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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납북이야기]뼈아픈 나의 6.25-정덕화
이름: 관리자
2013-09-24 12:07:13  |  조회: 3723
뼈아픈 나의 6‧25

정덕화

전쟁은 한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한 가족, 한 동네, 한 나라의 비극이다.
벌써 60여 년이 지난 일이 되어 그 비극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70을 넘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있고, 세상을 떠난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6․25 전쟁은 가족과 삶의 터전, 우리의 미래를 짓밟아 황폐화시킨 뼈아픈 역사의 무거운 장이 되었다.
나는 소년 시기에 가장인 아버지가 북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맞이하였다. 어린 일곱 남매의 어두운 장래가, 아니 우리들 가족의 불행스러운 운명이 다가왔다.
그때 나는 열다섯 살이었고 서울에서 경기상업중학교 2학년에 막 진급했을 때였다. 6․25 전쟁이 터지자 학교에서는 1,2,3 학년은 무기휴학조치를 취하였고 나는 곧바로 고향 평택으로 내려왔다.
아래로는 2년 터울의 남자동생 4명이 있었고, 그 아래로 여동생 2명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고향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계셨고 농사일도 겸영하셨기 때문에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고 단란한 가정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둘째아버지와 함께 피난을 가셨는데 공주 마곡사에 이를 무렵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심히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빠져 나오셨는데 바로 건강이 나빠져서 더 이상 피란길에 오르지 못하시고 고향집으로 돌아 오셨다고 한다. 한 보름 동안 약 지어 드시고 휴양하시어 거동이 가능할 즈음 인민군들이 찾아 와서 아버지를 끌고 갔는데, 그 다음 날 그러니까 제 기억으로는 8월 중순 쯤으로 기억되는데 몹시도 덥고 후덥지근한 오후 2시쯤 아버지와 10여명이 포승줄에 묶여 인민군에 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어머니는 나와 함께 젖먹이 동생을 업고 그 광경을 보았고, 다행히 다른 동생들은 그 모습을 못 보았다.
아버지는 납북되기 전 반공 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셨고 대한민족청년단 일에도 협력하셨다고 들었으며 한의원을 경영하시면서 농사일도 겸영하셨기 때문에 생활도 윤택한 편이었으니 그들의 눈에는 숙청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는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셨던가 보다.
이렇게 아버지가 납북되고 나서 일시에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농사를 하시던 큰아버지와 앞으로 살아갈 길을 의논하는 중, 큰아버지 계신 동리로 이사를 하자고 하시어 살던 집을 정리하고 큰 댁 옆으로 이사를 했다. 큰아버지는 농사일을 하셨고 둘째아버지도 농사일을 하시면서 동리 이장 일을 보고 계셨는데, 둘째아버지와 아버지가 같은 날 납북되고 혼자 남으셨으니 기가 막히셨을 것이다.
제 나이 열다섯에 그게 장남이라고 저한테 농사일을 가르치시는데 어린 몸에 농사일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모 심고, 벼 베는 일과 가을걷이해서 타작하는 일은 그래도 버틸 만 했는데 벼논 매는 일은 벼 잎에 눈이 찔려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벼농사도 힘들었지만 여름 날 뙤약볕 아래서 고구마 밭매기란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안 해 본 사람은 모를 것이다. 비가 안 와서 메마른 고구마 밭에 호미질을 할라치면 호미가 땅땅 튀어 올라 김을 맬 수가 없었으며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더운 날 콩 밭 매는 일이었다. 콩밭을 매러 밭고랑에 앉으면 하늘이 보이지 않고 숨이 막혀 털썩 주저앉고는 했다.
