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류인하 (증언자-류택열)
이름: 관리자
2013-09-16 10:21:22  |  조회: 2054


050513A 류인하 / 2005. 5. 1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류인하), 사진2(증언자:류택열)

피랍자
성명: 류인하(栁寅河)
생년월일: 1910년 7월 27일 (충남 금산군 진산 출신))
당시 주소: 서울 성동구 행당동
피랍일: 1950년 8월 1일
피랍장소: 서울 성동구 행당동(자택)
직업: 서울시 소방공무원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4남매
외모 및 성격 : 키170cm, 급하고 괄괄한 성격

증언자
성명: 류택열(1933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피랍자는 서울시 소방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9월 25일 새벽 3시경 무장 인민군에 의해 연행됨. 가장이 피랍된 후 배우자마저 함께 피난하던 자녀와 폭격을 맞아 사망, 아들 둘과 딸 하나만 생존해 금산에 사는 친척들에게 의존해서 생활함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생사 확인, 납북자 문제 특별법 제정 및 가족회 법제화











새벽 3시쯤 해서 인민군이 완전 무장을 해서 따발총과 총기를 가지고 방으로 들이 닥쳐서 아버님과 가족을 깨워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수색한 이후에 아버님이 입고 계셨던 소방 공무원 관복과 장농 속에 있던 태극기와 라디오와 아버님이 애용하시던 물건을 모두 보따리에 싸게 했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는 파자마 바람으로 무장 인민군에 의해서 성동 내무서에 연행이 되셨습니다

“아버님이 납북되시고 나서 가족들의 생활상이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장이 납치를 당해 가셨으니 어린 저희들이야 그야말로 고아 중에 고아죠. 어머니도 폭격으로 돌아가시고 다행히 저희 아버님이 9남매인 고로 금산 친척집에 의존해 살아왔고, 그 사는 과정에 아픔이라는 것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납북 경위

<전쟁 직전 평택에서 서울로 올라와 집에서 숨어 지내다가 9월 25일경 아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그에게 집을 물어 찾아내 연행>

Q: 전쟁 직후 바로 피난을 가지 않았는지?
A: 그 시기에 우리 나라 정부가 절대로 피난 가지 말라고 라디오를 통해 발표했습니다. 공무원들도 피난 가지 말라고 정부 쪽에서 라디오를 통해 새벽까지도 방송이 나온 것을 기억합니다. 일부 피난한 공무원도 있지만, 피난을 하려다가 자식과 가족 때문에 못 가고 되돌아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한강 앞까지 가셨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Q: 납북 경위?
A: 지금 제가 (흐느낌) 그 시기를 연상하니 눈물이 나서 말문이 막힙니다. 1950년 6.25 사변이 나던 해 8월 1일 성동구 행당동 무학여고 바로 옆 운전 면허 시험장 옆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날 새벽 3시쯤 해서 인민군이 완전 무장을 해서 따발총과 총기를 가지고 방으로 들이 닥쳐서 아버님과 가족을 깨워 방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수색한 이후에 아버님이 입고 계셨던 소방 공무원 관복과 장농 속에 있던 태극기와 라디오와 아버님이 애용하시던 물건을 모두 보따리에 싸게 했어요. 그리고는 아버지는 파자마 바람으로 무장 인민군에 의해서 성동 내무서에 연행이 되셨습니다.

납치이유

< 고교 졸업 후 소방공무원 취직, 해방 이후까지 소방 간부로 근무하던 중 납북, 특별한 청년 활동을 한 건 없고, 집안이 반공을 하던 집안 이라 소문이 나 있었음 >

납치 후 소식

<성동 내무서-정치 보위부-서대문 형무소로 연행됐다는 소문을 듣고 수 차례 가족이 면회를 시도했으나 거절당하고, 납북 이후 소식은 전혀 들을 수 없었음>

Q: 연행된 장소는 아셨나요??
A: 소문으로 들어서. 당시 아버님이 근무하시던 곳 왕십리 성동 소방서 앞에 성동 경찰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그 사람들이 접수하고 성동 내무서라는 간판을 걸어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이 납치 당한 이후 찾아가서 여러 차례 면회를 시도했지만 번번히 어린 저에게 거절을 하고 반동의 자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저를 박대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면회를 시도를 했으나 생사 확인이 되지 않고 오늘날에 이르렀고,
그 당시 대한 민국 정부의 도서관이 되던 건물이 있었는데 그 곳이 인민군의 정치 보위부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이 성동 내무서를 거쳐 정치 보위부로 연행되셨다고 해서 정치 보위부에 가서 면회를 신청했지만 반동 가족이란 이유로 면회가 사절이 되었고,
9.28수복이 된 다음에는 서대문 교도소에 가서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진 곳에 찾아가 아버님이 형체를 뒤져봤으나 찾을 수 없었고 혹시 그 이후 생사를 확인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지만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납치 후 남은 가족들의 생활

<가장이 납북된 후 배우자마저 함께 피난하던 자녀와 폭격을 맞아 사망, 아들 둘과 딸 하나만 생존, 금산에 사는 친척들에게 의존해 생활함>

A: 납북되신 후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저는 보행으로 8월 31일 서울을 출발해 홀로 아버님의 고향인 충남 금산 면까지 일주일에 걸려 굶주리며 큰집에 찾아가 겨우 살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 어머니는 경기도 광주로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을 가다가 폭격을 맞아 돌아가시고 당시 동생도 죽고 지금 막내 류성렬만 지금 살고 있고 둘째 여동생은 마침 큰집에서 귀거 하고 있어서 지금 생존해 있습니다.

