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문


지난 1월 17일 6.25전쟁납북인사 가족들이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날 저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는 그날의 비극을 떠올리며 누구를 증오하고 규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을 보호해야할 책무가 있는 정부가 그동안 납북사실을 호도하거나 확인노력조차 외면해 온데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더 이상 위정당국에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 저희 납북자 가족들의 외침은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오랜 세월 금전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어왔기에 최소한의 성의와 상징적인 수준의 피해보상을 바랄 뿐입니다.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은 이 땅에서, 남북장관급회담 등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때에, 또한 북한인권문제가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소송사태에 이르렀다는 점을 세상이 헤아려 지켜볼 것입니다.

얼어붙었던 이 땅에 해빙무드가 조성되어 남북화해니, 남북합작이니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마당에 이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당국에 묻고 싶습니다. 생이별이라는 통한의 아픔을 겪었던 6.25 그날로부터 반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부는 과연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지난 날 남북대치상황에서 적대감을 떨치지 못했던 시절엔 그렇다 치더라도 지난 문민정부시대로부터 국민의 정부를 거쳐 이른바 참여정부라는 오늘의 남북협력시대에 정부는 납북자문제해결에 과연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북한에 대한 화해제스처라고 할까 인도적 차원에서 비전행장기수를 보내고 나서 받은 답례인사가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하라는 10억 달러의 피해보상 청구서였습니다. 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정부가 과거의 실책을 인정하고 매듭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일본압제 속에서 누가 친일을 했느냐, 안했느냐 따지기 전에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씻고 한을 푸는 과거사정리가 절실합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이 문제해결에 대통령께서 직접 나서 주십시오. 이 울분을 덮어놓고는 겨레의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탄원하는 납북인사 가족, 저의 개인 신상을 알려드립니다.
납북되신 저의 부친 이길용(李吉用) 기자는 암울했던 일제질곡의 시대 언론활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애국지사의 한 분이었습니다. 이미 기미년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2년 복역하신 뒤 언론계에 투신, 1936년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일장기 말소사건을 주도했으며 모두 여섯 차례 옥고를 치르셨습니다. 1924년부터 3년 동안 춘원 이광수 기자 등과 함께 조선일보(朝鮮日報)에서 활약하며 민족운동을 고무하신 기록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 당시 민족지의 기자들은 우국충정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겨레와 나라를 위해 몸 바치신 분들이 이념대립, 국토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또 다른 피를 흘리고 희생되셨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 가운데는 정부 관료, 국회의원, 판, 검사, 언론인과 문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니 국가적인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희 선친은 훗날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愛國章)을 받으셨기에 지하에서라도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저희들은 납북인사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오랜 세월 피나는 노력을 했으나 모든 것이 허사였습니다. 대부분 가족들의 가슴은 이렇게 시커멓게 멍들어 모두 좌절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눈을 감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호소합니다. 저희들의 상처를 치유하지는 못할지라도 애절한 이 소원을 풀어주십시오. 동포의 사랑으로, 저희들이 눈물을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당국자든, 적십자든 진정 마음을 열도록 이 간곡한 호소를 그들에게 전해주십시오.

혼돈과 분열을 뛰어넘어 이 나라가 진정 하나로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새해 대통령님의 건승을 빕니다.

2006년 1월 24일

6.25 전쟁 납북인사 가족 이 태 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