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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점석 (증언자-박옥련,김지혜)
이름: 관리자
2013-09-16 10:15:49  |  조회: 2328


050503C 김점석 / 2005. 5. 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점석), 사진2(증언자:박옥련 김지혜)

피랍자
성명: 김점석
생년월일: 1920년 음력 8월 7일 (황해도 출생)
당시 주소: 서울 용산구 남영동 43번지
피랍일: 1950년 7월 8일
피랍장소: 서울 용산구 남영동 43번지(자택)
직업: 변호사(前 부장 검사)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녀
외모 및 성격 : 키가 작음

증언자
성명: 1.박옥련(1921년생) 2.김지혜(1942년생)
관계: 1.배우자. 2.장녀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1950년 7월 8일 오후 2시 용산구 남영동 자택에서 용산 정치보위부(現 용산 경찰서)에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데려간 후 소식 없음. 이 후 1.4후퇴 직전 평안북도 만포진에서 피랍자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었음. 부장 검사를 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직위가 높았고, 경제적으로 유지 격이라 공산당의 표적이 된 것으로 추정, 피랍자의 형님도 지방 유지라는 이유로 학살당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자 생사확인









“검사 변호사라는 높은 직위를 했고, 부자였고, 또 국회의원 출마 했다는 것도 죄목이 됐대요.”
“우리 큰 아버지도 자은도에서 면장을 하시고 괜찮게 사셨는데 전쟁 때 학살당하셔서 시체도 못 찾았어요. 다 죽었어요. 왜냐면 당시 자은도에서 김씨와 성씨가 잘 살았는데 공산당들이 들어와 머슴들을 이용해서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려 죽이고 다 학살했대요. 우리 사촌 오빠는 헤엄을 쳐서 겨우 물에서 빠져 나와서 얘기를 하더라구요. 잘 산다 하면 무조건 다 죽이는 거에요. 또 산 사람을 땅에 그대로 묻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 친구 중 한 분도 당했다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몰라요. 당시 전라남북도가 심했어요.”
“정부가 납치인 에게 성의를 베푼 일은 안 한 것 같아. 현 정부의 높은 사람들이 납치된 사람들이 돌아오면 자기 자리 뺏길까 봐 납치된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말까지 했었어. 그만큼 성의를 안 보였다는 말이지.”

납북 경위

<1950년 7월 8일 오후 2시 용산구 남영동 자택에서 용산 정치보위부(現 용산 경찰서)에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데려간 후 소식 없음. 전쟁 직후 피난을 시도했으나 아픈 아내와 자녀를 두고 갈 수 없어 다시 집으로 들어와 지내 던 때였는데 인근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단국대 법대에 다니던 학생이 찾아와 본인이 피랍자를 살린다며 몇 마디 나누고, 곧이어 용산 경찰서 인민군이 뒤따라 들어와서 연행해 감>

