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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 실태 저명인사-선원 등 총 8만5천명 휴전 이후 55년 대성호10명 시작,4백여명 69년 kal-79년 고상문
이름: 관리자
2005-09-26 11:58:08  |  조회: 3011
첨부 : 19940802-3.pdf  


79년 네덜란드 연수중 납북된 전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씨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밝혀진 가운데 그동안 북한에 억류돼있는 납북자 실태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월북" 주장 송환거부

현재 어느 기관에도 납북자들의 전모를 알 수 있는 정확한 통계는 없는 실정이다. 다만 통일원과 대한적십자사 등은 53년 휴전이후만 따질 때 납북자가 4백20여명을 웃돌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통일원은 선원 4백9명을 포함, 대한항공기와 해군함정 피랍사건 관련자를 합칠 때 4백41명이 아직도 북한에 억류중이라고 밝히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55년 서해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다 납북된 대성호 선원 10명을 비롯 최근까지 모두 4백29명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적십자사에 따르면 이중 해상납북자가 3백97명으로 가장 많다. 이들중 9명은 납북뒤 사망했거나 그후 간첩으로 남파됐다가 입건되기도 했다.

그러나 81년 5월 당시 문공부가 북한측에 "54년이래 납북한후 송환하지 않고 있는 4백49명의 우리측 인원 전원을 이제라도 무조건 송환할 것을 촉구한다"고 밝힌 것을 보면 납북자수는 정부기관간에도 다소 유동적이다. 81년이후에도 87년 동진호 선원 12명이 피랍된 것을 비롯 크고 작은 납북사건이 있었다.

올해 들어서 대한적십자사는 지난 4월22일 대북전통문을 통해 동진호 선원등 강제 피랍자가 4백40여명에 이른다며 조속한 송환과 함께 최소한 이들의 생사라도 확인하자는 요청을 거부하고 있는 북한측의 비인도적 행위를 비판했다.

가장 최근의 대형 납북사건은 87년 1월 백령도 부근에서 조업중이던 동진호 선장 김순근씨(45), 어로장 최종석씨(41)등 선원 12명이 납북돼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 납북자중에서는 이처럼 선원들이 가장 많은데 이들은 대부분 서해나 동해의 휴전선 부근에서 어로작업중 북한 경비정에 의해 강제 피랍됐다. 북한은 이들의 납치이후 의거에 의한 월북 이라며 송환을 거부하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가족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또 최근 납치사건은 87년 7월 미국 유학중 여름방학을 맞아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던 이재환씨(당시 26세)의 경우다. 이씨는 12대 민정당 전국구의원을 지냈던 이영욱변호사의 장남이다. 북한측은 이씨에 대해서도 입북 을 주장하며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 이씨는 학자를 꿈꾸며 이데올로기에 큰 관심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69년 12월 강릉에서 있었던 kal 여객기 납치도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북한은 당시 고정간첩 조창희씨를 통해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등 51명을 태운 kal기를 공중납치했는데 정경숙-성경희씨 등 이 여객기의 여승무원과 승객 11명을 아직도 억류하고 있다. 당시 24-23세이던 정-성씨가 25년이 지난 지금 각각 49세와 48세의 중년이 돼 북한에서 청춘을 모두 보냈다.

대남방송에 15명근무

이들은 현재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 에 근무하면서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북한 김책공대의 교수들과 강제결혼해 살고 있다고 자수간첩인 오길남씨(52)가 92년 증언, 충격을 준바 있다. 구국의 소리 방송에 근무했던 오씨는 " 민중의 메아리 등 대남방송에 이들외에도 제주도 출신 납북어부 양모씨(50)등과 월북자 15~16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의 납치 실적 은 이처럼 곳곳에 뻗쳐있다. 때문에 납치됐다 탈출한 경우도 있고 납치 직전에 극적으로 탈출한 사례도 많이 발견된다.

영화감독 신상옥씨와 영화배우 최은희씨 부부의 경우는 강제납치된후 탈출에 성공한 케이스다. 최씨는 78년 1월 합작영화 제작 협의차 홍콩에 갔다가 호텔에서 납치돼 북한공작선편으로 해주로 납북됐고 신씨는 실종된 최씨의 행방을 수소문하다 역시 홍콩에서 납치됐다. 이들은 북한에서 김일성-김정일 부자 우상화 영화제작에 동원됐으며, 86년 3월 납북 8년만에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84년 12월에도 아프리카 베냉국에 갔던 코트디브아르 태권도 사범 김영태씨(당시 47세)가 북한측의 납치정보를 사전에 입수, 위기를 모면하고 코트디브아르로 돌아온 적도 있다. 또 87년 1월에는 홍콩에서 사업을 하던 한국교민 윤태식씨(당시 28세)가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돼 평양으로 갈것을 강요받으며 납치돼있다 감시소홀을 틈타 탈출한 사건도 있었다.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아예 납치전문부대를 양성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북한은 75년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고교 졸업반 학생들중 성적과 당성이 우수한 20여명을 선발, 납치전문부대 를 조직해 납치-어학교육등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처럼 선원뿐아니라 유학생, 영화배우, 사업가, 군인등 닥치는대로 납치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 가능성 은 어디서든 열려있다는 것이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경고다. <최병묵-예병일기자>

