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가족이야기

가족이야기

[6.25납북이야기]납북의 한(恨)- 그 혼백을 찾아서-이상훈
이름: 관리자
2013-09-24 12:05:37  |  조회: 2961
납북의 한(恨)- 그 혼백을 찾아서

이상훈

슬픈 역사의 상처
6․25라면 우리 조상들이 겪은 먼 옛날이야기처럼 들린다. 8.15 조국광복과 함께 남북으로 갈라진 이 땅에 동족상잔의 전란이 터져 2년 넘게 처절한 전쟁의 상처를 겪은 것으로 듣고 배웠다.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느냐는 논란은 더 말할 것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납치되었느냐는 사실도 차츰 잊혀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잊을 일은 결코 아니다.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라 멈춘 것뿐이기에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 진실이 끝까지 밝혀져야만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이다.
훗날 역사는 기록할 것이다. 그리고 위로 받지 못한 고귀한 영혼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더 시급한 일은 더 늦기 전에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이라 확신하다.
그 미스터리 같은 전쟁의 30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나로서는 왜 이런 비극이 벌어졌으며 어떻게 60년이 지나도록 분단 상태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지 상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그 피해당사자인 납북인사가족, 손자 되는 사람으로서 슬픈 혼백을 위로해야 하겠다는 엄숙한 의무감을 느낀다.

6․25의 상처는 여전히 우리 가슴깊이 남아있다.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지워질 수 없는 트라우마, 곧 상처와 스트레스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의 충격, 가족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아마도 남북의 대치 상황, 더구나 공산주의가 만들어 놓은 증오의 뿌리 그리고 복잡한 분단환경에서는 이 비극은 끝나기 어려울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하다. 아울러 납북인사 가족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그만큼 어려울 것 같다. 납북가족 2세들, 그러니까 내 아버지 세대에서 그 한을 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럴 희망이 보이지 않다는 현실이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한다.
이러한 답답함을 풀기 위해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의 숨결을 느끼면서 그 흔적 찾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할아버지의 혼백이 남아 있을 만한 역사 속에 묻힌 자리를 맴돌며 영혼과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특히 6월을 맞으면 현충일로부터 시작하여 6․25 그날까지 한 달 사이에 할아버지의 혼백이 머물었을 곳곳을 돌면서 추억여행을 하는 것이다.
오래 전 학창시절 아버지에게 엉뚱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공산당이 그렇게 잔혹한 줄 알았다면 왜 피난을 가지 않았나요. 또 6․25때 북으로 끌려간 분들 가운데 그들에게 협조하거나 이용당한 사람은 없었나요?” 살벌한 전시상황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의문이었다. 훗날 들은 이야기는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할아버지 말씀이 “내가 우리 민족 앞에 죄지은 게 전혀 없는데 왜 도망가듯 동란을 피해야하는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당당한 모습이 존경스러웠겠지만 전쟁이란 무엇인지, 우선 적군을 너무 몰랐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 가족의 슬픈 역사, 그러나 민족과 국가에 헌신한 그 자랑스러운 흔적을 찾으려는 간절한 소망으로 나는 이 글을 시작한다. 언제 어디서 숨을 거두셨는지, 어디에 묻혀 계신지 알 길 없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세대가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세대가 이 숙원을 풀어 주리라 기대한다.

