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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탈출증언

[탈출자증언기] 계광순
이름: 관리자
2011-03-16 13:59:49  |  조회: 3375


돌아오지 않는 피랍인사들

-나를 포함한 한국인 27명과 독일, 프랑스 선교사 6명은 북괴군의 삼엄한 총검 호위를 받으며 화물차에 실려 평양 정치보위국에 끌려갔다-
계광순(당시 한국광업진흥공사 사장)

1950년 7월 15일 북괴 내무서원에 의해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 개성, 사리원, 평양교화소 등 사경(死境)을 거쳐 10월 8일 평양을 탈출, 도보로 18일 간 산중을 헤매다가 10월 24일 집에 돌아올 때까지 100일간의 지옥 생활을 겪은 것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먼저 나는 공산군에 납치된 원인을 밝혀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동정적인 청소년층, 더구나 공산 정권의 포악무도한 생리를 체험하지 못한 현 일본의 학생, 언론인 등 친공산 계층에 대하여 경고자료로 제공하고자 한다. 오늘날 순진한 청소년들이 사회주의에 동조하는 것은 오늘의 사회 환경과 역사적 과정에서 볼 때 당연한 현상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봉건 군주제도에서 해방된 개인 자유가 민주주의로,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로 발전하여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라는 소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러한 어리석은 생각에서 공산 정권의 생리에 대하여 경계심을 갖지 못한 채 6·25 전란을 맞이한 것이다. 오늘의 일본 지식층과 일반 시민들과 같이, 즉 공산 정권은 무자비한 흉적이라는 인식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설마 공산군이 죄 없는 나를 해할까, 나를 잡아가지는 않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이 납치된 제 1 원인이다. 남하·도피하지 않은 제 2 원인은 공산 정권은 정략상 국민의 대부분인 중립·무소속층을 당분간 그대로 방치하리라는 오산에 있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그 말기에 선거법을 개정하여 차기 제 2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하여 일정시(日政時) 고관 등 3등 재직자는 피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이 개정은 바로 나 한 사람을 목표로 한 비겁한 부정 입법이었다. 해방 후 나는 근신하였고 또 이 법률로 공민권이 정식으로 박탈되었음으로 어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으며 정치 활동도 하지 않았다. 공산 정권이 사회주의에 동정적인 자나 중립 무소속층을 반동과 일괄하여 우선 무자비하게 처벌하는 계급투쟁 단체라는 것을 알았던들 많은 애국지사들이 납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6월 30일 파고다공원 뒤 벽돌 4층 건물에 자리잡은 <북괴의용대>에 끌려갔다. 대장 유응호는 북괴군에 의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풀려난 자인데 6월 30일 아침 불문곡직하고 내 얼굴에 권총을 들이대고 쏘려 하는 순간, 한 청년대원이 뛰어들면서, 『저 사람은 강원도 내무서장 시절 나를 자기 관사에 5일간 숨겨준 사람이니 처벌은 우리들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극적으로 위기를 면한 것이다. 다음날 7월 1일 부대장이 유력한 동지의 보증인 있으면 보석할 수 있다고 하였다. 때마침 백방으로 나의 행방을 찾던 아내가 용감히 북괴 <의용대>를 찾아왔다. 나는 경북 출신 이명용이란 청년이 6·25 전 남파되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총살되기 직전에 이충영군(동경제대 후배)의 부탁을 받고 이호 치안국장, 이하영 사찰계장의 특별 배려로 석방시켜준 일이 있었다. 아내에게 이충영군을 통하여 보증인을 부탁하라고 하였더니 <인민의용대>는 일단 남한 정부에 체포되었던 자는 배신자이므로 보증 자격이 없다고 거부하고 말았다. 비관하고 있던 중 관리 시절의 후배인 김정제군이 용감하게 <의용대>에 와서 나의 석방을 요청하였다. 김정제군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남로당원이라는 누명을 쓰고 경찰에 구금되었다가 6월 25일 괴뢰군에 의하여 석방되었는데 이충영군의 말을 듣고 나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의 보증으로 우선 <인민의용대>에서 살아나왔다. 이것이 7월 5일 저녁이었다.

