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대한민국 정부가 전시 납북자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해왔지만, 이젠 진상규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으니, 국제적 협력과 연대를 통해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지요. 미국 의회에서 6.25 한국전쟁 납북자 결의안이 통과되면, 아직도 가족의 생사를 몰라 고통받고 있는 우리 전시 납북자 가족들의 아픔도 끝나겠지요.”

미국 북한인권위원회가 오는 11일 워싱턴 DC 의회에서 북한이 저지른 납치범죄 실태를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한다. 보고서 발표행사에는 북한에 의해 납치 피해를 입은 한국, 일본, 레바논, 프랑스, 루마니아 등 12개국의 워싱턴 주재 대사들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이미일 이사장을 비롯한 대표단이 참석해 북한의 납치 문제를 공론화에 나선다.

그동안 북한은 납치 범죄, 특히 6.25 한국전쟁 당시 남한 민간인에 대한 납치를 부정해왔다. 관련 단체들은 ‘전쟁범죄’임을 강조하며 다각적인 국제적 연대를 모색해왔다. 이번 행사는 그 첫걸음인 셈이다.

이미일 이사장 등 대표단은 미 의회 및 국무부 관계자 등을 만나 납치 피해의 중대성을 알리는 한편, 하반기 안으로 미 의회가 납북자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도록 나설 예정이다. 미 의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된다면, 납북자들의 생사확인 및 송환을 촉구하는 국제적인 압박이 가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이사장은 6일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서 “전시 납북자 문제는 휴전회담에서도 언급되지 못했다”며 “이 문제로 인해 휴전회담이 연기되는 걸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고 했다.

휴전회담 기록에는 북한이 납치 문제에 대해 철저히 부정해왔음이 드러나있다. 휴전회담이 진행되자 우리 정부는 ‘북한에 납치된 양민의 송환은 휴전협정 성립과 더불어 즉각 실현되어야 할 문제’라며 휴전협정에 납북자의 귀향을 추진하는 항목을 삽입할 것을 요구했다. 유엔은 1951년 12월30일 제60차 휴전협상에서 “한국인 피납자(kidnapped person)의 소재를 알려주고 그들을 송환하라”고 북측에 요구했지만, 북 측은 “우리의 사상·이념에 동조해 월북한 사람만 있을 뿐 납치자는 없다. 정치적 문제이니 더 이상 논하지 말자”고 선을 그었다.

결국 1952년 유엔이 남한의 전시 납북자를 ‘실향사민(Displaced Civilians : 전시에 본의 아니게 나라 밖에 나가 있으면서 본국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민간임)’으로 규정하면서, 북한의 정략적 논리에 휩쓸리게 된다. 북한이 월남한 북한 주민들에 대해 “유엔군이 위협해서 납치해간 사람들”이라며 500만명의 월남 피난민을 당장 송환하라고 요구한 데 이어, ‘포로 이외에 실향사민도 교환하자’는 유엔군의 수정안마저 거부했다.

우리 정부의 끈질긴 요구에 유엔은 휴전협정 제3조 59항에 실향사민 송환을 위한 규정을 삽입, ‘실향사민 귀향 협조위원회’를 만들어 조율에 나섰지만 북 측은 “외국인 10여명 외에는 송환을 희망하는 실향민이 없다”고 통보했다.

이 이사장은 “북 측은 터키인 11명과 백계 러시아인 8명 등 19명의 외국인만을 넘겨주고 남한 측 인원은 한 사람도 보내지 않았다”며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느냐. 납북 피해자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된 지금이야말로 전시 납북자 문제를 매듭지을 수 있는 적기”라고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이 이사장이 전시 납북자 문제에 적극 나선 배경에는 아버지가 있다. 이 이사장의 아버지 이성환씨는 그녀가 만 1살이 되던 무렵 납북됐다. 1950년 9월 ‘조사할 게 있으니 가자’는 북한 정치보위부 소속 인사에 의해 끌려갔다. 이씨는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었다. 소아과 의학박사였던 친형도 비슷한 이유로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협의회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6.25 전쟁 중 엘리트 계층에 해당하는 이들을 대거 납북했다. 숙청을 피해 남하한 지식인들로 인해 인텔리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던 까닭이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북한은 남한 내 친북좌익 세력을 동원, 성별·나이·사회적 지위 등을 고려해 납치대상을 선별하고 조직적으로 이들의 납치를 감행했다. 납북자 대부분이 ‘자택’ 근처에서 끌려간 것은 조직적 납치임을 반증하는 것.

이 이사장은 “연좌제로 감시받고 ‘월북’이라는 편견에도 견뎠지만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전시납북자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포기하지 않은 납북자 가족들 덕에 조금씩 나아졌지만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협의회가 추산하는 전시납북자 수는 최소 9만에서 최대 12만 가량에 이른다. 1952년 정부가 발행한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따르면 전시 납북자 수는 8만2959명에 이르고, 1951년 말 내무부가 정리한 피랍자 명단의 경우, 12만6000명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이사장은 이 같은 납북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을 2차례 발간하기도 했다. 지난해 3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데 이어 ‘6.25전쟁납북피해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와 관련 사무국이 같은 해 12월 문을 여는 성과도 올렸다.

그는 이번 미국 방문을 통해 휴전회담 당시 ‘실향사민(the displaced civilian)’에 포함시켰던 ‘납북민간인(the abducted civilian)´ 문제를 별도로 의제화하고, 북한의 전쟁 중 남한 민간인 납북사실 시인, 납북자 생사확인 및 소식 전달, 유해송환 등을 호소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6.25전쟁납북 피해 진상 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신고가 재외공관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도 교포사회에 알릴 계획이다.

이 이사장은 “전쟁 중 납치는 엄연한 범죄이지만, 진상은 60여년간 은폐돼왔다”며 “휴전회담에서 잘못된 용어를 선택한 결과가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으로 이어졌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북한에 의해 왜곡됐던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