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정회에서 발간하는 월간<헌정>4월호 통권238호 98쪽-100쪽에 실린 기고문

<정부의 `직무유기`를 고발한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장 이미일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된 감격을 필자는 체험하지 못했지만 당시 온 나라에 물결쳤던 태극기와 만세소리는 상상만으로도 형언할 수 없는 감격으로 전해져 온다.  
나라가 없는 서러움을 36년간 뼈저리게 겪어 오면서 그 소중함도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감격도 잠시 북에는 사회주의 정부가, 남에는 민주주의 정부가 수립되어 조국은 남과 북 분단의 길로 접어들었다. 
1950년 북한은 곧이어 6.25전쟁을 일으켰고 막대한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고 또 북한으로 납치되어 갔다.  전쟁 중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하는 것은 통례지만 납치라는 것은 6.25전쟁에서만 발생한 특수한 피해라고 생각된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자국민의 납치사건을 중대한 국가피해로 인식하였고 전쟁중이었던 1952년에 피납치자 명부를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952년 대한민국 통계연감 6.25전쟁 피해상황 1차 조사를 보면 납치자 수를 82,959명으로 기록해 놓았고 1953년 2차 조사통계에는 84,53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엄청난 수에 필자는 놀랐고, 그 분들이 지금까지 외면되
어 온 사실에 또 놀랐다.
북으로 끌려가신 분들이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수년간은 납북문제가 국가적 관심사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 정부의 무관심과 직무유기로 이 문제는 철저히 사장되어 왔다. 필자의 부친도 전쟁이 나던 해 서울 청량리에서 유기공장을 경영하던 중소기업인이었다.  북한 정치보위부원이 와서 잠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하여 1950년 9월 4일 데려간 후 종무소식이었고 어머니와 우리 세 자매는 아버지가 납치되어간 그 장소에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기다려 왔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자 냉전시대의 남북 대결국면에서 벗어나 화해와 협력의 새시대를 열어 가겠다고 선언하였고 드디어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화해의 상징으로 남북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며 이산가족 찾기 신청서를 받았다.  자의에 의하여 이산가족이 된 실향민문제 해결보다는 전쟁 납북자 문제를 정부가 우선 해결하려고 노력하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6.25전쟁납북인사에 관하여는 정부의 공식언급도 없었고 통일부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인권백서 2001년도에는 납북자 수를 487여명이라고만 기록해 놓았다.   
언론에서도 이 납북자에 관한 한 이 숫자만을 반복하고 있어 전쟁 중 납북된 가족을 둔 우리로서는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는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6.25전쟁 중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해 2000년 11월 30일부터 뜻 있는 6.25전쟁 납북자 가족들과 힘을 합해 나서고 있다.