몸이 다 성장하지도 않은 열다섯, 열여섯 살의 몸뚱이로 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그 때는 동생 두 명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에 가담하고 있을 때인데 저는 서울에서 중학 1년을 다녀 본 경험이 있었기에 이 힘든 일을 평생 할 것인지 아니면 내 몸에 맞는 다른 일을 찾을 것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 몰래 집에서 6km 떨어진 안중에 있는 고등 공민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는데, 학교라는 것이 교사 건물도 없이 천막 하나를 처 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문 틈 옆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칠판 하나는 걸려 있는데 책상, 걸상도 없이 맨 바닥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방 12km이내에는 중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이 학교에 다니기로 생각하고 교무실을 찾아 갔는데 교무실이라는 것이 농촌 주택 마루를 사용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만나 편입학 상담을 했다. 그 때 만난 선생님이 정시우 교감선생님이시다. 서울에서 중학 1년을 다니다가 전쟁이 나고 아버지가 북으로 납북되어 그 동안 농사일을 했다고 하니까 2학년에 편입을 시켜 주셨다. 그러니까 그 때가 11월 중순쯤이었고 실눈이 살살 내리는 날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이른 봄 3월에 3학년에 올라갔으니 중학 2학년 과정은 건너 뛴 셈이었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밭길을 건너고 논둑길을 지나서 삼성재라는 비교적 큰 산 고개를 넘으면 댓골이라는 아름다운 시골 길 동리가 나오는데 나는 그 동리에 들어서면 그 아름다움에 놀라곤 했다. 동리를 지나면 신작로가 나오는데 그 때부터는 걷기가 편해졌다. 오고 가는 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걸었고, 산딸기가 눈에 띄면 가끔 따 먹기도 했는데 내가 편도로 한 시간 반가량 걸리는 이 길을 왕복하면서 인내심이 길러지고 다리 힘도 길러진 것 같다.
등교하고 귀가하던 시간이 너무 길고 그 시간이 아까워서 가고 오는 길에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을 외우며 다녔는데 그것이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1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 성적은 꽤 올라갔고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방법도 터득하기 시작했다.
고등공민학교가 인가 받지 못한 중학과정이지만 공부 내용은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기 때문에 실생활에는 많은 도움이 되는 교육 과정이다. 이를테면 농사 짓는데 필요한 농업 통론을 배우는데 나는 그 때 농업 가르치시던 선생님께서 열심히 강조하시던 내용이 지금도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우리들 모두 알고 있듯이 벼는 물 있는 논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 벼는 밭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벼는 물을 필요로 하지만 물을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에 너무 오래 많이 잠겨 있으면 벼가 썩는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친구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교감인 정시우 선생님은 강의하실 때 온 힘을 기울여 열변을 토하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전농동에 있던 경성농업고등학교에 다니셨다고 했다. 이 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평생 하더라도 세금고지서는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지 양복바지 입은 것들한테 손해 안 보고 살 수 있다면서 어린 우리들이 사회 나와서 바보같이 살지 말라고 깨우쳐 주셨다. 평소 흠모하고 존경했는데 훗날 이 선생님께서 저를 도와주시게 된다.
공민학교 졸업 후 다시 동생들과 함께 농사일을 하는데 힘들고 고단함이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때 마침 서울 환도 소식이 들려 어떻게 하든지 서울로 갈 궁리를 하는데 숙모님 친정 조카 김용식이라는 분이 우리 집에 들렀다가 우리 어머니께 저 애를 저렇게 농사짓게 놔 둘 것인가 묻고는 어떻게 하든지 고등학교에 진학시키자고 간청을 하는 것을 내가 먼발치에서 듣고는 서울로 올라 갈 마음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때 그 분은 선린상업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수원에 있는 피난종합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어머니께 말씀 드리고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왔고 다니던 상업학교에 복학 수속 신청을 냈는데 중학교 졸업장이 없어 안 된다고 입학이 거절되었다. 그런데 당시 교무주임인 유연선생님이었는데, 그 선생님께 말씀드리길 주위에 학교가 없어서 못 다녔고 당시는 전시라 일종에 천재지변 상황이 아니냐? 이런 학교라도 다닌 것이 다행 아니냐 하고 따지니 말끄러미 나를 쳐다보는 눈초리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막무가내로 입학시켜 달라, 안 된다, 입씨름 끝에 학교를 나와 저녁에 교무주임 집에 찾아 갔다. 낮에 학교에서 당돌하게 따지던 어린 녀석이 갑자기 집까지 찾아 왔으니 난감해 하는 눈치였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골똘히 생각하시더니 당분간 우리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느냐고 해서 학교만 넣어주면 그리하겠다고 했다. 그 길로 입주 과외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 일이 대학 다니는 동안까지 거의 7년 동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가정교사란 이름으로 살게 된 시발이 된 것이다.
