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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곽노신 (증언자-곽창신, 곽홍신)
이름: 관리자
2021-09-16 14:59:52  |  조회: 159
곽 노 신 ( 郭노兟)

생년월일: 1927년 2월 30일
출생지: 강원도 문막읍 반계리
당시 주소: 충북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
피랍일: 1950년 음력 7월 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학력/경력: 무학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자녀 2남 2녀
외모/성격: 차분하고 순박함.

증언자
성명: 곽창신(1941년생), 곽홍신(1944년생)
관계: 장녀, 차녀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순한 성격에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분으로 회의에 참여하라고 하여 감기기운으로 달여 마시려던 감기약
도 다녀와서 먹으라는 재촉에 불려 나감.
• 이웃동네부터 3차에 걸쳐 빨갱이들이 동네 젊은이들을 여러 명 데려갔고, 그 중에 도망쳐 살아 돌아온
이를 통해 철원까지 갔다는 소식을 들음.

직업 및 활동
<큰아버지 대신 가업을 이어 농사일을 함.>
문_ 아버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게셨나요?
답_ 큰아버지 대신 농사를 지으셨어요.
문_ 납북 당시 같이 거주하던 가족은 어떻게 되나요?
답_ (곽창신)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저랑 동생 셋. 모두 여덟 식구였죠.
문_ 아버님의 성격은? 마을 청년단 같은 활동도 하셨는지요?
답_ (곽창신) 아니 그런 것도 할 줄 몰랐어. 농사만 하셨어요. 아주 순박하셨어요. 형님
이, 우리 큰아버지가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시니까 시골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고 부
모님들이,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작은아들이니까 가업을 지켜라 해서 농사를 지셨지.
우리 아버지는 차분하고 순박한 사람이었지. 그래서 저항이라든가 이런 게 전혀 없는 분
이였어. 부모님 밑에서 농사 배워서 농사만 짓는 분이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학교를 다녀도 할머니가 좀 여장부 스타일이라서, 할머니가 나서서 학
교에도 입학시키러 다니고 학교의 대의원 회의라던가 이럴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녔
지.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그런데 못 나가셨어요. 어른들 밑에서 그냥 일만 하셨지 그
때 당시.

납북 경위
<농사일 하시다가 감기가 걸려 저녁에 집에 들어왔을 때, 동네 우 씨네 머슴이 집으로 찾
아와 다리고 있는 감기약도 못 먹게 하고 참석을 재촉하며 아버지를 끌고 나감.>
문_ 언제 납북되셨나요?
답_ (곽창신) 6·25 이후 7월 경에 납치되셨어요.
우리 아버지가 강원도 문막면 태생이시고, 우리들도 다 거기서 낳았어요. 근데 아버지
가 징용을 뽑혀가니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형님네가 충북 진천읍에서 한의원을
하니까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먼데로 가면 징용을 안 간다고 해서, 피해서 거기로 피
란을 간 거예요. 해방 전에… 45년에 해방이 되었는데, 44년 봄에 거기로 피란을 간 건
데 말하자면, 거기서 해방이 되었고, 6·25가 날 때까지 한 5, 6년을 거기서 사셨어요.
사시다가 6·25가 나니까 납북 되신 거지. 당시 거주지는 충북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라
고 했어요. 거기서 (끌려) 나가신 거예요. 진천, 음성 쪽으로 이사를 간 거죠. 피란을 간
게 아니라. 그쪽에 있으면 또 징용에 붙들려가니까. 주변에 같은 또래들이 (징용에) 붙
들려 가니까 미리 이사를 가신 건데 거기에서 ·625를 만나가지고.
문_ 어떻게 납치되셨나요?
