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아픕니다. 60여년간 응어리진 마음을 이제야 풀게 됐으니까요.”

2일 정부가 처음으로 6.25전쟁 당시 발생했던 납북피해를 공식 인정했다. ‘전시납북자는 없다’며 존재마저 부정당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획기적인 성과다.

3일 <데일리안>과 인터뷰에 응한 이미일 6.25전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의 목소리는 모처럼 밝았다.

“11년 동안 지나온 날들이 너무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런 성과를 얻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께 대한민국이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전해드릴 수 있었으면 해요.”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피해자의 상징이 될 정도로 6.25전쟁 때 일어났던 납북피해를 알리는데 앞장서왔다. 정부에서조차 전시 납북피해자의 정확한 명단이 파악되지 않았던 덕에 직접 뛰어야 했다. 창고 속에 잠자던 외교문서를 발굴하는 수준이었다. 대상은 한국은 물론, 미국, 소련 등의 당시 전쟁과 휴전회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국가들이다.

이 이사장이 일일이 찾아다닌 덕에 지난 2007년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자료실에서 1949년 한국 주재 초대 미국대사로 부임한 존 무초 대사가 1952년 1월4일 유엔군사령관(CINCUNC)에게 보낸 긴급 비밀문서를 발견해내기도 했다. 해당 문서에는 민간인 납북자 11만355명이 포함된 명단이 포함됐다.

‘전시 납북자 = 자진월북’이라는 편견을 깨기 위해 납북 피해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자료집을 2차례 발간하는가 하면, 지난 2008년에는 국가를 상대로 1인당 58원씩 870원을 배상하라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었다.

이 이사장은 “그동안 파악한 전시 납북피해자의 수에 비해 이번에 공식인정된 분이 적어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라고 운을 뗀 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배우자나 직계가족이 죽기도 하고, 아예 납북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어 전시 납북피해 신고를 받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월북자’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는다. 특히 전시 납북피해자의 경우, 적과 동지가 수시로 바뀌어 지식인들의 월북이 이어졌던 시기였던 만큼, 의혹의 눈길을 더욱 강하다. 이로 인해 전시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선대의 납북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적지 않고, 납북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제와 무슨 소용이 있겠냐’며 신고를 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고 이 이사장은 전했다.

“납북피해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낸다는 게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건 압니다. 그러나 명백한 범죄행위를 저지르고도 뻔뻔한 북한을 더 이상 좌시할 수도 없고, 납북피해자들을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로 남겨두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조심스럽고 안타까운 부분이지요.”

납북피해 신고는 당시 정황을 적어야 하기 때문에 피해자 가족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하지만 납북피해자 가족들의 고통을 아는 탓에 이 이사장은 ‘신고해달라’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고령의 납북피해자 아내의 경우, 납북피해 신고 후 악몽을 시달리고 있다. 남편이 북한군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던 기억이 되살아난 탓이다. 납북피해 신고 후 생사확인과 유해송환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희망이 생겨 “심적으로 힘들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 이사장도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서울에서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아버지와 소아과 의학박사였던 큰아버지가 납북됐다. 그는 “배우자와 부모, 형제의 얼굴을 기억하시는 분들의 그리움은 더하지 않겠느냐”며 “당장 북한에게서 대답을 듣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후에라도 그 분들이 고향땅에 돌아올 수 있다면, 북한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면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기대하고 있다. 불이익을 걱정하는 피해자 가족들을 안심시키고, ‘자국민 보호 의지를 보여주는 일’이라는 설득을 하는 건 정부의 몫이다. 이는 앞으로 보강돼야 할 부분.

이 이사장은 “납북피해 신고를 알리기 위해 광화문에서 사진전을 개최했었는데, 그 곳에 와서야 신고 사실을 알고 ‘우리 남편도 납북피해자인데 어디서 신고하느냐’고 묻는 분도 여럿이었다”며 “신고가 들어온 인원도 420명에 그쳤다. 그 정도로 홍보가 부족하고, 납북피해 신고에 대한 이해가 낮다”고 지적했다.

이번에 공식인정된 전시 납북피해자는 총55명. 김상덕 전 의원 등 제헌국회의원 6명을 비롯해 정치인 8명과 공무원, 법조인, 농민, 자영업자, 학생들 다양한 인사들이 포함됐다. 이 가운데 11명은 어느 명단에도 포함된 적이 없는 납북피해자였다.

“‘전국 각 시·도별로 직접 달 테니, 안내 현수막만 만들어달라’고 한 적도 있다”며 “납북피해자의 수를 대략 10만명 정도 추정하고 있는데, 열한분이 새롭게 납북피해자로 인정받지 않았나. 이것도 완전하진 않다는 반증인 만큼, 각 시·도별로 더 많이 홍보해줬으면 좋겠다”고 이 이사장은 말했다.

“앞으로 갈 길이 멉니다. 납치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에게 생사확인과 유해송환 등을 요구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정부가 당당하게 끊임없이 이 부분을 요구해주길 바랍니다.”

이 이사장은 전시 납북피해자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시키기 위해 오는 10월경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한다. 휴전회담과 납북민간인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고, 지난달 27일 찰스 랭걸 의원(민주·뉴욕)이 제출한 결의안 초안 보완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그는 “결의안이 한국전 포로 및 실종자와 납북자 문제 해결을 북한에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다만 북한에 의한 강제납치라는 부분이 더욱 명확히 했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밝혔다.

휴전협정에는 남한의 전시 납북자가 ‘실향사민(Displaced Civilians : 전시에 본의 아니게 나라 밖에 나가 있으면서 본국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민간임)’으로 규정돼있다. “우리의 사상·이념에 동조해 월북한 사람만 있을 뿐 납치자는 없다. 정치적 문제이니 더 이상 논하지 말자”고 북한이 선을 그은 까닭이다.

이 이사장은 “미국에서 전시 납북이라는 전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각적인 연대를 모색해볼 생각”이라며 “납치 피해의 중대성을 알려 결의안이 채택되는데 노력하고, 전시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신고가 재외공관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교포들께 알릴 예정”이라고 덧붙였다./데일리안 = 변윤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