파고다공원 뒤 공중 변소 부근에는 공산 도배들에게 학살되어 썩어가는 시체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6월 30일 유응호가 방아쇠만 당겼으면 나도 저 꼴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7월 6일 원서동 김정제군 집을 찾았다. 그는 쌀도 돈도 없어 호박죽을 먹고 있었다. 사의를 표하고 집에 돌아와 륙색에 쌀 한 말을 담고 그 가운데 돈을 넣어서 맏아들에 들려보냈다. 3일 후 김군은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오는 형식으로 나한테 와서 『나도 동대문내무서의 호출을 받고 내일 들어가는데 내 신변도 불안하니 계 선생도 알고 선처하라』고 중대한 귀띔을 해주었다. 도망하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시내에 잠복하였다가 미군의 입성을 기다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나는 새벽밥을 먹고 작업복 차림으로 뒷문을 빠져나와 집에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나 7월 15일 새벽, <인민의용대원> 둘이 와서 대(隊)본부에 잠깐 가자는 것이다. 등록 서류에 서명만 하면 20분 후에 집에 보내겠다고 가족에 약속하였으나 안심이 안 된다. 그들은 나를 대본부에 약 2시간 연금하더니 삼화빌딩 3층 정치보위국에 넘겼다. 거기서 취조를 받고 구립도서관 지하실로 끌려갔다.

이튿날인 16일 앞 건물인 원동빌딩 2층 예심과에서 나를 부르더니 젊은 심사원이 『네놈이 총독부 과장을 해먹은 계광순이냐?』하고 물었다.『네』하고 대답하는 순간 옆 의자에 앉아 심사를 받고 있던 풍격 좋은 백발 노인이 벌떡 일어나서 『나는 전영필이오. 독립촉성회 강원도 울진지부장을 한 죄로 여기 왔지만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하던 사람이오. 계광순씨는 지금 초면이지만 강원도 내무부장 때 일경과 싸우면서 우리 조선 사람을 많이 도와준 사람인 것을 내가 아오, 저 사람은 왜 끌어왔소?』 하면서 큰 소리로 자연스럽게 나를 변호하는 것이었다. 심사원은 한참 듣고 내 이력서를 뒤적거리더니 태도 일변, 『그렇다면 왜 자수하지 않았소? 자수하면 살릴 수 있었는데』 하고 섭섭한 듯이 말했다. 나는 『자수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나를 데리고 삼화빌딩 정치보위국으로 가더니 다시 원동빌딩에 와서 자수반으로 나를 넘겨주었다. 자수자 대기실에 가보니 강세형 변호사, 백철씨 등 아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과연 이 자수자들은 24시간 만에 석방되어 나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런데 나만 24시간이 넘어도 놓아주지 않기에 담당 심사원한테 물었더니 사진이 첨부되어 있지 않은 탓이라는 것이다. 나는 파수 보는 북괴군의 허가를 받고 집에 돌아왔다. 노모한테 『하루 후에 아주 무사히 되어 나올 것이니 안심하시라』 하고 명동에 가서 사진 2장을 찍어가지고 내 발로 원동빌딩에 다시 들어가 담당 심사원에 사진을 주면서 빨리 나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독자 여러분이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하고 웃어도 할 수 없으리만큼 공산 도배의 기만성을 몰랐던 것이다.

7월 18일 아침 보위국원이 오더니 『계광순, 소지품을 다 갖고 나오라』 하기에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죄가 있나, 이제야 심사가 끝나 풀어주는구나 하고 기뻐했다. 같이 갇혀 있던 사람들의 나가면 자기 집에 전화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복도로 나왔다. 그러나 그 안내원은 빌딩 현관 쪽으로 가지 않고 뒷계단 2층으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2층 심사원이 최후 훈계를 하려니 하고 착각했다. 또 나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지 하고 따라올라갔다. 심사원은 내 얼굴을 본체 만체 뒷문을 열더니 들어가라는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석방된 줄로 알았던 친구들이 여기 다시 들어와 있음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밖으로 쇠를 채우더니 수감이라는 것이다. 완전히 속은 것이다. 보위국 직원이 『미안하오, 시설이 없어 여기 1주일만 있게 한 다음 호텔에 옮겨서 독서도 시키고 가족 면회도 허락하여 성적 좋은 사람부터 집에 보낼 터이니 그리 아시오』 한다. 감방에 와 있던 모 인사도 『전 경무부 차장 최경진씨도 여기 있다가 어제 빅토리 호텔로 갔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3~4일 후 언제 호텔로 옮겨주겠느냐고 물었더니 조급히 굴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7월 24일 아침 버스가 대기하고 있으니 전원 타라는 것이다. 일행은 이제서야 호텔로 가는가 보다 했다. 그러나 일행을 태운 버스는 종로 네거리,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대문으로 향하더니 마침내 서대문형무소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호텔 아닌 형무소 감방에 배치되었다. 나의 감방에는 경찰관과 서북청년회원 등이 있었다.



