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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탈출증언

[탈출자증언기] 김용규
이름: 관리자
2011-03-16 14:43:04  |  조회: 5257


저자 약력
1949. 6 청운초등학교
1949. 6 서울중학교 2년 중퇴
1951. 3 납북
1951. 5 북괴군 526군부대 루트공작원
1952. 10 금강정치학원 수료
1953. 4 중앙당학교 졸업
1953. 10 김일성대학 철학과 2년 중퇴
1955. 10 문천기계공장 직공장
1962. 4 문평공업대학 기계제작과 졸업
1966. 4 문천기계공장 직장장
1967. 6 노동당 연락부 공작원
1972. 6 김일성 군사정치대학 졸업
1973. 7 노동당 연락부 지하당 조직원
1976. 9 귀순

시효인간(회한의 25시- 거문도 04호)

「동아일보」 연재 수기 「평양의 비밀지령」 완전판
회한(悔恨)의 생이별

1951년 3월 4일
우수(雨水) 경칩(驚蟄)이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더니만 그날 아침은 전혀 이른 봄답지 않게 을씨년스럽고 음산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해 따라 절기(節期)가 늦어서인지 한적한 서울거리에는 때 늦은 눈가루까지 흩날렸다. 근 3개월여에 걸친 공산학정(共産虐政)에 치를 떨었던 서울 시민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남쪽으로 떠나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 때문에 도저히 집을 떠날 수 없었던 아버지는 그만 삶을 포기라도 한 듯 그대로 서울에 눌러앉고 말았다. 국군에 입대(入隊)한 형님은 물론, 출가(出嫁)한 누님들의 행방 역시 묘연했다. 그래서 서울에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이라고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뿐이었다. 우리는 오랑케(중공군)가 내려오면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린다는 소문을 듣고는 두려움에 싸여 대문 밖에 널장을 가로질러 놓은 채 마루 밑에 파놓은 방공호(防空壕)에 숨어서 살았다. 연기를 피울 수 없어 숯불로 끼니를 끓여 먹었으며, 심지어는 기침 한 번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간신히 죽으로 끼니를 이어가던 끝에 하루 한 끼씩 건너뛰기를 며칠째 계속했고, 마침내는 아예 꼬박 이틀을 굶어야 하는 처절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그쯤 되자 우선 기운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제 우리 식구는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을 성싶었다. 바로 그날 3월 4일. 묵묵히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무슨 용단(勇斷)을 내리셨는지 길 떠날 차비를 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핏기 없는 어머니의 가느다란 음성이 떨려 나왔다.
『어딜 가시려우?』
『앉아서 굶어죽을 수야 없지 않나? 뭘 좀 구해 봐야지!』
남은 가족들을 그대로 굶겨 죽일 수는 없다는 가부장적(家父長的) 책임에서 우러나오는 아버지의 비통(悲痛)한 대답이었다.
『나도 같이 가요. 아버지!』 하고 나도 함께 일어나려는데 어머니가 만류하는 것이었다.
『추운데 그렇게 입고 어딜 간다고 그러니?』
그러나 나는, 『엄마! 나도 가서 쌀 한 말이라도 지고 와야 형님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잖아?』 하며 누워 계신 어머니에게 이불깃을 여며드리고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일어섰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그러는 내가 퍽이나 대견스러운 듯 더 이상은 말리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윗도리를 주워 입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대문 밖에 나와 보니 눈길 위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나 있었다. 거리에 나서자 비로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버지, 어디로 가요?』
『시장으로 한 번 가보자.』
아버지도 명확한 행방(行方)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통인시장에 당도해보니, 그곳에는 이미 여러 사람이 군데군데 모여서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팔고 있는 아이들, 또 솥뚜껑을 엎어놓고 가래떡을 구워 파는 아낙네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쌀 같은 곡물(穀物)을 파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나는 담배 장사하는 아이에게. 『야! 어디 쌀 파는 데 없니?』 그러자 그 아이는, 『사람들이 그러는데 수색 쪽에 가서 사온대.』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즉시 수색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울은 말 그대로 주인(主人) 없는 유령도시(幽靈都市)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낮 12시쯤 되었을까? 아현동 로타리를 지나 수색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곳에서 <경무원(헌병)> 완장을 찬 북괴군들이 내왕하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붙잡아 놓고는 그 속에서 청소년들을 인근에 있는 독립가옥(獨立家屋)에 억류시키고는 『영감들은 돌아가시오.』라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졸지에 자식들을 빼앗긴 노인들이 돌아가지 않고 사정을 하자, 이번에는 어깨에 소좌(소령) 견장(肩章)을 단 북괴군 경무관이 나타났다. 『조사할 게 있으니 안심하고 돌아들 가시오!』 그는 처음에는 이렇게 회유(懷柔)를 해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자 노인들을 <반동>이라고 협박했고, 급기야는 공포(空砲)까지 쏘아대면서 총대로 사람들을 마구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새 날은 저물었고, 결국 나는 아버지와 말도 한 마디 못해본 채 생이별을 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내 생전(生前)에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는 안타까운 순간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죽음에의 공포

북괴군들은 우리들 한 방에 30명씩 빽빽하게 밀어넣고 거기서 남은 인원은 다른 집으로 끌고 갔다. 한 방에 갇히게 된 우리들 30명 가운데 열여섯 살짜리는 5명뿐이고, 그 외에는 모두 17~18세 정도로 보였으며, 그중에는 여학생들도 3명이나 섞여 있었다. 모두가 낯이 설어 눈치만 보고 앉아 있는데, 다른 한쪽 문턱에 모여 있는 몇 명은 무엇인가 쑤군거리다가는 웃고 장난질까지 치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보아하니 한 동네에서 끌려온, 서로 잘 아는 친구들인 것 같았다. 이윽고 날이 어두워졌다. 마당에서는 보초 한 명이 뚜벅뚜벅 서성거리면서 왔다갔다 했다. 나는 불도 없는 캄캄한 방에서 앞으로 닥쳐올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조사할 게 있다니 그게 어떤 것일까? 그리고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왜 조사하지 않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안한 예감만이 머릿속 깊숙이 스며들어왔다. 나는 이렇게 걷잡을 수 없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온밤을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한 후, 새벽녘에 가서야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드르륵, 드르륵> 하며 자지러지는 총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깜짝 놀라서 눈을 떠보니 앞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밖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말소리만 들려왔다.
잠시 후 북괴군 군관인 듯한 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종이에다 불을 붙여 들고는 머리를 끄덕끄덕 하면서 인원 점점을 했다. 그 순간 문턱 한쪽의 자리가 휑하게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친구들이 도망가자고 수군거렸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후에 안 일이지만, 그들은 보초가 조는 틈을 타서 도망을 치다가 6명이 몽땅 따발총 연발 사격에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생(生)과 사(死)가 뒤바뀌는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더욱 더 가슴이 죄어드는 공포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때 자리를 같이했던 목격자 모두의 공통적인 심정이었을 것이다.



