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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납북이야기]6.25 전쟁관련 에세이-조정기
이름: 관리자
2013-09-24 12:08:06  |  조회: 3520
6․25 전쟁관련 에세이

조정기

나는 1925년 6월 23일생으로 6‧25사변 당시 25세로서 결혼 6년째 되던 해였다. 아들 둘 딸 둘을 낳아 기르고 있었고 6살 4살 2살 1살 사 남매를 키워오던 중 6‧25 당시 거주하고 있었던 집은 서울시 중구 을지로 3가 291번지에 살고 있었다.

집은 당시 비교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편으로 집은 이층집이었고, 주위의 이웃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내 가족은 행복한 가정이었다. 남편은(36세 경찰청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로도 활동하면서 청년단장으로도 활동하면서 바쁘게 살아왔었고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밖에서는 비행기 폭격소리며 을지로 대로변으로 내달리는 탱크 소리며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남편은 2층 서재에서 책을 잃고 있었는데 내가 남편을 피신시킬 요량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남편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면서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서재에 머무르던 중 아닌 게 아니라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내려가 누구냐고 했더니 조 선생 계시냐며 저 고비서입니다 해서 문을 열어주었더니 어디 계시느냐고 해서 2층으로 안내를 하고 당시 내무부장관 비서(고비서 라고만 알고 있음)라는 사람이(남편과 친분도 있으셨음) 고비서는 2층으로 올라가 있던 중(몇 분 후) 또 다른 여자가 와서 방금 한 남자가 이 집에 들어갔느냐고 물었고 그렇다고 하니까 양해도 없이 이 여자가 뒤따라 올라가 잠시 후 세 사람이 내려오기에 나의 남편께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까 다방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나간 후 몇 분 있다 또다시 인민군들이(6-7명) 집으로 들어와서 총부리를 내 가슴에 데고 네 서방이 조병권이지 하면서 서방 찾아내지 않으면 너희 가족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공포에 떨던 중에 또 다른 인민군이 들어오더니 조병권 잡았어 하면서 집안에 있는 세간 전부를 그 일당이 온 집안을 뒤져놓고 온 집안 골동품 및 가재도구 들을(숟가락 젓가락마저) 트럭에 싣고 가는 바람에 당장 끊여 먹을 그릇 하나 없어 이웃집에 가서 식기를 빌리려고 갔다가 사정이야기를 하는데 죄가 있으면 죗값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으냐는 식에 말투로 정중히 거절을 당하고 나서야 훗날에 우리 이웃들이 거의 전부가 좌익분자들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남편은 다방에 갔다 온다는 그 후로 2주쯤 지났을 때 지게를 진 나이 지긋하신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나에게 편지를 전하시면서 어떤 젊은이가 이 편지를 주면서 을지로3가 291번지에 가셔서 전해주시면 돈도 드리고 식사도 대접해 드릴 테니 꼭 좀 전해달라고 해서 왔다고 하시길래 편지를 보니까

지금 내가 서대문형무소에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프고 옷도 필요하니 준비해서 서대문형무소로 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얼마 있으면 나가게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머님(시어머님) 아이들 깨끗하게 잘 키우고 있으라는 내용 당시 내 나이 25세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방법이 없었지요. 그래 을지로3가 집 뒤편에 하원시장엘 가서 떡 등 이것저것을 사서 서대문형무소가 어딘지도 몰라 물어물어 가다가 광화문을 막 지나려는데 남편과 알고 지내셨던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어 그분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기에 사정이야기를 다했더니 갈 필요 없다면서 만약 가게 되면 아주머니도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니 가지 말라는 예기를 하면서 조금 전에 트럭에 모두 싫고 어디론가 갔다는 겁니다. 그 사람 역시 좌익으로서 나에게 거짓으로 한 말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요. 당시 그 사람 말만 믿고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던 것이 6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래도 서대문형무소까지 가서 남편의 상황을 못 알아본 것이 뼈에 사무치듯이 아쉽고 원망스럽게만 느껴지고요

또한 그 당시 하늘에서는 폭격기들이 무차별적으로 폭격해댔던 터라 무섭기도 하고 무어라 말로 표현을 못 할 정도로 무서웠었지요. 나는 몸을 피해 가까스로 을지로 집에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 후로 시어머님은 화병으로 중풍까지 오게 되어서 시어머님 병시중부터 4남매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당시 나의 막내 오빠는 CID대장으로서 군인이었지요. 오빠네 가족들과 한 트럭에 올라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는데 부산 서면에서 피난생활을 마치고 9‧28수복과 함께 서울로 다시 올라오게 되어 을지로 집에 갔을 때엔 이미 폭격으로 집 전체가 전소하여서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지요. 오라버님 집으로 (현재 서울 안암동) 가서 신세를 지며 살게 되는데 내 가족 모두가 (시어머님. 당시 집에서 일했던 가정부 아이 4남매 물론 저의 올케가 좋아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더구나 어수선한 전쟁 시기였던 터라 한동안 살다가 오라버니께서 마련해준 집으로 이사하게 되어 살면서 시어머님은 중풍 병과 아들을 잃은 슬픔에(남편은 3대 독자) 화병으로 시력까지 잃게 되면서 합병증세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서 당시엔 영구차량도 없어서 구루마를 빌려서 시체를 구루마에 싫고 큰조카 큰오빠의 아들과 같이 구루마를 끌고 망우리까지 모셔다가 땅을 파서 모시고 그 시절에 매장 형식도 없이 매장해 드리고 돌아와 다음 해 추석 명절 때 찾아뵀을 때 여름 장마에 묘지가 소실되어 시어머님 시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막힐 노릇입니까? 남편 잃어 시어머님 시체까지 잃어 나의 무능력을 한탄하기까지 하게 되면서 일 년 열두 달 365일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또한 아이들과 앞으로 먹고살 일들을 고뇌하며 살아오면서 여자로서 안 해본 일 없이 일평생을 6․25의 참혹한 전쟁으로 개인적인 일생은 물론 자식들까지 고생시켜가며 한 가정이 무너져버린 현실에 6‧25의 저주는 그칠 줄 모르며 오늘까지 살아오고 있다