오늘의 후손이 기억하고 존경하는 이길용(李吉用) 할아버지는 독립유공자로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신 분이다. 기자로서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여 베를린 올림픽 때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말소하여 신문(동아일보)에 실어 민족혼을 보여주었다. 격노한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에 무기정간 조치를 내리고 할아버지는 강제해직과 함께 일체의 사회활동을 못하도록 금족령과 함께 감시를 받았다.
할아버지는 인천에서 태어나셨지만 배재학당을 다니면서 줄곧 서울에서 사셨으니 서울사람과 다름없다. 할아버지가 1919년 3.1운동 전후에 일본유학 도중에 귀국, 조선철도국에 들어가 제2의 3.1운동을 펼치려다 그 계획이 발각되어 2년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셨다고 한다. 따라서 배재학당, 정동교회, 동아일보사와 그 앞 광화문 네거리 그리고 서대문형무소까지, 도심의 여러 곳에서 그 혼백을 찾아볼 수 있다.
행복이 넘쳐흘렀을 6․25 이전 성북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가문의 영광과 좌절,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어 착잡한 마음을 억제하기 어렵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혼란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극복의 세월이었듯이 6․25와 함께 풍비박산되었던 우리 가정은 고난시기를 거쳐 다시 일어선 공동운명체의 본보기였으니 아마도 하늘 높은 곳에서 우리를 지켜주신 할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국가유공자 가족으로서 손자까지 학비전액 국가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만해도 우리들에게 어떤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게 한다.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의협심이 강한 민족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독실한 신앙인이었다. 우리나라 개화기,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교회에 다니시며 믿음을 통한 사랑을 전하기에 열성을 다하신 것으로 들어 알고 있다.
인천에서 태어나 미션스쿨인 영화(永化)학교를 다니신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특히 감리교 정동제일교회는 창설 100년이 훨씬 지난 개신교 최초의 교회당으로 근세 민족사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의 결혼식을 가진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할아버지가 서울의 배재(培材)학당(오늘의 배재중,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깊은 믿음에 영향 받은 탓이리라 짐작된다. 일본 유학(同志社대학)을 도중에 접고 귀국한 것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한 직후였다. 이즈음 동경유학생들 사이에 독립운동 비밀결사대를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일본압제에 비분강개하는 청년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할아버지는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철도국에 들어가 중국을 드나들면서 상해임시정부와의 연락망을 확보하고 비밀전단을 수송하다 일경에 검거되어 처음으로 2년의 옥고를 겪으셨다고 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출옥 후 동아일보 기자로 왕성한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할아버지의 발자취나 공적을 설명하는 것은 납북피해 본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생략하려 한다. 다만 일제치하의 항일운동과 공산치하의 강제북송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납득할 길이 없기에 역사의 심술과도 같은 납치비극 그리고 가족해체와 희생에 대해 세계정의에 고발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또한 ‘울고 싶은 달’ 6월을 맞을 때마다 하늘에 따져 묻고 싶어진다. 이 땅에 신(神)이 있다면 어찌하여 전쟁 중의 무참한 학살도 그러하려니와 민간인에 대한 잔학무도한 납치와 고문, 끝내는 생명을 앗아가는 만행을 보고만 있었는가, 원망할 뿐이다. 이야말로 2차 세계대전 중 유태인을 대량 학살한 아우슈비츠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 민족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맺힌 가족사의 증언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서울 교외 통일로의 고양시 접경마을이다. 아버지가 서울을 떠나 이곳에 자리 잡은 지 40년이 넘었으니 이곳 서오릉주변 마을이 바로 내 고향이 된 셈이다. 단출한 우리 가족은 한식이나 추석 때면 어김없이 임진강변 통일동산 안의 동화경모공원에 있는 할머니묘소를 찾는다. 파란 많은 세월, 슬픈 역사의 격랑 속에 하늘여행을 떠나신 할아버지를 기억하며 꿋꿋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겠노라고-
그 바로 앞의 북한 땅, 손에 잡힐 듯한 북측마을을 바라보노라면 착잡한 심정에 휩싸여 머리가 혼란스럽다. 남북분단의 현실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건만 우리가 그 비극의 역사를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보다 6․25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60년이 지나도록 남과 북이 왜 평화의 인사는커녕 험상궂은 얼굴로 총부리를 겨누어야하는지, 왜 그들은 그렇게 폐쇄된 사회에서 심각한 기아에 허덕이면서 핵무기위협만 거듭하고 있는지 이해할 길이 없다. 그리고 남쪽의 평화롭고 풍요로운 들판과는 다른 북쪽의 살풍경한 인상이 너무 대조적이었다.
17년 전 86세를 일기로 작고하신 할머니는 생전에 가끔 6․25전쟁 때의 고생담을 털어놓으시곤 했다. 특히 일제치하에서 언론인으로 항일운동을 하셨던 할아버지가 공산정권에 의해 납북되어 행방을 알길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가 얼마나 고통을 겪으셨을지, 할아버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도 그러하려니와 가장이 사라진 뒤의 가족의 생활고는 어떠했을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여기서 우리 집안이야기를 좀 더 덧붙이려한다. 늘 정의감에 불타는 열혈청년이었던 할아버지는 이른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의거’의 주역으로 교과서는 물론 신문, 방송을 통해 잘 알려져 있는 터였지만 6․25나 8.15를 맞을 때면 할머니의 표정은 늘 우수와 비애에 잠겨 있었다.
1930년대 서울에서 명문 고등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나와 학교교편을 잡으셨던 할머니는 분명 엘리트 지식인의 한사람이었다. 훗날 일본신문기자나 평론가와 인터뷰한 내용을 전해 듣고 나도 감탄한 적이 있다.
지금 임진강변의 언덕에 잠들어 계시는 그 할머니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우리들에게 전하고 계실까. 아마도 유택(幽宅)으로 그 자리를 스스로 택하신 것이 북녘을 바라보며 무언가 전할 말씀이 있어서일 터이다. 아울러 임진강 푸른 물결을 넘나들며 두 분 영혼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매우 훌륭한 선택을 하신 셈이다. 아버지는 성묘 때면 꽃가꾸기를 즐기셨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꼭 생화를 바친다. 그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할머니께 기쁨을 드리려 함일 것이다.
봄이면 우리 집 마당에는 꽃향기가 넘쳐흐른다. 앞 뒤 마당의 노송(老松)과 오죽(烏竹)사이로 꽃들의 경연이 펼쳐진다. 6․25의 악몽 이전, 할아버지, 할머니가 꾸며놓으셨던 성북동 장원(莊園)을 재현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이해하고 싶다.
집 마당에서 바라보이는 통일로에서는 지금 그 옛날 6․25전란의 상처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 길이 바로 수많은 납북인사들이 손발이 묶인 채 끌려간 길이기에 ‘돌아오지 않는 다리’처럼 슬픔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우리 가족의 한(恨)이 하나 남아 있다. 할아버지 가묘(假墓)라도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훗날 건국훈장(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로서 국립묘지에 모실 수도 있다는 통보를 받아놓은 상태지만 머리카락 한 가닥이라도 유해의 한 부분이 없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가족의 바람이라면 흉상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었는데 이 역시 실현되지 못했다. 일제탄압 속에 옥고를 치르신 곳, 더구나 납북직전에 억류되어 서울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신 곳이 바로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이다.
이러한 기념비보다는 납북인사 모두를 위한 기념공원과 추모탑이 서울 어디엔가 세워진다면 가족으로서 죄책감을 씻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라를 위해 헌신하다가 북으로 끌려가신 분들 가운데는 제헌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검찰, 경찰 고위간부 등 국가공무원, 애국 문인, 언론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국가는 이들을 보호하기에 얼마나 애를 썼는가. 국가의 보호는커녕 위로조차 받지 못한다면 누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인가.
언제인가, 6․25전란 중에 전사한 미군병사를 찾기 위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국 산간벽지를 누비며 심지어는 한강 바닥까지 뒤지고 있다는 미 국방부 수색대관련 뉴스를 보고 감동한 바 있다. 그들은 제이팩(JPAC) 즉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사령부까지 만들어 전문 인력 13명을 투입,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수중 탐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당시 한강밤섬 부근에 추락한 미 해병대 함재기 F-7 전투기의 조종사와 레이더 관제사의 유해를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국가가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고 우리를 보살펴 준다는 그런 신념이 있었기에 그들은 나라에 충성하며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웠을 것이다. 그들이 내건 구호는 ‘고국의 품에 돌아올 때까지’라고 한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이야기인가.

