부지였었으니까. 아버지가 어떤 상황이었고 내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나이였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게 조금 아쉬워요. 사실 커서도. 남쪽에 나와서도.
문_ 동네에서 다른 사람들도 납치나 감금된 일이 있었나요?
답_ 있었어요. 수원으로 저희가 피난을 간 거예요. 거기서 같은 피난 막사에 천막을 쫙 쳐놓고 살았는데, 거기서 아시는 분을 만났다고 하시더라고요. 동네 분. 모친이 소문으로 듣기로는 누구 누가 같이 납북되어 갔다라고 다 알고 계셨는데 그분 중의 한 분이 거기 계셨대요. 그래서 만나러 가셨다고. 그분도 아마 우리 아버님보다 나이가 어렸었나 봐요. 같은 마을에는 안 살았지만 저희 아버님이 여러 마을에 아시는 분이 많으셨으니까. 형수님 아니시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아이고, 형님하고 같이 납북 됐다가 자기는 이만저만 이렇게 해서 나왔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로는 연천에서 다른 지역으로, 철원군 있는 어느 쪽으로 이동했다고. 거기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무슨 교화를 시킨다고 강제 노동을 시켰대요. 그리고 거기서 한 달 정도 있다가 다시 뒤로 포승을 해서 수갑을 채워가지고 그냥 몇 날 며칠을 끌고 북쪽으로 끌고 올라가더래요. 그런데 어느 날 포승을 풀어 놓고 밤에 저녁으로 주먹밥을 주는데 감시가 소홀한 틈에 아무도 없으니까 굴러서 개천가에 빠져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또 다시 포승줄로 묶어 떠나는 걸 보고, 그냥 이 길 저 길 해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자기는 납북되지 않았던 척하고 있다가 6월에 국군이 들어오니까 거기에 같이 피난을 나왔노라고.
문_ 그럼 그때 아버님을 만나셨다고 해요?
답_ 네. 만났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그때 간 게 한 칠십 명 정도 끌려갔는데 끌려가면서도 몇 명은 다 죽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왜냐면 몸이 아프거나 병이 걸려서 따라가지 못하고 처지면 그냥 어디 계곡 같은 데 가서. 가면 총소리가 몇 발 난대요. 그러면 인민군들이 그냥 돌아온대요. 총살을 시키고 나머지만 끌고 가고 그랬다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어디까지 끌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면서 희생 됐을 거라고.
형님도 눈치를 보면서 기회를 노리는 것 같았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자기는 천운이 따라서 그렇게 할 수 있었고 넘어오게 됐다고. 그렇게 말씀을 어머니가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십중팔구는 그때 다 많은 분들이 희생되시지 않았을까. 일반 사람들도 아니고 저들이 생각하기에는 반동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도 희망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희생되시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 같은 것도 사실은 가지고 있었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3개월 후 수원으로 피난을 떠났고 이후 동두천에 정착. 학교는 학비가 없어 그만 두고 카투사로 근무하다 월남파병 다녀옴.>
문_ 남은 가족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사실 말이 남하하는 거지. 아녀자 한 분이 애들 둘을 데리고 선뜻 나선다는 게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었어요. 근데 51년 6월에 다시 UN군하고 군인이 북진을 해서 들어오게 됐어요. 들어와서 한국군 통역하시는 분들이 남쪽으로 피난 가실 분들은 짐을 싸서 어디 모여라 그렇게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남쪽으로 내려가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는데. 그래서 어머니는 군말 없이 짐을 챙기시더라고요. 마을 분들 거의 70~80%는 다 같이 짐 싸서 나오시고. 나머지 한 30%는 거기 사실 거라고 하셨었어요. 내가 알기로는 호주 사람들이 우리를 피신 시켰는데 임진강에서 배 타고 건너가서 군 트럭을 타고 남쪽으로 가게 됐죠.
우리가 그때 수원 쪽에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이 그래도 고향 근처 쪽으로 자꾸 가야지. 전쟁이 뭐 오래 가겠니 몇 개월 있으면 끝나겠지. 고향 근처에 있다가 통일이 되면 다시 들어가자 그래서 차츰 가서 살게 된 게 동두천까지 올라갔어요. 꽤 많이 올라갔죠. 동두천에서 제가 군대 가기 전까지 살았어요. 거기서 정착을 해서 살게 됐죠. 거기 살면서 제가 56년도에 다시 학교를 들어갔어요. 삼학년에 들어가니까 나이가 벌써 정상적인 애들하고 네다섯 살 차이가 나니까 배울 게 없더라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아시니까 한 이 개월 삼학년 하다가 사학년으로 올라가서 사학년에서 몇 개월 있다가 또 오학년으로 올라가고. 그래서 열여섯 살인가에 졸업을 하고, 근데 모친이 가는 데까지는 가야 된다고 그랬어요.
