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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박진규(증언자-박호일)
이름: 관리자
2021-09-16 15:05:07  |  조회: 132
박 진 규 ( 朴鎭圭)

생년월일: 1908년 4월 9일
출생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금능리
당시 주소: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금능리(현재 비무장지대)
피랍일: 1950년 7월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농업, 장단군 총 청년단장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2남 2녀
외모/성격: 표현을 하지 않는 편이었음

증언자
성명: 박호일(1940년)
관계: 차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납북인 박진규는 장단군의 총 청년단장을 했음. 그래서 남한 정부였을 때 근무를 했다는 명목으로 잡아
간 것으로 추정됨.
• 증언자가 보는 앞에서 피랍인이 논에서 일하다가 대충 물로 씻고 끌려감.

직업 및 활동
<해방 전 해주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다 8.15 해방 후 남한으로 넘어 와 장단군에서 농사
를 지으며 장단군 총 청년단장을 했음.>
문_ 아버님 납북되시기 전 어떻게 지내셨나요?
답_ 경기도 장단군에 있다가 해주로 간 거죠. 해주에서 사시다가 8.15 해방이 나서 그
때 해주에 있을 때 내가 듣기로는 공무원 생활을 했대요. 그래서 공무원들은 북한정부에
서 다 잡아서 사형하고 그랬기 때문에 아버님이 남한으로 피난을 온 거예요. 그래서 넘
어오셨고 나하고 형하고 여자동생이 있다가 형도 혼자 넘어왔어요. 그러니까 내 여동생
둘하고 나만 있었죠. 어려서 기억도 잘 안나요. 그러다가 어머니가 동생이 살도 없고 조
사도 오고 핍박도 받으니까, 월남을 온 거야. 그 당시에 제가 일곱 살인가 여덟 살인가
그랬어요. 어렴풋이 해주 집은 생각이 나는데… 어머니가 여동생을 업고 끌고 나를 끌
고, 걸어오다가 그 땐 돈 주는 안내원이 있었나 봐요. 넘어 오다가 한 번 잡혔어요. 잡혀
서 그때만 해도, 지금 같으면 총살했겠죠. 근데 집에 가라고 하더라고요. 도로에 있다가
또 안내원 사가지고 엄마하고 둘이 밤중에 넘어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지금 생각하면
‘야, 그때 어머니 심정이 어땠을까?’ 싶어요. 그 조그만 다리를 건너는데 겨울에 서리가
와서 미끌미끌했대요. 그래서 거길 건너서 온 거예요. 장단군 진서면 금능리에 가서 할
아버지 선조들이 사니까 거기에 농가 조그만 집에 살았죠. 거기서 아버님도 만나고 형님
도 만나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6·25 터지기 전에 형님이 이제 농사를 안 짓겠다고 했어
요. 형님이 해주 고보를 다녔거든요. 해주 고보 같으면 해주에선 제일 좋은 고등학교에
요. 거기 다니다 나와 가지고, 서울 가서 공부하겠다면서 혼자 서울로 갔어요. 아버님은
거기서 농사짓고 있었어요. 6·25 나기 전에 아버지도 남한으로 더 왔어야 했는데, 그냥
거기서 농사를 지었어요. 그러니까 어머니, 저, 여동생 둘과 아버지하고 살았죠.
문_ 아버님의 당시 하시던 일과 그 외 활동이 있으셨나요?
답_ 아버지는 농사를 하셨어요. 또 아버지가 지금으로 치면 민방위 같은 건데, 아버님이
장단군의 총 청년단장을 했어요. 그럼 군단장이니까 꽤 높은 자리죠. 지금 같으면 아마
구 단위일 거예요. 예를 들어 송파구 단장 정도 될 거죠. 그렇게 단장을 했어요.

