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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용진(증언자-김윤길)
이름: 관리자
2021-09-24 16:31:45  |  조회: 57
190710A 김 용 진 ( 金容鎭)

생년월일: 1922년 2월 1일
출생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당시 주소: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피랍일: 1950년 8월 16일 오전 6시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자동차 정비소 운영
직계/부양가족: 모, 남동생, 배우자, 2남 1녀
외모/성격: 180cm가 넘는 큰 키
/ 똑똑하며 지는 걸 싫어함

증언자
성명: 김윤길(1944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일본으로 혼자 유학. 기술을 배워 와서 관공서 자동차 수리 전문 일인자였음. 이승만 정권 때 기능 올림
픽에 나가 1등을 함.
• 피난 가다가 한강다리가 끊겨 돌아와 집에 숨어 있다가 잡혀 감. 누군가 예의주시했던 거 같음.
• 새벽 아침에 무장한 인민군 한 명과 동네 빨갱이 두 명이 들이닥쳐 끌려 간 후 소식이 없음.

직업 및 활동
<자동차 정비소 사장으로 정비소 두 곳 운영. 원효로와 종로 5가 사이에 위치했음.>
문_ 당시 아버님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답_ 6·25사변 났을 적에는 저희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 공장을 했어요. 그 원효로 하고
종로 5가 이화예식장 옆에 두 군데서 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우리 할머니가 그러더라
고, 학교 다니다가 일본으로 내뺐대요. 그때는 연락선 타고 일본에 갔어요. 일본에 가
서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운 거예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우리 아버지가 자동차 정비
기술 일인자였다고 알고 있어요. 왜 그러냐면 6·25사변 때 우리 아버지가 집에서 숨어
있다가 뭐냐 하면, 사실 그 동네 빨갱이들이 그런 거고 그리고 저희 작은아버지가 군
인이었어요. 그래서 삼각지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매주 토요일마다 외출 나오면 또 우
리가 살 만하니까 많이 해 먹였대요. 떡도 해 먹이고 뭐 잔뜩 해 먹이고 하루 저녁 자고
일요일 저녁때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집을 갖다가 작은 부대라는 별명이
났었어요. 군인들이 많이 몰리니까, 외출해서. 그렇게 자금 부대에다가 또 우리가 살
만하니까는 동네에서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조금 살면 그런 걸로 인해 가지고
그때 잡혀가실 때 인민군하고 동네 빨갱이 사람 셋이서 와서 그냥 끌고 갔는데, 반동분
자라고. 왜냐하면 협조 안 하는 악질분자라고 그래서 우리 자동차 공장도 다 뺏겼어요.
문_ 그 외 다른 활동은 어떤 것이 있나요?
답_ 어머니 말씀으로는 우리 아버지는 좀 영리하셨다던데. 우리 할머니가 얘기를 많이
하시지. 근데 영리하시고 똑똑하고. 뭐 똑똑하니까 그렇게 하셨겠죠. 키가 커서 친구들
이 우리 아버지 별명을 전보선대(전봇대)라고 했어요. 1미터 80이 넘은 거 같아요. 그
래서 별명이 전보선대고 이제 있다가 사진 보시면 알지만. 하여튼 그때는 우리 동네에
서 우리 아버지가 말도 타고 다니시고 그랬어요. 집에서 말도 기르고. 그것도 짐승이니
까는 먹여주고 닦아주고 다 해줘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거를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
의 아버님이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너무 고생하신다고 그 말을 팔았다고 그
런 얘기도 하시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우리나라에 6·25사변 전에는 한복 긴 옷도 입
고 다니고 그랬어요. 그럴 적에 양복 깨끗이 입고 다니시고 그리고 우리나라 관공서 차
를 전문으로 고쳤어요. 친구들이 많이 와요. 관직에 있는 사람들 만나서 집에 데려와서
옛날에는 어디 가서 먹는 거보다 집에 데려와서 먹이고 그러더라고요.

