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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박수홍(증언자-박동화)
이름: 관리자
2021-09-27 15:26:13  |  조회: 203
190924A 박 수 홍 ( 朴壽弘)

생년월일: 1911년 5월 25일
출생지: 강원도 양구 방산리
당시 주소: 춘천 소양로2가 기와집골
피랍일: 1951년 1월 23일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춘천 군청 근무
학력/경력: 농업학교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3녀
외모/성격: 유달리 꼼꼼하고 자상한 성격

증언자
성명: 박동화 (1938년생)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무장한 빨치산들이 밤 12시에 들이닥쳐 지형을 알려달라며 동행을 요구. 이에 따라 나갔다가 납북자의
공무원 신분을 아는 지방 빨갱이와 마주쳐 집에 들어와 방공호로 은신하려는 순간 또 다른 무장 빨치산
들이 따라 들어와 경찰이 사는 집을 알려 달라고 하여 나간 후 소식 두절.
• 피난을 갔지만 중공군이 앞지르고 어린 자식들 때문에 집으로 되 돌아와 방공호를 파고 낮에는 방공호
로, 밤에는 집에서 잠을 잤음.
• 봉학고개 너머에 있는 철원 노동당사 지하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증언자가 직접 보았고, 다음날 또 찾아
갔으나 평양 갔다는 말만 인근에서 전해 들음.

직업 및 활동
<농업학교 졸업. 춘천 군청에 다녔고, 동네에서 소문난 일꾼으로 집안일 돌보며 농사도
지었음.>
문_ 당시 아버님은 무슨 일을 하셨나요?
답_ 춘천 군청에 다니셨고, 그전에는 다른 군청에도 있었어요. 내금강이라는 데서 살았
다는 걸 기억해. 그때 유명한 장안사도 가고 사진도 찍은 기억이 나요. 학교는 농업학교
다니신 걸로 알고 있어요. (사진을 보여주며) 우리 아버지인데 군청에 다닐 때 찍은 것
같아요. 이곳이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 입구의 다리 같아요. 야유회 가서 찍은 거고요.
(다른 사진을 보여주며) 이것은 학교 다닐 때 찍은 건데 농업학교 같아요. 여기 소화 11
년이라고 쓰여 있는데 소화 11년이면 서기 36년이에요. 내가 태어나기 전이지.
문_ 당시에 같이 살던 가족은 누구였는지요?
답_ 아버지, 어머니, 누님, 나, 여동생, 남동생 다 같이 살았지. 막내가 그때 세 살인가
그랬습니다. 그 위에 사내 동생이 여섯 살인가 그랬는데 죽었지요. 아버지를 그렇게 따
르고 아버지도 그렇게 귀여워 했었는데, 아버지가 납북 당한 다음에 비실비실 앓다가 죽
었어요.
문_ 아버님의 외모나 성격은 어떠셨나요?
답_ 아주 꼼꼼했지. 철저하고 빈틈없고 살림도 아버지께서 다 하셨어요. 어머니는 거의
밥만 하셨고 쌀 사오고, 부식 사오는 것도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서 다 하셨어요. 그때는
여기가 아니고 기와집 거리라고 춘천에서 꽤 부자가 살던 동네에서 살았어요. 소양로2가
기와집골이요. 좋은 아버지셨고 모든 일에 유별나게 꼼꼼하셨어요. 춘천역 쪽에 밭이 있
었는데 아침에 일어나셔서 맨발로 거름통 짊어지고 밭에 가 흙거름도 주고 농사 지으시
고, 매일 아침 밭에 갔다 와서 냉수마찰 하면서 건강관리도 철저하게 하셨어요.

