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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광석 회원 증언
이름: 관리자
2019-05-15 17:22:33  |  조회: 26

2006. 6. 19 채록
060619A 최 홍 식(崔鴻植)


피랍인
성명:  최홍식                             
생년월일:  1912년생
출생지: 서울
당시 주소: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122-47
피랍일:  1950년 전쟁 중
피랍장소:  자택
직업:  경찰공무원(내무부 산하 치안국 경위)
직계/부양가족:  계모, 배우자, 여동생 1, 남동생 2, 1남 1녀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남성적임, 미남형


증언자
성명:  최광석(1912년생)
관계:  아들
증언성격:  

특이사항 (납치주체/상황/원인)
경찰공무원으로 재직 중이던 피랍인 최홍식은 전쟁 직후, 자택으로 찾아온 내무서원과 좌익 계열 주민 대여섯 명에 의해 연행됨. 그 이후로는 소식을 들을 수 없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인 생사확인, 사망시 사망 경위 확인, 북한의 납북 사실 인정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

“그때 제가 아버지가 쓰시던 제복이나, 권총 같은 것을 감추어 두려고 지하실에 들어간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사이에 내무서원하고 동네 공산분자 몇 명이 왔어요. 저는 수색을 당할까 봐 지하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두 삼촌(피랍인의 동생)이 그 장면을 직접 목격을 했는데 대여섯 명이 와서 잠깐 물어볼 게 있으니 가자며 데리고 갔고,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눈물)제가 지하실에서 나와서 올라갔을 때는 상황 종료였죠. 아버지만 안 계셨고, 나머지 가족은 수심에 차 있는 상태였죠.”

“처음엔 할머니하고 저하고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아현동 공덕동 일대에 진정서를 받기 위해 돌아다녔어요.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지만 상당히 주변의 인심을 얻으셨던 분이셨어요. 빨갱이 치하이니 납치된 경찰관을 위해 탄원서를 쓰고 도장을 찍어준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100명 이상의 진정서를 받았어요. 일종의 탄원서인데 자필로 내용을 쓰고 도장을 찍는 것으로 해서 마포경찰서에 저희가 제출을 했어요.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고요.”


○ 직업 및 활동

<경찰공무원으로 재직>

문_ 직업은?
답_ 내무부 산하 치안국 경위였어요.

문_ 가정 형편은 어땠나요?
답_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마포경찰서 뒤쪽에 작은 한옥을 갖고 있었어요. 그리고
공무원으로 계셨으니 잘사는 것은 아니었어도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어요.


○ 전쟁 당시 상황

문_ 전쟁 당시 분위기는?
답_ 6·25 나기 전에 여수 순천 반란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국민학생이었는데 당시 신문에서 군인, 경찰 가족이 많이 피해를 당했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래서 6·25가 나고 인민군이 들어왔을 때, 순간적으로 우리가 경찰 가족이다 보니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었어요.
  그러다 6·25가 났을 때는 제가 양정중학교에 다니던 때인데, 전쟁 나기 전날 토요일인가에 우리를 일찍 집으로 보냈던 기억이 나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냐면 우리 반은 2층에 있었는데 창 밖으로 소련제 전투기 야크기와 호주 쌍동 전투기가 공중전을 하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러고 나더니 학교 당국에서 집으로 가라고 하고, 다시 연락이 있을 때까지는 오지 말라고 했어요. 그게 제 중학교 생활 끝이었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주간을 다니는 마지막이 되었죠. 다음에 학교에서 연락이 온 것도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아요.


○ 납북 경위

<전쟁 직후, 내무서원과 좌익 계열 주민 대여섯 명이 자택으로 찾아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며 연행한 뒤로 소식 없음>

문_ 납북되던 상황?
답_ 제가 납북 장면은 목격을 못했어요. 저희 집에 2차 세계대전 때 미군 폭격이 심해서 방공호로 쓰려고 만들어뒀던 지하실이 있었어요. 당시는 이미 이북군이 들어온 상태니 제가 그때 아버지가 쓰시던 제복이나, 권총 같은 것을 감추어두려고 지하실에 들어간 거 같아요. 그런데 그 사이에 내무서원하고 동네 공산분자 몇 명이 왔어요. 저는 수색을 당할까 봐 지하실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마당에서 뭐라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체포되신 후로는 더 이상 볼 수 없었고, 시기는 6·25 직후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언제인지 정확하게는 기억을 못하고 있어요. 두 삼촌(피랍인의 동생)이 그 장면을 직접 목격을 했는데 대여섯 명이 와서 잠깐 물어볼 게 있으니 가자며 데리고 갔고, 그 자리에서 폭력이나 상해를 입히거나 한 것 없었대요. 당시 우리 아버지가 계모이시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어머니, 저 갑니다” 하고 말하고 가셨대요. 그게 마지막이었다고. (눈물) 제가 지하실에서 나와서 올라갔을 때는 상황 종료였죠. 아버지만 안 계셨고, 나머지 가족은 수심에 차 있는 상태였죠.