그때는 동두천이 아니고 동두천에서 미군부대가 다시 양주로 이주를 하니까 그 부대 미군 선임하사가 너도 나랑 같이 가자고 그랬어요. 내가 거기 하우스보이였는데, 군대에서 심부름 하고 자고 먹고 구두 닦아주고 그런 걸 했었어요. 근데 자기가 부대가 이전이 되는데 나랑 가자. 갈래 안 갈래 해서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갔어요. 우리 가족이 다 갔죠. 내가 거기 식당에서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 나머지는 식당 선임 하사가 사정을 다 아니까 먹다 남은 거 싸서 엄마, 동생 갖다 줘라. 그러면 갖다 주고 그랬어요. 주 생활원이 나 였어요. 또 내가 미군들 빨래거리를 챙겨다 드리면 어머니가 빨래를 하셔서 잘 다려서 갖다 주면 걔들이 돈을 주고 해서 어머니도 벌이는 하셨죠.
초등학교 졸업하던 해에 그 부대가 완전히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거기 생활도 끝나게 됐고. 빨래하고 뭐하고 해서 돈을 조금 모았어요. 모아서 어머님이 방 두 개 있는 집을 얻으셔서 미군 부대에서 장사를 하셨어요. 한국 사람들이 미군부대에 노무자들로 많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미군 부대에서 물건을 빼내오면 그거를 사서 제가 시외버스 타고 종로 가서 팔고. 그렇게 하면서 중학교를 들어갔어요. 중학교도 늦게 들어가서 정상적으로 다닌 애들하고 네다섯 살 차이가 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공부를 잘해서 중학교 일, 이, 삼학년은 장학생으로 다녔죠.
군대는 사실 내가 참 운이 좋아서 훈련 받고 카투사로 가서 주특기를 의무병으로 받았어요. 나중에 카투사에 가서도 군단 의무실에서 근무를 했고, 또 하우스보이를 한 경험 때문에 영어가 조금 통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다른 거는 다 못 해도 영어 하나만큼은 아주 특출하니 재능이 있어서 그래서 제가 카투사를 가게 됐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에서 지원해 준 것은 있나요?
답_ 도움 받은 거나 그런 거에 대한 기억은 없어요.
문_ 아버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하셨나요?
답_ 그런 건 안 했어요. 피난 다니느라 바빠서요. 사실 처음에는 이산가족신청도 적십자사에 내가 했었어요. 만약에 아버님이 탈출을 하셔서 남쪽으로 넘어오셨으면 고향도 다 알고 또 무슨 경로를 통해서든지 올 수 있는 그런 능력도 가지고 계세요. 근데 여태까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끌려가시다 잘못되셨던지 아직 북에 계시던지 둘 중 하나지 남쪽으로 내려오셨을 리는 없다. 이산가족 신청을 해놨으니까 그 결과나 기다려보자고 그랬죠. 허튼 짓 하느니. 신청만하고 별로 큰 기대는 안 했어요.
문_ 어머님이 아버님에 대해서는 주로 뭐라고 얘기하셨나요?
답_ 어머님이 2014년에 작고하셨는데, 아버님에 관하여 거의 말씀 안 하셨어요. 늘 얘기는 너희 아버지는 고지식해서, 좀 세상살이 둥실둥실 그러셔야 되는데 그랬으면 이런 일 안 당하셨을 텐데. 꿀리는 거 잘 못 보시는 성격이시고.

호적 정리
<2017년에 납북자 결정을 받은 후, 실종 선고를 받아 호적 정리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사실 어머님이 살아 계실 적에는 아버님도 호적 정리를 안 했어요. 어머님이 나 죽
으면 해라 뭐 이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일부러 안 했고, 어머님이 2014년도에 돌아가시고 나서 정식 법원에다 절차를 밟아서 2017년에 했어요. 납북자 결정을 받은 후에 했어요. 그래서 법원으로부터 정식으로 실종 선고를 받았죠. 실종 선고가 결정이 되면 사망으로 호적 정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정부 지방 법원에서 법적 정리를 끝내서 사망으로 법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납북으로 하면 결정이 금방 안 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납북자 결정도 받았고 그러니까 일단 호적 정리를 해서 끝내는 게 좋겠다 싶어서 법적으로 정리를 끝냈습니다.