납북 경위
<1.4 후퇴 이후 피난을 가다가 중공군이 앞지르게 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낮에는 방
공호, 밤에는 집에서 생활. 총을 맨 빨치산 서너 명이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를 잠깐 데리
고 나갔는데 또 다른 빨치산들이 뒤 따라 와 동네 경찰집에 직접 데려다 달라고 요청하여
함께 나갔다 돌아오지 않음.>
문_ 6·25 전쟁 터지기 전에 마을 분위기가 어땠나요?
답_ 아주 좋았어요. 우리 옆집은 교장 선생님 댁이었어요. 길 건너편에는 경찰이 사셨구
요. 세 분 나이가 다 비슷해. 아버지가 제일 위, 그 다음이 앞 집에 사신 분, 그 다음이
교장 선생님이시고. 삼 형제라고 하면서 가깝게 지냈다고. 6·25사변 나던 해에 아버지
가 40세이셨지. 네 집, 내 집 할 거 없이 행사가 있으면 왔다 갔다 하고, 같이 술도 나누
고 형제같이 지냈어요.
문_ 아버님이 언제 납북되셨는지요?
답_ 51년 1.4후퇴 때 중공군이 남침한 거야. 그 이후, 1월 23일쯤 납북 당하신 것으로
기억을 해요.

납치 이유
<지역 치안 담당이라고 머슴이 밀고해 잡혀 감.>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춘천 남면에 발산인가 광판인가까지 갔는데, 중공군이 앞질러 와서 더 갈 수가 없었
어요. 객지에서 먹을 것도 그렇고 모든 게 다 불편하니까 아버지가 나만 데리고 집으로
오셨어요. 집 뒤에 축대가 한 4-5미터 있었는데, 낮에 폭격이 심하니까 방공호로 사용
하기 위해 그 밑을 아버지랑 둘이 팠어요. 그 다음에 식구들을 모두 데리고 와서 거주를
한 거야. 춘천은 대부분 재바다가 되었는데 기와집골은 그렇게 피해를 안 봤어요. 그저
비행기가 낮에 와서 폭격을 해서 낮에는 방공호 들어가 있고 저녁에는 나와서 방에서 자
고, 그렇게 생활을 한 지 열흘이나 보름쯤 됐나?
문_ 납북되던 날 상황을 말씀해주세요.
답_ 어느 날은 밤 12시쯤 됐는데 대문을 다 걸어두었는데도 방문 앞에서 서너 명이 문 두들
기며 보자고 소리를 지르잖아. 나가니까 장총을 들고 서 있는데 우리 집에서 신호탄이 올라
갔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그걸 확인하러 왔다며 가택 수색을 하더라고요. 복장이 빨치산
같았어요. 인민군 정복은 아니야. 짝 달라붙는 남자 모자를 쓰고 있었어요. (베레모를 보여
주며) 이런 것과 조금 차이는 있지. 들어와서 다 뒤져보니 신호탄을 쏜 증거가 없잖아 .
문_ 아버님은 어디 계셨는지요?
답_ 집에 계셨지. 자다가 그랬으니까요. 빨치산들이 집안을 다 뒤진 거야. 신호탄을 쐈는
지 그 증거물을 뒤져서 찾는 거야. 다락도 올라가고 다 뒤졌어. 그런데 증거가 있어야지.
신호탄을 쏘려면 총이라도 나와야 할 것 아니야. 한국군이 어떠한 신호로 해서 어떻게 연
락이 되어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집이 아군하고 접촉이 되는