납북 경위
<구장이 밀고하여 인민군복을 입은 군인 한 명과 동네 빨갱이로 보이는 사람 둘이 아침
일찍 집으로 들어와 조사할 게 있다며 끌고 감.>
문_ 어떻게 납북되셨나요?
답_ 한 팔월쯤 될 걸. 그 노량진 다리 건너기 전에 거기서 다시 들어왔어요. 그래 가지
고 숨어 있던 거죠. 그런데 저희 아버님은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게 있냐 뭐를 숨냐. 그
런데 저희 집 옆에 옛날에는 솜을 틀었어요. 옛날에는 솜이불이니까는 솜을 틀어가지고
그 솜 트는 집이 있었는데, 그때 낮에도 숨어 있을 때는 솜 트는 거는 쌓아 놨잖아요. 그
솜 속에서 숨어 있다가 잡혀갔다니까요. 새벽에. 낮에는 거기 숨어 있었고 들어와서 그
집, 집과 집 사이에 창문이 있잖아요. 그쪽으로 넘어와서 저녁에 자다가 집에서 잡혀간
거죠. 끌려갔을 때가 새벽인데 안개가 뿌여가지고 새벽이니까. 우리 집을 예의주시하고
우리 아버지 잡으려고 군인이 인민군 복장한 사람 하나 보고, 그 다음에 짬뽕 모자 도루
이치라고 하지 일본말로 그 모자 이렇게 납작한 거 그 모자 쓴 거 두 사람하고 셋이서 잡
아갔죠. 조사할 거 있으니까 간다고 하고 강제로 끌고 간 거지. 집이 난리 났었잖아요.
울고불고. 새벽 6시쯤 됐을 거예요. 인민군이 하나 총 가져오고 그 다음에 두 사람이 같
이 따라온 게 민간인 복이니까. 난리가 났으니까 (나는 자다가) 깬 거죠. 강압적으로 데
려간 거죠. 조사한다고 하면 누가 쫓아갈 사람이 있어요? 총 들고 둘이서 와서 옆에서
팔짱 끼고 데려간 거니까 저항도 안 하고 뭐 조사받을 거 있어 간다고 그러니까 순순히
가셨죠. 내가 봤을 땐 그래요. 난리 치고 가니 안 가니 이런 옥신각신은 없었던 거 같아
요.
문_ 피난은 가셨는지요?
답_ 아홉 살이지 따지면. 따지면 그런 거 같은데 내가 봤을 때. 여덟살 인가. 초등학교
들어가서 얼마 안 됐죠. 그래서 1.4 후퇴 때 피난 갈 때 그때 가방이 제일 좋은 게 뭐냐
고 그러면 이 근래도 있었지만 가죽 가방 미는 거 있어요. 지금은 없는 거 그거 메고 피
난 갔어요. 기억나는 게 바로 그거예요. 6·25사변 나가지고 피난을 우리는 자동차를 가
지고 나가는데 그 주위 사람들 있으니까 우리도 태워달라고 하고 피난 가는 사람이 몸만
가면 되는데 이불도 싣고 뭐 하고 가다 보니까는 한강 다리가 끊어져서 다시 들어온 거
라고요 사실은. 그러니까 예의주시하고 우리 집을 감시를 했던 거 같아. 아버지 끌려가
시고 1.4 후퇴 때 천안으로 고모네 식구랑 할머니, 엄마, 동생들이랑 다시 갔죠.

납치 이유
<집이 부유하여 납치됐다 생각됨.>
문_ 왜 납치되셨을까요?
