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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납북이야기]어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을까-홍능자
이름: 관리자
2013-09-24 12:08:35  |  조회: 3634
어찌 그날을 잊을 수가 있을까

홍능자

60여 년 긴 세월이 지났지만 그때 아버지가 남자 인민군 2명과 여자 인민군 2명이 총대를 메고 마을 앞 저만치 보이는 신작로 길로 흰 중이적삼만 입으신 우리아버지를 인민군들이 포위하여 끌려가시던 마지막 그 모습이 내 가슴에 영원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때는 1950년 심한 가뭄과 유난히도 무덥던 여름이었습니다. 평화롭기만 하던 우리 마을에 6‧25전쟁이 우리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우리 집은 아버지 어머니 큰언니 작은언니 그리고 셋째인 저와 늦게 남동생을 낳으시고 막내 동생까지 7식구가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집은 선대로부터 넉넉한 집안으로 아버지는 우리 마을에서 공부도 제일 많이 하셨고 마을 구장 일을 (지금의 이장) 오랫동안 맡아보셨고 야학당도 지어 마을 사람들에게 글도 배우도록 하셨고 마을을 위하는 일이면 언제나 성심을 다하시어 청북면에서는 우리 아버지 홍남석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덕망이 높으신 분으로 존경받고 항상 사랑방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도 6‧25전쟁이 나기 전부터 안동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공장을 짓고 계셨습니다. 그 공장이 다 짓고 마무리 상태에 있을 때 6‧25전쟁 나서 우리 마을까지 공산군들이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인민군들이 총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우리 마을에는 해방 전부터 좌익 활동을 하던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공산군들이 점령하니까 이때다 하고 기세가 등등 하여 마을구장과 유지들 공직자들을 포함하여 아무 죄도 없는 우리아버지를 납치해 간 것입니다.

어렵게 살던 몇 몇 사람들은 유지들의 재산을 몰수해 자기들한테 분배 해준다니까 신이 나서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공산군들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고 다녔습니다.
공산군들과 좌익들이 점점 더욱 기승을 부리며 마을을 휘젓고 다니며 날마다 무슨 회의가 있다고 모이라고 하여 모아놓고 인민 노래며 공산당 교육을 날마다 가르치고 회의에 안 나가면 반동분자라고 낙인찍고 납치해가곤 했습니다.

그날도 무슨 회의가 있으니 삼계리 창고에 다 모이라고 해서 아버지는 거기에 가셨습니다. 안가면 반동분자라고 낙인 찍힐까봐 억지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회의장에 가시고 얼마 안 있으니 총대를 멘 남자공산군 2명과 여자공산군 2명이 우리 집에 와서 총을 아무데나 막 쏘며 아버지를 찾아내라고 온 집안을 뒤지다가 안 계시니까 아버지를 안 찾아오면 식구들을 다 죽인다고 총을 아무데나 쏘아대여 우리큰언니는 기절을 하고 우리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울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안계시니 그 공산군들은 곧바로 삼계리 창고 회의장으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내어 납치해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신작로 길로 흰 중이적삼만 입으신 우리아버지를 총을 멘 인민군들이 포위하여 끌고 가는 것을 우리 식구와 이웃 몇 사람이 우리 집 대문 앞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우리 집 우리를 돌아보시고 또 돌아보시며 가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내 눈이 선합니다.

그리고 공산군들이 점령한 경찰서에 아버지를 가두고 며칠을 기다려도 아버지는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른 사람도 몇 명 끌려갔었는데 그들은 며칠 후에 풀려나와서 아버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들도 아버지와 같이 있었는데 인민군들이 우리 아버지를 얼마나 많이 때렸는지 살점이 튕겨져 흰 중이적삼에 피가 엉겨 붙어 꼼짝도 못하시고 신음만 하고 계셨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불쌍하고 가슴이 아파 저는 그때부터 지금가지 크게 웃어 본적이 없고 울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며칠이지나 평택으로 넘어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피붙은 옷이라도 갈아입히시려고 청북에서 평택까지 60리 길을 시벽에 떠나시어 아버지가 강금 된 서로 찾아갔지만 만나지도 못하시고 그 이튿날 또 가시고(그때는 청북에서 평택 가는 차편이 없었답니다.)

밤이 되어 돌아오시면 발은 온통 부르터 물집이 잡혀 있었고 옷은 온통 땀으로 젖어 비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이튿날 또 가시고 또 가셨지만 아버지는 북으로 끌려 가셨다고 이제는 오지 말라고 하더랍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아버지를 끝내 못 만나시여 그 옷을 전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9.28수복이 되고 인민군들이 북으로 후퇴 하면서 아버지와 여러 인사들을 트럭에 실고 북으로 납치해가는 도중에 미군 비행기가 폭격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공산군들이 납치해가던 트럭을 길에다 두고 소나무가 많은 산으로 피신을 하더랍니다. 그때 같이 끌려가시던 아버지친구 면장님이 우리도 이 기회에 도망가자고 하였지만 매를 너무 많이 맞은 아버지는 꼼짝도 못하시어 가다 죽으나 도망가다 죽으나 마찬가지니 면장님이나 어서 도망가시여 살아 돌아가시면 우리 가족한테 전해달라고 하셨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끝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실까 날마다 밥을 지어 아랫목에 묻어 두시고 아버지를 몇 날 며칠 수없는 날을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며칠만 서울 수복이 늦었으면 우리가족은 다 죽었을 것입니다. 9․28수복이 되기 며칠 전부터 마을이 어수선하고 사람들이 수근 거렸습니다. 학교에 학생들한테 휘발유를 가져오라고 하여 학교에 많이 쌓아 놓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반동분자 가족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고 집에다 불을 지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을 둘째 언니의 등에 업혀 우렁이 잡으러 간다고 하고 외가로 보냈습니다.

