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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세월 4회 1962. 4. 2
이름: 관리자
2005-10-05 14:04:31  |  조회: 2032
첨부 : 19620402-2.pdf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 죽음의 歲月 4

이름 : 관리자 번호 : 21
게시일 : 2001/01/10 (수) PM 02:31:44 (수정 2001/01/26 (금) PM 02:47:39) 조회 : 46

1962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서


죽음의 歲月 ④


납북인사 북한생활기


번번히 失敗한 脫出
靈泉고개서 海州까지 밤마다 拉北隊列
붙들리는 대로 銃殺



서울에서 내무서원들에 의해 가정 또는 길가에서 체포된 판·검사, 중견관리, 청년단 간부 및 45세 이하의 무명인사들은 7월말부터 8월말까지 계속 開城방면과 漣川방면 두 갈래로 납북되어갔다.

서울시내 각 학교에 수용되었던 이들 무명인사는 한번에 一천여명씩 분대, 소대, 대대별로 대열을 지어 매일 밤 10시쯤 북으로 떠났는데 밤이면 靈泉고개에서 海州에 이르기까지의 가도는 묵묵히 끌려가는 이들 무명인사들의 대열로 꽉 연이어 있었다.

臨陣江 철교를 건널 때는 밤이라곤 하지만 폭격이 있을까 두려워 뜀박질을 하다가 서로 뒤밀리는 바람에 그대로 강물에 떨어진 사람이 30여명이나 되었다. 그런데다가 경비원들은 도망치는 줄 알고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마구 총탄을 퍼부었으니 물에 빠져죽고 총탄에 맞아 죽기도 하였다.

약 二시간쯤 걷고는 십 분씩 쉬게 하는데 쉴적이면 모두 쓰러지듯이 땅바닥에 드러누워서 잠들어 버리곤 하였다.

날이 훤히 밝을 무렵 開成상업학교에 수용되어 낮에는 잠을 자고 또 해가 지면 북으로 떠나는 것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 수없이 끌려오는 납북자들을 위해 여성동맹원들이 주먹밥을 준비했다가는 배급해 주었다. 金川을 거쳐 海州에 도착하자 이미 海州중학안에는 무명납치인사들로 꽉차있었다.

8월 17일밤 11시쯤이었다. 미리 모의를 한 50여명의 무명인사들이 유리창을 부수고 경비원의 입을 틀어막아 질식시킨 후 뒤쪽 산등으로 도망을 쳤다. 비상소집으로 급거 동원된 인민군 경비대원들은 공포를 마구 쏘며 시내는 물론 야산 일대와 해변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새벽녘 그중 20명이 붙들리고 해변에서 三, 四명이 사살되었으며 나머지 전원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날이 밝자 인민군경비대장은 八백여명의 피납무명인사들을 모아놓고 붙잡아 온 20명에 대한군중재판을 열었다. 사전에 이미 군중 속에는 그네들의 「푸락치」가 배치되어 있었다.

주모자급 五명에 대해 「옳소!」식 재판으로 총살형이 언도되고 나머지 십五명은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총살형이 언도된 五명의 무명인사 중에는 河鎭文(변호사) 朴允善(중앙청과장) 崔永秀(기자)등이 끼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인민군 경비대는 五리씩 간격을 두고 八백명을 단위로 하여 海州시를 중심으로 碧城군 書院里, 載寧군 富川면, 信川군, 鳳山군, 平山군 야산일대에 분산시켜 짚으로 막사를 지어 가지고 거기 기거하게 하였다. 이때 이 지방 일대에 분산 수용되어 있던 피납무명인사들의 총수는 약 四만여명이나 되었다.

인민군경비대는 이들 무명인사들에게 주로 군사훈련을 시키고 방공호굴착, 도로, 교량수리, 양곡 운반 등 중노동을 시켰다. 그리고 청년들은 뽑아서 인민군에 편입시키고 거개가 신분을 모두 속이고 있기 때문에 신분조사, 사상 검토 등을 엄격히 시작하였다.

載寧군 富川면에서의 일이었다. 젊은 목사인 張世駿이 방공호 파는 일이 너무 고되어 느리게 파자 경비원이 일을 빨리 하라고 화를 내면서 총대로 그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張世駿은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리며 그대로 달겨들었다. 이 광경을 본 동료 수십 명이 참다 못하여 같이 달겨들어 그 경비원을 죽어라하고 마구 두들겨 패었다.

이일로 인하여 姜東鎭(변호사), 金弘順(판사), 李洙永(사법관)은 10일간씩 영창생활을 하고 나왔다. 이것이 9월 10일의 일이었다. 영창 속에서 주먹밥하나 물 한 모금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갖은 혹독한 고통을 겪고 나온 전기 姜, 金, 李 세 사람은 나오던 그 날부터 경비원을 살해하고 탈출할 모의를 비밀리에 거듭하였다. 이윽고 60여명의 호응을 얻어 감행할 것을 결의하였다.

9월말쯤이었다. 자정쯤 되어 이들 무명인사 60명은 변소에 가는 척 가장하고 한사람씩 밖으로 나가 경비 서있는 두 명의 인민군에 달겨들어 교살한 다음 도주하려 하였다.

그 순간 순찰중인 인민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인민군 경비대의 총동원으로 현장에서 모두 체포되고 말았다. 다음날 주모자 三명과 그 외 20명이 포박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 후 그들의 소식은 감감하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곳에 수용 중이던 수많은 인사들은 현재 平壤에서 살고 있음을 밝혀둔다. 이들의 소식은 이야기 순서에 따라 차차 나오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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