납북 경위
<6·25 발발 뒤 7월 경 모르는 사람 3~5명이 집을 찾아와서 논에서 농사를 짓던 피랍인
을 물로 간단히 씻게 한 후 데려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증언자가 먼 곳에서 목격하였음.
끌려간 후에 어머니로부터 내무서원이 잡아갔다는 말을 들었음.>
문_ 북한군이 들어올 때 마을 분위기를 말씀해주세요.
답_ 전쟁 터지고, 밤에는 북한군이 왔어요. 낮에는 비행기가 떠요. 그럼 도망가는 거죠.
얘기하면 참 그런데, 인력 있는 다른 사람은 방공호를 팠어요. 근데 우리는 요만한 애들
이 팔 수 없으니까 비행기만 뜨면 밭으로 뛰어나가서 고랑 사이 얕은데 가서 누워 있는
거예요. 요만한 고랑에 엎드려 있는 거죠. 지금 얘기하면 참 기가 막힌데. 비무장지대에
서 그러고 있었어요. 경계지대니까 낮에는 비행기가 뜨고 아군이 총을 쐈어요. 남쪽에
는 아군이 여기서 쏘고 이쪽에선 북한이 쏘는 거야. 그런데 저희 집이 여기 가운데였어
요. 어렸을 때에는 방문 앞에서 구경하고 그랬어요. 죽는 게 뭔지 모르니까. 지금이면
무서울 텐데 무서운 게 없었죠. 그 나이 땐 죽음이 뭔지 모르니까. 그런 상황이었어요.
6·25 나고 나서는. 그러다가 비무장지대가 되고 휴전이 되고 한 거죠. 거주지에 몇 가
구 안됐기 때문에 북한군 내려왔다 (아군) 들어왔다 계속 반복이었어요.
문_ 어떻게 납북되셨는지요?
답_ 우리 집 앞에 논이 있어서, 논 가운데 집이고, 바로 옆은 산이고, 앞에 밭 있고. 저
희 집 앞 논에서 있는데 ‘박진규’ 하고 부르더라고요.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얼굴도 기억
이 안 나요. 저 멀리서 부르니까. 아버님 친구가 불러 가나보다 했죠. 그냥 잠깐 오라고
하더라고요. 저한테는 집으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보고 있는데 불
러서 데려갔어요. 아버지가 논에서 일하시다가 대충 물로 씻고 끌려가셨어요. 그 장면
이 마지막이에요. 왔다가 옷을 갈아입고 간 것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갔죠. 대개 잡혀
가면 하루는 풀어주고 옷을 입혀서 다시 부른다 하던데, 그 이후론 뭐… 장면이 그게 다
예요. 7월경이었어요. 자발적으로 불러서 간 거죠. 뭐라고 하는 거 없이요. 저는 논에
서 일하니까, 아버지 불러 가지고 갔죠. 아버지를 데려간 사람은 생각해보면 한 서너,
너덧 명 된 거 같아요. 그거 기억은 나요. 인상착의는 전혀 기억이 안 나고요. 멀리서 쳐
다본 거니까요. 논두렁 저 멀리서 불렀으니까요. 그건 또렷이 생각이 나죠. 어머니말로
는 동네 사람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래요. 청년단장이라는 게 시골에선 다 뻔하니
까요. 다른 동네사람이라도 아니까요. 그래서 와서 불러간 거 같아요. 그 후는 뭐 더 끌
려가서 돌아가셨겠죠. 논이 외지니까 누가 같이 갔다는 것도 아니고.

납치 이유
<장단군의 총 청년단장을 했기 때문에 납북되었다고 추측함.>
78 2부 증언자료 79
문_ 납치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_ 아버지가 군단장이었잖아요, 그게 남한 정부였을 때 근무를 했다는 명목으로 잡아간 거 같아요. 그래서 잠깐만 조사하고 온다 했는데, 그 뒤로는 알 수 없죠. 그 땐 제가 어리니까 뭐 어디 면에 가는 것도 없고. 뜬소문에는 잡혀 가지고 고생고생 끌려 가면서 매도 맞고, 끌려서 개성까지 가는 거더라고요.