다행이 9‧28수복이 빨리 되어 그나마 우리 식구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그렇게 억울하게 잃고 우리가족은 얼마나 많은 고생과 슬픔으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안 오시니 공장을 짓느라 많은 논과 밭을 판 상태였고 집안에만 계시던 어머니는 갑자기 당한 큰 충격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시고 어린 우리들과 아버지 오시기만 기다리며 신작로길만 바라보고 눈물과 슬픔으로 지냈습니다.

공장 짓던 것도 아버지가 안 계시니 어머니와 어린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 전부터 우리토지에 집을 짓고 텃밭을 붙이며 사는 사람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시고 사셨습니다. 아버지가 말씀 안하시다가 갑자기 끌려 가셨으니 어떻게 아셨겠어요. 그런 중에 남동생이 성장하여 면사무소에 등기 등본을 열람해보니 아버지이름으로 된 토지가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름으로 된 토지에 그 사람들이 몇 년씩 살고 있으면서 아버지가 안 계시니 자기들이 차지하고 계속 살고 있는 것을 그 때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땅이니 돌려달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못준다고 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재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재판결과 우리가 이겨 우리 땅을 다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시 항고를 하고 변호사를 대고 어떻게 된 일인지 시효 무기라는 이유로 돌려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어찌 통탄할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다 아버지가 안 계셔서 억울하게 당하고 지금 생각하면 분하고 원통하여 치가 떨립니다. 그때는 우리가 어리고 몰라 재산도 다 빼앗기고 밖의 출입도 안하시고 사시던 어머니는 18살 16살 된 언니와 10살인 나와 4살 된 남동생과 2살 된 여동생을 키우시느라 연약한 몸으로 갖은 고생을 다하시고 아버지 오실 날만 기다리며 슬픔으로 한세상을 사셨습니다.

아버지는 가족과 늦게 본 아들이 보고 싶어 먼 안동에 계실 때도 1주일이 멀다하고 오시였어요. 그때는 기차가 석탄을 때든 때라 안동에서 오시려면 굴속으로 지나는 철길이 많아 집에 오시면 얼굴이 까맣게 되어 오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을 두고 어떻게 끌려 가셨으며 혹시나 북으로 끌려가시어 사셨으면 그 가족이 얼마나 그리워 어떻게 사셨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옵니다.
남동생을 보았다고 나를 끔찍이 사랑하시여 서울을 가셔도 나를 꼭 데리고 다니시고 그때는 누구내도 없는 세발자전거도 사다주시고 유학까지 공부시켜 훌륭한 교육자로 키우신다는 늘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북으로 끌려가시다가 모진 매 맞은 것이 화근 되어 돌아가셔서 그놈들이 어느 산골짜기에 버리고 갔으면 무심한 갈 까마귀밥이 되어 처참한 넋이 되어 구천을 헤맸을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달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상하시고 남달리 정이 두터워 한 번도 다투시는 것을 저는 못 보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평생을 기다리다가 돌아가시고 지금은 영혼이나마 서로 만나셨는지 오늘밤 꿈이라도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 뵙고 싶습니다.

어느 한날 아버지를 잊어 본적이 없지만 저는 해마다 6월이 오면 그날의 아픈 기억들로 몸살을 앓고 있답니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도 듣고 싶고 훤칠한 키에 이목구비 잘 생긴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버지 하고 가만히 불러봅니다. 집에 오실 때 언제나 저희들 주실 옷이랑, 운동화, 학용품 먹을 것을 사다 주시는 아버지가 이렇게 늙어버린 딸은 그때가 그리워 눈물이 나서 더 이상 글을 못 쓰겠습니다.

우리는 6․25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어찌 우리뿐이겠습니까.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캐나다의 6‧25참전용사 지프 허시와 아치폴드 허시형제의 실화를 읽었습니다. 61년 전 한국의 평화를 위해 싸우다 전사해 부산 UN기념 공원에 안장된 형 조지프 씨를 만나기 위해 동생 아치볼드씨의 유해가 오는 22일 한국에 온다는 기사를 읽고 나는 가슴이 아프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형 곁에서 영면에 들기 위해서랍니다. 이름도 낯선 동아시아 외진 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숨진 그들의 희생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국방력을 튼튼히 하여 시시탐탐 야욕을 채우려는 북한이 다시는 남침을 못하게 안보에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를 잃고 긴 세월을 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어려웠던 일들을 어떻게 작은 지면에 다 옮기겠습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더욱 아버지가 그립고 생각나니 이렇게나마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버지 유해라도 거두어 드리지 못한 여식이 죄스러운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디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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