실향(失鄕)

불안과 공포 속에서 온 밤을 뜬눈으로 새운 우리는 쪽잠(경황이 없는 틈새에 아무 곳이고 쭈그리고 앉아 잠시 눈을 붙이는 것)으로 한나절을 보냈다. 해질 무렵, 북괴군들은 주먹밥을 한 덩이씩 갖다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잔뜩 배가 고팠던 나는 차디찬 주먹밥을 물 한 모금 없이 단숨에 꿀꺽 집어 삼켰다. 그야말로 코끼리 비스킷 먹는 격이었다. 잠시 후 북괴군 경무관(警務官) 한 명이 불쑥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 24명을 마당에 정렬하라고 해놓고는 8명씩 갈라서 3개 조로 편성하고 여학생들은 각 조에 1명씩 배치했다. 여자들끼리 한 조에 있으면 수근거리며 도망칠 궁리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열 편성이 끝난 다음 우리를 약 500m 떨어진 어느 독립 가옥으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다시 쌀이 가득히 담긴 배낭을 하나씩 짊어지라고 한 뒤 좌우측 멜빵 끈을 또 다른 끈으로 붙잡아매게 했다. 혹 배낭을 벗어던지고 도망칠 것이 염려되어 미리 예방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렇게 멍에 아닌 멍에까지 쓰고 나니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행군(行軍)은 시작되었다. 호송병(護送兵)은 북괴군 군관 1명, 사병 4병이었다. 총을 멘 사병들은 대열 앞뒤 좌우측에서 우리를 감시했다. 우리가 큰길에 나섰을 때 능곡으로 통한 대로에는 중공군 자동차와 마차들이 꼬리를 물었고, 그리고 패주(敗走)하는 북괴군들과 피랍객(被拉客)들의 행렬이 거리를 메웠다. 그중에는 우리와 비슷한 행렬도 종종 눈에 띄었다. 처음엔 「어디로 부역을 가는 것인가? 」 이렇게 생각했던 우리는 능곡, 일산, 문산을 지나서 임진강을 건넌 다음에야 비로소 북으로 끌려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나는 공포와 불안, 서러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의 창백한 모습이며, 북괴군의 총대에 밀리며 애원하며, 『용규야!』 하고 목놓아 부르던 아버지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에 메아리쳤다. 옆에서나 앞뒤에서도 흐느끼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어디 빠질 구멍이 없나?」 하고 눈치를 보다가 대열(隊列)에서 조금만 떨어져나가면 <꽥!> 소리를 질렀다. 소변을 보겠다고 하면 줄곧 옆에 지켜 섰다가 다시 따라왔고, 앞 가슴에 잡아맨 끈을 풀지나 않았나 해서 수시로 검열하곤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쩔 도리가 없이 고삐에 매인 송아지처럼 북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고향은 아득히 멀어져가기만 했다. 우리는 하루에 주먹밥 두 덩이로 주린 창자를 채우면서 밤마다 1백 리를 걸어야 하는 고행 길을 계속했다. 그 이틀 후 우리는 개성을 지나서 금천에 이르렀다. 일행 중 대부분은 온몸에 몰려온 피곤으로 인해 픽픽 쓰러졌다. 사흘째 되는 날부터 장딴지가 부어오르고 발까지 부르터서 걸음을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런 데다가 피로가 겹쳐 저절로 눈이 감기곤 하여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 간나 새끼들, 빨리빨리 걷지 못하겠나? 적들이 벌써 서울에 들어왔단 말이다. 그래도 못 걷겠나?』 하며 발길로 마구 걷어차고 총대로 밀며 몰아쳤다. 절룩거리며 걷다가 앞사람과의 거리 간격이 조금만 멀어지면 북괴군의 발길에 채고 고꾸라지거나 쓰러졌다. 그때마다 얼른 일어나지 못하면 엄살을 부린다고 또 한 번 채이기가 일쑤였다.



북(北)으로의 행군

서울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 밤!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고생길에 일행은 모두 지칠 대로 지치고 기진맥진했다. 어깨가 나른하고 온 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그보다도 더욱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사정없이 졸음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밤에만 행군(行軍)하고 낮에는 쉰다지만 잠자리라는 것이 기껏해야 어느 계곡의 나무 밑이나 풀밭, 아니면 폭격에 허물어진 주인 없는 어느 집 헛간이었다. 그리고 덮을 것도 없이 배낭에 기댄 채로 쪽잠을 자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언제 한 번 평안히 잠을 잘 수가 있었겠는가. 단 하루만이라도 푹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지만, 북괴군들은 사정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저절로 눈이 감기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절뚝거리면서 걸어가다가는 앞 사람이 우뚝 멈춰서면 연달아 부딪치기가 일쑤였고 <꽥!> 하는 소리에 기겁을 해서 정신을 차려 보면 꼬부라지거나 푹 파인 길이었다. 이렇게 북괴군들의 채찍에 몰려 황해도 남천을 떠난 지도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새벽 2시가 지났을까? 고갯길을 넘어 꾸부러진 길목에 이르렀을 때였다. 선두에서 갑자기 <으악!>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문득 대열이 멈춰졌다. 이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측으로 꾸부러진 길에서 졸며 걸어가던 좌측 열 선두 2명이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져 버린 것이다. 극도로 피로한 데다가 무거운 배낭까지 등에 지고 있어서 그들도 미쳐 손쓸 사이가 없었던 것이다. 잠시 후 벼랑 밑에서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북괴군 2명이 벼랑 아래까지 내려가서 2명 중 1명만 업고 올라왔다. 저희들끼리 수근거리는 걸 보니 1명은 즉사(卽死)한 것이 분명했다. 북괴군의 등에 업혀 올라온 동료 1명은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북괴군들은 부상당한 그를 인근 마을까지 메고 가서 어느 한 농가에 맡겨 버렸다.