나는 친구들이 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도 더 지나서 4월 중순쯤 편입이 허락되어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다. 전쟁 때 중학교를 못 다니고 제 때에 고등학교를 못 간 탓에 같은 연배보다 일 년이 늦게 되어 입학이 된 것이다. 어떻든 유연선생님 배려로 학교를 들어가고 일학년 2학기 때에는 적선동에 잇는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추천해 주셔서 학비걱정, 숙식걱정 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다만 밥값 하느라고 내 공부 하는 것은 밑졌지만 오랜 후에 그 선생님을 찾아뵈려고 했는데 벌써 세상을 등진 뒤셨다. 참 고마운 분이었는데 학교 성적도 우수해서 취직 걱정도 별로 안 하고 있는데 3학년 때 담임인 이종화 선생님(후에 서울시립대 교수)이 불러서 교무실로 가서 만나 뵈니 대학에 진학하라고 해서 나는 못 간다, 선생님은 가야한다 그러기를 두어 달……. 다시 불러서 갔더니 오늘 결정을 보자는 거였다. 나는 빨리 취직해서 시골살림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했고 선생님은 네가 그 돈 벌어서 그 많은 동생들을 어떻게 다 건지겠느냐, 동생들일은 이다음에 다른 방법으로 생각해 보고 선생님이 입학금을 대 줄 테니 대학에 진학하라는 것이었다. 네 인생도 챙겨 가면서 동생들 일을 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냐고 하셔서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사람 마음이 간사 했다 했던가, 내 마음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고 담임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해서 대학 진학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되었다.
가정교사를 접고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기를 반년, 대학 입학시험 준비를 늦게 시 작하다보니 몸에 무리가 갔는지 졸업 시험 때 둘째 시간에 의자에서 혼절했다. 병원으로 후송되고 있는데, 진찰 결과 과로와 영양실조라는 진단을 받았다. 고향에 내려가서 한 달간 휴양하고 복학했다. 쌀쌀한 초겨울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입학시험을 치러 갔는데 시험지를 받아 들고 이름 석 자를 쓴 다음 눈을 감고 하늘에 기도했다. 같은 값이면 붙게 해 달라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담임선생님 기대에도 부응해야 하고 더더욱 내가 잘되어야 집안을 일으킬 것 같으니 웬만하면 붙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눈을 Em고 시험지를 들여다보니 대개 다 아는 것이 나왔고, 매시간 그리 어려운 문제가 없어서 쉽게 쓰고 나왔는데 아마도 집안 걱정하는 내 간절한 소망에 하늘이 응해주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힘들 때는 하늘을 쳐다보며 하늘에 대고 인생을 이야기한다.
입학시험에 합격하고 담임선생님께 들렀더니 몹시 반가워하시면서 입학금 낼 날짜와 금액을 물으시면서 바로 준비하겠다고 하셨다. 입학과 관련하여 꼭 쓰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합격자 발표 날 나를 찾아 온 손님이 있다고 해서 가보니, 옛날 아버지 고향 친구께서 찾아 오셨다. 내가 서울에서 서울대학에 시험을 친다고 해서 옛날 아버지 생각이 나서 부랴부랴 올라오셨다고 하시면서 고향에서 면장도 하시고, 낙선은 하셨지만 국회의원 입후보도 두 번 하신 분이며 일본 대학 유학도 하신 보기 드문 시골 유지이시다. 같이 발표를 보고 내가 합격을 하니까 손을 덥석 잡으시면서 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아 하였겠느냐고 몹시 아쉬워하셨고 고향에 내려가서 어머니께 소식 전해 드릴 테니 그리 알라 하셨다. 참으로 어버이의 정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생들 두 명이 고등학교로 나를 찾아 왔는데 웬일이냐고 물으니 안중중학교에서 왔다고 했다. 선배님이 학교 다닐 때는 공민학교였지만 지금은 중학교가 되었다며 유세준 교장선생님과 정시우 교감선생님의 편지를 보여 주는 것이었다. 편지 내용은 이러했다.