답_ 피난가려다 다리가 끊겨 못 가고 돌아와서 생활을 못하고 그때는 숨어있는 거지. 우
리 집이 작은 부대라고 6·25전쟁 전 군인인 작은아버지와 군인들이 우리 집에 자주 와
서 잘 먹고 잘 사는 집 이거고. 나중에 붙잡혀 갈 때는 반동분자라고 해서 붙잡혀 갔어
요. 그 소리는 들었어요. 반동분자. 저는 어려서 기억을 못 해도, 숨어 있는 이유가 뭐
예요? 옛날에는 잘 살고 잘 먹는 것이 문제에요. 그때 저희가 살던 데가 마포 형무소 그
근처에서 살았는데, 사실은 그때 통장이 있잖아요. 구장이라고 그랬어요 구장. 그래 가
지고 그 사람이 인민군 앞잡이로 해서 다 누구 집은 누구, 누구 집은 누구 해서 붙잡아
갔는데 그 여자가. 여자예요 그때 구장이, 근데 내가 몹쓸 거를 봤어요. 몹쓸 게 뭐냐면
그 여자가 찔러서 간 거지. 인민군이 아니라, 동네 빨갱이들인지 뭔지 그런 사람이 그렇
게 했다는 거지.

납치 후 소식
<아버지를 붙잡아가고 3일 후에 다시 와서 기능올림픽 트로피 등을 가져가고 그 가운데
아버지의 시계를 차고 온 동네 빨갱이도 있었다고 함. 끌려간 이후 시신들까지 뒤집어 보
았지만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음.>
문_ 아버지의 피랍 후에는 어떠했나요?
답_ 저희 아버지가 기능올림픽 일등 한 거 가, 옛날에 할머니가 얘기를 하시는데 기능올
림픽을 해서 일등을 하면 할머니가 그러더라고 군악을 잡히고 온다고. 나팔을 불고 북
치고 그러고 오면서 금으로 된 트로피 있잖아요. 그거를 은으로 만든 거, 금이 아니고.
은으로 만든 트로피도 걔네들이 다 갖고 갔어요. 우리 아버지 잡아간 인민군하고 그놈들
이. (끌고 간) 그날 갖고 간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 붙잡혀 가고 삼일 있다 와 가지고 그
거를 갖고 가고, 우리 아버지가 산 금 시계를 뺏어서 그 놈이 차고 왔더라고 우리 할머니
가 그러더라고.
문_ 아는 사람이었나요?
답_ 동네 빨갱이 같은 놈이니까 모르죠. 그 놈 누구누구 이런 거는 모르죠. 근데 구장이
라는 여자가 그렇게 해서 붙잡아 가서. 왜냐하면 그 동네가 사는 사람끼리 감정이 안 좋
은 걸로 붙잡아 가서 죽여가지고 그때 공덕동에서 만리동 고개 넘어가는 그게 큰고개라
고 그랬어요. 그 만리동 고개 넘어가는데 거기에 파출소가 있었거든. 그 파출소 뒤에 옛
날에는 파출소고 형무소고 전부 밭이야 밭. 그래 거기다가 묻어 버렸다고. 사람을 죽여
가지고. 근데 묻어가지고, 뭐냐면 9.28 수복하면서 우리는 아군들이 들어왔잖아요. 인
천 상륙해서 들어와서 아군들이 들어왔는데 저희 작은아버지가 들어왔더라고. 한강 너
머니까 제일 먼저 온 거 아니에요. 그래 와서 형님이 잡혀갔다니까는 아무리 찾아도 없
었던 거고 9.28 수복하면서, 아니 얘기하다가 말았는데, 파출소 뒤에다가 사람 죽인 거
를 묻어놨어요. 몇 사람 되더라고 내가 어렸을 때 본 게. 아주 못된 거 본거지. 그래서
묻은 거를 이 여자가 밀고해서 죽은 사람들이라 (아군들이 들어오고) 그래서 그 구장이
라는 여자가 묶여가지고 왔어요. 와 가지고 사람들이 어디다 묻었냐? 여기다 묻었다 그
러니까 동네 사람들이 쫙 보러 온 거 아니에요. 나도 어려서 뭔가 하고 보니까는 그거
를 시체를 꺼내가지고 시체 옆에서 구대기가 나더라고. 구대기가 나는데 물 떠다 주고
다 씻기라 그러더라고 그 여자보고. 그 여자가 안 씻길 수가 없잖아요. 그렇죠? 씻기는