국회전문위원, 서울지방법원 부장검사, 체신부 전무국장, 중구청장, 전농초등학교장, 마포형무소 간수부장 등 수다한 공무원들이 나라를 위해 몸바쳐 일하다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남은 가족들은 당장 생계유지가 어려웠고 납치된 가장 또는 아들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겪어 왔다.  또한 남과 북의 대립으로 인한 연좌제로 납북인데도 정부로부터 감시와 불이익을 고스란히 당하며 납북인사 가족들은 근 반세기를 납북되어간 부모형제의 생사도 모른 채 치유되지 않는 상처를 부둥켜안고 이중 삼중의 고통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한 회원은 남편이 6.25전쟁당시 중앙청 정보과에 근무하던 중 납북되었는데 시댁에서 남편을 잡았다고 모진 구박과 수모를 당하였다고 한다.  건강이 좋지 않아져 출입이 어려워진 이 분은 정부가 없다고 하던 대한민국정부 작성 "6.25사변 피납치자명부"를 본회에서 찾아내어 납북되신 남편이 명부에 있음을 확인해 드렸더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시며 울먹이셨다.  
공무원 외에도 민간인의 신분으로 의료계, 법조계, 교육계, 문화계, 언론계, 상업계, 기술계 등 사회 주요 계층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많은 분들도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주요 계층 외에도 젊은 청년들을 닥치는 대로 납치하여 인력이 필요한 곳으로 끌고 갔다.  한 회원의 경우 부친을 납치하려고 밤에 내무서원들이 들이닥쳤는데 부친이 피하자 대
신 학생인 오빠를 납치해 갔다. 부친이 얼마나 죄책감으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살았을까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결국 부친은 일찍 타계하고 아들의 소식을 아직도 학수고대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누이동생이 모시고 산다.   
2001년 6.25전쟁 납북자 생사확인 전국 가두서명운동을 하며 각 도시에서 낮에는 서명을 받았고 저녁에는 지역회원들의 사연을 듣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중에 제헌국회의원의 자제로 부친이 납북당한 한 회원이 있었다.  어머니와 삼남매는 어머니를 마땅치 않아 하는 친가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어 장남과 누나는 고아원에 가야 했고 어린 막내인 자기만 어머니가 데리고 일을 다녀서 겨우 끼니를 이었다고 하였다. 지금 형님은 아파트 경비를 하며 생활하고 있고 누나는 결혼했는데 정신질환이 생겨 생활보호대상자로 혼자 살고 있고 자신은 그래도 공무원이 되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모시고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하며 자신의 신분이 알려지는 것을 걱정하였다.  
또 다른 제헌 국회의원의 장녀로부터도 역시 부친이 납북되신 후 어렵게 살아 온 자취를 볼 수 있었다. 이 가정에도 여동생이 정신질환에 걸려 모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필자는 6.25전쟁 직전에 국회프락치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혹 이분들이 연루되어 있는가 확인하여 보았지만 전혀 그런 분들이 아닌 것에 놀랐다.  이처럼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초석을 다지는데 기여하신 분들이 납치되어 간 것도 기막힌데 그 분들의 남은 가족들이 그토록 고통을 겪는데 정부가 돌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정부의 존재 이유를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창립 후 6.25전쟁 납북자문제를 정부에 공식 제의하였지만 전쟁 중 혼란기라 납북과 월북을 구분할 명단도 없는데 무슨 근거로 납북자라고 하느냐고 하였고, 정부관련 부처에 서면으로 6.25납북자 관련 명단의 보관여부를 질의하였지만 한결같이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납북사건을 증명하기 위하여 명단을 비롯해 관련자료를 수집하는데 주력해 온 결과 마침내 지난 2002년 2월 16일 대한민국정부가 1952년도에 작성한 6.25사변피납치자명부 책5권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발견하게 되었고 82.959명의 전국명단을 복사해 왔다. 정부기관에 버젓이 있는 자료를 정부는 그동안 없다와 모르쇠로 일관해 온 사실에 정부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또 명단이 발견되어 납북과 월북의 구분이 가능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6.25납북자를 일반이산가족에 포함시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무성의한 대책만을 고수하고 있다. 이산동기가 완전히 다른데 동일한 방안으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현재 일반이산가족 찾기도 북한의 일방적인 거부로 전면 중단되어 있고 재개의 가능성도 희박한 상황이다.

정부란 무엇인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법을 만들면, 이를 집행하는 곳이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며, 국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국민을 끝까지 지켜주고 보호하는 것이 정부의 마땅한 의무가 아닐까? 6.25납북인사를 반세기가 넘도록 버려온 정부에 우리가족들은 묵묵히 납세와 병역 등 국민의 의무를 다하며 살아왔다. 이제는 기다리고 싶어도 더 이상 기다릴 날이 남지 않았다.  6.25전쟁납북인사도 엄연한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정부에 이제라도 6.25전쟁납북인사 문제해결을 위한 새로운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서서 조속히 생사를 확인하고 생존자 및 유해송환을 추진하고 이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현대사의 중요한 자리로  모셔올 것을 촉구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진정한 의미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그를 바탕으로 통일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