6․25이후

대중교통 버스차장이 안내하던 시절 안내양들 합숙소에서 안내양들과 합숙하며 밥해 먹이고 빨래까지 해줘 가며 돈을 벌어야 했던 그 시절 월급 기억이 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이 먹고살 만한 월급은 아니었기고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었기에 어린 자식들을 떼어놓고 버스차장들과 합숙을 하며 지내며 돈을 벌어야 했었던 시절은 새벽 첫차가 5시였고 이른 아침밥을 해먹여야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어린 자식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했다. 개중에는 버스 차장 아가씨 중에 승객들로부터 받은 버스표를 나에게 주는 차장들도 많이 있었고 나는 받은 버스표를 우리 아이들에게 주면 아이들이 버스정류장에 나가서 판매대에서 파는 가격보다 싸게 내다 팔며 자기네들이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과 학교에서 필요한 학용품들을 살수가 있어서 생활에 도움이 되곤 했다

이 직업마저도 경쟁이 심해서 백이 없으면 오래가질 못했다. 그다음 직업은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

(지금의 동덕여대 자리) 배재학당을 지을 때 건설현장에서 함바집(노동인력 식사하는 식당)을 운영하며 어렵게 살아왔던 시절 4․19 이후 배재학당 건설이 중단되면서 함바집도 문을 닫아야 했던 어려움 또다시 생계를 위하여 떠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찾아야만했었던 처절했었던 삶과의 싸움 중에 중앙산업건설 회사(종암동에 위치) 뒷산에 돌산을 폭파한 돌을 무거운 망치로 잔돌로 깨어내는 일들 여자로서 힘들어 감당하기 힘들었었지만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 이외엔 내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요. 돌을 깨다가 손을 찍어 고통을 감내했어야 했던 기억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 잘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궂은일 가릴 것 없이 살아오면서 정신과 육체마저 나약해질 때는 6․25 참상의 분노 언제나 남편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살아는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소문에는 미아리고개를 넘을 때 팔팔하게 잘 따라오는 포로들은 끌고 갔고 비실 비실대는 포로들은 미아리고개 갓길에 세워놓고 따발총으로 모두 쏘아 죽였다는 소문에 의정부 쪽 배밭골에 땅을 파서 생매장시켰다는 소문 이러한 끔찍스러웠었던 소문들을 접하며 그래도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의 끈은 붙들고 살아오면서 의지가 약했었던 나약함에 (당시 성당에 나갔었음) 무당을 불러 굿을 했더니 불쌍한 것 죽어서 어떡하니 어떡하니 하면서 배가 고파 죽겠으니 밥 좀 달라고 울며불며하는 것을 보고 정말 남편이 나타나서 나에게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져 한동안 죄책감마저 느끼며 살아왔던 그 시절 주위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또다시 다른 무당을 불러서 다시 굿을 하라기에 용하다는 무당을 불러 또다시 굿을 했는데 이 무당은 북한으로 끌려가서 살아있다며 그런데 배가 고파 죽겠으니 밥 좀 달라는 것이었다. 이 어쩌면 북한군에 납치되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어떤 지게꾼에게 보내온 편지내용대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보내달라는 편지내용과도 어쩌면 똑같이 재현하는지 배가 고팠었던 것만큼은 확실했었던 것으로 짐작이 간다 이제 아이들과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 생계를 위해 일을 찾던 중에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집은 제기동에서 서울운동장까지 4km 차비를 아끼느라 아침저녁으로 걸어서 출퇴근하기 시작한다.

운동경기 중에 관중이 버린 쓰레기는 청소원 몇 명으로는 담당하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으로 피곤했었다. 또한, 걸어서 집에 와 아이들 밥해 먹이고 나면 파죽지세였다 잘때면 팔다리가 아파지면서 온몸에 경기마저 오면서 그래도 혼자 참아야만 했었다 아이들에게라도 피곤하고 아프다는 내색을 한다면 혹시 아이들에게 심적 부담 및 밖에 나가서 기죽일까 봐 건강한척 살아왔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파죽지세였고 밤에 자다가도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저릴 때엔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아이들은 어떡하지 그나마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시 잡고 살아온 세월 어느새 내 나이 88세 이제 증손자까지 보았으니 그저 아프지 않고 밤에 자는 듯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늙은 나이에 걱정 되는 것이 있다면 요즈음 뉴스와 주위사람들로부터 듣노라면 6‧25 때와 마찬가지로 불순분자들이 여기저기서 날뛰고 있고 중 고등학교 대학 정부기관 하물며 국회에까지 좌익분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특히 요즘 북한에서 핵을 쏜다는 소문에 민주노동당에서 4.11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소문에 부정선거는 어떻게 해서든 국회의원을 당선시켜서 국회를 장악해 보겠다는 것이 아닌가. 6‧25 참상을 몰랐던 세대들이야말로 자각해야 할 줄 믿는다. 다시는 이 땅에 동족 간에 6‧25와 같은 전쟁으로 인하여 10만여 명의 선량한 국민이 납치되어서 동족상잔의 이별 아픔이 다시는 이 조국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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