연좌제 피해
<처음 은행에 입행할 때 신원조회가 불합격됨.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인민군 장교였던 사촌 누님 때문이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1969년도 10월에 내가 은행에 입행을 했어요. 고등학교도 졸업 못 했는데 어떻게 입행을 하나 그랬는데 월남 갔다 온 거, 그 군 경력을 인정 해줬어요. 처음에는 안 된다고 그랬는데 인사과에 가서 매형이 얘기를 하고 처음에 신원조회가 사실은 안 됐어요. 신원조회가 불합격됐다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내가 신원조회 불합격이 될 이유가 있나? 대한민국 청년으로 대한민국 군대 생활을 했고 자유수호를 위해서 월남까지 가서 전투까지 한 사람인데 걸릴 게 뭐가 있냐는 말이에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인데 그래서 인사과에서도 옥신각신 했었나 봐요. 그래서 결국은 취업이 됐어요. 처음에 신원조회 때문에 안 되겠습니다 그랬을 때 아버님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의외였었어요. 왜냐면 사실 아버님은 남쪽을 위해서 하시다가 납북이 되신 거 아니에요.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사촌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누님이 인민군 여자 장교였어요. 나중에 안 일인데 아버님은 이북에서 뭐 하려다가 어떻게 된 게 아니고 민주주의를, 국군들을 위해서 뭘 한 거니까 그렇게 문제가 안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사촌 누님 때문이지 않았나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신원조회 불합격되고 제가 알기로는 한 삼 개월 정도 옥신각신했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정부가 납북자 문제에 좀 더 관심을 써주길 바람.>
문_ 정부에게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사실 40대 초반까지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바쁘다 보니까 아버님에 대한 생각을 사실 못했고.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어요. 50대가 넘어가면서 슬슬 깨닫기 시작을 했고 그때야 아버님의 빈자리가 보이고. 이제는 내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리액션을 해야 되겠다 생각이 들어서 납북자 문제, 이산 문제에 눈을 뜨기 시작을 했고 정부가 바뀔 적마다 신청도 해놨어요. 그래도 정부가 바뀔 때마다 어떤 희망을 가졌거든요.
이미일 회장님 하시는 일에 마음도 있고 얼마씩 회비도 내고는 있지만 크게 기여를 한 것도 없고, 또 크게 공도 세우지 못했어요.
그래도 청와대 앞에서 큰 행사가 있다던지 여의도에서 1인 피켓시위 할 때 가서 참여도 하고 뭐 그런 거는 했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저는 사실은 다 포기를 했어요. 안 된다. 납북자와 실종자는 엄연히 개념 자체가 다르고 말이 바뀌었을 때, 법이 바뀌었을 때는 180도 달라지는 건데, 개인적으로는 제가 80인데,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다 이제 사실은 접었어요. 신앙에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사랑으로 감싸 줘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했던 모든 사람들을 다 내려놓고 용서하기로 했어요.
또 우리 아버님 문제도 어떨 때는 잠을 못 자요. 젊었을 땐 안 그랬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나니까. 그리워질 때는 그저 막 그리워지고 그러더라고요. 그 대신 내가 눈을 감고 죽을 때까지 잊지는 않을 거예요. 잊지는 않지만 다 용서는 했어요. 우리 어머님도 늘 기도를 하실 때 용서하자. 그래야 나도 편하고. 하늘에 계시던 어디 계시던 돌아가신 분도 평온하다. 자꾸 따지면 뭐하나. 나도 이제 80이면 인생에서 살 날이 얼마 안 남았거든요. 그거를 다 쥐고 가는 것도 부담스럽고. 다 내려놓고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우리 가족들한테만 내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보상을 받아서 뭘 해요 내가. 보상을 하는 얘기에 대해서도 나는 그랬어요. 돈 몇 푼 받아서 뭘 하겠느냐고.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어디에 계시든 편하게 계시기를 바라며 보고 싶음.>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살아계실지 또 하늘나라에 계실지 돌아가셨으면 어디에 묻혀 계실지. 예측은 할 수 없지만 만에 하나 살아 계신다면 그래도 이 자식이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또 만나 뵙고 만나면 지금까지 불러보지 못했던 (울먹이며) 당당하게 ‘아버님’이라고 크게 불러보고 싶은 그런 심정이 있어요. 어디에 계시든 지금까지 아버님과 함께 하지는 못 했지만 늘 생각하고 머릿속에 있었고 아버님을 위해서 기도했으니까, 어디에 계시든 참 편하게 영안을 누리시기를 빌고 있습니다. 아버님 보고 싶습니다. (울먹이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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