이날 밤 뜻하지 않은 추락사고(墜落事故)로 더 이상 행군은 하지 않고 황해도 서흥군 신막(新幕)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 일행은 초라한 신막역 부근에 있는 커다란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우리는 주먹밥 한 덩어리씩을 얻어먹고 다시 드러누웠다. 그런데 그날 따라 별난 게 북괴군들은 개별심사(個別審査)를 한다고 각 조별로 한 사람씩 불러냈다. 내가 속해 있던 조는 건너편 안방에서, 2조는 그 건넌방, 3조는 사랑방에서 각각 심사를 받았다. 한 사람을 심사하는 데 10분 정도가 실히 걸렸다. 한참만에야 내 차례가 되어 안방으로 불려갔다. 들어가니 북괴군 소위 견장을 단 경무관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가 본적이 어디며, 학력, 가족관계 등 내 신원사항(身元事項)에 대해 캐묻고 나서 희망이 무엇이며, 무슨 소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 짓궂게 물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행군은 다시 계속되었고, 서울을 떠난 지 6일 만에 우리는 황해도 황주(黃州)에 도착했다. 북괴군은 황해도 황주군 인교면 여의리에 자리잡은 서울시 청년훈련소라는 곳에 우리 일행을 인계하고는 어디론가 가 버렸다. 훈련소에는 우리처럼 남쪽에서 끌려온 청소년들이 1천 5백 명이나 있었고, 그중에는 여자들도 3백 명이나 끼어 있었다. 모두가 초라한 모습으로 지치고 불안한 표정들이었다.



서울시 청년훈련소

서울시 청년훈련소는 북괴군 대남공작(對南工作) 부대인 526군부대에 입대(入隊)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기초훈련(基礎訓鍊)을 담당한 교육 기관이었다. 김일성이 2차 패주(敗走) 당시 서울을 비롯한 철수 지역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간 것도 실은 금후 대남 공작에 소요되는 인적 자원(人的資源)을 확보하기 위한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훈련소 소장은 1·4 후퇴 때 서울시민청 부위원장이었던 고광옥이었고, 이하 교직원, 교관들과 초급 지휘관들까지는 과거 남로당 계열에서 좌익운동(左翼運動)을 하던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훈련소라는 것은 아무런 시설도 없어 임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초라한 농가의 윗방을 숙소(宿所)로 빌려 썼고, 필기도구 하나 없이 풀밭에 앉아서 강의를 받고, 훈련도 들판에서 진행하게 되어 있었다. 우리가 황주에 도착한 후에도 각 지방에서 납치된 청소년들이 20명 또는 30명씩 계속 보충(補充)되어 왔다. 1951년 3월 15일. 훈련소 입소식(入所式)이 거행되고, 이어 대열 편성(隊列編成)이 있었다. 편성된 대열은 완전한 군사편제(軍史編制)였다. 나는 1대대 1중대 3소대 1분대에 배속됐다. 함께 납북된 동료들은 모두 뿔뿔히 헤어지게 되었고, 납북 당시 한 조에서 친숙했던 이진숙은 나와 한 중대인 1중대 여성소대에 배치되었다. 내가 소속된 3소대 1분대는 10명으로 구성됐다. 분대원들은 모두 17 ~ 20세였고, 16세짜리 동갑은 나와 중동중학교를 다녔다는 김동현 둘뿐이었다. 나는 김동현과 가장 친숙하게 지냈다. 우리는 서로의 호칭을 <김동무>, <이동무>로 바꿔 부르도록 강요당했다. 대열 편성이 끝나자 그 이튿날부터 혹독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내 운명의 수레바퀴는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첫 시련(試鍊)

북괴군에게 붙잡혀서 황주로 납북돼 오기까지 6일 동안에 겪은 모든 사건들은 내 일생에 처음 당하는 커다란 시련(試鍊)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훈련소에서 겪은 체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산야발주(山野發走)라는 미명하에 숙소로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산봉우리 3개를 넘어 10리쯤 떨어져 있는 초소에 가서 식권(食券)을 가지고 와야 아침밥을 한 그릇 먹을 수 있었다. 시간이 늦으면 그것도 주지 않는다. 만일 불가피한 사정으로 갈 수 없을 경우에는 중대장의 사전 승인(事前承認)을 받아야 하는데, 그 승인을 받기는 하늘에 별 따기만큼 어렵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조선해방투쟁사」라는 과목으로 정치학을 배우고, 군사학으로는 군사지형학, 병기학, 사격원리 등으로 2시간씩 이론 강의가 진행됐다. 그 다음 실지 동작 훈련으로는 지형 훈련을 비롯하여 제식(制式) 사격 훈련이 진행되고, 오후 5시에는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한 짐씩 해와야 저녁 식권(食券)을 주었다. 그리고 훈련을 받는 가운데서도 가장 힘겨운 것은 저녁 식사 끝에 진행되는 50리 야간 산악 행군이었다. 2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산꼭대기를 기어오를 때면 목에서 단내가 난다. 이렇게 산악을 오르내리며 50리를 돌고 나면 온몸이 비지땀으로 젖고, 두 다리는 마비된 듯 감각마저 없어지며, 땀에 흠뻑 젖은 몸을 식힐 사이도 없이 자리에 쓰러지면 자기도 모르게 물먹은 솜처럼 녹초가 되고 만다.