답_ (곽홍신) 동네 부잣집 우 씨네 머슴으로 온 사람이 우리 아버지 나이였는데, 그 사람
이 어디서 빨갱이 사상을 받아온 거예요. 우쭐대면서 그래 가지고 친구들을 다 불러가지
고 회의하러 오라고…
(곽창신) 대성면사무소에 학교 마당으로 밤에 회의를 한다고 그러면서, 근데 우리아버
지가 감기가 걸려서 큰댁이 한의원을 했어요. 진천읍에서. 그래서 감기약을 지어다가
숯불에 다리는데 우리 할머니가 먹고 가라는 데도, (데리러 온) 그 사람이 갔다 와서 먹
으라고 그러고 그 약을 먹지도 못하고 간 게 끝이에요. 그때 회의도 처음인지. 두 번째
인지 그랬는데 처음에는 못 가셨나 봐요. 일 하러 가고 안 계셔서. 그날은 약 잡수시려
고 저녁에.
(곽창신) 저녁이었죠. 회의를 하면 꼭 밤에 하더라고. 그래서 밤에 가려고 저녁 먹고 약
먹고 가려고 했는데, 그냥 빨리 갔다 와서 먹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아주 그냥 손을 끌고
가는… 우리 할머니가 안 된다고 약 먹고 좀 쉬어야 한다고, 몸살감기가 났으니까 안 된
다고 붙들어도 그 사람이 손을 잡아끌고 그냥 대문으로, 시골에 삽작이라고 울타리에 그
대문으로 끌고 나간 게 마지막이었어요. 여름이니까, 추석 전이였어요. 추석 전 7월 말
쯤 되나 봐요. 음력으로. 그때는 양력은 잘 안치니까. 6·25는 6월에 났으니까 음력으
로 한 5월쯤 되겠죠. 그러니까 한 (음력)7월쯤에 가셨어요. 농사를 짓다 말고 가셔서 그
때부터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도 어려웠죠. 우린 딸들이고 그리고 어리고 할아버지 할머
니가 연세가 환갑 전후였을 때예요. 그래서 갑자기 일꾼 사가지고 농사를 짓고 이러느라
고 참 어려움이 많았어요. 그러니까 제가 본 건 집이지만 할머니가 본 게 음성군 어느 국
민학교 수용소였는지 가서, 그 사람들이 낮에는 거기서 잠을 자고 밤만 되면 움직이는
거예요. 북쪽으로 가는 거야 이제. 마지막 본 거는 일하시고 와서 감기가 드셨다고 큰댁
에 가서 약을 지어 와서 대리는데 빨리 가자고, 그 사람이 와서 독촉을 하고 서 있으니까
잠깐 갔다 오면 된다고. 우리 할머니가 아니 애는 지금 감기가 들었으니까, 이 약을 먹
어야 한다니까, 먹고 간다고 하니까, 갔다 와서 먹으면 된다고 그러면서 끌고 간 게 마
지막이지.
(곽창신) (마을에서) 대여섯 분인가 가셔서 못 오셨어.
(곽홍신) 그러니까 그때 청년들을 (1,2,3차로) 그렇게 끌고 갔으니까. 한 20호 되는 가
구니까.
문_ 데려간 사람이 누군가요?
답_ (곽창신) 이름은 ◯갑이라고 불렀는데, 성은 오래돼서 잊어버렸어요. 우서방네 일
꾼이었어요. 알죠. 근데 그 사람(◯갑)을 아군이 9.28 수복이 되고 데려다가 죽였어요.
음성 경찰서에서 붙들어다가 죽였어요. 그래서 마누라가 시신 가져다 장사를 치르는 걸
우리가 봤다고. 체구가 있고 사람이 좀 껄렁껄렁했지. 말하자면 지금 말하면 용감하달
까? 껄렁껄렁한 사람이었어요.
(곽홍신) 당시 동네 일꾼들이 빨갱이가 많이 됐잖아.
(곽창신) 그때 당시에는 돈 있는 사람, 이런 사람 내 땅에서 소작 붙이는 사람이 다 끌고
가서 다 죽였잖아. 다 납북 시켜 버렸잖아.
문_ 아버님에 대한 기억을 말씀해주세요.
