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께

저는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이미일입니다. 6.25전쟁 중인 1950년 9월 4일 부친이 납북된 후 홀로 남은 어머니와 함께 56번째 새해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며칠후면 흩어진 가족들이 함께 모여 복을 나누는 설날이 옵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아버지의 빈자리로 인해 명절이 결코 즐겁거나 행복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가족회 어머니의 일기 한 구절을 옮겨 봅니다.

1974년 1월 22일
陰曆 섣달 그믐날 (음 12월 말일) 세월은 빠르다. 내일은 초하루 설날이다.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가고. 하던 세월이 흘러 흘러 어릴 때 즐겁던 설날들이 어렴풋이 뇌리에 떠오르․․는 설. 이젠 즐거운 날이 아닌 힘들고, 바쁘고, 괴롭고, 서글퍼지는 날이다. 客地에 나갔던 家族들이 모여드는 날. 서울역 改札口가 미여지는 날. 멀리멀리 떨어졌다가도 한사코 돌아 오는 날이 또한 설날인데-- 25年 生離別을 해오는 今年도 여전히 實感도 안 나고 돌아오지도 않는 가슴만 점점 더 아파 오는 날이 돌아온다.

언제나 저희들은 아버지께 세배라도 드릴 수 있는 날이 오려는지...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 온 세월이 반세기를 훌쩍 넘어 이제는 그 희망마져도 빛이 바랬고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2000년 11월 가족회를 창립하였고 지금까지 6.25전쟁납북자의 실태파악과 생사확인 등을 위하여 정부 관계부처와 국회, 적십자사를 비롯한 사회단체, 해외단체와 국제사회 등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청해 왔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21일에는 저희의 소망을 대통령님께 말씀드리고자 면담을 신청하였지만 회신도 받지 못했습니다.

6.25전쟁 납북인사들은 1950년에 북한군에 의해 강제 북송된 대한민국 국민들로 국가에 충성한 공무원을 비롯하여 각계각층의 유능한 애국인사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염려하고 극진히 사랑하시던 분들이었습니다. 저희 남은 가족들은 우리 정부가 납북된 자국민 피해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해 주리라 믿었지만 오히려 냉전기 연좌제에 걸려 핍박과 희생을 강요당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 6월 15일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남북 교류가 시작되면서 저희 가족들은 이제는 북에 간 가족들의 생사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남북화해에 걸림돌이 된다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1953년 정전 후 납북자 480여명만을 납북자라는 명칭을 붙여 공식적으로 인정하였고 6.25전쟁 납북자는 공식적인 언급조차 하지 않아 우리 가족들은 망연자실하였습니다.

6.25전쟁납북사건은 저희들에게는 과거사가 아니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인권피해입니다. 저희들은 정부가 방관하고 있는 동안 백방으로 노력해서 대한민국정부가 1952년에 작성해 놓은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찾아냈고 이로 인하여 납북사실을 우리 정부가 공식 인정한 문서를 공개했습니다. 무려 82,959명이나 되는 분들의 인적사항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우리 가족들은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부에는 저희 가족회 회원 가족이름 상당수가 빠져있었습니다. 따라서 6.25전쟁납북자 실태파악이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저희들은 대북협상에서 생사확인이라도 하려면 정부 차원의 실태파악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수차례 통일부에 간청하였지만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입법부에도 <6.25전쟁납북자명예회복및지원에관한법률안>을 두 번째 상정해 놓고 있지만 제정은 요원해 보입니다. 저희들은 참담한 심정으로 지난 1월 17일 국가를 상대로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상황에서 저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에도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에서 무고한 조선 백성들이 청나라와 왜나라에 인질 또는 노예로 끌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는 각 나라에 대신들을 보내어 끌려간 백성들을 속전을 주고 구해오는 방안으로 귀환시켰습니다.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때도 자기 백성을 끝까지 보호했던 선조들의 의지가 그 후손들인 대한민국에 살아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잊혀 진다는 말이 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만 갑니다. 당시 젖먹이였던 자녀들은 장년이 되었고 청장년들은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어 하루 하루 숨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못 잊어 죽기까지 소식을 기다리며 생사라도 알고 싶어하는 이 안타까운 마음은 부모자식간의 천륜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가족회원 가운데 90대의 노모 한 분은 아들 두 명이 납북되어 생사확인이라도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일반 이산가족 찾기 신청을 하였지만 생사확인 불가라는 회신만 받았습니다.

당시 94세로 오직 두 아들의 소식만을 학수고대하시던 노모는 그만 그 회신에 기진하여 돌아 가셨습니다. 그 후 또 다른 90세 노모의 요청도 역시 생사확인불가로 나왔습니다. 납북자들은 실향민들과는 달리 북한내의 주소가 없기 때문에 일반 이산가족 찾기로는 애당초 생사확인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대통령께서는 인권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이처럼 장구한 세월에 걸쳐 가정을 말살한 극심한 인권유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6&#8228;25전쟁납북자들은 고령이 되셔서 거의 다 작고 하셨으리라고 짐작됩니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사시다 언제 돌아가셨는지 추모일이라도 알고 싶고 묘소라도 참배하여 불초한 자식이지만 자식된 도리를 해보고 싶은 것이 저희 남은 가족들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저희들은 기다리고 싶어도 더는 기다릴 수 없는 절박한 시점에 와 있습니다. 납북1세대들이 다 지고 나면 생사확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선 올해 91세된 노모의 아들 생사확인만이라도 해 주실 수는 없는지요? 부디 대통령께서 우리 국민인 6&#8228;25전쟁납북자에 대한 실태파악과 생사확인이라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어 6.25전쟁납북자와 가족들의 인권이 조금이나마 회복되기를 간곡히 청합니다. 또한 저희도 대통령의 통일정책 기조인 남북한 한민족 화합에 동참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반가운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대통령님께서 병술년 새해에도 더욱 강건하시고 가정이 평안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06년 1월 24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이 미 일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