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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의 어머니, 김복남씨. (사진 중앙)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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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는 기한이 없다. 특히 언젠가 내 곁을 먼저 떠날 것을 예측하지 못했던 배우자의 부재는 평생의 아픔이자 그리움이다.

조선 후기 문신 채제공(蔡濟恭)은 먼저 세상을 뜬 아내를 그리워하며 이런 시를 남겼다.

“…이른 아침 빈 방에서 모시옷을 입으니/당신의 얼굴 어렴풋이 다시 보는 듯하오/당신이 창 앞에서 바느질하던 모습을 생각하니/내가 이 옷 입은 것을 당신이 못 볼줄 어찌 알았겠소…/누가 황천에 가서 내 아내에게 말을 전해주오/ 당신이 지은 모시옷 내게 너무 잘 맞는다고.”(‘백저행(白紵行)’중)

정조의 개혁정치 선봉장으로 영의정까지 올랐던 채제공에게도 배우자의 부재는 애달픈 기억이자, 안타까운 그리움이었다.

2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 납북자사진전시회장. 백발의 할머니가 사진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쳐냈다. 뺨이라도 쓰다듬듯이 말없이 한참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보고 싶다”고 입을 뗐다. 잠시 멈추었던 눈물이 금새 그렁그렁해졌다. 사진 속에서 그녀를 내다려보는 이는 61년 전 헤어진 남편, 김재봉 씨(납북 당시 경기도 강화군에서 금용조합 서기로 근무, 1920년생)이었다.

김항태 씨(82)는 남편 이야기를 꺼내자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그리고 눈물을 지었다. 남편과 강제로 떨어져 61년을 살면서 남편 이야기를 묻어야 했다. 납북자에 대한 편견도 강했고, 그녀와 딸이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하지만 김씨는 “하루라도 생각을 안하는 날이 없었다. 마음 속에 너무 깊이 남았다”고 했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연애결혼’을 했던 부부였다. 연상의 남편은 지인의 소개로 언뜻 김씨를 보고서는 그 날로 중매를 넣었다. 그리고 남들 눈을 피해 연애를 했다. 한밤 중 공동묘지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김씨가 등불을 들고 나가 기다리면 저쪽에서 남편이 ‘깜박’하고 신호를 보냈다. 별다른 말없이 서로 얼굴을 보고 수줍게 손을 잡았다가 화들짝 놀라 쑥스러워 했던 연애였다.

“어른들이 나가시고 남편이 놀러왔었어.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참 좋았어. 그런데 갑자기 숙부님이 들어오신 거야. 둘이 같이 있는 걸 들킬까봐 쌀뒤주 뒤에 숨어있는데, 갑자기 남편이 뒤에서 살짝 안아주더라고. 얼마나 가슴이 콩닥거리던지, 그 소리가 들릴까봐 얼굴이 빨개졌었지.”

김재봉씨가 납북된 것은 1950년 9월께. 결혼한지 불과 1년만이었다. 김씨는 “입덧도 하기 전이라 아이가 생겼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다”며 “남편이 아이를 참 기다렸는데, 그 말을 못한 게 한”이라고 눈물을 닦아냈다.

김씨는 남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다. 풍문으로 북쪽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역시 확실치않다. 그래서 살아있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크다.

“공산당에 가입하라고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있었거든. 우리남편은 싫다고 거절했지. 그랬더니 반공분자라면서 인민군이 와서 가슴팍에 총을 대고 위협하는데 안갈 도리가 있나. 그런데 그게 끝이었어. 죽으면 잊을까, 평생 저 사람을 품고 살았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한 세월이었다.

김복남씨(90)는 광화문을 찾았다. 서울 수복 직전인 1950년 9월4일 북한 보위부 사람들에게 집 근처에서 그대로 끌려간 남편 이성환 씨(납북 당시 청량리유기공장 대표, 1920년생)를 비롯한 전시 납북자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기 위해서다. 다리에 힘이 없어 서 있기도 버거운 그녀를 큰 딸 은일씨(66)가 부축했다.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시를 딸이 낭독하는 동안, 김씨는 눈가를 훔쳐냈다. 그립다, 보고싶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딸들이 힘들까봐 내색않고 그녀는 씩씩하게 살았지만, 밤에는 홀로 숨죽여 울었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의 얼굴은 또렷하고 그리움은 더하다.