Q : 당시 납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주시겠어요?
A(박옥련) : 6.25 당일 남편과 명동에 있는 수도 극장엘 갔었어요. 그런데 그 날 갑자기 영화가 중단 되면서 전부 대피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집으로 갔더니 의정부 쪽에서 인민군이 내려온다고 하더라구요. 사람들은 겁이 나서 도피할 준비를 하는데 도피하지 말라는 이승만 박사의 방송이 나왔어요. 다 우리나라에서 방비책을 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로고 (남편이) 26일 날 법무부엘 가 본다고 나갔어요. 갔더니 당시 이 호 법무 장관과 지방검찰청장 장재갑씨가 지프차를 가지고 와서 같이 피난 가자고 해서 차를 타고 가는 중 (남편은) 남영동에서 우리(가족들)가 사는 곳이니 잠깐 들여다 본다고 내렸어요. 그 때 마침 제가 위궤양을 앓아서 자리에 누워있었어요. 식모도 가버리고 집 일을 봐주시던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이 사람이 도저히 못 간 거에요. 그래서 나중에 이호씨와 장재갑씨가 날 찾아와서 그 날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니까 할 수 없이 남하했다며 자기네가 맘이 아주 괴롭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그러고 우리는 그래도 가만히 집에 있을 수 없겠다 싶어서 노량진 아는 집으로 갔어요. 그런데 갔더니 쌀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결국 한강 다리는 끊겼고, 도로 뗏목을 타고 집으로 들어온 거에요.
그러다 이튿날 마침 저의 이모 아들이 사회 주의 운동을 하던 애였는데, 그 아이가 와서 도피를 하려면 자기가 좋은 데로 해주겠다고 해서 남편과 같이 나갔거든요. 가서 보니까 그 집에 사회주의 프락치들이 많아서 남편은 못 있겠더래요. 그래서 다시 집에 왔다가 가방이랑 옷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가려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것을 주위의 프락치들이 다 보고 있었던 거에요. 그 사람이 집으로 들어오는가. 안 오는 가를.
그러다 완장을 찬 단국대 학생이 왔어요. 그러더니 그 동네 여관집 아들인데 우리 집에 와서 평소에 법률책을 참 많이 빌려갔던 애에요.그 아이가 와서 '선생님 고생하지 말라고, 제가 선생님 살린다'고 했는데, 조금 있으니까 경찰서에서 완장 찬 사람이 오더니(인민군인가 봐요) '선생님 잠깐만 몇 마디만 답변해 주시면 됩니다.'해요. 그리고 그 이를 데리고 간 데가 용산서에요. 마침 먼 친척 되는 애가 따라 갔는데 그 아이는 가라고 하더래요. 며칠 조사받고 나가신다고. 우리가 이튿날 갔더니 2~3일 더 있어야 된다고 가라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 담날 또 갔더니 거기 없다는거에요. 어디 갔냐 했더니 당시 국립 도서관 자리였던 정치 보위부로 갔다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를 몇 번을 갔는데도 만날 수 없었어요..
Q : 납치하러 온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나요?
A(박옥련) : 붉은 완장 찬 사람들. 용산 경찰서 사람인데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라면서" 얘기하고 데려갔어요. 차로 데려 갈 때도 아주 공손하게 하고 포박도 안하고 그냥 같이 같이 갔어요.

납치이유

<부장 검사를 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직위가 높았고, 경제적으로 유지 격이라 공산당의 표적이 된 것으로 추정, 피랍자의 형님도 지방 유지라는 이유로 학살당함>
A(김지혜) : 검사 변호사라는 높은 직위를 했고, 부자였고, 또 국회의원 출마 했다는 것도 죄목이 됐대요. 5.3선거 전남 무안에서 출마하기도 했었어요.
또 우리가 6.25때문에 피해 본 것은 우리 큰 아버지가 자은도에서 면장도 하시고 괜찮게 사셨거든요. 학살당하셔서 시체도 못 찾았어요. 다 죽었어요. 왜냐면 당시 자은도에서 김씨와 성씨가 잘 살았는데 공산당들이 들어와 머슴들을 이용해서 돌을 매달아 물에 빠뜨려 죽이고 다 학살했대요. 우리 사촌 오빠는 헤엄을 쳐서 겨우 물에서 빠져 나와서 얘기를 하더라구요. 잘 산다 하면 무조건 다 죽이는 거에요. 또 산 사람을 땅에 그대로 묻기도 하고 전국적으로 그랬어요. 우리 아버지 친구 중 한 분도 당했다는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걸 몰라요. 당시 전라남북도가 심했어요.
납치 후 소식

<정치 보위부에서 취조를 받을 때 피랍자가 본인은 애국자라며 거센 항의를 한 적이 있다고 전해 들음. 나중에 형무소에서 납치 당시 입었던 윗옷이 발견됨. 그 이후 피랍자의 지인이 북한으로 갔던 명태장수가 만포 자강도 어느 식당에서 몇 몇 사람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김점석 검사를 봤다고 한 것을 전해 준 뒤로는 소식 없음>

Q : 납치된 이후에 아버님 소식을 들으셨던 게 있으셨나요?
A(박옥련) : 6.25가 끝나고 후일에 장 후영 변호사가 한 방에 같이 있었다며 우리한테 연락을 했어요. 자기는 변호사만 했어서 나올 수 있었는데 (남편은) "내가 잘못한 게 뭐 있냐? 나는 애국자다"라면서 그 사람들하고 싸웠더래요. 그래서 더 조사해야 한다며 안 보내줬다는 그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우리가 아는 상황은 그게 전부죠.