데 거기서 총살시켜서 거기다가 죽여버리더라고. 군인이 와서 뭐냐고 그러면 밀고하고
동네 빨갱이들을 잡은 거예요 전부 잡아들인 거지. 그게 또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그
게? 내가 봤을 때는 그러네, 지나고 보니까는 9.28되기 전에 총으로 쏠 때 민간인한테
는 손으로 엎드리라고 한 곳이 미근동이야. 그리고 이제 9.28 수복할 때 인천 상륙해서
들어올 때 그냥 밤에, 그 총알이 서로 막 해서, 총알이 빨게. 내가 어렸을 때 보니까 총
알 불이 그게 시뻘게요. 그게 왔다 갔다 하는 거 그거 느껴지고, 또 이제 가다가 많이 죽
었어요. 붙잡혀서 죽는지 인민군도 많이 죽고 그랬어요. 근데 그때 우리 할머니하고 우
리 외할머니가 계셨는데 그 만리동서부터 마포 일대에 사람 쓰러져 죽은 거를 우리 아들
인가 그러고, 전부 할머니가 울면서 얘기하는데, 송장을 다 뒤집어 봤대요. 그 보통 사
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죠?
문_ 그 후 소식은 있었나요?
답_ 없었죠. 그래서 납치당하고 고만이에요. (누가 봤다더라) 그것도 없었죠. 여기저기
뭐 (연락) 할 데는 다했죠. 그리고 그 이후에 아버지 끌려가고 난 다음에 우리나라 사람
인데 인민군이 아버지 친구라고 그러는 사람이 왔었대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고. 와 가지
고, 우리 할머니가 꼬치장 찌개를 잘해요. 두부 넣고 고추장 찌개 하는 거를 아주 그게
일품이라고 그러셨어. 그래서 어머님, 나 그 어머님이 해주는 고추장 찌개를 먹고 싶어
서 왔습니다. 그러면서 두부찌개를 먹으면서 우리 아버지 물어보고 그러더래요. 그래서
얘기를 했더니 그 사람도 다 찾아봤는데도 모른다고 그러더래요.

남은 가족의 생활
<어머니는 재가하여 연락이 끊어지고 할머니 손에 자람. 집을 가지고 있어 월세 받은 돈
과 집에 있는 유물들을 팔아 생활했고, 중학교 졸업 후 기술을 배우려고 양복점에서 일을
시작하여 자영업을 해왔음.>
문_ 납북된 후 가족들 생활은 어떠셨나요?
답_ 어머니는 재가하셨고 그러니까 살기가 어려웠지. 우리 아버지가 하던 거니까 우리
할머니가 나이가 많으시니까 모르는 거죠 다. 그렇게 흐지부지 6·25 (전쟁 통에) 없어
졌어. 그러니까 이제 집 한 채만 남은 거지. 사실은 그때 1.4 후퇴 때 피난 갔다 오니까
막 폭격을 당해서 여기저기 집들이 쓰러져서 불타고 없어지고 우리 집은 남았어요. 그
때. 그래서 그거 가지고 우리가 좀 자란 거지. 먹고 살고. 우리 삼 남매 있었거든요. 그
렇게 끌고 간 사람들이 인민군도 아닌 민간인 복장이야. 왜 더 기억나냐 하면 그때 마포
형무소가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점령을 했어요. 감방에 있는 사람들 다 내보내 버렸어. 근
데 인민군 애들이 보초를 서는데, 세월을 이렇게 지나고 나서 생각을 하니까, 한 열일곱
열여덟 이런 애들이고, 자꾸 우리 어린애들을 불러가지고 보초 서는데 심심하니까 같이
놀자고 그러고, ‘동무야 나오너라’ 이런 노래도 가르쳐 주고 그러더라고. 그리고 그 당시
에는 그렇게 되고, 벌써 식량이 떨어지잖아요. 잘 먹고 잘 살다 식량이 없으니까는 그 풀
있잖아요 풀. 명아주 이런 거 갔다가 간장 된장 꼬치장을 담아 놓잖아요 장독대에다가.