춘원은 독방에 쌀밥을

7월 29일 저녁 장희창씨(전 연세대 교수, 재무차관), 제헌국회의원 오모씨(청원군 공의(公醫) 출신), 나 세 사람만 나오라는 것이다. 경찰관, 서북청년회원과 구분하여 우리 세 사람만은 무죄 석방하는 줄 알고 일동은 자기집에 전하여 달라는 쪽지를 주었다. 감방을 나와 문에 와서 맡겼던 신발과 혁대를 주기만 기다렸더니 내무서원이 와서 하는 말이 『시간이 없으니 빨리 나와. 혁대와 신발이 없으면 없는 대로 빨리 나와!』 하는 것이었다. 또 다시 다른 데로 옮기는구나, 될 대로 되라 하는 생각으로 형무소 정문에 나와 보니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옥선진 대검 차장검사, 강수창 전 경찰국장, 차윤홍 의사국장, 박명진(치안국 과장), 문작지(전 군수), 오용방 건국청년회 회장, 김봉호 전 경찰청장 등 한국인 27명과 독일·프랑스 선교사 6명 모두 33명을 태운 버스는 서울역에 도착, 북괴군의 삼엄한 총검 호위를 받으며 우리 일행을 화물차에 실었다. 7월 30일 아침 개성 소년교화소에 도착, 8월 1일 사리원 내무서 감방에서 2박, 8월 4일 새벽 평양 정치보위국에 끌려갔다가 외국인 선교사는 분리되고 나머지 27명은 평양구교화소의 세 평짜리 감방에 수용되었다. 우리 일행 이외에 이 교화소에는 최린, 이광수, 백관수, 방응모, 김동원, 김한규, 최경진, 강기문, 강병옥, 서상천, 이해창, 명제세, 김효석, 장철수, 고봉경, 김귀(노총간부) 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김정제군이 먼저 여기에 수감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또 최경진군은 경무부 차장으로 있었지만 퇴관 후 변호사로서 남파간첩 두목 이주하의 법정 변호를 한 관계로 부산으로 도망하지 아니하고 자수하였다가 빅토리 호텔에 있다 하더니 우리보다 먼저 이 교화소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다시금 놀랐다.

우리들은 반 주먹밖에 안 되는 콩밥에 수수와 조밥을 조금씩 섞은 것을 먹으니 무엇보다도 배가 고파 못 살 지경이었다. 다만 춘원 이광수만은 독방에 두고 쌀밥을 준다고 들었다. 나는 완전 소화, 영양 섭취를 위하여 입에 든 콩밥을 백 번씩 씹어서 삼켰다. 피골이 상접하고 다리는 새다리같이 말라들었다. 납치인사의 대부분은 영양 부족으로 쓰러졌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물마저 아침에만 반 컵씩 주기 때문에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다. 변기 소제를 하면 물을 준다. 나는 똥통을 메고 나갔다. 뜰에 빗물 고인 것이 있었다. 나는 엎드려서 이 빗물을 마셨다. 그러나 긴장한 탓인지 병도 안 났다. 밤중이 되면 끌어내다가 고문을 한다. 나도 여러 번 젊은 심사원한테 이유없이 얻어맞았지만 70 노인인 최린 선생이 발길로 채여 오줌을 앉은 자리에서 누는 것을 보다 못해 너무하다고 계원에게 항의하다가 다시 한 번 뺨을 맞고는 일절 하라는 대로 할 뿐 가만히 있었다.