Q : 북송 과정에는?
A(박옥련) : 정치보위부에서 북으로 가는 중의 소식은 없었고, 윤 변호사(피랍자의 지인)가 형무소 간수가 윗옷을 하나 주웠는데 그 안에 김점석 이름 석 자가 수 놓아져 있었다는 얘길 전해줬어요. 남편이 그 날 위에 그거를 걸치고 갔었어요 그래서 법조계에서는 (남편이 거기 있었다는 걸)알아요.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 있었나봐요.

Q :그게 마지막 소식이었나요?
A(박옥련) :그 후 소식은 별로 없고, 피난 가 있을 때 윤무선 변호사가 한 번 만나자고 해요.그래서 만났더니 누구한테 애긴 하지 말라면서, 자기 아는 사람이 1.4 후퇴 직전에 이북에 명태 장사를 갔었대요. 그게 사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땐 이북하고도 왕래를 했지 않습니까? 여튼 그 분이 만포 자강도 어디 식당에서 (남편을) 본 일이 있다고 하더래요. 몇 사람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 분이 보니 검사가 맞아 남편에게 "왜 여기 계시냐?"고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아무 말 하지 말라 하더래요. 그러더니 나중에 나올 때 (남편이 그 사람한테) "내가 끌려온 사람이다. 그러니 말하지 말라. 큰일난다" 그래서 말을 못하고 왔다고 그러더래요. 그 얘길 한 번 듣고는 몰라요.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용산 경찰서에서 완장을 찬 사람이 나와 가택 수사 및 현금과 귀중품을 모두 압수함. 이후 자택은 인민 여성 동맹의 근거지로 사용되었고, 피랍자의 가족은 친척집으로 피신함. 1.4 후퇴 때 부산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연수원을 차려 운영하다가 서울로 온 뒤 피랍자의 아내가 직장 생활과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꾸려감>

Q : 재산을 약탈당한 것은 없었는지?
A(박옥련) : (남편이)용산 경찰서에 들어간 다음 날 용산서에서 완장 찬 사람이 서너 명 와서 가택 수사를 했어요. 와서 현찰이며 돈이며 찾아서 싹 다 가져갔어요. 보관 한다면서. 살림은 거의 한 쪽으로 운반을 해서 손 못 대게 못질을 해요. 그러니 우리가 무서워서 거기 있을 수가 없어서 안암동 친척집으로 애들을 데리고 도망을 쳤어요. 나중에 고추장, 된장을 가지러 그 집에 다시 가 보니까 거기다 인민 여성 동맹 간판을 붙이고, 여자들이 많이 있더라구요. 내가 집주인이라니까 나더러 반동 분자라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집 된장 고추장을 못 준대요. 그런데 나도 그 당시 겁이 없어 그랬는지 파출소로 갔어요. 가서 빨간 완장 단 인민군에게 "내가 내 집이라서 내 고추장, 된장 가져가려 하는데 왜 안 주느냐? 공산당 이데올로기가 이거냐? 나도 젊었을 때 사회주의, 공산주의 책도 많이 본 사람이다. 그런데 이남에 이러려고 왔냐"고 소리지르니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우리집을 가서 여성 위원장을 막 야단을 쳤어요. 그러니 다 가져 가라고 해서 내가 양품에 된장 고추장을 퍼서 그걸 이고 안암동까지 왔던 기억이 나요. (이 후 집에 찾아가니) 물건을 가져간 건 못 봤는데 다 없어졌더라고. 근데 파출소에 가보니 우리 집 응접 셋트가 다 가있더라고. 책상이고 테이블이고. 가정용품은 여성위원들이 다 가져갔는지 아무것도 없구요.