그거를 갖다가 삶아 가지고 독기를 뺀다고 해서 빼서 그거를 묻혀서 먹고 꽁보리밥도 없
어서 못 먹을 때니까. 그 이후로는 한 팔월 정도 되면 꽁보리밥도 없어서 못 먹어요.
할머니는 울면서 세월을 보낸 거죠. 끌려가고 나서도 달이 있으면 달을 쳐다보시고. 내
가 밤에도 봤어요 장독대에다가 옥수물이라나 물을 떠 놓고 빌면서 우리 아들 (제가 어
렸을 때 항만이라고 했어요. 지금은 김윤길이지만.) 항만이 아범이 살아있으면 저 달을
보겠지? 이런 얘기를 내가 들었어요. 그러고 막 빌고. 또 느끼는 게 뭐냐면 아버지가 돌
아오시는 날까지 맨날 밥을 하면 1.4 후퇴 피난갔다 와서도 그랬어요. 꼭 밥을 한 그릇
떠가지고 겨울에는 이불 밑에 덮어놔. 네 아범이 들어오면 먹을 거다 그러고. 지금 생각
하면 가슴이 아프지 내가 (울먹이며).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기술자니
까 데려가서 죽이지는 않았을 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또 작은 부대 악
질분자니까 죽였을 수도 있는 거다 뭐 이런 얘기 하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 다 있어.
그리고 또 점 보러 많이 다니시더라고 살았나 죽었나. 그리고 밥을 아랫목에다 놓고도
그때는 놋그릇이에요. 그때는 밥에서 물이 이렇게 흐르면 아버지가 살아있는 거고 물이
안 흐르면 돌아가신 거라고 그러더라고. (잠시 울먹이며) 맨날 옥수물 떠놓고 장독대에
서 달이 보름달처럼 청청하면 우리 용진이가 살아있으면 저 달을 보고 있겠지. 할머니가
우시는 걸 내가 느꼈었죠.
문_ 생계는 어떻게 하셨나요?
답_ 엄마는 이런 얘기 여기서 하면 안 되는데 자기 팔자를 고쳐 간 거지. 막내가 사변둥
이인데, 막내 젖떼고 재가하셨어요. 그러니까는 살기가 어려웠지. 집이라도 한 채 있으
니까는 방세 몇 푼 받아가지고 쌀은 팔아먹었어 반찬 해먹을 돈은 없고 할머니가 그때
보니까는 쌀 팔고 무슨 연탄이라던가 한 달 땐 거 뜨듯한대서 잠은 자야겠고 그런 거 정
도 하는 거는 됐어요. 근데 다른 거 쓸 거는 하나도 없었거든. 그때 저희 옆에 공덕동 살
때 행남약국이라고 있었어요. 한의원. 그 사람이 이제 공덕 삼덕 동대장이야. 그때 미
국 원조 들어와서 못 사는 사람들 밀가루 나눠주고 그랬잖아요. 강냉이가루 나눠주고.
그때 그 사람이 다른 데 한 포 주면 우리 두 포 주고 그랬어요. 우리 집에 유물이 많았어
요. 우리 할머니가 옛날 수원 사또의 딸이에요. 그래 가지고 그 다랑어리 같은 거 이런
거 있는 거 백두산 갔다 와서 나무 깎아서 만든 목판 뭐 하여튼 유물이 많았는데, 행남약
국 이정화 씨가 우리가 6·25사변 나고 못 사니까는 끼니가 없으니까는 그 사람이 그 유
물을 보고서 그냥 할머니 이거 저한테 파세요 해서 그냥 팔은 게 개 값에 준 거지 진짜.