답_ (곽창신) 오래돼서… 아버지 얼굴도 잘 기억이 안나요. 오랜 세월이 됐고 그때 사진
도 하나 제대로 변변한 게 없으니까 그냥 대강 눈에 어리기는 하죠. 우리 아버지는 차분
하고 순박한 사람이었지. 그때는 시골이니까 양복이 없었어요. 그래서 광목으로 된 하
얀 중의 적삼이라고, 홑겹으로 만든 거. 밑에는 둘둘 말아서 입으시고 그렇게 일을 하셨
죠. 논에 들어가고 그때는 장화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맨발로 논에 들어가니까 접어서
입으시죠. 집에 오려면 내리고. 일하던 복장 그대로 가셨죠.
문_ 당시 마을 분위기를 말씀해주세요.
답_ (곽창신) 전쟁 전에 조그만 마을이었어요. 부잣집이라고 소문난 집이 하나 있었고,
그 집 아들도 납북자라고 ◯중이라고 ‘우◯중’이라고 그 문패에 있더라고요. ◯중이도 그
◯갑이가 우리 아버지보다 나중에 3차로 잡혀갔어. 그때는 대학생이였어. 서울대학교
문과대학교 1학년. 그러니까 지식인으로다가 끌려 간 거지 총각이.
(곽홍신) 우◯중이는 소문에 들어보니까 자기 형제들한테 연락이 왔다는 것 같아요. 이
북에 살아 있다고 연락을 받은 것 같아요. 만나자고.
(곽창신) 근데 자기네 집에다가 주소를 똑바로 대면 자기네 집이 시골에서는 아주 부호
였거든요. 그래서 지장 갈까봐 가명으로다가 댔다고, 이북에 가서 잘 산다고 소식이 직
접 온 건 아니고 어떻게 들었대요. 말을 하더라고요, 그 형제들이. 근데 그 위패에는 있
어요. 그 사람이 우◯중이라고 찾아보니까.
그 당시에 우리 동네는 인민군은 안 들어오고 그냥 지방 빨갱이들이 어디서 와 가지고
저기 인민군 동무라고 부르면서 찬양…
(곽홍신) 우리 동네 애들을 불러서 저녁에 그쪽 애국가 노래를 가르치고 그랬어요. 저녁
에 나오라 해서 그 노래를…
(곽창신) 우리 애국가를 부르지 말라면서 거기 애국가를 가르치고. 또 어른들은 저녁마
다 우서방네 마루로 불러서 어머니, 고모는 ‘여성동무회’라고, 모르는 여자들이 와서 노
래를 가르치고 연설도 하고 뭐. 노인네들은 뭐 집에 계셨던 것 같아요. 근데 나중에 쫓
겨 갈 무렵쯤 돼서 추수해서 벼 이삭이 익어갈 무렵이었어요. 수확은 아직 안하고 그럴
때 그 사람들이 와서 (이삭을) 센다고 밭에 들어가서 세고 그러는 장면까지 우리가 기억
하는 것 같아. 추수한 이삭에 몇 알이나 나오는지 그 통계를 뽑아서 세금을 매긴다고 말
하자면… 그래서 그런 것만 생각이 나지.

납치 후 소식
<할머니가 종적을 수소문해서 아버지를 서너번 가량 만났음. 마지막으로 본 것은 음성 초
등학교였고 그 이후로는 만나지 못했음.>
문_ 납치 후 어떻게 하셨나요?