문_ 당시 왜 피난을 가지 않으셨는지요?
답_ 그때는 전쟁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어요. 더구나 이북과 이남 같은 민족간의 문제였기에 그것이 그렇게 잔혹한 결과를 가져올 줄은 잘 몰랐을 겁니다. 당시 정치계나 특수 계층에 있는 사람들은 알았을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진행이 어떻게 될지 예측불허였던 거죠. 그때그때 상황 대처만 하기에도 바빴어요.


○ 납치 후 소식

<소식 없음>

문_ 소식을 들으셨나요?
답_ 아버지가 연행돼 가시고는 저희집 근처 마포경찰서로 이송이 됐다고 해서 이제 곧 풀려나지 않을까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했는데 그렇지를 못했어요. 그후의 소식은 단편적으로 듣긴 했지만, 한 번도 확증적인 것은 없었어요. 마포서에서 어디로 이송돼 가는 걸 봤다는 사람도 있고, 그 이후로도 뜬 소문 같은 것은 있었지만 납치되신 이후로는 전혀 소식을 알 수 없었어요.


○ 남은 가족의 생활은?

<피랍인 납치 후 증거 확보를 위한 가택 수색이 심해, 평택 친척집으로 피난감, 수복 이후 서울로 복귀했다가 다시 1·4 후퇴 때 대구로 피난,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들어옴. 이 과정에서 피랍인의 배우자는 떠나고, 그 자녀는 친가 쪽에서 어렵게 생활함>
문_ 납치 이후에 피난은 가셨나요?
답_ 납치 이후 내무서원들이 집을 자주 방문해서 다락이고 뭐고 증거물이 있는가 뒤졌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보면 내무서원도 아닌 동네 빨갱이나 보조 역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실 이 사람들의 행패가 더 심했습니다. 일종의 노략질이죠. 집에 있는 사상과는 전혀 관계없는 귀중품, 예를 들면 패물(시계, 반지, 훈장 등)을 전부 가져간 거죠. 이런 일을 하도 당하니 저희가 겁이 난 거죠.
  나중에 우리집 대문에는 ‘반민’이라고 팻말 같은 걸 붙여 아무나 못 들어오게 했어요. 그리고 혼인을 하지 않은 고모가 있었고, 두 삼촌은 의용군에 끌려갈 적령기에 있었고 해서 결국 우리 가족은 밤에 몰래 도망가서 평택에 계시는 고모님 댁으로 피난을 갔죠. 그리고 9·28 수복이 된 뒤에 돌아왔죠.

문_ 생계는 어떻게 하셨어요?
답_ 평택 고모님도 혼자 계시던 터라 대가족이 들이닥치니 식량 문제가 어렵고 했어요. 그래서 어른들은 남양만에 가서 남은 게 그것밖에 없다 해서 지어진 남은 재나물(돗나물)을 뜯어먹고, 그래도 고모님 덕분에 굶진 않고 있다가 9·28 수복되면서 서울로 왔죠. 왔더니 집은 다행히 폭격을 안 맞아 그대로였지만, 먹을 게 없잖아요. 그래서 전부 밭이었던 모래네 쪽으로 가서 배추 같은 거 가져가면 남는 이파리를 푸대에 주워서 소금에 절여 먹고, 시래기로 김장도 담았어요. 또 중공군이 들어오면서 먹어보지 못하고 대구로 가게 됐어요.
  당시 전쟁 직전에 시집을 갔던 고모가 있었는데, 남편이 치안국에 계셨어요. 그분은 전쟁 때 남하를 하셨어요. 그래서 1·4 후퇴 때는 우리를 전부 도와주셨던 거죠. 기차 꼭대기에 자리를 마련해서 대구로 가고 마산을 거쳐 다시 대구로, 거기서 휴전 협정 맺어질 때까지 있다가 서울로 들어온 거죠.
  그 와중에 저는 또 제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1·4 후퇴 때 한꺼번에 피난을 갈 수 없어 헤어졌는데 그후론 어머니를 볼 수 없었어요. 1967년인가쯤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구요. 어머니도 안 계시고 고아라면 고아지만 다행히 할머니와 삼촌들이 계셔서 의지는 했어요. 대구, 마산에서 떡장사도 하고 신문팔이도 하고 안 해본 거 없이 다 해봤죠.

문_ 어머니는 왜 못 만나게 된 건지?
답_ 어머니가 1·4 후퇴 때 우리는 대구로 피난을 가는데 기차를 얻어 타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치안국에 다니는 고모부가 도움을 주셔서 작은 공간을 얻었는데 어머니와 동생은 함께 가지 않았어요. 당시 집을 누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던 거 같고, 마침 저희 큰삼촌이 다니던 고대를 휴학하고 마포경찰서에 순경으로 잠깐 들어갔었어요. 그래서 잠시 제 누이동생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어요.
  그러다 중공군이 들어오면서 큰삼촌은 통역장교로 나갔고, 나중에 누이동생은 만났는데 어머니는 못 만났어요. 알고 보니 당시 생계가 너무 힘들어 전쟁 3년 사이에 재혼을 하신 것 같아요. 당시 재혼한 입장에서 자식을 볼 낯이 없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나중에 제가 1965년에 결혼을 하고 다음해 큰딸을 낳았는데, 그때 우리 엄마가 문 틈으로 우리를 보고 가는 걸 봤다는 얘길 들었어요(울음). 그러니 가슴이 더 미어지죠.