하늘은 듣고 있는가, 이 호소를

몇 해 전인가, 납북인사가족의 한 사람으로 6․25를 회상하는 납북퍼포먼스이벤트를 독립공원 앞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당시 서대문형무소의 어둡고 차디찬 옥사(獄舍)와 모골(毛骨)이 송연한 사형대도 그러하려니와 이곳에서 내 할아버지가 서울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어떤 심정으로 무슨 말을 남기고 싶으셨을까.
시계를 거꾸로 돌려 그날의 비극을 체험한다고 가정하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납북인사가족에서 제작한 홍보물이나 납북인사 신고를 독려하는 지하철 광고판 보니 앞면에 포승줄에 묵인채로 북으로 끌려가는 당시의 사진을 싣고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우리가 지금 그 공포의 현장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내 가족이 지금 그 비극 속에 있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언제, 어떻게, 어디로 가는지 알 길 없는 납북의 공포감을 상상해보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배부른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편치 않다. 아니 오히려 부끄럽고 괴롭다고 해야 할까. 풍요를 누리는 우리가 6․25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6&#8228;25를 체험한 내 아버지는 납북인사 가족의 한 사람으로 여러 행사에 열심히 쫓아다니신다. 아마도 노력에 상응한 성과를 바라기보다는 속죄하는 마음, 또는 영혼의 안식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이리라. 독립공원에서 시작된 <납북 길 걷기행사>의 행진거리는 얼마 되지 않지만 가족들의 마음은 평양에 이르는 500여km 이상 달려가고 있지 않았을까. 이날 행진의 절규가 휴전선 비무장지대, 분단의 숲을 넘어 그 분들의 혼백에까지 전달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전쟁 60주년, 납북희생자를 기억하는 한 주(週)’라는 긴 타이틀의 사진전시회는 시대흐름의 단면을 반영하듯 지나는 시민들의 표정은 무관심, 무감각, 무표정할 뿐이다. 6&#8228;25전쟁 당시의 참혹상은 먼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린 채, 시민들의 현실주의와 이기주의를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전시회에는 일제압박으로부터 나라를 되찾으려 투쟁을 벌이다가 희생되었거나 건국이후 공직에서 헌신하신 분들, 그리고 교육, 문화, 종교, 법조와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중을 이끌어가시던 개척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 깊은 뜻을 이해하는 국민이라면 박수를 보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종북(從北) 좌파들이 여전히 활개를 치는 이 사회의 혼란 속에서 박수소리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납북인사 이름 부르기>행사도 있었다. 그리운 그 이름, 사무친 그 이름을 하늘은 듣고 있을까. 6&#8228;25전쟁의 총성은 아직도 피해가족들의 귓전에 울리는 듯 하건만 시민들의 반응은 망각의 물결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외국 언론들, 특히 전쟁당사자인 미국과 납치피해국인 일본의 보도진이 특별히 관심을 보이는 건 ‘왜 한국인들은 전쟁 중 어느 날 사라져버린 국민의 생명, 특히 부모형제의 생사에 대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인 사건은 비극일수록 잊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가르침을 일깨워주는 것이기도 하다.
천안함 폭침사건 때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나라를 생각하는 국민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시청 벽면에는 ‘대한민국은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과연 나라는 무엇인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국민을 나라가 지켜주고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올바른 나라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같은 논리로 6&#8228;25전몰장병과 납북된 국가공무원과 국가유공자에 대해서도 이제 와서 어떤 예우를 바라는 게 아니라 성의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 마땅하다. 그것이 곧 명예회복의 명분이 아니겠는가.