답_ (곽창신) 그날 저녁에 안 들어오시니까 우리 할머니가 그 집을 막 쫓아가서 종주목을
댔죠. 그러니까 그 집도 어머니하고 마누라가, 젊은 마누라가, 애기도 없는 마누라가 있
었는데 그들도 모르지 무식하니까. 자기 남편도 안 왔다고 그러다가 하루이틀 지나고 의
용군으로 끌려갔다고 하니까 우리 할머니가 이웃 동네까지 쫓아가서 수소문을 해서 그
사람들이 지금 어디 가 있다는 걸 알아서 그 이튿날 새벽에 밥을 싸서 가져가시고. 그래
서 한 서너 번은 가신 걸로 기억해요. 음성까지 가서 무슨 국민학교에서 마지막 면회를
하고 오셨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도망와라 이러니까 ‘내가 가면 어머니, 아버지, 다 식
구 삼대를 다 죽인다 하니까 나하나 죽고 마는 게 낫지. 어떻게 도망을 가느냐?’ 이러면
서 빤하니까 시골에는 옛날에… 그래서 못 오신다고 그러더래요. ‘그래도 그렇게 못 할
거다. 그러니 도망와라 도망와라.’ 우리 할머니가 그랬는데, 마지막 밥을 먹이고 나오는
데 마당 쯤 오니까 폭격기가 지나가더니 벼락치듯이 폭격을 하는데 거기는 무사했는데,
할머니가 깜짝 놀래서 땅바닥에 넘어지셨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그게 마지막이예요. 가
족이 본 건 할머니 혼자 다니셨어요. 우리 집에서 음성이 한 사십리인가? 오십리되니까
걸어가야 하니까. 지금은 차편이 좋지만 옛날에는 차편도 없고 새벽에 밥을 해서 해뜨기
전부터 걸어가시니까 점심 한 끼 주겠다고 진천으로 이월로 이월면이 더 가깝거든요. 이
월면이 그 경계니까 거기 가서 하루 더 면회하고. 또 진천읍에 있다 해서 그때는 다 입소
문으로 뉴스가 있나 신문이 있나 사람한테 물어서, 주로 학교에 가 있더라고. 학교에 가
서 찾으면 사람이 백명인가 이백명이 있으니까, 찾기가 쉬우니까 찾아서 밥을 먹이고 오
시고. 십리씩 삼십리를 걸어오시면서 얼마나 허망하게 걸어오셨으면 털썩 주저앉으셔서
울고, 그 기억밖에 없어. 음성까지. 우리가 음성군과 진천군 경계에 살았는데 방죽이 하
나 있는데, 방죽을 경계로 이쪽은 진천군이고 저쪽은 음성군인데 음성읍을 가려면 한 사
십리를 가야해요. 멀어요. 진천읍보다 거기가. 근데 거기까지 가셨었어.
문_ 음성군에서 본 이후의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곽창신) 그 다음에는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소문도 못 듣고 어디로 찾으러 갈 수
가 없었지. 어디로 갔다는 소문을 들어야 가는데 못 들으니까. 한번도 소식을 못 들었
죠. (당시에) 맨날 위원회 같은데 가서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고, 그러자 또 1·4 후퇴가
되니까 서울에서 피란민들이 들어오고 그러니까. 우리 고모네, 작은 할머니네, 큰아버
지네 전부 다 그냥 우리 집으로 피난을 와서 우리가 한 삼십년을 살았어요. 그 집에서.
그러느라고 뭐. 그러는 와중에 우리 사촌 동생 죽고, 우리 남동생들 둘 죽고 우리 할머
니 입장에서 손주들이 셋이 한꺼번에 죽으니까 맨날 눈물로 세월을 보냈지 눈물로. 나가
있는 아들도 궁금하고 집에 있는 손주들 다 죽고 그러니까. 할머니가 세월을 원망하면서
죽지 못해 사셨죠. 우리야 철이 없으니까 그런가보다 그랬지 그때만 해도. 그렇게 절실
하게 현실을 모르니까.
(곽홍신)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친구와 같이 붙잡혀 갔는데 양재 뭔데 이름을 잘 모르겠
어요. 어려서 하여간 같이 갔다가 두 분이 돌아오지 못하시고. 그 ◯중이도 못 오고 또
여러 사람이 갔는데 1차 2차 3차로 갔는데 저희 아버지는 2차로 가셨고, ◯중이는 3차
로 갔는데 1차에 갔던 사람 중에서 포로 교환에 살아서 온 사람(민영재)도 있어요. 그 사
람 증언에 의하면 우리 아버지가 철원까지 갔었다고, 동네 사람이니까. 친구 지간이니
까 만난 적이 있다고 그래요. 철원까지 가다가 폭격이 나니까 서로 피하느라고 헤어진
게 끝이라고 하더라고요. 그이는 거제도 수용소에까지 갔다가 포로교환 때 왔더라고.
살아있다고, 뭐 그 형제들한테 왔다고 하는데, 형제들도 지금 어려우니까 다 죽게 되고
그랬으니까 찾질 않는 것 같아요.