납치 후 소식
<후에 어머니가 납북되었다 도망 온 사람에게서 피랍인을 형무소에서 봤고 개성까지 갔다는 얘기를 들음.>
문_ 납북 후 아버님의 소식은 들으셨나요?
답_ 개성으로 끌려가다가 누가 도망 온 사람들도 있나 봐요. 어머니가 그 사람한테 아버지 소식을 들으셨대요. 아버지가 개성까지 끌려갔다고 그런다. 근데 어떻게 돌아오실지, 도망쳐야 하는데 어떻게 돌아오실지 모르겠다고 했대요. 근데 그 땐 너무 어리니까 상황에 심각하게 슬프고 그런 건 없죠. 그러다가 어머니는 30년 전에 78년도에 돌아가셨어요.

남은 가족의 생활
<전투가 치열했던 지역인 장단에서 53년까지 농사하며 지내다 휴전으로 지역이 비무장지대가 되면서 서울로 이주됨. 6·25 전 서울로 갔던 형이 경찰공무원이 되어 서울에서 재회. 형과 어머니가 찾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으나 알 길이 없었음.>
문_ 피난은 가셨나요?
답_ 6·25가 터지자마자 피난을 갔어야 했어요. 그런데 크게 잘못한 것이 없으니까 안 갔죠.
문_ 남은 가족들은 어떻게 사셨나요?
답_ 장단에서는 53년까지 살았어요. 6·25 전쟁 때는 뭐 어머니가 혼자 나를 데리고 농사짓고 사셨어요. 그러면 먹고는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살다가 휴전이 돼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휴전이 안됐으면 이사 안 갔을 거예요. 거기가 비무장지대가 되니까, 사람이 못 살잖아요. 거긴 3.8선 이남이고. 어쨌든 남한으로 다 이주시킨 거죠. 어렴풋이 기억하면 헌병대가 사람을 실어 날랐어요. 서울에다가.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시청 앞이야. 한 사람당 쌀 한 말씩 받고.
그리고 형님은 고대인가 법대를 들어갔대요. 근데 돈이 없잖아요. 그래서 경찰학교를 갔어요. 경찰학교를 나와서 순경을 했어요. 경찰 공무원을 하다가 6·25 휴전이 되니까 영어도 잘해서 NP라는 곳에 있었죠. National Police라고 해서. 그 땐 지프차 하나에 순경, 해군 헌병, 육군 헌병, 미군 헌병 넷이 타요. 그때 그걸 백차라 했어요. 그러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어요. 형은 거기에 타고 다녔어요. 그래서 형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형이 피난 왔을 거 같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럼 아무래도 고모네 집 성북동이니까 거기 있지 않겠냐?’ 하고 나랑 어머니는 성북동에 있는 고모네 집으로 가다가, 길거리에서 형을 만났어요. 그렇게 만나서 그 이후부터는 가족들이 같이 살았어요. 그때 형은 스물두 살인가 스물세 살이었어요. 어리니까 경제적으로 뭘 어떻게 하고 그런 게 없죠. 뭐 할 수도 없고요. 그때는 두 끼 밥을 못 먹었어요. 저는 두 끼도, 비지를 가지고 풀어요. 거기에 소금을 쳐서 비지국 하나 마시는 게 식사였어요. 그러고 살았어요. 제가 60년대에 안 해 본 게 없어요. 신문 배달부터 구두닦이까지… 나중에 형이 삼선교에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나 세를 얻어주어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하셨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부터 했죠. 아침 신문 배달도 했고, 공부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안 나. 그래도 따라간 게 용하다, 내가 머리가 명석한 것도 아닌데. 새벽에 신문을 돌려야 했어요. 그리고 저녁에도 또 돌렸어요. 왜? 돈을 벌어야하니까. 신문 배달을 석간, 조간 돌리고, 공부시간 외에는 항상 가게에 있는 거야. 학교 가 있을 동안은 어머니가 가게를 보셨어요. 여동생들이 너무 어리니까. 뭐 돕긴 도왔죠.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엄청나게 했죠.
문_ 아버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해보셨나요?
답_ 나보다도 어머니가 많이 알아보셨어요. 곧 휴전이 됐잖아요. 53년도에 휴전이 됐죠. 50년 전쟁 나고 휴전됐으니까. 형이라도 찾아보고자 했는데 찾아볼 길이 없잖아요. 휴전되고 나서 뜬소문으로 동네에서 어머니가 도망 나온 사람을 봤다는 얘기가 있었어. 개성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도망 나온 사람인데 무슨 형무소인가 거기에서 봤다더라고요. 그런 얘기만 들은 기억이 나요. 그 후는 뭐 돌아가셨겠지. 형은 찾는 노력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근데 길이 없어요. 길이 있어서 하면 할 수 있다 하면 했죠. 더군다나 경찰 공무원이니까요.
문_ 이산가족 찾기는 하셨나요?
답_ 이산가족 찾기랑 적십자 같은 기관에도 등록을 안 했어요. 먼 친척이라도 누가 있었으면 혹시 또 북한 가서 상봉해서 했겠지만, 그런 게 없으니까요. 그런 것도 안 했죠.
문_ 형님은 아버지 납북되신 것을 후에 알고 뭐라고 하셨나요?
답_ ‘그때 왜 아버지가 6·25 터지고 도망오지 왜 계셨냐? 그게 안타깝다. 청년단장을 했는데 걔들이 가만히 두겠냐?’ 그런 얘기를 가끔 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납북자 신고는 하셨나요?
답_ 신문에 납북 유가족 관련 기사를 읽고 제가 송파구청을 찾아갔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서류를 내라고 해서 냈죠. 공적서 같은 서류요. 담당자하고 얘기를 하고 하니까 맞다고 하더라고요.
문_ 정부에서 피해조사나 도움은 있었나요?
답_ 그런 것은 없었어요.