게 아니냐는 얘기야. 그런데 증거를 못 찾으니까 그 다음에는 이놈들이 동네 지형을 잘 모
르니 설명해 달라면서 잠깐 나가자고 하더라고. 그래서 아버지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나
가셨어요. 그런데 기와집 골을 보면 좌우로 첫째 골목부터 넷째 골목까지 골목이 있어요.
우리가 셋째 골목인데 로터리쯤 가니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있잖아. 우리 집 사랑방에 성
주네라고 상당히 건실한 사람이 세들어 살았어요.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성주 아버지
를 많이 도와줬어요. 사람들도 착하고 하니 한집안 같이 지냈다고. 그런데 성주 큰아버지
가 있었는데 가끔 성주네 만나러 오고 할 때 봤던 거지. 그 사람은 사변 전에 다른 데로 이
사를 갔는데 지방 빨갱이가 돼서 온 거에요. 로터리에서 총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데 아버
지를 보더니만 아는 척도 안하고 반가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요. 그 사람을 보고 아
버지가 집에 들어오시면서 암만해도 여기서 안 되겠다고 하시더라고. 방공호 판 것이 무너
지지 않도록 동발을 세우는데, 얼른 끝내고 피신해야겠다고 하셨어요. 그러던 찰나에 한
시간 정도 지나서 다른 놈들이 또 온거야. 아까 왔던 놈들이 아니야. 그 사람들도 빨치산이
라고 그래. 인민군 정복은 아니었고 통일된 복장도 아니야. 도리후찌(베레모 또는 빵모자)
를 쓰고 따발총으로 무장을 했는데, 거절을 하면 바로 가해가 있을 것 같았어요. 뭐 좀 물
어볼 게 있다며 나오라고 하더라구. 이번에는 근처에 경찰이 사는 집을 좀 알려달라고 했
어요. 바로 앞집도 경찰인데 얘기를 안 했지요. 뒷골목에 한 분이 살고 있다고 하니까, 그
렇게 말해서는 모르니 직접 안내를 하라고 했어요. 알았습니다. 따라가 내가 다 알려주겠
습니다 하고 아버지가 나가시고는 소식이 없는 거야. 어머니는 금방 오실 거라고 기다리
셨는데 날이 새도 안 들어오시잖아요. 남은 가족 중에 활동할 사람이 누구야. 나밖에 없잖
아요. 춘천 시내 웬만한 데는 산 아니야? 인민군들이 점령한 다음부터는 산 곳곳에 파놓은
방공호가 있었는데, 빨치산들이 그곳을 개축해서 생활하면서 사무를 보고 그랬어요. 봉이
산에도 몇 군데 있고 시내에도 있었어요. 인민군이 이미 마을 밑까지 점령을 하고 있을 때
인데 낮에는 빨치산들을 볼 수 없었고 밤에는 그 놈들이 방공호를 들락날락하는 것을 볼 수
있었어요. 낮에는 아군 비행기가 오고. 그런 방공호들을 이튿날부터 찾아다닌 거야 울면
서. 아버지 찾아 달라고. 내가 열세 살이면 중학교 1학년인데, 그때는 키가 아주 작았어.
난 아예 어린애로 보는 거지. 걔네들이. 종무소식이었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그 다음에는 식구들이 온통 눈물로 세월을 보낸 거죠.

