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성균관 여성유도회 조애영 초대회장  
중앙일보  2000-09-06  17면  ()  10판  기획.연재  2145자 
지난달 25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한 은촌(隱村)조애영(趙愛泳)여사는 속박의 굴레를 벗은 신여성이자 항일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였다. 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우리네 내방가사(內房歌辭)의 맥을 이어 온 여류 문사였다.

특히 고인이 영남지방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가사를 모아 자신의 작품과 함께 펴낸 `은촌내방가사집` `한국현대내방가사집` 은 지금도 문학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한마디로 강변에 침적해 있는 `사금(砂金)` 과 비슷했다. 

작은 알갱이지만 모으면 덩어리가 돼 가치를 지니는 사금처럼 고인이 평생에 걸쳐 조각조각 창작한 그의 작품들은 두 편의 가사집으로 출판돼 전통적인 내방가사의 명맥을 되살려 놓았다. 

작고한 백철(白鐵)전 문인협회장은 생전에 "고대문학의 귀중한 유산인 규방문학이 선생에 의해 되살아 났다" 고 평가했었다. 

고인은 1911년 대대로 `삼불차(三不借)` 를 내세워 온 경북 영양군 일월면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식.돈.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만큼 인물과 재력, 문한(文翰)이 끊이지 않았던 명문가였다. 
고인의 선친 조인석(趙寅錫)은 조선 말 대간(大諫)을 지낸 성균관 유생이었고, 제헌의원.2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조헌영(趙憲泳)씨가 친오빠다. 조헌영씨의 아들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趙芝薰)으로, 고인은 趙시인의 고모가 된다. 

엄격한 유가에서 태어났지만 고인은 배화여고보에서 신학문을 접했다. 15세 때 `산촌향가(山村鄕家)` 란 가사를 지어 선친에게 보였더니 딸의 재능을 기뻐한 나머지 서울로 유학을 보낸 것이다. 
학생만세 사건이 전국으로 퍼질 무렵엔 배화여고보의 주동 인물로 나서 무기정학을 당하고 옥살이까지 했다. 

31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뒤 이화여전에 입학했으나 이담(李潭)씨와 결혼하면서 학교를 자퇴했다. 이담씨는 내무장관을 지낸 이호(李澔)씨의 동생이다. 

고인은 결혼과 함께 평범한 가정주부로 만족해야 했다. 역시 완고한 유가출신의 남편이 사회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창작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주로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한 것이었다. 
당시의 안타까운 심정을 남편을 기다리며 쓴 시에서 `된장찌개는 보글보글 졸아드는데 내 마음도 졸아든다` 고 살며시 드러내기도 했다. 

58년에는 자신의 작품에 조카 조지훈 시인이 `슬픈 동경` 이란 제목을 붙여줘 시조집을 만들었으나 역시 남편이 반대해 출간하지 못했다. 
개인적으론 불행한 일이었지만 60년 남편과 사별한 뒤 75년에는 성균관 여성유도회 창설을 주도하는 등 사회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趙씨 집안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3편의 규방가사( `화전가` `직녀가` `애환가` )에 직접 지은 `한양비가` `학생의거혁명가` 등을 모아 가사집을 내놓았다. 

창작에 대한 열정은 나이를 잊게 했다. `한국현대내방가사집` 을 발간한 것은 환갑을 넘긴 77년이고, 칠순을 바라보던 79년에는 제4차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해 `Mother` 라는 시조를 발표했다. 
이어 80세 때인 91년 `구한말애사` 12곡과 납북된 오빠 조헌영을 그리워하며 이산가족의 아픔을 노래한 `한국동란회상곡` 을 지었다. 

큰아들 이병붕(李秉鵬)성균관대 교수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3개년 계획을 갖고 계실 정도였다" 고 회고했다. 

그러나 고인은 남모르게 서서히 죽음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는 지난해 6월 "마지막 부탁이 있다" 며 여고 후배인 김정자(金貞姿.70.성균관 3대 여성유도회장)씨를 불렀다. 선친이 쓴 `소녀필지(小女必知)` 란 제목의 빛바랜 원고를 내놓으면서 이렇게 부탁했다. 

"아버님이 쓰신 것을 세상에 내놔야 내가 눈을 감아.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야. 꼭 출판해줘. " 
金씨는 원고를 위당 정인보(鄭寅普)선생의 딸인 정양완(鄭良婉)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에게 보여줬고, 원고 내용에 감동을 받은 鄭교수는 자청해서 역주를 맡아 최근 출판작업을 끝냈다. 비록 고인은 책을 받아들진 못했지만 `소녀필지` 는 조만간 세상에 나올 예정이다. 

그는 눈을 감기 전 金씨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생전에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영감을 사랑한 것 같아. " 
金씨는 "삶이 정열적이어서 잠시 잊고 지내셨겠지만 노년의 선생님은 몹시 외로우셨던 것 같다" 고 애도했다. 

강민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