526군부대

서부전방연락소

유엔군의 반격에 부딪쳐 전쟁 2단계 전략이 풍비박산 나게 되자 북괴는 거기에서 응당한 교훈을 찾는 대신 계속 전시 효과를 노리면서 남한의 배후(背後)에 제 2전선을 형성하고,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새로운 모략(謀略)을 꾸몄다. 김일성은 대남간첩(對南間諜) 양성기관인 금강정치학원을 신설, 보강하고 남파간첩들을 대대적으로 양성하는 한편 밀로개척(密路開拓)과 간첩 남파 호송임무를 전담하는 대남공작부대로서 526군부대를 창설(創設)했다. 526군부대는 서부전방연락소와 동부전방연락소로 조직되었다. 1951년 3월, 북괴는 두 번째로 패주하면서 서울을 비롯한 전반적인 철수 지역에서 청소년들을 닥치는 대로 강제 납북해갔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된 훈련이 계속되던 어느 날, 훈련소에서는 기초 훈련이 시작된 지 두 달 만에 전체 훈련생들에 대한 판정 검열(判定檢閱)이 진행되었다. 검열은 526군부대 기간요원(基幹要員)들이 판명(判明)하에 지형 훈련, 비합법 산악 행군 훈련, 실탄 사격 등을 위주로 하여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합격된 사람들은 다시 인물심사를 거쳐서 526군부대로 편입되고, 나머지는 모두 북쪽 후방으로 압송되었다. 나는 판정 검열에서 합격된 탓으로 526군부대에 편입되었다. 전체 합격자 5백 명 중에서 열여섯 살짜리는 나까지 포함해서 모두 12명이었다. 526군부대에 입대한 후 나는 다시 한 달 동안 장애물 극복, 잠복 초소 통과, 비합법 산악 침투 훈련, 그리고 격술(태권도) 등의 특수 훈련을 받고, 1951년 5월 15일 서부전방연락소 제 1방향(526군부대 예하의 대대급 편제) 루트 공작원으로 배치되었다.


화선(火線) 넘어 2천리

제 1방향 지휘부는 강원도 철원군 이동면 신현리 하사골 부락에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제 1방향으로 배치된 인원은 모두 25명이었다. 우리가 연락원의 안내로 하사골에 도착했을 때, 방향장 이하 구대원(고참대원)들은 우리를 반겨 맞이했다. 그 다음날 방향에서 구대원과 신대원들을 배합하여 대열 편성이 있었다. 루트 공작조(工作組)는 1개조에 3명씩 15개조로 편성되었고, 1개 코스를 3개조가 담당하여 그 중에서 2개조는 기본 전투조, 나머지 1개조는 예비공작조로 편성되었다. 나는 예비공작조에 배속되었다. 내가 배속된 예비조는 조장 정 규철과 이상규, 그리고 나까지 세 명이었고, 조장 정규철은 고참 공작원이었다.

대열 편성이 끝난 후 방향장 이두환(1·4 후퇴 때 서울시 조국보위후원회 위원장)은 방향 내 생활 일과(生活日課) 준칙(準則)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루트 공작원의 기본 임무는 대남침투로(對南浸透路)를 개척하고 정치공작원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안내·호송하는 데 있다. 그러니만큼 공작 도중에 그 어떤 흔적도 남겨서는 안 되며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침투·복귀를 해야 한다. 장애물을 돌파할 때에도 통과한 다음에는 반드시 원상복구(原狀復舊)시켜야 하며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보초병을 살해(殺害)하거나 생포(生捕)해서도 안 된다. 만약 흔적을 남기게 되면 피흘려 개척한 루트가 봉쇄될 수 있다. 때문에 절대로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한다. 』는 내용으로 일장 훈시를 내렸다. 대열 편성이 있은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루트 공작이 개시(開始)되었다. 우리 예비조 성원(成員)들은 전방 지대를 비롯한 자기 조의 담당 코스에 대한 지형연구(地形硏究), 그리고 침투 훈련(浸透訓練) 등으로 일과를 보냈다.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방향에는 지휘부로부터 20명의 신대원이 배치되어 왔다. 희생된 대원들을 보완하기 위해 내려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나는 며칠 전 잠자리에서 조장 정규철이 한 말이 떠올랐다. 「방향에서 죽지 않고 석 달만 견디면 구대원이 된다.」 그러니 죽으면 보충되고, 또 죽으면 또 저렇게 보충될 것이 아닌가? 밑 빠진 독에 물 퍼붓기 식으로 끝이 없을 성싶었다. 그 다음 순간, 「나도, 아니 지금 여기서 한 솥의 밥을 먹는 모든 동료들도 언젠가는 끝장을 보고 말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니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님, 누님들 생각이 간절해졌다. 집을 떠난 지도 벌써 석 달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집 생각을 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지금처럼 이렇게 간절히 생각되기는 처음이었다. 쌀자루를 메고 들어오겠거니 하고 기다리던 막내아들이 빨갱이들한테 붙들려갔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듣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릴 어머님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아마 이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든 동료들의 공통적인 심정이었으리라. 그런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개인의 심정이고, 그와는 관계없이 방향 일과는 정해진 대로 진행되었다. (중략)

우리 조가 처음 담당했던 코스는 강원도 철원군 이동면 갈현리 327고지 남쪽 역곡천 경계선에부터 종심(縱深) 30km 지점에 있는 연천 서남방 군자산 경계선까지였다. 행동 개시 일시는 다음날(7월 10일) 18시 30분, 침투 복귀 일정은 6일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방향장 이두환으로부터 출발 명령을 받고 중공군 감시소로 가서 침투 전면에 대한 육안 정찰(肉眼偵察)을 진행하고, 저녁 6시 30분에 행동을 개시했다. 이미 구상된 대로 척후에 조장 정규철, 핵심에는 내가 서고 후방 척후는 이상규가 서기로 했다. 휴대 장비는 각기 미식(美式) 기관단총 1정과 단도 1개, 수류탄 3발, 그리고 비상 식량으로 미숫가루 1주일분, 비상 약품, 포승줄 20m, 지도, 나침반뿐이었다. 대열 간격은 1 ~ 1.5m, 신호는 정지 신호로서 <혀 튀기는 소리> 2회로 약정(約定)했다. 행군 도중 감시 분담은 척후가 전방을 감시하고, 후미(後尾)는 후방, 핵심은 좌우측 감시를 맡았으며, 행군 도중 이상한 징후가 나타나면 징후를 먼저 발견한 사람이 신호를 발신하고, 정지신호가 있을 때는 적정(敵情) 유무 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신속한 동작으로 숨어서 전투 태세를 갖추며, 나타난 징후를 판단한 다음 의견을 일치하여 다음 행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중략)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려 지뢰밭을 다 극복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철조망이 앞을 가로막았다. 철조망에 바싹 붙어 주위 동정(動靜)을 살펴보니 멀리서 이따금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가 들릴 뿐 별다른 정황(情況)은 없었다.