납치 이유
<납북자의 공무원 신분을 아는 무장한 지방 빨갱이와 빨치산이 경찰집을 알려 직접 달라
는 구실로 납치.>
문_ 그 새벽에 본 사람과 찾아온 이들은 누구이며, 왜 데려갔는지요?
답_ 지방 빨갱이가 된 성주 큰아버지의 어떤 장난이 아니었나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의심이 되요. 그리고는 아마 바로 돌아가신 것이 아닐까 추측
하고 있어요. 조금도 근거를 찾을 만한 게 없으니까.
문_ 어머니는 어떠셨는지요?
답_ 어머니 뭐 내가 이야기 하니까 이젠 끝장이라고 허탈해하셨지. 어떻게 생존해 계셔
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램뿐이라고. 그때부터 눈물로 지새면서 체념하신 거지. 당시에
아버지는 겨울에도 내복을 안 입으셨어요. 속옷 위에 그저 솜도 없는 적삼 한복 있지?
그때가 아주 추울 때인데 적삼 저고리와 바지만 입고 나가셨으니 바로 들어올 거라고 봤
었지요.

납치 후 소식
<전혀 들은 바 없음.>
문_ 아버님 외에 다른 마을사람들이 납치되었나요?
답_ 없어요. 경찰가족도 앞집하고 옆집도 피난을 잘 갔다가 돌아왔더라고.
문_ 납치 후 아버님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전혀 소식이 없었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전쟁 중에는 빈집에 남아있는 낱알이나 인민군들이 숨겨 놓은 곡식을 몰래 가져다 먹으
며 연명하고, 휴전 후 어머니께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생계유지.>
문_ 그 후 생계는 어떻게 하셨나요?
답_ 부자 동네니까 수복 전까지는 내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쌀독을 뒤져서 바닥에 남아있
는 것을 싹싹 긁어서 연명을 했어요. 또 방공호마다 빨치산들이나 내무서원이나 민청 같
은 여러 북한 기관이 있잖아. 걔네들이 어디다 곡식을 감추냐 하면 폭격을 해서 불이 탄
집의 잿더미에다가 숨겨 놔. 그걸 내가 알았어. 그래서 걔네들 모르게 곡식을 가져와 절
구에다가 몰래 찧어서 해먹고 그랬어요. 수복한 뒤에는 그냥 뭐 별일을 다 했지. 농지
가 있어도 거의 사람들이 없었어요. 낮에는 폭격 때문에 다닐 수가 없고 밤에는 무서워
안 나가니까 가을쯤에 빨치산들이 물러갔죠. 그때부터 고생을 했어요. 어머니는 일산에
나가서 품팔이 하고, 남의 일 거들어주고 뭐 별일 다했지. 김도 매고 남의 집 일도 해주
고 닥치는 대로 일이 있으면 다했지 뭐. 그래서 안방에 우리가 생활하고 윗방은 하숙도
치고요. 한집처럼 지내던 앞집, 옆집, 우리집, 세 집 중에서 우리집이 제일 잘 살았다가
그렇게 되고부터는 나도 학교 다니는 게 어려워졌지.
문_ 어머님이 아버님에 대해 하신 이야기가 있나요?
답_ 어머니는 그저 아버지 하는 일에 순종하고 사시다가 아버지 납북되고부터는 물불 가
리지 않고 생업에 뛰어든 거지. 아버지 때문에 눈물 흘리시고, 고생스러우면 나도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러셨어요. 내 동생은 나 때문에 공부를 못했지. 나도 고학을 하고
가정교사도 하고 별일 다 하고 살았지.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북되셨을 당시 군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셨는데, 납북 관련 조사가 있었는지요?
답_ 아니 없었어요. 다른 사람한테도 물어본 일은 없어요. 뭐 대답할 만한 증거를 내가
갖고 있지도 않았고 그때 당시에 내 판단으로는 돌아가신 걸로 알고 어디서 빨리 시신이
라도 찾고 싶고 그랬던 거죠. 근데 못 찾았어요. 어머니하고는 군청 직원과 만나서 이야
기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려서 잘 몰랐고, 직접 나와는 접촉이 없었어요.
문_ 이산가족 찾기는?
답 _ 시도도 안 했지.

호적 정리
<15년쯤 뒤에 실종 신고하여 사망처리 함.>
문_ 호적은 어떻게 하셨어요?
답_ 한참 뒤에 정리했어요. 원래 법적으로 실종되고 10년 후에는 신고를 하면 사망신고
가 되더라고. 그래서 한 10년 더 있다가 15년쯤 되서 실종신고해서 사망 처리가 됐어요.

연좌제 피해
<사망처리로 인해서인지 피해는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연좌제 피해는 없었어요, 다행히도. 그런 문제가 있으면 난 공부도 못하고 아주 집
안이 파산이 됐겠지 뭐.

정부에 바라는 말
<유골이라도 찾아서 모시고 싶음.>
문_ 정부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내가 지금 하고 싶은 얘기는 아버지가 지금 연세가 우리나라 나이로 110세야. 그러
니까 생존해 계시고 이산가족상봉 이런 건 생각도 안하고, 그저 시신이라도 찾아서 내가
잘 모셨으면 하는 바람이야. 아버지를 내가 직접 뼈라도 찾아서 모실 수 있었으면 해요.
납골묘를 해 놨거든 어머니 돌아가실 적에 아버지 성함으로 대리석 패를 했어. 그래서
어머니 옆에 나란히 해서 모셨다고. 그리고 애들하고 얘기를 해서 납골묘를 해 놨다고.
그래서 거기다가 모시는 게 소원이에요. 그것 밖에는 없어요. 생존은 아주 포기를 했으
니까.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아버지의 시신이라도 내 손으로 모셨으면 함.>
문_ 아버님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자식들 때문에 희생당한 거야. 그저 어린애들 데리고서 멀리 못 가니까, 자식들 때
문에 희생을 당한 거지. 전하고 싶은 얘기야 그렇지 내 생각으로는 그저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으니, 아버지 시신이라도 그저 내 손으로 알뜰히 모셨으면 하는 기대 밖에 없지.
나중에라도 찾았으면 좋겠다. 그게 마지막 희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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