붉게 노을이 지면 설거지를 하던 아내를 불러 “저길 좀 봐. 참 곱지?”라고 어깨를 맞대고 같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드는 풍경을 보던 남편이었다. 아이들과 개울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나 잘 잡지 않아?”락 소년처럼 웃던 남편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딸아이들을 양무릎에 앉히고 동화를 읽어주고 머리를 쓰다듬던 남편이었다. 남편과의 결혼생활은 고작 5년여. 그러나 그 기억이 있었기에 61년을 버텼다.

은일 씨는 “언제나 아버지가 옆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은일씨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미일 이사장의 큰 언니다. 전시 납북자 피해 신고를 독려하기 위해 이날 진행된 행사에 참석하려고 미국에서 들어왔다.

아버지가 납북될 때 은일씨는 만 5살. “온가족이 손잡고 빵집에 가고, 조개를 주워다 구워먹은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술․담배를 하지 않았던 가정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행복 그 자체였다. 항상 무릎에 앉히고 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기억이며, 길을 가다 ‘필통이 갖고 싶다’고 조르면 허허 웃으며 사주시던 기억이며, 무얼 물어보면 ‘이런 것도 물어보다니, 똑똑한 딸을 뒀다’고 기뻐하던 기억이며 집 안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은일 씨는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늘상 하셨다. 좋은 추억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면서 ‘잊지 말라’고 하셨다”며 “떨어져 있어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아이라고 말씀해주신 덕에 괴롭지 않았다. 나 역시 우리 딸과 손주들에게 아버지 이야길 해주곤 한다”고 했다. 은일씨는 이날 미국에 거주하는 딸과 손녀․손자와 함께 참석했다.

북한은 전시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가족들은 제사조차 지내질 못하는 실정이다. 어렵사리 중국 등을 통해 생사확인을 한 경우에도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를 알지 못해 생일이나 임의로 날을 받아 제사를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성의 씨(61, 여)는 “마음놓고 슬퍼하지도 못했다”고 했다. 숨죽인 채 61년을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저희는 아버지를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씨는 울먹울먹 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할 때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 아버지, 그래서 더 보고싶고 묻고 싶은 것도 많았던 아버지였다.

이씨의 아버지는 이종령 씨(1909년생)다. 변호사였던 이종령 씨는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5월 30일 을지로 집에서 잡혀갔다. 아버지의 납북 후 전업주부였던 어머니는 홧병을 얻었다. 사람들은 “월북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가장의 빈 자리를 채워주던 큰 아들도 지리산 토벌에 참가하고 돌아온 뒤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다 갑작스레 병사했다. 밥이라도 굶지 말라고 친정에 맡긴 둘때 아들과 둘째 딸은 휴전협정 이후 친정이 있던 연백군이 북한으로 편입되면서 뜻하지 않게 이산가족이 됐다. 어머니의 시름을 달래주던 넷째딸은 전쟁 중 어디선가 날아온 유탄을 맞고 어머니 곁을 떠났다. 일곱 남매 중 남은 아이는 세 딸뿐.

“사진을 닳도록 보고 이야기를 그렇게 들었는데 직접 뵈면 얼마나 좋겠어요. 살아 있다면 100세를 넘기셨을 테지만, 살아서 얼굴을 맞댈 행운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정부는 지난해 9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뒤 올초부터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피해신고를 받고 있다.

이씨는 “어머니가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고 가셨더라면 한결 편히 가셨을텐데”라고 안타까워했다. 이씨의 어머니는 남편이 납북된 뒤 자리보전을 하다 결국 1990년 눈을 감았다. “니 아버지를 보고 죽을 수 있으려나, 내 가슴이 얼마나 까맣게 탔는지 나 죽거든 열어보렴.” 어머니는 ‘아버지가 보고싶다’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이씨는 “어머니를 대신해 힘이 닿는 한 계속 전시 납북자 활동에 적극 나설 생각”이라며 “많은 분들이 전시 납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납북 길 따라 걷기’ 행사를 개최하고, “북한이 하루 빨리 전시 납북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들의 생사확인 및 송환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들은 서대문 형무소 독립공원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가두캠페인을 벌이며 ‘6.25전쟁 납북 피해 신고접수에 동참해달라’고 호소했다./변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