잠시 후 후미의 엄호하에 조장 정규철과 나는 돌파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철조망은 텐트식(지붕식) 철조망이었고, 여기저기 군데군데에는 빈 깡통에 탄피(彈皮)까지 매달려 있어서 조금만 건드려도 소리가 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먼저 훈련에서 익힌 솜씨로 철조망에 달린 깡통부터 하나씩 쥐고 그 속에다 수건을 하나씩 틀어막았다. 소리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 조장 정규철은 철사로 만든 <S>형으로 생긴 고리로 가로 늘어진 철조망 간선을 상하로 벌려 그 아래 윗줄에 각각 걸어놓고 철조망 안으로 들어갔다. 다음에 내가 통과하고 같은 동작이 반복됐다. 후미는 마지막에 세 번째 철조망 안에 들어섰을 때였다. 약 20m 저쪽에서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순간 우리는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렸다. 철조망 안에서 이렇게 됐으니 발견되기만 하면 영락없이 죽을 판이다. (중략)

그런데 잠시 후 좌측 능선 기슭에서 또 중얼중얼 말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미군 잠복 초소가 50m 간격으로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잠복 초소 위치를 포착(捕捉)한 이상 50m 간격이 문제될 것은 없었다. 우리는 잠복 초소와 잠복 초소 사이로 한 치 한 치 기어올라가며 신호줄을 극복하고, 교통호(交通壕)를 통과, 유엔군 진지 후면 남쪽 경사면으로 붙었다. 불과 2km 남짓한 구간을 무려 5시간이나 걸려 돌파한 셈이다. 요경계(要警戒) 지대를 돌파한 후 우리는 3일간의 악전고투(惡戰苦鬪) 끝에 목적지 군자산에 도착했다. 연천 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군자산에 이르렀을 때 내 마음은 착잡했다. 남쪽으로 1 백 리하고 50리만 더 내려가면 내가 나서 자란 고향땅이었다. 부모형제들이 기다리고 있는 내 고향! 얼마나 그리웠던 고향땅인가! 그러나 다시금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다. 넉 달 전, 북으로 끌려갈 때만 해도 도망갈 구멍을 찾았던 내가, 오늘은 도망칠 수 있는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도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북행길에 올랐다.


납북인사들의 비참한 말로

1950년, 6월 25일을 전후하여 북괴의 검은 마수에 걸려 강제로 끌려간 납북인사들의 수는 무려 14만 명이 넘는다(의용군 제외). 이들은 시기적으로 구분해보면, 6·25 때 납북된 정계, 사회계, 학계,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8만4천여 명, 1·4 후퇴 때 납북된 청소년들이 5만 5천여 명, 그 나머지는 휴전 이후 어선, 여객기 등 여러 경로를 통해서 납북된 사람들이다. 김일성이 왜, 무엇 때문에 그토록 <인간 사냥>에 혈안이 되어 날뛰었는가? 그것은 첫째로, 장차 북한 사회를 이끌고 나아갈 만한 인재(人才)가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한반도 전체를 적화 통일시키기 위한 정치적 야망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자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인해 김일성은 6·25를 계기로 본격적인 <인간 사냥>을 개시했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프리카의 노예 상인을 방불케 하는 야만적인 수법으로 닥치는 대로 납치했었다. 납북된 인사들의 그후 운명(運命)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는 알 수 없어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높은 명망을 가지고 있던 인사들의 경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혹독한 고문 속에 죽어간 정계(政界) 인사들

납북된 정계 인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김규식(金奎植) 박사를 비롯하여 6·25 무렵 서울시장 이었던 안재홍(安在鴻)씨, 그리고 사회당 당수이며 국회의원이었던 조소앙(趙素昻)씨, 백범 김구 선생의 비서실장으로 한독당 수뇌부에 있던 엄항섭씨, 그외에 국회의원 오하영, 윤기섭, 김효석, 원세훈, 김용무, 김동원, 박철규씨 등이다. 북괴는 납북된 정객들을 대남 선전의 돌격대로 이용하기 위해 처음에는 대우를 해주는 척하면서 회유책을 쓰기도 하고 공갈 협박을 들이대기도 했다. 그러나 납북인사들은 그 누구도 북괴의 회유 기만 술책과 공갈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거부에 나섰다. 이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자 김일성은 정계인사들을 교화소에 감금시켜 놓고 장기전을 획책하면서 연일 심문을 했다. 납북 직후 정세의 변화에 따라, 압록강 국경 지대로, 평양 지대로 끌려다니며 납북 정객들이 겪은 고초는 형언(形言)할 수 없다. 강계, 만포진에서는 침침한 토굴 속에 감금되고, 평양으로 끌려와서는 교화소의 차디찬 콘크리트 바닥에 억류(抑留)되었다.

