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아들 납북…9순 노모의 ‘애타는 세모’자식향한 그리움 漢詩에 구구절절
또 한해가 가는구나. 26일 오후 김직자 할머니(90·서울시 상계동)는 안방에서 농묵을 듬뿍 찍어낸 붓으로 화선지에 글씨를 쓰다가 잠시 멈추며 “올해도 아들 얼굴을 못보고 지나가려나”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할머니의 아들 안호철씨(71)는 6·25가 터진 직후인 1950년 8월17일 북한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한국전쟁 피랍가족인 김직자할머니(90)가 아들 안호철씨 사진을 보며 옛 생각에 잠겨있다. /박민규기자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당시 춘천중 4학년, 16세이던 아들 안씨는 국민회장(요즘의 주민회장격)이던 아버지 안상몽씨(작고)를 체포하러 온 내무서원들에 의해 아버지 대신 끌려갔다.“포승줄에 묶인 채 트럭에 실려가면서 ‘어머니, 잘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어. 그게 마지막이야. 내 붓글씨에는 호철이를 기다리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어.”어느새 눈물이 할머니의 주름의 골을 따라 흘러내렸다.강원 평창군 봉평면에서 살던 할머니는 당시 붙잡혀간 아들을 만나기 위해 평창경찰서로 여러 차례 찾아갔으나 “면회 불가”란 대답만 듣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아들이 끌려간 직후 집의 기둥에는 빨간색 차압 딱지가 붙었고 결국 그해 9월초 할머니의 가족은 정처 없는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할머니는 피란길에 춘천의 시동생 집에 머물던 중 ‘국민회장 일가는 모두 몰살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아 친척들과 함께 산 넘고 강 건너 서울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1·4후퇴 직후의 차가운 겨울밤에는 젖먹이 아기였던 조카가 얼어 죽기도 했다. 남편 안씨는 살아있을 때 “아들이 나 때문에 북에 끌려갔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지더니 65세이던 76년에 할머니를 남긴 채 저세상으로 가고 말았다.그 후 서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사는 딸 안청자씨(64)는 “아버지가 언젠가 술에 취해 ‘아들 얘기는 제발 그만하라’며 화를 내신 적이 있다. 당시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죄책감이 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할머니는 남편을 잃은 이후 아들을 향한 그리움을 한시로 표현하며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매일 붓으로 화선지 가득 아들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다. 그리움이 얼마나 깊던지 최종 학력이 소학교 3년이지만 실력은 “왕희지도 울고갈 명필”이란 칭찬을 들을 정도다.‘拉北臨津江/叫喚母喊聲/束手無策拉/飢寒空手去’(납북길 임진강에서/ 어머니! 하고 얼마나 소리쳐 불렀을까/꽁꽁 묶여 배고파 떨며 먹을 것 없는 빈 손으로 끌려갔다오) 할머니는 대한적십자사가 주관하는 이산가족찾기에 참가 신청을 해 북한으로 생사확인 의뢰서를 보냈지만 지난해 3월 ‘생사확인 불가’ 통지를 받아 마음의 상처만 더 깊어졌다. 할머니는 “55년 세월동안 눈만 감으면 아들 얼굴이 떠오른다. 아들 나이가 70세가 넘었지만 죽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안청자씨는 “오빠의 생사만이라도 확인되면 어머니 마음이 훨씬 편해질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虛送光陰流/待五里霧中/庭園樹木蓮/鵲鳴幕敎枝’(가는 세월 그 누가 막으리오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소식은 없고, 정원의 목련나무 가지 위에 까치가 울고 있소) 〈정홍민기자 psgull@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