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자식간은 천륜인데, 어지하여 김정일은 이를 끊어놓는지 피도 눈물도 없단 말입니까. 이버지께서 철사줄에 꽁꽁 묶여 울며 넘던 미아리 고개...지금이라도 북쪽 어디선가 계실 아버지, 언젠간는 만날 날이 있겠지요. 삯바느질에 식모살이로 고생하며 20살 소녀과부로 평생을 눈물로 수절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상 글을 올리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부디 살아만 계세요. 아버지라 부르며 얼른 달려가 품에 안겨보고 싶은데, 아버지라는 이름이 그립다 못해 서럽습니다. 다시 뵐 그날까지 건강하세요, 아버지...”

백발이 성성한 노신사는 연신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쳤다. 지난 시간에 대한 서러움과 이룰 수 없는 그리움으로 목소리는 흐느낌으로 가라앉았다.

27일 서울 중구 코리아나호텔에서 진행된 ‘북한에 의한 납치의 전모와 해결책 in Seoul’ 세미나. 북한자유주간의 일환인 이 세미나에는 한국과 일본, 태국 등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 납북된 피해자의 가족들이 참석해 남겨진 가족의 가약없는 기다림과 고통을 전했다.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애틋함과 “북한 땅과 가까운 서울이니, 내 목소리가 전달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담은 이들의 호소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장년을 넘어선 납북 피해자 가족 중에서는 눈물을 흘리거나 애써 슬픔을 억누르는 듯 입술을 깨물기도 해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했다.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많은 것을 바라진 않는다. 정부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납북자 문제에 대해 해결에 나서달라”고 촉구하는 한편, 우리 국민에도 “납북자에 대한 편견을 떨쳐내고 우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고 호소했다.

이상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더욱 애달픈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냈다. 이 이사의 아버지는 경기 수원시의 중앙농업기술원(현 농촌진흥청) 곤충계장이었다. 1950년 8월 정치보위부 요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끌려가 소식이 끊긴 이후 2006년 제14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만날 예정이었다가 갑자기 북한측에서 행정착오라고 통보, 만남이 취소됐다.

돌을 갓 넘긴 아들은 60을 바라보는 장년이 됐고, 당시 27살이었던 아버지는 고령의 노인이 됐을 터. 이 이사는 “부모자신 간은 천륜인데 김정일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 아버지라 부르며 품에 안겨보고 싶다”며 “아버지 살아만 계셔달라,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고는 흐느꼈다.

태국인 납북피해자인 아노차 판죠이씨의 조카, 밴 존 판죠이씨는 “할아버지는 30년 동안 고모를 기다리다 5년전 90세 이상의 나이로 돌아가셨다”며 “돌아가시면서도 ‘한번이라도 아노차를 만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말했다. 아노차 판죠이씨는 1978년 5월 21일 “미용실을 다녀오겠다”며 마카오의 그녀 아파트를 나간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 같은 해 7월 2일 마카오 경찰에 의해 2명의 마카오 현지 여성과 함께 공식적인 실종보고가 됐지만 행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는 “고모의 납치는 2005년 미국인 찰스 로버트 젠킨스가 40년간 지냈던 북한을 떠나면서 ‘이웃에 아노체라는 이름의 태국여성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알려졌다”면서 “아버지는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는 여동생을 만나길 학수고대하며 (고모와 함께 살던) 집을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벤 존 판죠이씨는 이어 “아버지도 나이가 드셔서 귀가 아파 소릴 잘 듣지 못하게 되셨지만, 늘상 ‘고모를 만나고 싶다’ ‘우리집에 돌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며 “북한 가까운 한국에서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 전달되지 않을까, 혹시 만나러 오지 못하더라도 기다리는 걸 알고 전화나 편지라도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아버지가 고모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여기 계신 납북자 가족들이 다 돌아와 축하하는 모임에 오고 싶었다. 태국정부에 더 이상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우리 가족이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한국과 일본의 납북피해자 가족들”이라고 간절한 소망과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납북의 고통은 혈육을 빼앗긴 가족만의 몫이 아니었다. 납북피해자 당사자와 그들이 북한에서 얻은 가족들에게도 또다른 아픔이었다.

고명섭 귀환납북자협의회장은 “보위부의 감시를 받으며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았었다”며 “납북자 가족들은 철통같은 감시를 받아야 했다”고 북한에서의 생활을 회상했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1973년 전역한 고 회장은 1975년 8월 강원 강릉시 주문진항을 떠난 오징어잡이 배 ‘천왕호’에 탔다 다른 선원 30명과 함께 동해 대화퇴 어장에서 북한 경비정에 의해 배와 함께 납북됐다. 이후 북한에서 결혼해 평북 성천에서 양계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1997년 자신의 납북사실을 남한의 가족에게 알린 뒤 우여곡절 끝에 지난 2005년 탈북에 성공했다.

고 회장은 “북한 당국은 앞에서는 ‘의거 입국한 용감한 남한 사람’이라 추켜세웠지만 뒤에선 감시했다. 친지들 경조사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면서 “식량난이 겹치자 고난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 소나무껍질을 벗겨먹고, 이름 모를 독초를 먹다 죽을 뻔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는 그 아귀소굴에서 탈출해 고향의 품에 안겼지만, 남은 가족들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고 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내가 탈북한 이후 살던 곳에서 추방돼 감시소에서 살고 있다고 들었다”며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은 병과 굶주림에 세상을 떠나 몇 남지 않았다. 이웃에 살던 국군포로 가족은 본인과 손주를 포함 여섯가족이 굶어 죽었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 세미나에 참석한 나카이 히로시(中井洽) 일본 납치문제담당상 겸 공안위원장은 “일본 정부는 17명의 일본인이 북한에 납치됐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아직 5명의 귀환밖에 실현시키지 못했고 정부가 인정하는 피해자 외에도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실종자가 많이 있다”며 “납치문제는 중대한 일본의 주권 침해 문제인 동시에 중대한 인권침해”라고 강조했다.

이어 나카이 담당상은 “북송된 재일 조선인(재일교포)과 1천831명에 달하는 일본인 처들이 북한에서 수용소에 보내지거나 엄청난 차별대우 속에서 연락이 두절된 것이 현실”이라며 “북한의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미한을 중심으로 국제연대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또 그는 “현행 일본의 북한 인권법은 일본 국적을 갖고 북한에 있는 사람과 재일교포만 구출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며 “이 법을 개정해 모든 탈북자를 일본의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카이 담당상은 천안함 침몰과 관련해서는 “일본 정부는 (사고 원인) 조사 결과가 나오면 한국 입장을 지지해 같은 보조를 취하겠다”면서 “희생된 젊은 장병과 유족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의를 표한다. 어제 서울시청 앞에 모셔진 영령 앞에서 헌화했는데, 한국 정부의 진지하고 냉정한 대응에 대해 우방으로서 깊은 경의를 표한다”고 덧붙였다./변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