이렇게 죄수 취급을 받아온 정계인사들 중에는 고문을 당한 사람도 있고, 가중되는 고초로 인해 고혈압에 신장염, 관절염 등 심각한 합병증(合倂症)으로 옥중에서 별세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이다. 북괴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한두 사람만 전향시키는 데 성공해도 큰 성과라고 떠벌이면서 그들에게 끈질긴 세뇌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납북된 정객들 중에서도 김일성이 목표로 간주했던 사람들은 김규식 박사를 비롯해서 안재홍, 조소앙, 엄항섭, 오하영씨 등 국회의원들과 야당 인사들이었다. 김일성은 단 한 사람이라도 돌려세워 볼 심산으로 1955년도에는 북괴의 행정 간부 양성 기지인 인민경제대학에 특설반이라는 것을 신설하고, 교화소에 수감된 정계 인사들 중에서 명망이 높은 인사를 50여 명을 특설반에 집어넣고 세뇌 공작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1956년 7월에는 이른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라는 허수아비 기구를 조작해 가지고 정계 인사들을 강제로 망라(網羅)시켰다. 그리고는 《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들에 보내는 호소문》이요 뭐요 하는 위장 평화 공세를 취할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이용하여 성명, 호소문을 남발(濫發)하곤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북괴는 정계 인사들을 각각 분산시켜 가지고 동년 말경에 엄항섭, 조소앙, 윤기섭, 김상덕씨 등 24명의 인사들을 반정부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씌워서 모조리 체포하여 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처형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피동 분자로 몰렸던 신성균, 조옥련, 허영호, 이주형, 이만근, 박동환씨 등 나머지 20여 명은 1958년 말과 1959년 초에 북쪽 벌목장으로 각각 분산·배치시켜 귀양(정배)살이를 보냈다. 그후 남한에서 4·19가 일어나자 김일성은 거기에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조국평화통일위원회>라는 허수아비 단체를 또 만들어 가지고 58년 엄항섭 사건에 관련시켜 처형하지 못했던 저명 인사 안재홍, 김규식, 오하영, 박철규씨 등을 대동강 기슭에 있는 독립 초대소에 각각 밀봉시켜놓고 1948년 납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때 월북한 이극노와 함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의장단 성원으로 강제 기용시켰다. 이렇게 정계 인사들은 계속되는 연금 생활을 하다가 1963년 안재홍씨를 마지막으로 전부 노환(老患)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1958년, 엄항섭 사건 당시 피동 분자로 낙인(烙印)찍혀 북쪽 산간 벽지로 추방된 인사들도 그후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용 끝에 추방된 과학자들

6·25 때 끌려간 납북인사들 가운데에는 정계 인사들도 많았지만 저명한 박사, 교수와 같은 학계 인사들도 많았다. 6·25 당시 남한의 과학자들을 색출, 납치, 회유(懷柔) 하는 데서 돌격대 역할을 수행한 것은 전 서울공대 교수로 있다가 1948년도에 월북한 김재을이었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하자마자 김재을 박사를 끌고 나와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감투를 씌어 놓고 그와 과거부터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일본 경도제국대학 출신 동창들과 권위 있는 박사, 교수들을 물색, 포섭하게 하는 한편,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정치보위대를 동원해서 수색 작업을 벌여 납치하도록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수많은 박사와 교수들이 강제 납북되게 되었다. 사실 6·25 직전까지만 해도 북한에는 인재(人才)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북한에서 최고학부(最高學府)로 불리던 김일성대학과 김책 공업대학의 교수진에서 그 중추를 이루고 있던 인물들은 과거 남한에서 좌익계의 영향하에 있다가 6·25 전에 월북한 교수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과거 서울공대 교수로 있다가 1948년도에 월북한 김재을 박사를 비롯해서 백남훈, 정평수, 도상록 등을 들 수 있다. 화공학 박사 김재을은 김책공업대학 교수로, 수·물학(數物學) 박사 정평수, 도상록은 김일성대학 교수로 있었다. 이들 모두가 일본 경도제대 출신들이다.

6·25 때 강제 납북된 과학자들 중 대표적인 인사들은 서울대학교 총장이었던 최규동(崔奎東) 박사를 비롯해서 고려대학교 총장 현상윤(玄相允) 박사, 서울사범대학 학장 손진태(孫晋泰)씨, 그리고 서울공대 교수였던 이승기(李承基)·최삼열(崔三烈) 박사 등이다. 납북된 이들 과학자들 중에는 동란 중에 잘못된 사람들도 있으나 그 대부분이 북괴에게 이용당하다가 1958 ~ 1959년 사이에 중앙당 집중 지도 당시 거의 다 숙청되었다. 최규동 박사와 손진태씨는 동란 때 강계시 향하리까지 끌려가서 북괴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고 하여 침침한 굴 속에 감금당했다. 이들은 굴 속에 억류된 지 1년 만인 1951년 말, 1952년 초에 각각 별세하고 말았다. 고려대학교 총장이었던 현상윤 박사는 정계 인사들과 함께 1955년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을 수료하고 북괴가 조작한 재북 평화통일촉진협의회 의원으로 강제 기용되었었다가 1958년 말 엄항섭 사건에 관련되어 다시 교화소에 수감, 그후 양강도 위면 임산사업소 벌목장으로 유배되어 강제 노동당하다가 교화소에서 걸린 질병으로 고생하던 끝에 1960년에 별세했다는 소식이 남한 출신들을 통해서 전해졌다.

한편 의학박사 이성봉씨와 서울의대 교수였던 김시창씨는 패주하는 북괴군에게 끌려 자강도 만포까지 갔다가 다시 나와서 동란 당시 북괴군 57호 야전병원에서 외과의(外科醫)로 고용,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에는 평양의학대학 교수로, 그후 이성봉 박사는 적십자 중앙병원 임상연구소(臨床硏究所)로 자리를 옮겨 가지고 있다가 1958년 말경에 숙청, 그후 소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납북된 과학자들 중에서 김일성에게 가장 후한 대접을 받은 사람은 이승기 박사였다. 그는 북괴군이 패주할 당시 만주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김 일성이 만들어준 청수화학연구소에서 비닐론을 연구했다. 그후 이승기 박사는 비닐론 연구 성과로 해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국회의원)이 되고, 1964년도에는 노력영웅 칭호까지 받았으며, 과학원 함흥분원(分院) 원장으로 임명되어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 1968년 <프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하여 정세가 긴장되자 김일성은 이승기 박사에게 국방과학원 원장직을 겸직시키면서 어깨에다 큰 별을 두 개나 달아주었다. 그리고 그 밑에다 10여 명의 조수들을 붙여주면서 신형 무기(新型武器)를 개발 연구하도록 했다. 그런데 그후 몇 년이 지나도록 연구 성과가 나타나지 않게 되자 1971년 말, 북괴는 이승기 박사에게 책임을 추궁했다. 이때 이승기 박사는 호된 비판을 받다가 「저런 조수 10명보다 차라리 천재 1명을 붙여주는 것이 더 낫다」는 식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자 북괴는 당에 대한 도전 행위라고 하면서 이승기 박사한테서 국방과학원 원장직과 함흥 분원 원장직을 박탈하고 사상 검토를 들이댔다. 그후 소식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과학원 공학연구소 연구사 및 김일성대학 교수로 있던 최삼열 박사와 김영창, 정열모, 고정옥씨 등은 1969년 간부대열 정리 당시 출신 성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최삼열 박사가 숙청되는 바람에 영화촬영소 공훈 배우로 있던 최부실도 황해제철소 노동자로 좌천되어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용해 먹을 대로 이용하다가 그 이용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헌 걸레처럼 취급하는 것이 김일성의 인텔리 정책이다. 김일성의 이러한 인텔리 정책은 비단 납북된 과학자들에게만 적용된 것뿐이 아니다.