귀하는 처음부터 우리 학교에 들어 온 학생은 아니었고 피란 때 잠시 편입해서 졸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문에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학에 합격했다고 하여 선생들과 의논 끝에 사정이 어떤지 나의 시골집에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는데 다년 온 선생 말씀이 내 어머니가 내가 대학 들어간 것이 못마땅해 하시면서, 장남으로 태어나서 집안 일 돌보면서 동생들 거두어야지 대학은 무슨 대학 무슨 돈으로 어떻게 대학을 가겠느냐면서 천하에 나쁜 놈이라고 푸념을 하는 바람에 놀라 돌아와서 그리 보고하니 정시우 교감선생님이 주동이 되어 돈을 각출해서 입학금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돈의 대부분은 교감 선생님께서 부담하셨다고 들었다. 편지와 함께 동봉된 돈을 보여 드리니 담임이 읽어 보시고는 몹시 기뻐하시면서 “내가 너를 돕고 싶었는데 나보다 먼저 너를 돌보는 사람들이 나타났구나! 항상 열심히 노력하고 성실히 하면 세상은 그리 삭막한 것만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선생님들이 두 번째, 세 번째 은사님들이다.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데 도무지 생각이 정돈이 되지 않고 집중력이 떨어져 공부에 흥미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어느 날 주말에 고향집에 들르러 가는데 동리 입구에 이를 무렵 10여명이 모내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둘째, 셋째 동생들이 어른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걸음이 멈춰졌는데 논으로 들어 갈 수도 그렇다고 혼자 집으로 들어 갈 수도 없는 심정이 되었다. 저것들이 학교도 못 가고 저리 고생하는데 내가 대학교 교복을 입고 이런 모습으로 논둑에 나타나다니, 저들 생각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하니 그 뒤로는 고향에 자주 가지도 못하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 묻고 대답하고 도무지 심정이 착잡하고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내가 그때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직해서 저들을 도와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했겠는가. 대학 간 것을 너무 많이 후회하였다.
세월이 흘러 재학 중에 군대도 갔다 오고 다시 복학했는데 그때 정시우 교감께서 3학년 2학기 등록금을 또 보내 주셨다. 어떻게 아셨는지 가정교사를 해서 등록하려면 6개월 후에나 등록금이 마련 될 텐데 우선 이 돈으로 등록하라는 것이었고 편지에는 나는 매일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고맙고 눈물겨운 이야기이다. 이들 은사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내가 바른 길로 잘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내가 은행에 들어가 많지는 않지만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시골 동생들도 장성해서 집안이 기틀을 잡아갈 무렵 셋째 동생이 서울로 찾아왔다. 그가 군대 생활을 마치고 막 돌아온 길인데 시골에 가보니 농사일은 둘째 혼자해도 될 것 같으니 자기는 택시 운전이나 하고 살았으면 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하고 한남자동차학원에 등록시켜 연수시키고 면허증을 받았다. 그러나 시내 택시 운전을 하는데 시골 사람이라 서울 지리를 모르니 승객과 타투기가 다반사였다. 도저히 서울에서 택시 운전하기가 힘들다면서 일은 안하고 집에서 낮잠만 자서, 한심한 생각에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니 모래나 파다 팔아먹고 살게 덤프트럭이나 한 대 사 달라는 것이었다. 신진자동차에 물어 자동차 값을 알아보니 240만원인데 그 때 불광동 대지 35평에 18평짜리 집이 100만원 하던 때였고 나는 30만 원짜리 전세를 살던 때였다. 