조상의 혼백은 살아 있다

‘원한은 모래에 남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는 말이 있다.‘슬픈 기억일랑 세월이라는 물결에 흘려버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납북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분들의 생사를 확인하고 유해를 찾아내는 일과 명예를 되찾는 일은 가족의 문제이기 전에 국민이 꼭 기억하고 국가가 실천해야 할 약속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라를 지키기에 피땀을 흘렸던 조상의 얼은 우리에게 다짐하고 있다.‘기억하는 한 살아 있다’는 평범하면서도 심오한 진리를-
아버지의 글 가운데 2005년 6월 서대문 독립공원에서의 납북인사 송환궐기대회에서 낭독한‘하늘에 띄우는 편지’가 나에게 감동을 주었기에 여기에 옮겨 적는다.
<그리운 아버님. 이 생명 다하여 사랑하는 아버님.
또다시 6월입니다. 엊그제 현충일엔 허공을 맴도는 아버님 모습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오열했습니다. 그리고 치솟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제 자신을 매질했습니다. 저는 큰 죄인입니다. 아버님 생사조차 모른 채, 여전히 크게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용서를 청합니다. 하느님, 불민하고 불쌍한 저희 모두를 용서하소서.
그 처절한 전쟁이 끝나고 포성이 멎은 지 반 백년.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은 다시 부둥켜안고 흐느끼는데 왜 납북인사 소식은 깜깜한가요. 검은 역사의 구름 뒤편으로 사라져 잊혀버린 것인가요. 아버님은 지금 이 시간 어디에 계십니까. 하늘나라에서라도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절규와도 같은 이 호소는 바로 우리 납북인사 가족 모두, 아니 온 겨레의 울부짖음입니다.
저는 이곳에만 서면 피가 역류하는 듯합니다. 6&#8228;25전쟁의 와중에, 납북인사들이 서울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더러는 처형을 당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무슨 역사의 심술인지,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모진 고초를 겪은 분들이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 이번에는 좌, 우 이념의 대립으로 동포에 의해 납치와 고문을 당하고 종내는 유골조차 찾을 길 없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다니- 아, 너무 허망합니다. 아니 온몸이 떨려 분노를 참을 길 없나이다.
아버님은 일본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이곳에서 가까운 배재학당을 다니시며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불사불멸의 생명을 믿으셨을 줄 압니다. 그런데 불멸의 아버님영혼은 어찌하여 저희 앞에 나타나시지 않으십니까. 남과 북은 분단된 채, 설상가상의 편 가르기로 여전히 나라 안팎의 사정이 어지러운데, 구천(九泉)을 맴도는 영혼이시여, 이 나라를 굽어 살피옵소서.
민족공동체의 화해협력과 평화정착이라는 구실 아래 고위인사들이 남북을 오고가지만 납북자들의 생사확인조차 못하는 현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분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건 허위요 기만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나라는 무엇인지, 비전향 장기수는 조건 없이 보내면서, 우리가 받아낸 것은 무엇인지, 따져 묻고 싶습니다.
아버님께서 잘 아시는 민족시인 김소월은 이렇게 노래했지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선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저는 오랜 세월 기다림에 지쳐 버렸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가슴 벅찬 그날이 오며는,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이렇게 노래한 시인 심훈의 절규처럼 이 생명 다하기 전에 아버님 마지막 모습, 유골 아닌 영혼이라도 만나고 싶습니다.
목이 메도록 부르고 싶은 아버지의 이름, 고난 속에 더욱 당당하셨던 그 모습을 저희 가족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대쪽 같은 기자정신의 용기는, 저희들에게 언제나 큰 산이 되고 나무가 되어 후손들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고향에 영혼을 모실, 그 날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평안히 잠드시옵소서. 2006. 6. 불효 아들 올림>