Q : 피난은?
A(박옥련) : 저는 쭈욱 있다가 1,4 후퇴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어요. 가서 아는 대법원 판사를 알아서 그 이랑 지금의 연수원 같은 데를 같이 (운영)했어요. 제가 남양동서 살다가 6.25를 만났고, 다른 사람은 다 피난을 갔는데 난 그 때 몸이 아파서 못 나간 거죠. 그러다 안국동에 잠시 머물다가 나중에 부산으로 간 거죠. 세째 딸이 조폐공사 폭격할 때 도망치고 나오다가 파편에 다쳐서 피투성이가 돼서 안국동의 외과 병원에 갔더니 전부 인민군이 와서 의사들 데려가고 없는데 촌으로 가면 의사가 있을 거라 해서 안암동으로 가서도 있었어요. 거기서 석 달 동안 있었어요. 그 당시 잘 살아서 금패물이 있었는데 이걸 다행이 안 뺏기고 들고 나와서 그걸 하나씩 팔아가며 페니실린 구해서 그래서 셋째 딸이 나은 거에요

Q :이후 생계는?
A(박옥련) : 제가 직장생활을 했어요. 처음에 군청에 취직을 했어요. 그래서 도청을 왔다갔다하면서 직장생활하고, 그 다음엔 장사도 많이 했죠. 여러 가지 은행 융자 받아 장사도 하고 그렇게 살아서 애들이 고생 많이 했습니다.

호적 정리

<미정리>

정부의 노력

<전혀 없음>

Q : 신고는?
A(박옥련) :. 적십자에 신고 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많아 그런지 첨에 아주 까다롭게 굴더라구요. 그래서 이태희 검찰 총장하고 장재갑 지방경찰 총장 두 분이 가셔서 '이거는 너희가 잘 못하고 있다 이 부인 신고해 주라'고 해서 한 거에요. 이북에 간 사람은 무조건 안 해 준다는 식이더라구요. 정부가 납치인 에게 성의를 베푼 일은 안 한 것 같아. 왜냐면 나랑 같이 납치된 가정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불평이 많아. 심지어는 현 정부의 높은 사람들이 납치된 사람들이 돌아오면 자기 자리 뺏길까봐 납치된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말까지 했었어. 그만큼 성의를 안 보였다는 말이지. 정부에다 탄원을 하고 진정을 해봤자 아무 소용 없으니까 안하는 거야.

Q : 정부에서 피랍자를 찾으려는 노력은?
A(박옥련) : 납치인에 대해 국가가 너무 성의가 없다 이거에요. 이북에서도 그렇고, 이남에서는 바쁘고 사람이 많고 해결할 길이 없으니 못한다고 말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려면 왜 못하겠습니까? 납치인에 대해서는 만날 수도 없게 하지 않습니까? 뒤늦게라도 이북에 가서 돌아가셨다 하더라고 거기 가 있었다는 것을 발표해 주면 좋을 텐데 그런 명단 발표도 못하지 않았습니까? 안 하죠. 안 한다고 보는 거죠.
정부에게 바라는 점

<피랍자 생사 확인>

Q : 정부에 바라는 점 있으시면?
A(김지혜) : 북한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지금 벌벌 떨고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만일 돌아가셨다면 저희 아버님이 북한에 잡혀가서 어떻게 사셨는지 확인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살아 계시면 상봉하고 싶은 그게 다에요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아요. 지금쯤 우리 정부의 힘이면 강하게 얘기해도 될 꺼 같은데 왜 그걸 못하는 지 원망스럽죠.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박옥련) : 오래 살았으면 좋겠어. 오래 살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죠. 그런데 이북에 다녀온 의사들 얘기 들어 보니 이북에 약이 없대요. 그래서 오래 살기 힘들다는 얘길 들었는데 명은 알 수 없잖아요. 건강히 오래 살아서 꼭 와서 만났으면 좋겠어요.(울음)
A(김지혜) : (눈물) 바램이라면 이북에 붙잡혀 가셨어도 거기서 가족을 이루고 잘 사시다가 솔직히 공산당에 협력을 하셨더라도 다 괜찮아요. 아무쪼록 잘 사시다가 자기 수명대로 가셨으면 하는 게 제 최대 바램이고 소망이에요.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요. 우리 어머니도 거기서 잘 사시다 가시기를 바라실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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