(곽창신) 그 사람(민영재)도 근데 죽었어요. 몇 년 전에. 그러니까 우리는 어디 가서 찾
아볼 생각도 못해 보고 이산가족 상봉 때도 여의도에 이름은 써서 올렸지만, 우리 애들
이 들고 가서 했지만 뭐 어디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때는 의용군들은 나라에
서 인정을 안 해줬잖아요. 대한민국을 위해서 간 게 아니다 해서.
(곽홍신) 그 쪽을 위해서 간 거라고. 우리는 혜택을 하나도, 공부할 때도 하나도 혜택을
못 받았잖아요.
(곽창신) 끌려 간 거지만 의용군으로 돼서 그쪽을 편들고 간 것처럼 그렇게 됐어요. 그래
서 우리는 요만 한 혜택도 하나도 못 받고, 어디 가서 당당하게 얘기도 한마디 못해 봤어
요.

남은 가족의 생활
<농사짓다가 조부모님 돌아가시고 고향땅을 정리하고 서울로 와 작은집을 사서 셋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
문_ 아버지의 납치 후 가족들은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답_ (곽창신) 농사를 지으니까 살긴 살았는데, 먹고는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할머니 할
아버지도 연세가 있으셔서 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와 가지고…
(곽홍신) 우리는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까.
(곽창신) 서울에서 우리는 결혼을 했고, 여기는 서울 와서 공부를 했고. 그래서 결혼도
서울 와서 했으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돌아가셨지. 서울에서는 큰아버지가 서울 사
시니까. 뭐 도와준 건 아닌데.
(곽홍신) 거기 농토를 팔아가지고 와서…
(곽창신) 여기와서 조그만 집을 하나 샀지, 이대 입구에.
(곽홍신) 방 세개짜리를 사가지고, 하나는 우리가 쓰고 양쪽 방 세놓고 그래서 세를 놔
가지고…
(곽창신) 그거 가지고 연명을 했어요.
문_ 살아 생전에 할머님, 할아버님이 납북되신 아버님에 대해 이야기하셨나요?
답_ (곽창신) 맨날 그렇죠. 경조사가 있거나, 당신이 몸이 아프거나, 좋은 일이 있거나
뭐 이러면 꼭 이야기를 하죠. 언제 한번 내 눈 감기 전에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
고…
(곽홍신) 맨날 쑥맥같이 끌려갔다고, 도망 오라고 했는데 도망도 못 오고…
(곽창신) 우리 할머니는 용감하셨어. 근데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 순박하셨
어. 할아버지는 얌전했고 할머니는 좀 여걸 스타일이였어. 그래서 면회를 가는데도 할
아버지가 안가시고 할머니가 그렇게 쫓아다니셨다니까. 우리 할머니는 동네에서 알아
주는 여걸이었어요. 다른 집 어머니들은 감히 그런데. 음성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
는 분들은 감히 나서지도 못해요. 근데 우리 할머니는 용감해서 그렇게 쫓아다녔다고.
(옆 동생을 가르키며) 이 동생은 고등학교도 자기가 벌어서 했어요. 할머니, 할아버지
연세 많고 시집가기 전에 다 돌아가셨는데 참 우리 고생 많이 했어요. 한 사람 가장을 그
렇게 데려가는 바람에 한 가정이 다 무너지는 거야.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북 당하셨던 그 동네나 정부에서 도움이 있었나요?
답_ (곽창신) 아니 뭐 집집마다 걸리다 싶이 했는데 뭘.
(곽홍신) 전혀 없었어. 그런 거 없었죠.

호적 정리
<할아버지 살아 생전에 사망으로 처리.>
문_ 호적 정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답_ (곽창신) 이게 나중에 해야 한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돌아 가시기 전에 사망신고를
냈나 봐요. 납북자라고 할 수 없으니까. 문막에, 본적지에 가서 사망신고를 했어요. 그
래서 그냥 사망이 된 걸로 된 거지.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곽창신) 못 느꼈어요. 나는 그냥 학교 졸업하고 바로 시집을 갔고 이 동생은 사회생
활을 했죠. 그런 건 우리는 안 받았는데, 혜택을 못 받았지. 그때 뭐 공부 좀 많이 한 사
람들 취직한 사람들 연좌제에 걸려서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하더라고.