호적 정리
<1987년 11월 6일 날 법원에 부재자 신고 확인서를 받고 87년 11월 16일 제적.>
문_ 호적 정리는 하셨나요?
답_ 아버님은 이제 백 살이 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법원에 부재자 신고를 해 가지고, 1987년 11월 6일 날 법원에 부재자 신고 확인서를 받았어요. 호적에 제적은 그 후에, 그걸 근거로 해서 87년 11월 16일날 재적이 되었죠. 그러니까 사망한 거로 된 거예요. 법원의 판결을 받았죠.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있었나요?
답_ 그런 적 없었어요. 납북가족에 대해서 그런 건 처음 알았어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들이 고령이라 운명을 달리한 사람들도 납북사실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필요함.>
문_ 정부나 대한민국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답_ 글쎄요. 납북자 가족에 대한 것이 그나마 활성화되는 거 같고, 나름대로 잘 되어가는 것 같아요.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죠. 고령이라 운명을 달리한 사람이라도 납북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나라 역사에 기록으로 남겨줬으면 해요. 1950년에 6·25사변이 있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북한에 (잡혀) 갔다. 북한 정부에서 이런 짓을 했다. 이런 사실들을요. 설령 나중에 우호적인 한민족 되어서 살게 될지라도 그 옛날 역사에 50년 전 100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에 남기는 것은 국가적으로 큰 의의가 있다고 봐요. 역사적으로 모든 걸 기록에 남겨서 후대에 그 나라의 이력이 될 수 있고, 후대에 큰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살아온 얘기를 말씀드리고 싶음.>
문_ 아버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세요.
답_ 만일 생존해 계시다고 하면 그저 어머니하고 형제, 우리 가족이 이러 이렇게 살아서 이렇게 왔다. 당신 자식들이 그래도 거러지 생활 안하고 그래도 공부도 하고, 반듯하게 이렇게 살아 왔다 하는 얘기를 자랑스럽게 하고 싶죠. 살아 계시다 하면요. 살아온 얘기를 말씀해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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