은행 공제회 대출 80만원을 받고 160만원은 5년 할부로 해서 트럭을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는데 몇 년 사이에 두 번이나 사람을 치어서 그것 합의 보러 다니느라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둘째는 셋째가 차 가지고 사업하는 것이 부러웠든지 농사는 팽개치고 조수 노릇하면서 드디어 동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잘 되었어야 했는데, 운수업은 운수가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이 실감나듯이 우리 집안하고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아버지가 남겨 놓으신 농토와 재산 다 까먹고 길로 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시골집에 들렀더니 이삿짐을 싸고 있어 이게 무슨 일 이냐고 물었더니 빚에 넘어가 집을 내 놓게 되었단다. 그 길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왔다. 이 노릇을 어떻게 한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둘째는 300평을 사서 벽돌, 기와 공장을 내서 공장 일하게 되고, 셋째는 평택, 안중 노선버스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둘째는 그 공장이 커서 공장 허가 1000평으로 늘었고 어엿한 시골 부자가 되었다. 둘째는 버스 일을 하고 그 내자는 미장원을 차려 열심히 살았다. 그 미장원 차릴 때 내 아내와 내가 시골에 가서 미장원 터를 보고 와서 돈을 대 주었다. 후에 둘째는 포클레인을 사서 사업을 벌이더니 꽤 많은 재산을 모은 것 같다. 그가 초등학교만 나오고도 평택시의회 의원을 두 차례나 한 걸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넷째는 복덕방도 하고 이런 일 저런 일 전전하다가 지금은 평택시에서 택시 업을 하고 있다. 다섯째 막내는 내외가 양장점을 해서 잘 살고 있었는데 그만 교복자율화가 되는 바람에 일거리가 줄어 사업에 실패하고 빈 몸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 양장점도 내가 마련해 준 것인데 잘 되었으면 좋았으련만……. 서울로 온 막내 동생은 살 길이 막막하게 되어 할 수 없이 면목동 지하에 공업용 재봉틀 몇 대를 사 넣고 봉제업을 시작하게 했다. 원래 그 아내가 양장 기술이 있어 바느질을 잘 하기 때문에 방산시장이나 동대문 시장에 봉제품을 납품을 해서 사업을 잘 키워나갔다. 지금은 아들과 딸을 잘 둬서 사업은 다 접고 편하게 말년을 지내고 있다. 하나 있는 여동생은 대전 계룡에서 아들, 딸들과 과외 학원을 하면서 잘 살고 있다.
지금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지나온 과거를 생각하면 다른 집들 하고는 사정이 많이 달랐고 어두컴컴한 터널을 수십 년이나 지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 그래서 고생 고생하면서 기를 쓰고 살려고 버둥댄 것이 그 못된 공산당들의 아니었겠는가하고 생각하면 정말 치가 떨리는 세월 이었다.
이제 어머니하고 이야기 하고 싶은 시간이 왔다.
우리 어머니는 한의원 댁 마나님이라 시골 농사짓는 법을 잘 몰라서 남편을 여의고 여섯 남매를 거두느라 그 심정이 오죽하였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천성이 꿋꿋하시고 강건하셔서 웬만한 어려움에는 끄떡도 안하시는 분이셨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까짓 것”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 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니까 내가 공부한다고 서울로 가 버리고 어린 동생들 다섯 데리고 살림하면서 어렵게 버텨내지 않았겠는가? 우리 집에 같이 사시면서 노인정에 늘 다니셨는데 90세가 되어서도 좌장 노릇을 하시면서 늘 장남 잘 두었다고 제 자랑을 하셨다고 한다. 내가 대학 갈 때는 그리도 못 할 말씀을 하시더니 마음이 풀어지신 것 같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셔서 고향 선친들 묘역에 혼자 묻혀 계시는데 살아서도 혼자이시더니 죽어서도 남편 곁에 못 가시고 홀로 계시니 내 마음이 항상 무겁다. 이제 혼백이라도 아버님과 만나 좋은 곳에 가셔서 사셨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이제 또 아버지 하고 이야기 할 시간이다.