다시 6월을 맞으며

이제 다시 6월을 맞는다. 우리 겨레에건 크나큰 아픔과 슬픔을 안겨준 달이다. 가장아름다운 생동의 계절이 이렇게 살벌하게 바뀐 건 한마디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제 그 응어리를 풀어볼 때도 되었건만 6&#8228;25는 여전히 비극의 상징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휴전 60년이 훌쩍 지난 오늘 북핵(北核)의 위협과 공포, 그리고 미국 등 우방의 강경대응으로 언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어느 납북인사가족의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 6월은 서러움이 가슴을 적셔 주는, 울고 싶은 달입니다.(중략) 세월은 망각이라는 명약을 준다던가요? 그러나 해마다 6월이 오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제 작은 가슴을 적셔 줍니다. 아 아 찬바람 몰아치는 저 북녘 땅 어느 하늘아래 살아 계시는지, 아니면 돌보아주는 이 없는 차가운 땅속에 묻혀 계실지도 모르는 아버지시여! 용광로에 넣어도 녹지 못할 우리 남매들의 응어리진 한을 녹여 주시옵소서.>
이처럼 6월을 맞는 가족, 아들딸과 형제자매들의 마음은 착잡한 정도를 지나 침통하기만 하다. 이러한 슬픔을 접어두고 어떻게 남북화합을 논할 것인가. 납북이든, 월북이든, 탈북이든 가릴 것 없이 인권을 박탈당한 희생을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겠는가.
할아버지의 희망이라면 후손의 행복 이전에 가문의 맥(脈)과 업(業)을 잇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가족으로서 부끄러움이 앞선다. 내 아버지는 부전자전 대(代)를 이어 종합일간지 기자로 30년 넘게 땀 흘렸지만 3대에서 그 뜻을 잇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실 듯하다. 신문기자가 되려면 적성이나 글재주 이전에 무서운 경쟁을 통과할 수 있는 실력이 요구되므로 흔한 표현으로 아무나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다른 분야에서라도 할아버지의 정의감 넘치는 꼿꼿한 기개를 가슴에 새기며 미디어활동의 다른 보람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으로 나의 아쉬움을 달래고 싶다.

우리가 청소년기를 보내면서 안타까웠던 일은 아직도 많은 젊은이들이 6&#8228;25전쟁의 진실, 특히 납북사건의 진상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 많은 민간인 납치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것도, 북한당국이 일본인 납치는 시인하면서 동포납치사실을 강력 부인하는 것도 우리 세대에서 제대로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비극을 제대로 알아야만 역사의 저주를 되풀이하지 않고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가슴 속의 증오심을 털어버리고 지난날의 죄악을 용서하려면 진실고백이 선행되어야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다시 6월을 맞으며 하늘에 바치는 간절한 우리의 다짐이며 바람이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40 그리운 아버지 - 김지혜
김지혜
17-03-27 2177
39 제46회 한민족통일문예제전-대통령상 수상 납북인사 김명혁님의 증손..
표은혜
15-08-13 2626
38 [6.25납북이야기]생각하면 할수록 보고 싶은 큰오빠-황종순
관리자
13-09-24 3693
37 [6.25납북이야기]어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을까-홍능자
관리자
13-09-24 3636
36 [6.25납북이야기]6.25 전쟁관련 에세이-조정기
관리자
13-09-24 3523
35 [6.25납북이야기]뼈아픈 나의 6.25-정덕화
관리자
13-09-24 3725
34 [6.25납북이야기]금강산의 가족 나들이를 꿈꾸며-이중희
관리자
13-09-24 3097
33 [6.25납북이야기]독립유공자 아버님(이 종식님)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하며-..
관리자
13-09-24 2903
32 [6.25납북이야기]납북의 한(恨)- 그 혼백을 찾아서-이상훈
관리자
13-09-24 2960
31 [6.25납북이야기]단 한 번 만이라도-이경숙
관리자
13-09-24 3165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