문화 예술인들의 비참한 말로

6·25 당시 납북된 인사들로서 특히 빼놓을 수 없는 사람들은 문화인(文化人)들과 연예인(演藝人)들이다. 문화인으로 납북된 인사로서 누구보다도 가장 비참한 종말을 가진 이는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선생이었다. 북괴는 이광수씨를 북으로 압송(押送)해간 후 그를 이용해 먹으려고 갖은 회유책을 다 썼으나 완강(頑强)한 저항으로 그 뜻을 이룰 수 없게 되자 반동 작가로 몰아 평양교화소에 감금시켜 버렸다. 억류된 춘원은 폐결핵에다가 심한 관절염까지 걸려 앉은뱅이가 된 채 일어서지도 못하고 1958년에 무참히도 옥사(獄死)당하고 말았다.

그외에 임화, 이태준, 한설야, 한진태 등 좌익계 영향하에 있던 작가·예술인들은 문예 전선의 돌격대로 이용당하다가 무자비하게 숙청당했고, 임화, 이태준은 1953년 박헌영, 이승엽 사건과 연관된 반동 작가라고 하여 숙청했는데 임화는 이승엽, 배철 등 남로당 계열의 거두들 축에 끼어 총살(銃殺)당하고 이태준은 교화소에 수감된 후 영영 무소식이었다. 허정숙이 문화선정상으로 있다가 숙청당하자, 그 자리를 넘겨 받았던 한설야는 김일성의 날조(捏造)된 혁명역사(革命歷史)를 주제로 하는 소위 혁명문학(革命文學)을 창작·일반화하는 데 대한 김일성의 교시를 반대·비난했다 하여 1960년대에 반당 종파 분자로 숙청, 함경북도 종파수용소로 추방된 후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소설가인 한진태는 《화선천리》라는 자기 작품에 서울에서 의용군에 끌려간 한 서울대학생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북괴는 『왜 그런 소부르주아 출신을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는가?』하면서 그 내용을 뜯어 고치라고 억압을 했으나, 못마땅히 생각한 한진태가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역시 반동 작가로 몰아 숙청해 버리고, 이미 출판된 그의 작품을 모조리 회수해서 불태워 버렸다.

연예인들의 경우에도 그 처지는 마찬가지였다. 일정 때부터 무용가로 그 명성이 높았던 최승희와 그의 딸 안승희는 한때 북한에서 민족 무용 발전에 그 공로가 컸다고 해서 김일성으로부터 인민 배우 칭호까지 받고 김일성의 총애를 받았다. 김일성은 최승희의 이름을 따서 최승희무용연구소까지 차려주는 등 극성을 부렸으나 최승희의 남편 안희마저 농촌 구석으로 숙청해 버렸다. 만담가 신불출은 동료들과 함께 술좌석에서 남한 출신들에 대한 잔인한 숙청상을 비유해서 『야! 모가지 여분을 몇 개나 가지고 있기에 함부로들 지껄여. 까딱하다간 끄떡한다. 괜히들 말조심해.』 이렇게 혀를 잘못 놀렸다가 안전부에 연행되어 간 후 소식이 없다. 또한 인기 배우 황철은 북에 들어가서도 재치 있는 연기로 인해 인기를 한 몸에 모으는 등 인민 배우 칭호까지 받고 한 때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까지 지냈으나 1959년에 중앙당에 끌려가 한 차례 검토를 받자 고민 끝에 쇼크로 졸도한 다음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한편 연예인 중에서 누구보다도 파란 많은 곡절을 겪은 사람은 심영이다. 그는 연기 생활을 통해 공훈 배우로 각광을 받아왔지만 1953년 남로당 숙청 당시 한 차례 걸려들었다가 간신히 모면하고, 1960년 한설야가 숙청될 당시에 다시 사상 검토를 받은 후 공훈 배우가 된 지 20년이 넘도록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다가 1971년에 숙청되어 평양 삼신탄광 탄부로 떨어졌다. 그러자 영화 배우로 있던 그의 딸 심영옥과 아들 심승보까지 삼신탄광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그후 심영은 탄부로 고역을 치르다가 1973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했는데, 그는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 자식들 앞에서 『내 평생에 제일 큰 실수는 공산주의를 따른 것이다. 너희들을 두고 가자니 내 마음이 안 놓이는구나. 이 다음에 통일되면 나를 서울에 갖다 묻어 다오』라고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밖에 공훈 배우 김연실, 문예봉, 김선영 등은 남한 출신 배우들에 대한 차별 대우에 불평을 품는 기미를 보이자 냉대를 받게 되었다. 특히 그중 자기 불만을 노골적으로 털어놓았던 신세민은 1972년에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공훈 배우였던 홍인순은 1971년 말경에 평야 건설사업소 노동자로 숙청, 벽돌짐을 지는 신세가 되었으며, 문예봉은 연기 생활도 못하고 영화촬영소의 말단 분장실 분장사로 생활하고 있다. 이 외에도 가수 유은경, 왕수복, 조경, 김점순, 그리고 작곡가 김순남, 나화일, 체육인 나윤철 등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 출신이라는 <죄> 아닌 죄로 인하여 심한 박해를 받고 있는데, 남아 있는 모든 문화 예술인들의 말로(末路) 역시 그 신세는 뻔한 것으로 보인다.



