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아버지를 돌려주세요"

그리운 아버지!
제게는 아버지라고 부를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익히기도 전인 두 살 나던 해 6.25사변 중에 아버지를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50년이 넘게 빼앗기고 살아 온 저의 아버지를 이제는 저희 가족품에 돌려 주십시오!

저는 고향이 평북 박천인 아버지 이성환과 개성이 고향인 어머니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예쁘게 생기지 않은 둘째 딸을 낳은 것을 미안해 하는 어머니를 위로하며 마음이 예뻐야 한다며 제게 미일이라는 소중한 이름을 지어 주셨답니다.

우리 가족은 서울에 살다 6.25가 나 피난길에 나섰으나 한강다리가 끊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가족들은 동생이 태어난지 한달도 채 못된 50년 9월 4일 그토록 식구들을 아끼고 사랑하던 아버지를 빼앗겼습니다. 정치보위부원인 유소위가 오후 4시 경 집에 찾아와서 그동안 숨어 지내던 아버지와 맞부딪치게 되었고, 서북청년단원과의 관련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며 잠시 지서로 가자고 해서 따라 가셨답니다.

어머니는 저녁 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가 몹시 걱정이 되어 지서 근처에 가서 동정을 살피는데 아버지가 유소위를 따라 나와 전차를 타러 가시더랍니다. 어머니가 달려가 영문을 물으니 창백해진 아버지가 '정치보위부에 가서 더 조사할 것이 있대. 아마 내일은 돌아올 수 있을거야'라는 말을 남긴 것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정치보위부를 찾아 가서 면회를 신청하려 하였지만 접근도 할 수 없었답니다.

어머니는 잡혀가신 아버지의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어 애가 타서 기진하셨고, 갓난 동생까지 어린 딸 셋을 부둥켜 안고 삶을 포기할 지경까지 이르렀답니다. 3일후면 서울을 탈환한다던 정부는 3개월이 지난 9월 28일에서야 서울을 수복하였고, 인민군이 후퇴하며 잡아간 사람들을 다 죽였다는 항간의 소문에 어머니는 갓난 동생을 업고 사체가 있다는 곳은 미친 듯이 다 찾아 다녔지만 아버지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오직 아버지 사체만 찾으면 어린 딸 셋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 뿐이었답니다.

날은 점점 추워 오고 여름 옷차림에 고무신을 신고 나간 아버지를 생각하면 살아 있는 자신이 원망스러워 어머니는 밤을 하얗게 밝히며 식음을 전폐하고 죽지 못해 살고 있는 지경에 전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 다시 밀려 서울을 빼앗길 지경에 놓이게 되었답니다.

조부모님께서 당신들은 피난 안 가신다고 하며 저의 어머니를 간곡히 설득하시며 '아범은 죽지 않고 살았을 것이니 너도 살아야 만날 것 아니냐. 그러니 아이들 데리고 피난가라'고 등을 떠밀었답니다. 이에 어머니는 '부모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저희도 안 간다'고 하여 조부모님을 모시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피난길에 오르셨답니다.

이토록 모진 상황에 설상가상으로 제가 아프기 시작하였답니다. 6·25사변 직전에 저를 봐 주던 할머니가 업었다가 떨어뜨렸는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척추카리에스가 온 것이었습니다. 전쟁 중이라 치료할 약도 구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의사인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헌신으로 죽지 않고 살아 오늘의 제가 있답니다. 어머니께서는 사경을 헤매며 하루에도 수 차례 혼절하는 저를 껴안고 '아빠를 보고 죽게 해달라'고 절규하셨답니다. 저는 병의 후유증으로 장애인이 되었지만 어머니의 남다른 가이 없는 사랑과 아버지의 깊은 사랑, 조부모님의 끔찍한 사랑을 받은 한없는 사랑을 빚진 자로서 그 분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정직한 삶을 살고자 다짐합니다.

저는 어릴적 어머니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합니다. 앉으면 바닥에 닿으리 만큼 긴 생머리를 땋아서 머리 둘레에 갖다 붙이시고 너무 길어지면 잘라서 달래를 만들어 고이 간직하시며 '너희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보여 드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낮에는 아버지 대신 생업에 바쁘시고 밤에는 주무시지도 않고 저희 옷을 손수 뜨개질하시거나 만들어 입히시며 저희 딸 셋을 고이 길러 주신 꿋꿋하시던 어머니! 항상 건강하시고 늙지 않으실 것만 같던 어머니께서 99년 겨울,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어머니 생각만 하면 제 가슴은 미어질 듯 눈물만 난답니다.

어머니와 저는 아버지를 빼앗긴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아직도 아버지가 마련하시고 가정을 꾸리셨던 곳, 아버지가 마지막 잡혀가신 곳이기도 한 그 장소에서 오늘도 아버지의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진 속에서 항상 너그럽게 미소 짓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며 오늘도 가만히 속으로 아버지께 말씀드립니다.
“아버지! 어디 계시나요? 아버지! 뵙고 싶습니다. 어머니의 반세기가 넘는 간절한 기다림을 아버지는 아시죠? 제게 마음이 예쁘라고 미일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 주신 아버지의 깊은 사랑은 항상 저의 삶을 지배하고 있답니다. 소식만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부디 살아만 계세요. 제가 아버지와 연락이 닿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사랑해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