나는 고문을 면하기 위하여 사실 이상으로 자기 죄과를 꾸며댔다. 기록으로 보면 너무 어마어마하게 된 모양이다. 2~3일 후 다른 국원이 『조서의 죄가가 너무 과중하게 기록되어 재심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 국원 말이 『우리는 사실을 알고자 할 뿐이니 해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러면 솔직히 말씀하지요. 총독부 조선인 관리는 3종류로 구분할 수 있소. 조선 사람 관리의 8할은 의식주 생활을 위하여 총독부 관리를 한 것이니 그들 개인에게 죄가 있다는 것보다는 망국(亡國)이란 현실에 책임이 있지요. 나머지 1할은 애국자를 밀고·체포·박해하든지 공출과 징용을 혹심하게 하여 민족의 희생으로 출세한 자인데 이들은 대개 학력도 없고 순사 혹은 말단 기사로 있다가 동포 박해의 공로로 출세한 자이니 마땅히 처벌하여야 되오. 그러나 나머지 1할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관 시험에 합격한 실력자로서 행정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민족과 동포의 이익을 주장·옹호한 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 수감되어 있는 이창근, 문작지, 김봉호, 장철수, 김정제 등은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였지 동포를 박해한 일이 없는데 왜 처벌하시오? 이들을 용서하는 대신 악질 분자만 엄벌하시오』 이와 같이 주장하였더니 그 심사원은 나에 대한 재심을 하지 않고 나가 버렸다.



잊지 못할 은인 두 사람

8월 25일 밤중에 그들은 나와 문작지, 이창근, 장철수, 송찬도 등 관리 출신을 화물차에 싣고 대동강을 건너 중화군 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머리를 숙였고 뒤에서 따발총이 지켰다. 26일 새벽 2시 교실 세 개밖에 없는 소위 인민학교에 도착하여 교실에 들어가보니 명제세, 서상천, 김봉호, 김정제, 강수창씨 등이 먼저 와 있었고 김효석씨만은 포승으로 묶인 채 앉아 있었다. 나는 즉시 심사실에 불려갔다. 재판장 격인 대좌는 흑색 정복에 금색 견장을 달고 안경을 쓴 흰 얼굴의 미남으로 교양 있는 인텔리임을 알 수 있었다. 좌우 양편에는 중좌, 소좌, 두 사람이 배석하고 있었다. 『계 선생, 소감이 어떻소? 지금의 심경을 솔직히 말하시오』 재판장이라는 자가 물었다. 이자들에게 선생이라고 불리기는 처음이다. 나는 대답하였다. 『이 모양 이 꼴에 감상이 다 무엇입니까. 죽이겠으면 빨리 죽일 것이지 번잡하게 굴 것 없지 않소?』 『죽이다니, 누가 죽인다고 했소? 죽일려면 여기까지 끌고 오겠소? 나는 선생을 잘 압니다. 평북 출생인 것도 알고 동대를 졸업하고 총독부 관리한 것도 잘 알지요. 우리 사회에서 이력서를 여러 번 쓰게 하고 발언의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은 희망을 주는 특별 대우인 줄 아시오. 그런데 감상이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은 손해요.』

이 대좌는 과연 누구인가. 대학 후배인가. 하여간 나한테 호의를 가지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어 대답하였다. 『미안할 뿐입니다』 그러자 배석하였던 중좌가 함경도 사투리로 『동무의 이력을 가지고 우리 인민의 편에 와 있었으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것을 왜 일제의 주구를 하였소?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소, 우리 형법은 개정되어 친일 반역죄의 시효 기한은 재판장이 자유 재량으로 정하게 되니까』 호감을 표시하는 것 같았다. 『해방 전 관리로서 유명했는데 해방 후에는 모리배로 성공하였다 하니 그 비결을 말씀하시오』 『해방 후 농사나 지을 작정이었으나 고향이 이북인 고로 농사도 못 짓고 9인 가족을 위하여 모리를 좀 했습니다. 국유광산을 빌어서 광부들과 같이 벌어 먹었지요.』 『광부들을 많이 착취하였지요?』 『아니오. 나는 임금제를 쓰지 않고 광부한테는 쌀 한 가마니를 매일 사주고, 금이 나면 서로 분배하였소. 결과적으로 광부는 매월 식량은 확보되고 노다지가 나면 월 25만원의 이익 배당을 받은 예도 있었소. 광업소장 월급은 5만 원인데 광부 수입은 그 10배인 50만원이 됩니다. 소련 광부도 그런 수입이 없다고 자부하지요. 남조선 경제 체제하에서 양심적으로 운영한 것이지요』 『그런 사고 방식이야말로 악질 반동이요. 우리 프락치의 보고에 의하면 동무가 경영하는 태창광산에서 광부가 월 45만원을 배당받은 일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본주가 주는 혜택은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마비시킬 뿐이오. 노사 협조라는 것은 반동적 기만이니 그런 말은 주의하시오』