아버님이 납북되시고 나서 가족들의 생활상이란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시기에 어린 저희들을 남겨놓고 가장이 납치를 당해 가셨으니 어린 저희들이야 그야말로 고아 중에 고아죠. 마침 저희 아버님이 9남매인 고로 금산 쪽에 가서 친척집에 의존해 살아왔고, 그 사는 과정에 아픔이라는 것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호적 정리

<미정리 >

A : 글쎄요. 아버님의 사망신고를 아직까지도 안 하고 있습니다. 아버님이 납치 당할 때
상황을 그리면 비참하게 잡혀가셨기 때문에 사망신고를 일부러 안하고 있습니다.
생각컨데 지금쯤은 돌아가신 것으로 생각은 되나 확인되지 않은 고로 아직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연좌제 피해는?

<없었음>

A: 저희 가족은 연좌제 피해는 받은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가족 둥 아버지 형제 분 들이 수복 이후 정부 기관에 근무한 분이 있었고, 가족 중에 정부에 공을 한 형제들이 있었던 고로 연좌제에 걸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감시도 절대 없었습니다.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어디에 도움을 청한 일은 없고요. 아버님이 납치 당한 것을 신고해야 하는 것을 저희는 어려서 몰랐습니다. 마침 당시 돈암동에 살던 둘째 고모님이 그저 대한 적십자사에 신고하셔서 납치 가족으로 등록이 됐습니다. 그리고 현재 가족 모임이 있어 여기에 와서 겨우 상황을 발견을 했습니다.
Q: 정부의 도움은?
A: 도움을 청해봤자 응할 리도 없고, 또 납치 당한 사람이 한 두 사람입니까? 그 시기에 7,8만 명이란 얘기를 후에 들었습니다. 납치된 가족들이 부당하게 정부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납치 당해 가신 가족은 그야말로 애국의 가족들입니다. 그 납치 인사들이 한국에서 무엇인가 자기가 많은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모하게 김일성 공산당이 침입을 해서 그 인재를 납치해 갔습니다. 그런 것을 저희 가족들이 어디 가서 호소할 길도 없었고, 지금에 생각하니 그 시기가 연상돼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정부에게 바라는 점

<생사 확인, 납북자 문제 특별법 제정 및 가족회 법제화>

A : 지금 정부가 60여 년이 지난 이 시기 까지 그 억울하게 납치당하신 분들의 생사확인을 못하고 있을 정도로 무력한 것이 현실입니다. 하루빨리 이 정부가 북한과의 통상이라든가 대북 사업 등을 빌미로 삼아 북에 할말을 못한다거나 이런 비열한 생각을 하루빨리 버리고 정정당당하게 역사를 바로 잡는 의미에서 확인해주는 역할을 했으면 고맙겠구요. 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과거사 진상 규명 등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 같은데 바로 이것이 과거사 입니다. 이 과거만큼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다. 이 중요한 대목을 내팽겨 치는 것 자체가 시대적으로 국민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는 하루 빨리 6.25 납북인사들을 그 영령을 위로하고 달래기 위해 저희들 6.25가족 모임을 법제화 하기 위한 제출한 법안이 있는데 이것을 먼저 가려놓고 그 다음에 다른 과거사 진상 규명을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순서를 가리면서 이 정부가 현명하게 60여 년이 지난 이 시간도 그 시대만 생각하면 목이 매여 피눈물이 나는 감정이 사려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을 역지사지 바꿔놓고 생각해서 이 목 메이는 심정을 이해하고 현명한 국회의원들이 바로 생각하셔서 법령을 법제화 시켜 6.25 납치자 가족 모임에 보답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 아버님 제가 어렸을 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불효임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버님.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0 납북자-윤태경 (증언자-윤명식,윤창식)
관리자
13-09-16 2169
9 납북자-권경정 (증언자-김옥분,권기영)
관리자
13-09-16 2715
8 납북자-김창희 (증언자-김동일)
관리자
13-09-16 2322
7 납북자-류인하 (증언자-류택열)
관리자
13-09-16 2053
6 납북자-김정기 (증언자-김남주)
관리자
13-09-16 2268
5 납북자-김경희 (증언자-이정림,김교현)
관리자
13-09-16 2075
4 납북자-김병기 (증언자-김용준)
관리자
13-09-16 3104
3 납북자-김말란 (증언자-배용종)
관리자
13-09-16 2291
2 납북자-김점석 (증언자-박옥련,김지혜)
관리자
13-09-16 2344
1 납북자-이성환 (증언자-김복남,이미일)
관리자
13-09-12 2221
1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