밀가루 받아먹고 이런 걸로 그냥 준 거에요. 남의 집 다니면서 돈 벌어 온 거죠. 그래서
그걸로 반찬 사 먹고 이런 거 보태 쓰고 그러다가 이제 돈 좀 벌만하니까는 성장해가지
고 군대 가야 되잖아요, 그렇죠?
군대 가서 또 삼년 있다가 나오고. 양복점 가서 기술을 배우라고 그러더라고. 사람은 언
제든지 옷을 입어야 하니까 그게 좋다고 그러면서. 그래서 내가 명동 친구네 양복점에
입사를 했어요. 기술을 배워 서소문에 양복점을 시작했고 중국음식점도 했고 남동생은
조명기술 배워 역시 자영업으로 생활했지. 내 동생 있잖아요. 걔도 실질적으로 나와 생
활한 게 똑같아요. 왜냐면 공부를 누가 많이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월사금. 그때는 월
사금이라고 그랬지 수업료를. 그거 대줄 사람도 없고 그리고 걔가 조명기술 배우러 남의
집살이를 했는데, 조명사업해서 돈 많이 벌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신고는 하셨는지요?
답_ 그 전에 납북된 사람들 신고하라고 해서 했었죠. 1.4후퇴 피난 갔다 와서 우리 치안
이 조금 안정 됐을 때 그거 조사를 했죠.

호적 정리
<문제가 되어 나중에 정리함.>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호적 정리는 안 됐었죠. 그러니깐 그 호적이 안 되니까는 문제가 생기더라고. 아버
지가 살아있는 걸로 돼있잖아요. 사망신고가 안 되니까. 그래서 그거를 나중에 찾아가
니까는 그걸 해주더라고 나중에.

연좌제 피해
<없었음.>

정부에 바라는 말
<생사확인하고 유골이라도 찾고 싶음.>
문_ 정부에 바라는 바를 말씀해주세요.
답_ 아니 유골이라도 찾아서 줘야 되는 게 원칙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우리
이미일 이사장님에게 너무 고맙게 생각해요. 왜 그러냐라고 하면 (흐느끼며) 우리 아버
님이 붙잡혀 가 가지고, 뭐 제사를 지낼 수가 있어 뭐가 있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근데
납북자기념관 임진각에 만들어줘 가지고, 거기에다가 위패를 만들어줬잖아요. 그 이름.
그게 위패에요. 그러니깐, 아. 내가 죽어도 우리 아버지는 남아 있구나 이런 거를 내가
(눈물을 닦으며) 아이, 이런 걸 보이면 안 되는데 미안해요. (연신 눈물을 닦으며) 그래
서 그 위패를 하나라도 해준 것을 너무 고맙게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면 흔
적이 없어지잖아요. 그죠? 그리고 제가 저희집에 있는, 저 뭐야 유품들을, 그때는 국무
총리가 했어요. 내가 갖다줬어요. 광화문이니까 집이 가까우니까. 광화문 교보빌딩 있
을 때. 거기서 내가 제일 많이 가져왔대요. 임진각에 우리 기념관 만들어 놓은 데도 저
희 유품이 좀 여러 개 있어요. 거기요. 우리 아버지. 아이, 자꾸 물어보면 눈물이 앞서
가지고… 우리 아버지! 원래 이러지 말아야 되는데…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그때 너무 어리고 그래서 정이 특별한 거는 없죠. 그래도 어린 나이에 이렇게 보며
는 아버지가 말 타고 다니는 것도 보고 또 그 당시에는 말 타고 다닐 정도면 아주 인텔리
급이에요. 그리고 뭐냐 그러면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시고 그러니까는 동네에서 그래서
잡혀간 거 같아. 내가 보기에는. 그러고 자꾸 할머니도 도망가라 그러고 여기 이런 데
있을 땐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붙잡혀 가면 큰일 난다. 아니 내가 무슨 죄가 있냐고. 그런
얘기는 들은 적 있어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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