27일 다시 불려가서 심사가 시작되려는 때에 미군 비행기 3대가 출현, 이 『인민학교』에 기총소사를 했다. 대좌 정복을 입은 재판장은 책상 아래로 들어갔고, 나는 벽에 붙어 난을 면하였다. 한 사람의 내무서원에 중상을 입히고 비행기는 사라졌다. 나는 대좌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싱겁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생사를 같이한 인간 대 인간의 정이었다. 서로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9월 초 평양 지방은 냉기가 돌았다. 우리들은 교실 마루방에서 모포도 없이 여름 샤쓰바람으로 잤다. 나는 맨발로 끌려가서 양말도 못 신었다. 필경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장카다르가 이질이 되고 말았다. 그들은 오전 6시, 오후 1시, 오후 7시 이외는 변소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마루에 앉은 채로 대변을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교실 안에는 악취가 가득 찼다. 물론 휴지도 없었다. 전염을 두려워한 그들은 나를 인근 농가에 격리시켰다. 약이 있을 리 없었다. 이대로 병사하는 줄 알았다. 다행히 이 집 주인 김병규 노인이 몰래 열무김치 한 사발을 소약이라면서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먹으니 곱이 멎었다. 김옹은 생명의 은인이다.



서흥서 만난 유엔군

9월 23일경 나는 장군리 윤 대위 집 건넌방으로 옮겨져 그 부처의 감시하에 휴양하게 되었다. 그 부인은 친절한 여성이었다. 남편 몰래 계란도 주었다. 10월 7일 윤 대위는 『우리들은 자강도로 가니 선생도 동행하자』 는 것이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대동강 인도교를 건너 평양 정치보위국 본부에 들어가려는데 노타이에 사복을 입은 청년이 『윤 동무, 저 사람은 병중이라 데려올 필요가 없소. 내가 책임질 터이니 그대로 두고 윤 동무 혼자만 가시오』 하고 나에게 왔다. 자세히 보니 예의 그 대좌다. 나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다시 대동강 인도교를 건너 장군리로 돌아왔다. 큰길에서 대좌는 『윤 대위 집에 다시 들어가 있으시오. 내일 11시까지 연락하지요』 하면서 작별의 악수를 청했다. 다시 『몸 조심 하시오, 문제가 생기면 자강도 정치보위국 제 3처로 연락하시오』 이런 말을 남기고 그는 어둠 속에 총총히 사라졌다.

윤 대위 집에 돌아와보니 다 도망하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로소 대좌의 참뜻을 알아차렸다. 나는 옆집에서 앓아 누워 있는 김봉호군을 데리고 장군리를 떠났다.
옥수수 밭고랑과 숲속에서 자면서 산길을 걸어 황주와 서흥의 중간, 목탄 굽는 집에서 3일간 잠복하여 유엔군을 기다렸다. 서흥읍에서 유엔군을 만났을 때의 기쁨은 안심으로 변하는 동시에 긴장이 풀려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북진하는 군대는 우리를 도와줄 겨를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도보로 신막, 평산 등을 거쳐 10월 20일 청단에 이르러 개성경찰서에 들어갔다. 2일간 이곳에 머물다가 23일 오후, 개성 남문에서 전리품을 싣고 오는 국군 화물차를 만나 이 차에 편승케 되었다. 우리는 24일 오전 1시 서대문에서 하차, 김봉호군을 수송동 자택에 인계하고 3시경 가회동 집에 돌아왔다. 만 100일 만에 구사일생한 것은 천신의 기적이지만 정치보위국 제3처장(?)의 후의를 일생 잊을 수가 없다. 정치보위국은 절대 비밀주의로 심사원 개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떤 기회에 대좌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는 묵묵부답하더니, 『남조선에 이동환씨를 잘 아시지요?』 하면서 암시를 주었다. 이동환군(전 오스트레일리아 공사)에게 물었더니 내가 강원도 산업부장 재직시 사상 사건으로 검거된 것을 도지방과에 같이 근무하던 이동환군과 그의 형의 소개로 도경찰부장에 부탁하여 석방하여준 청년인데 강원도 통천군 출생으로 상해 동아동문서원 졸업생이라는 것이다. 그후 숙청되지나 않았는지, 그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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