*6 25전쟁/가족신고 7천명 10배 넘을듯/김규식-안재홍-방응모등 지식인들 많아/북한,아직까지 생사여부 알려준 적 없어

6 25당시 피랍자는 아직까지 정확한 숫자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지난 56년 가족들에 의해 신고된 납북자는 7천34명으로 집계된 바 있으나 관계당국에선 8만4천5백여명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56년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인사들의 송환을 요구한 바 있다. 그러나 북측은 57년 납북인사는 모두 3백37명이며 모두 건재하다 는 지극히 성의없는 답신을 단 한 번 했을 뿐, 지금까지 이들의 생존사실조차 알려주지 않고있다.

북한은 50년 7월 김일성이 주재하는 군사위 합동연석회의에서는 모시기 작전 이라는 암호명 아래 남반부의 정치 경제 사회계 주요인사 포섭 에 나섰다. 이들은 주요인사를 다섯가지 기준에 따라 분류했다. 첫째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한 정당-단체에 소속했던 인사들, 둘째 북한의 프락치와 동조자들, 셋째 남북정치협상에 참여한 지도자들, 넷째 자발적 협력자들, 다섯째 연행 또는 체포해야할 인사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권유나 압력에 따라 자진출두 한 사람들은 김약수 이문원등 국회프락치사건 관련자와 일부 전-현직 국회의원들뿐이었다. 그외 많은 저명인사들은 강제연행의 수순을 밟았다. <4면에 계속>

<3면서 계속> 50년 7~9월에 걸쳐 강제연행된 주요인사들은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박렬등 임정요인들, 안재홍(전 조선일보사장) 백관수 정광호 구중회 신석무 신상봉 김헌식 이강우 장련송 조종승 오정방 김용무 조헌영 명제세 김종원 설민호 김경배 김용하 이상경 이만근 박영래 방응모(당시 조선일보사장) 박승호(여) 박보염( )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등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이었다.

50년 7월하순 최초로 북으로 간 사람들은 1~4부류에 속한 80명이었다. 북한은 이들을 2차례에 걸쳐 북으로 끌고 갔다. 당시 목격자에 따르면 이들은 주로 남북협상파로 알려진 정계 지도급인물들로, 이들 가운데에는 엄항섭 조완구 윤기섭 송호성 원세훈이 포함됐었고 조헌영 백상규 구덕환 최병주 최석홍등 국회의원을 비롯, 남궁혁 구자옥 김시창등 관계, 학계, 종교계인사들이었다고 한다. 다음달 20일에는 3백여명의 2진을 평양으로 끌려갔다. 이들은 지난번 1진과는 달리 이른바 반동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최규동 고원훈 최린 현상윤 정인보 이광수 김동원 손진태 명제세 김용하 등 학계 정계 문화계 인사들과 김장렬 김의환 김용현 최병주 허영호 정인식 신용훈 최석홍 조옥현 정광호 조규설 오택렬 조중현 이종성 이구수 김경도 장련송등 50여명의 국회의원, 이밖에 50여명의 종교인들이었다. 이밖에도 김기림 유후자 방한준 이백수 김억 이명우 김형원 김동환등 예술인들도 끌려갔다. 그러나 김규식 안재홍 조소앙등 연로한 사람들은 일단 서울에 그대로 머물게 했다. 9월에는 박준식(검사) 이우경(판사) 이춘근(육군장교) 임성대(경찰관) 최림(내무장관 비서) 허남수(국회사무처 총무과장) 문택규(변호사) 림준수(법관) 이복본(연극배우)등 3천여명이 합류했다. 이들은 연합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하자 세가지 경로로 이송됐다. 이 과정에서 김규식 방응모등 다수의 인사들이 사망했다. 병을 앓고있던 이광수 최규동등은 들것에 실려 북쪽으로 향했으나 최규동은 폭격으로 사망하고 이광수도 그해 10월 지병인 폐결핵으로 만포면 고개동 마루턱에서 운명하고 말았다.

성북동 비밀가옥에서 두달을 보낸 김규식 조소앙등 일부 임정요인들과 국회의원들도 9 28수복 하루전인 27일 개성에 도착한뒤 황해도 금천을 향했으나 서흥부근에서 공습을 받아 방응모 김붕준등 몇몇인사가 사망했다. 방응모 당시 조선일보사장의 묘소는 서흥부근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탈출하다 살해된 사람들도 있었다. 50년 8월11일 해주에 도착한 피랍인사들이 탈출을 감행하다 실패, 주모자로 몰린 박윤선(중앙청 과장) 하진문(변호사) 최영수(언론인)등이 즉결 처형됐다.

살아남은 인사들의 앞길도 순탄치 않았다. 휴전후 평화통일촉진협의회 등 어용단체에 소속돼 북측정책 지지성명에 이름을 도용당하는등 북한정권에 가치가 다할 때까지 이용당했다 <선우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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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94년 8월 2일 3면 기사내용

납북자 실태
저명인사-선원 등 총 8만5천명
휴전 이후
55년 대성호10명 시작,4백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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