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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아버지 - 김지혜
이름: 김지혜
2017-03-27 11:13:51  |  조회: 2178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

그 긴 세월 어떻게 지내셨어요? 지금도 19485월에 찍은 제 사진을 볼 때마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 사진 속에서 저는 변호사 김점석 법률사무소라고 한자로 쓰인 간판 앞에 서 있지요.

 

1950626, 법원에 가셨다 만난 친구 두 분과 함께 부산으로 피신해 가시던 아버지는 남영동 대로변에서 잠깐 내려 집에 피난 간다 알리려고 하셨지요. 집에 잠깐 들르셨던 아버지는, 얼른 부산으로 피난가라고 어머니가 그렇게 떠미시는데도, 가족을 생각해서 차마 못 떠나셨지요.

 

195078, 남영동 43번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붉은 완장을 찬 동네 청년과 인민군은 잠깐 조사할게 있다.”며 같이 좀 가시자고 했고, 그 말을 믿은 아버지는 잠깐 다녀올게.”라고 어머니께 말씀 하시고는 용산 경찰서로 끌려가셨지요. 어머니가 두 살 된 동생을 업고 뒤쫓아 용산 경찰서까지 쫓아가셨을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손짓 하시면서 쓴웃음을 짓고 들어 가셨지요.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시면서도 집에 어린 아이 둘만 있는 것을 걱정하셨던 것을 압니다. 그 모습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면서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늘 통한해하고 계십니다.

 

1950711, 아버지께서 지금 명동 롯데호텔 자리인 정치보위부로 이송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니께서 면회를 가셨지만 면회는 안 된다고 거절을 당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하여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두 살배기 동생을 등에 업고, 어머니는 몇 날 며칠을 서성거리셨다지요.

 

아버지가 납북되신 후 7월 말쯤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두 살배기 동생 영명이를 등에 업고, 저는 왼손에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오른손에는 동생 미혜를 잡고 그렇게 갈월동을 지나 원효로 조폐공사 공장 포격으로 도망가던 중에 영명이 머리에 파편이 스쳐서 피를 많이 흘려 죽을 뻔 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니는 페니실린을 구하려고 갖고 계시던 폐물을 모두 처분하셨지요. 당시의 모습들이 지금도 제 눈에 선합니다.

 

9·28 수복 후, 정치보위부에서 아버지와 함께 조사를 받았다고, 장후영 변호사로부터 아버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내는 아프고 어린 세 딸만 있는데.”라면서 몹시 걱정하시더라는 소식이었지요. 또 다른 친구 분은 안 쪽에 김점석이라고 아버지 이름이 새겨진 양복저고리를 서대문 형무소에서 발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1950년 미국 첩보원이 북진하면서 입수하였고 50년 만에 기밀 해제된 CIA 문서에는 서울시에서 체포해 간 민간인 654이라는 명단이 있었고, 그 명단에 아버지의 성함이 있었습니다. 그 명단은 2012년에 이르러, 지금 제가 몸담고 있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회가 발굴한 명단이었습니다.

 

아버지, 65년이 흘렀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슬퍼지고,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누구에게나 자상하셨고, 의리있는 훌륭한 분이셨다는 말씀을 아버지 친구분, 친척, 동료들에게서 많이 들었습니다. 효창국민학교에 입학하던 저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셨던 아버지. “그아, 그아를 빨리하면 가가 된다.”라고 하셨지요. 그 어린 저에게 과학적인 원리를 쉽게 가르쳐 주셨지요. 그 덕분에 저는 한글을 마치고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자마자 왼쪽 귀밑이 약간 찢어진 짝귀인 것을 보시고는 짝귀는 재주가 많다더라.”고 하시면서 천재를 낳았다고 좋아하셨다지요. 그래서 저는 제 귀에 대해 한 번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랐습니다. 아버지, 저와 미혜를 데리고 효창원에 갔던 기억, 두부를 사오다가 넘어져서 다 부서진 두부를 들고는 울면서 돌아오는 저를 보고 어린 저에게 두부 심부름을 시켰다고 어머니를 나무라시던 기억, 어린 영명이 코가 막혀서 빨아 주시던 기억, 동생 미혜가 동네 도랑 가 에서 놀다가 다쳤을 때 응접실에서 글을 쓰시던 아버지는 펜을 던지고 병원으로 달려가 이마를 꿰맨 동생을 안고 나오시던 기억. 이 모든 것이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그 험한 북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그 힘들고 긴 세월을 어떻게 사셨는지요.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버지의 말만 하면 우시던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님을 어찌 잊겠습니까. 1962, 78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아버지의 무사를 기원하며 새벽마다 첫 우물물을 떠다가 목욕 재개하고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셨던 할머니. 전쟁 중에 큰아들 마져 학살당하고 시신도 못찾은 할아버지는 죄인이 어떻게 호롱불을 켜고 밥을 먹느냐고 어둠 속에서 식사하셨습니다.아버지, 당시 고향 자은도에서는 인민군이 지역머슴들을 충동시켜 지방유지들을 산채로 바다에 수장하였습니다. 모두 가슴 아픈 기억들 뿐입니다.

 

어머니와 저희 세 자매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특히 어머니의 고생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구순의 중턱을 넘은 어머니는 지금도 굶어죽지 않는 것이 기적이라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희 세 자매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착하게, 성실하게 잘 살았습니다. 세 명이 모두 대학을 졸업했고 좋은 남편 만나 이제 70대의 할머니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외손자 4명과 외손녀 2명은 공부 잘하고 잘 자라서 각자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고 있습니다.

 

통일이 오면, 자유왕래라도 되면, 제일 먼저 아버지를 찾으러 북으로 가겠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사셨고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혹 후손이 있는지, 후손이 있다면 어디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찾아서 서로 형제·자매로 잘 지내겠습니다. 지난 65년 간, 꿈에도 잊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리며 소식만 기다리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152,

큰 딸 지혜 드림

 

 


                                  5.  


1. 신혼시절 아버지, 어머니(1942년 4월) / 당시 평양지검 검사이셨다.

2. 고향에서 온 체육인들과 함께 1947. 7월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 당시 서울지검 부장검사이셨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전라남도 육상대회 우승자였으며, 테니스도 잘 치셔서 직장대회에서 늘 우승하셨답니다.

3. 집 앞에서 장녀 김지혜(1948년 5월 만6세)
-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붙어있는 용산구 남영동 43번지 집 앞.
- 당시에는 자신의 집에 변호사 간판을 걸었습니다. - 당시에는 법원내에 변호사 상담실이 있었답니다.
- 당시 대한변호사회 총무이셨다.
- 불과 1·2년 후 전쟁으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날줄은 아무도몰랐습니다.

4. 집 앞에서 장녀 김지혜(1949년 초등학교 입학 전)


5. 1948년 아버지 김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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