아버지는 제가 여섯 일곱 살 때 천자문을 가르치면서 먹을 직접 갈게 하고 붓으로 쓰는 법을 가르치셨다. 제가 제대로 쓰지 못하면 집 앞에 있는 버드나무의 회초리를 만들어 오라고 하셨다. 내가 맞을 회초리를 가지고 방에 들어가면 목침 위에 종아리를 걷게 하고 서너 번 강하게 후려 치셨다. 어찌나 아프던지 어린 마음에 원망도 했었다. 내가 천자문을 붓글씨로 배우고 동몽선습이나 명심보감을 읽은 후에 초등학교를 들어갔으니 학교 공부가 식은 죽 먹기였다. 붓글씨 잘 쓴다고 서예 반에서 활동하고, 군대에서는 상벌 계에 배치 받아 상장이나 감사장 등을 쓰는 일을 하다가 제대하게 되었다. 은행에서 지점장을 할 때는 영주에 계신 석계 김태균 선생께 서예를 사사 받아, 일 년만 열심히 하면 국전에도 출품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을 듣기도 했었다. 그분은 국전에서 초서 특선을 두 번이나 하시고 추천 작가로 활동하던 분 이었는데, 그 뒤 인연을 계속 이어가지 못해 그분과의 연락이 끊기고 나도 직장 생활에 바빠서 그만 그 소질을 살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 하지만 어려서 아버지께 버드나무 회초리를 맞아가며 배운 천자문 덕에, 사서삼경도 가끔 들여다보며 그 내용으로 친구들과 담론을 하기도 한다.
아버지 살아 계실 때 반공청년단들과 대한민족청년단들이 평택시청, 라이온스클럽과 협찬하여 50여 년 전에 평택 신한고등학교 뒷산 정상에 추모비를 세웠다.
안호상 전 문교부 장관도 오시고 이은상 시인께서 시문을 지어 비문에 새겨 넣어 주셨다. 매년 6월 25일이면 나와 아내는 유가족으로 참석한다. 인근 부대 군인들이 와서 조총을 쏘고, 고등학교 밴드가 와서 조가를 연주해준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그 때 납북 되었던 분들의 가족이 추모제에 오시는데 이제 그 배우자들은 다 돌아가시고 그 자식들도 늙고 병들어 어떤 이들은 세상을 버려서 참석자들이 많이 줄었다. 그들의 얼굴에 늘 수심이 들어있고 행색이 초라해서 그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늘 침울하다.
어머님은 돌아가시고 오봉산 밑 선형 들 아래 혼자 묻혀 계신다. 혼백이라도 계시다면 같이 만나 보셨는지 모르겠다.
내 아내가 50년 동안 아버지 좋은데 가시도록 절에 가서 지극 정성으로 기도한다.
아마도 좋은데 가셨을 거라면서……. 백중 때는 물론이고 초파일, 초하루, 보름에는 평생을 두고 절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 아무쪼록 어린것들 두고 떠나시면서 눈을 못 감으셨을 텐데 이제 아들 딸, 손자들 낳고 잘 살고 있으니 그 멍에 벗어 던지시고 훨훨 날아다니실 거라 생각된다.
정부가 미뤄 둔 납북자 진상 조사 문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작년 11월 23일에는 국무총리실의 조사관들이 집을 방문하여 실사를 했고 지난 4월 6일 드디어 아버님께서 납북자라는 결정서가 나왔다.
나약한 여린 여성이, 그것도 장애인인 이미일 이사장이 국회다, 미국 의회다 뛰어 다니시어 법률을 통과시켰다. 참 대단한 분이고 감사하다.
이제 나도 짐을 줄이고 멍에를 내려놓아야 하겠다.
열다섯 살 이었던 내가 벌써 77세의 노인이 되었으며 분단 70여년, 6․25 전쟁 60여년의 엄청난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 역사는 하나도 변한 것은 없지만 우리들의 이 뼈저리게 아픈 동족상잔의 기억은 우리 대에서 지워졌으면 좋겠다.
나와 내 자식 또 그들의 자식 대에까지 그 무거운 짐의 굴레에서 벗어날 날을 기원하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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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6.25납북이야기]금강산의 가족 나들이를 꿈꾸며-이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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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4 3093
33 [6.25납북이야기]독립유공자 아버님(이 종식님)의 평안한 안식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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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4 2900
32 [6.25납북이야기]납북의 한(恨)- 그 혼백을 찾아서-이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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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4 2959
31 [6.25납북이야기]단 한 번 만이라도-이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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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4 3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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