거문도 4차 남파와 3분 만의 거사(擧事)

8·18판문점 사태 후 제주도 남방까지 내려왔다가 <미드웨이호> 때문에 더 북상하지 못하고 일본 근해에 표류하다가 다시 남포항으로 복귀한 지 이틀 후, 아직 배에서 시달렸던 피로가 가시기도 전이었다. 1976년 9월 4일, 예고도 없이 부부장 김상호가 담당 지도원을 대동하고 중년 사나이 1명과 함께 검은 세단으로 초대소에 도착했다. 김상호는 들어서자마자 『상급당의 결정에 1940번(나의 공작 번호) 거문도 공작조에 선생(공작원) 한 분을 더 배속시켜 3명으로 구성하기로 되었습니다.』라고 하며 중년 사나이를 소개시켰다. 그는 김영철(가명)이라 불렀다. 우리는 서로 자기 가명을 대고 악수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밀리고 밀리어 오던 거문도 4차 공작은 드디어 1976년 9월 19일 22시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되었다. 4차 공작 임무는 첫째, 거문도 고첩(固諜) 김재민의 딸 김영희를 대동 복귀시키는 동시에 내륙 지대 주민등록증을 획득해오는 것이며, 둘째, 8·18 사태 이후 남한의 군사·정치 정세와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중략)

이튿날 정오, 우리는 연락부장 정경희의 환송을 받고 평양을 떠났다. 남포연락소 전용 선착장 와우도에 도착한 우리는 부부장 김상호 이하 간부들의 뜨거운 배웅을 받으며 저녁 7시에 낯익은 공작선 56호에 올랐다. 선원들은 모두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에 맞았다. 잠시 후 시동이 걸리고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을 내며 공작선은 남포항을 떠났다. 남포항을 떠나면서 나는 이번 거문도 4차 침투를 마감으로 오랫동안 마음속 에 그려오던 자유대한으로 귀순할 것을 결심했다.
(중략)

드디어 9월 19일 저녁 6시에 제주도 동방 50마일 공해상에서 자모선(子母船)이 분리되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의 항해는 계속됐다. 모두 장한(壯漢)들이었지만 며칠째 멀미에 시달려 백지장처럼 창백한 얼굴로 창호와 영철이는 묵묵히 앉아 있었다. 멀리서 등댓불이 번득였다. 거문도 남단에 있는 수월산 등대였다. 우리는 등댓불을 보고도 한참 더 달려서 밤 9시 30분경 거문도를 우회하여 섬 북쪽 연안으로 접근했다. 경비정의 눈에 뜨일까 봐 조심조심하면서 <큰이애> 해안으로 상륙했다. 상륙하자마자 창호와 영철이는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중략)

나는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대한민국으로 귀순한다는 그 자체가 김일성을 반대하는 하나의 투쟁 형태가 되는 것인 만큼 이왕 거사를 할 바에는 일을 크게 벌려서 간첩선도 잡고 동료 2명도 설복해서 같이 집단 의거하도록 하자! 만약에 그들이 응하지 않고 반항하는 경우, 그땐 벌써 동료가 아니라 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결심했다. 나는 날이 밝을 때까지 배가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단 1분이라도 더 붙들어 두기 위해 약속된 접선 시간 마지막까지 시간을 끌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복귀하던 도중 부락 뒤 산등성이에서 동료들을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다시 서도리 부락으로 향했다.
(중략)

공작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손님이 와 있던 관계로 영희의 대동 복귀 문제는 거론하나마나였다. 나는 그런 대로 공작을 결말짓고 안내원에게 <나간다>는 신호를 보냈다. 접선 장소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에게 모든 일이 정상이라는 인상을 던져주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대상 가옥을 이탈하여 접선 장소로 향했다. 복귀 노정(復歸路程)에 들어서는 순간 내 마음은 여러 가지 착잡한 심정으로 뒤엉켰다.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조원들이 내 의사에 호응하겠는가, 반항하겠는가? 몇 분 후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전혀 예측할 길 없었다. 이렇게 골몰하는 사이 어느덧 부락을 벗어났다. 일이 바로 되든 거꾸로 되든 이젠 행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만약을 생각하여 안전 장치를 풀었다. 반항하는 날에는 대응 조처를 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내 머리에는 불길한 예감도 들었다. 만약 반항에 부딪혔을 때 「공교롭게도 첫발이 불발탄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모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내가 마음 속에 찍어두었던 지점인 서도리 뒷산 능선마루에 다다랐다. 이젠 한 발자국도 더 갈 수 없었다. 조금만 더 가면 안내원들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나는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리고 조원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자! 얘기 좀 하자. 난 이미 여기 남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 지긋지긋한 소굴로 다시 돌아가겠는가, 함께 떨어지겠는가? 우리 태도를 분명히 밝혀보자.』라고 하면서 집단 의거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면서 나는 슬며시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사실 그때 나는 캄캄한 밤이었고 또 상대방 2명이 똑같은 무장을 한 데다가 그들이 어떤 태도로 나올지 알 수 없는 조건에서 더 이상 길게 말할 수 없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들은 처음엔 얼떨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깨달았는지 창호는 멈칫하면서도 가만히 있는 것 같았으나 바로 앞에 있었던 김영철이 갑자기 두 손을 벌리며 와락 덤벼들었다. 사태는 위급했다. 그 순간 나는 「이제 틀렸구나」 이렇게 단념하고 우선 덤벼드는 놈부터 발길로 걷어찼다. 내 손가락은 이미 방아쇠를 당기고 있었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발이 먼저 나간 것이다.

내 발길에 차여 자빠지던 영철이 권총을 잡는 순간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륵 드르륵> 고막을 뚫는 요란한 총소리가 거문도의 밤하늘에 메아리쳤다. 짧은 연발 사격에 2명이 한꺼번에 맞고 나가떨어졌다.
(중략)

거사는 불과 3분 만에 끝났다. 주위는 다시 고요했다. 나는 남해 바다의 새벽 공기를 마시며 서도리로 발길을 옮겼다. 요란한 총소리가 하늘을 진동한 다음에도 섬마을은 언제 총소리가 있었냐는 듯 여전히 고요했다.

자유의 품에 안기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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