정부에 바라는 말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혜택이나 보상이 주어졌으면 좋겠고, 유골송환이 가능하다면
받고 싶음.>
문_ 정부나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을 말씀해주세요.
답_ (곽창신) 우리가 나이가 이제 많으니까 우리 생전에 조금은 보상이라도 받았으면 좋
겠어요. 너무나 우리가 많은 피해를 받았어요. 국민학교 3학년에서부터 시작해가지고
한 푼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 푼도 못 받았으니까.
(곽홍신) 뭐 충분히 이야기 했는데 뭐 그냥 우리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의료혜택이
라도 주거나 바램이 있다면 그것뿐이고, 아니 월남 갔다 온 사람 이런 사람들은 보훈 병
원 혜택을 받고 그러잖아요. 그냥 갔다 오기만 했는데. 그런데 우리는 전혀 아무 것도
없으니까.
(곽창신) 우리는 뭐 오래 살아야 십년이고, 보통 오륙년 보는 거죠. 우리가 눈 감기 전에
그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뭔 보상이라도 조금 받으면 그걸로 위로를 삼고 고맙게 생각
할 거죠.
(곽홍신) 가족회에서 이불 한 채 주고 이런 거 우리가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곽창신) 이게 우리 아버지가 준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작년부터 쌀이 10키
로씩 오더라고요. 그래서 그거랑 이불이랑 여름잠옷이랑 이런 걸 우리는 아주 기념비적
으로 생각해요. 그것뿐이었어요. 아버지에게서 받은 선물은.
(곽홍신) 그러니까 우리 사는 동안 조금은 보상이라도 좀. 세월호 같은 거, 그런 사람들
은 그렇게 보상을 해주는데, 우리는 여태까지 고생을 했는데 우리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곽창신) (유골이) 만약에 있다면 받아야죠. 유골송환도 받아서 재라도 우리가 보관하고
싶고,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인 것 같아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음.>
문_ 아버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세요.
답_ (곽홍신) 우리는 살아 계시다고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연세가 워낙 많으시니까. 그
래서 우리는 남북교류, 이산가족 전혀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을 안하고 있었어요.
살아 계실 것 같지가 않으니까.
(곽창신) 그래서 철원 폭격할 때 돌아가셨거나… 이북에 가서 살아 계셨다고 생각이 잘
안 돼.
(곽홍신) 그래서 우리는 남북교류, 이산가족 전혀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을 안하고
있었어요. 살아 계실 것 같지가 않으니까.
(곽창신) 만약 거기서 살아계셨다면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가서 동네사람을 만날 수도 있
었을 텐데, 만나지도 못하고. 또 포로교환 때 만약에 살아 계셨다면 우리는 이북에 아무
친척도 없어요. 거기가 뭐 좋다고 수용소에서 이북을 갔을 리가 만무하고, 만약에 살아
계셨다면 집에 오겠다는 희망으로 그 사람이랑 같이 왔을 텐데, 그게 아니니까. 어디서
중간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우리가 아들이었으면 제사를 지냈을지도 모르는데 딸들이였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
지 어머니 생전에는 오실 날 만을 기다렸지. 안 죽었으면 온다는 희망 속에서 살았고.
지금은 각자 종교가 있고 하니까 제사 같은 건 못 지내요. 그런데 이제 종문회에 가면 족
보에 사당 같은데 가면 이름이 있고 하니까 그걸로 위로를 삼고 있는 거예요. 6·25전쟁
납북자기념관에도 가니까 그렇게 위패도 모셔져 있고 그걸로 위로를 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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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납북자-박영근(증언자-박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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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797
175 납북자-이화실(증언자-이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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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965
174 납북자-조수준(증언자-조종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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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2026
173 납북자-김구민(증언자-김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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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889
172 납북자-심동구(증언자-심인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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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1895
171 납북자-유창열(증언자-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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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26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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