○ 호적정리

<사망 신고 처리>

답_ 제가 1965년에 결혼을 했는데, 결혼 신고를 하면서 상속 문제도 있고, 당시는 행방불명으로 호적에 올라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사망 신고를 했습니다.


○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가족을 찾으려는 노력은?
답_ 처음엔 할머니하고 저하고 아버지가 근무하셨던 아현동 공덕동 일대에 진정서를 받기 위해 돌아다녔어요.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지만 상당히 주변의 인심을 얻으셨던 분이셨어요.
  빨갱이 치하이니 납치된 경찰관을 위해 탄원서를 쓰고 도장을 찍어준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100명 이상의 진정서를 받았어요. 일종의 탄원서인데 자필로 내용을 쓰고 도장을 찍는 것으로 해서 마포경찰서에 저희가 제출을 했어요.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었고요.
  그후엔 살기가 워낙 어려웠으니 저희는 사실 체념을 했어요. 아버지가 경찰공무원이니 생존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런 노력을 경주할만한 여유가 없었어요. 정부 차원에서 역시 적십자사를 통해 신고하라는 얘기를 들은 것까진 기억나는데 정확한 것은 모르겠어요.

문_ 정부의 도움은?
답_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 연좌제 피해

<없었음>
답_ 우리는 신분이 뚜렷했기 때문에 그런 건 없었어요. 경찰공무원으로 있었고, 이적 행위라든가 친북 행위가 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객관적으로도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제가 1967년에 해외를 처음 나갔는데 당시 문제가 전혀 없었어요.


○ 정부에 바라는 점

<피랍인 생사확인, 사망시 사망 경위 확인 및 북한의 납북 사실 인정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

답_ 미국이나 일본, 세계 어느 나라도 자기 국민이 해를 당했을 때, 특히 국내가 아닌 국외,즉 자기네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다른 지역에서 자국민이 피해를 당하거나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에 1차적인 보호 의무는 그 나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애국심을 자주 강조하는데, 애국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거든요. 부모 자식간에도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모질게 대한다면 나중에 자식이 그 부모가 늙고 병들었을 때 도와줘야겠다는 맘이 덜 생길 수 있어요.
  하물며 국가와 국민간의 문제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와는 또 다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언의 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건 내가 세금을 내고 나라를 위해 일한다면 내가 어려울 때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면 국가라고 볼 수 없죠. 애국심은 내가 어려울 때 국가가 도와주고 나는 그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나 혼자만의 목숨이 아닌 내 가족, 내 자식, 내 손자 대대로 국가의 보호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전쟁이 나면 내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다는 거거든요. 미국은 6·25 전쟁 때 이북에서 죽은 미군 병사들의 유해 발굴을 지금까지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본도 자국민이 납치당한 것을 끝까지 문제 삼아 수상이 직접 가서 찾아올 생각까지도 하는데, 우리나라도 국민이 국가의 일을 하다가 납치당했는데 여기에 대해 적극적인 추적이나 보호는 못할망정 그 자체를 인정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어떻게 그런 나라에서 애국심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전쟁이 또 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떤 젊은이가 전쟁을 나가 싸우다 죽게 될 수도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지금 남북간의 화해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부분이지요. 그러나 무조건적인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따질 건 따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향도 목적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북 관계에 있어서 할 것은 하되, 또 우리가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무엇보다도 10만 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납치됐는데 그것 자체를 이북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이쪽에서 인정조차 못하고 있다는 건 정권이나 나라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돼요. 누가 그런 정권, 그런 나라를 믿겠어요?

문_ 구체적으로 납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답_ 1차적으로는 납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상호간에 인정해야겠죠. 지금 객관적으로 증거는 충분히 있거든요. 최근 일본의 경우도 인정을 했는데, 지금 이쪽에서 조금만 강하게 나간다면 북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우선은 인정을 해야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는 거니까요. 우리가 이 문제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납북되신 분들이 언제 어느 때 돌아가셨는지, 살아 계신다면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북도 같은 민족이란 걸 생각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또 그럴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유도하고 때로는 강제할 필요도 있다고 봐요. 정부가 이것을 등한시한다면 애국심이나 국가관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답_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아빠라고 부른 게 저한테는 끝이었죠. 제가 너무 어려서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저한테 어떤 의미인지 생각을 (흐느낌) 제대로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저도 손자까지 두고 아버지가 그 당시 저희를 얼마나 어렵게 키우셨는지,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 큰 식구를 당신은 희생하시면서 그렇게 키우신 것,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살아 계시다면 더욱 건강하시고, 저희는 여기에서 잘살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위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 할머니, 고모님, 고모부님은 다 돌아가셨고, 나머지 식구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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