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관리자
2013-09-16 10:19:00 | 조회: 3679
050503A 김병기 / 2005. 5. 3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병기), 사진2(증언자:김용준)
피랍자
성명: 김병기 (金秉基)
생년월일: 1984년 음력 5월 1일생(서울 종로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피랍일: 1950년 9월 15일
피랍장소: 종로 4가 제일극장(現 평화극장)앞 인도
직업: 상업(도윤 상회, 불로 상회 운영), 前 장면 박사 선거 사무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 3녀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건강함.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용준(1932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직후 압구정(한강 이남)으로 피난을 했다가 인근 좌익의 의심과 움직임에 9월경 다시 서울 자택 쪽으로 들어옴. 마침 미아리에서 상업을 하며 민보단 단장이었던 사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에 소식이라도 얻으러 나갔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발각, 과거 장면박사 선거사무장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됨. 이후 함께 수감, 납북되던 중 탈출했던 사람들로부터 서대문 형무소, 미아리를 경위해 38선 근처, 만포진 탄광이 있던 지역까지 끌려 갔던 것을 전해 들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사망 시 사망일자 확인 및 유골 송환
“그때 인천 상륙한 이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을 열어놓고 나가라고 했대요. 그 당시에 도망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님하구 38선 근처까지 같이 묶여갔었대요. 그 사람은 38선 근처에서 감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풀숲 속으로 굴러서 도망을 나온 거였어요. 그 이후에 또 아버지하고 같이 묶였다가 도망 온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말이 평양까지 가서는 약간 휴식을 하고 만포진까지 갔대요. 거기에 탄광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소식이 전부에요. 내 희망은 아버지가 계시는 북한 만포진까지 가서 그 탄광에서 뭘 했는지, 혹시 살아계시는지, 만일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아보는 거에요.”
“둘째 누이가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울에 있는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군이 들어오고 누이는 그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잡혀갔어요. 그 후 누이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게 한이 되요”
전쟁 당시 납북자의 직업 및 활동
<종로에서 도윤 상회, 불로 상회 등을 운영하면서 정치활동도 겸함.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장면 박사의 선거 사무장을 했고, 한국 민주당을 창설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음 >
Q :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A : 그 당시 아버지는 종로 5가에서 도윤 상회. 또 불로당, 불로 양주장. 불로상회를 친구분하고 같이 하셨어요. 그리고 불로 버스도 운영했어요. 그 당시에는 상회라면 주식 회사였어. 아버지가 한약재를 강원도에서 들여와서 중국으로, 대만으로 보내는 무역을 했어. 물물교환 이라는 걸 했는데. 그 당시 강원도 쪽에 마차로 끌고 가서 강원도까지 끌고 가는 건 고급 무역회사야. 왜놈이 쓰던 차로 트럭도 있어서 그 차로 강원도에 일주일에 와서 한 번 (짐을)풀고 했어요. 그러면서 또 저희 아버지는 사람을 두고 맡기고 (당신은) 나가 다니면서 정치적인 일을 많이 했어. 한국민주당 창설도 하고 했고….. 6.25전쟁 전 해방 되기 직전에는 국회의원 부위원격인 경성부의원을 했어요. 그러면서 다리도 놓고 굶는 사람들에게 쌀도 주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일본말도 곧잘 하셨는데 그래도 친일은 아니셨어요. 언제나 한복만 입고 그러셨어요. 우리나라 역사학자 한 분을 도와 주시기도 했구요. 또 장면 총리. 천주교신자인 그 사람을 뒤에서 밀어주셨어요. 그 당시 그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셨어요. 발이 넓으신 분이셨거든요.
Q : 장면 박사님의 제헌국회의원 재임 때 사무장을 하셨던 건가요?
A : 네. 그 당시엔 김병기 하면 다들 잘 알았어요.
납북 경위
<전쟁 직후 압구정(한강이남)으로 피난을 했다가 인근 좌익의 의심과 움직임에 9월 경 다시 서울 자택 쪽으로 들어옴. 마침 미아리에서 상업을 하며 민보단 단장이었던 사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에서 정보를 구하러 나갔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발각, 과거 장면박사 선거사무장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가서 연락 두절됨>
Q: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아버님이 쉰 일곱 살에 아들에게 넘겨주시려고 압구정 정자 주변으로 2700여평 정도의 집을 사두셨어요. 큰형부부를 그곳에서 관리를 하게 두셨는데 그 다음해 6.25전쟁이 발발됐죠. 그래서 피난을 그곳으로 간 거에요. 저는 6.25전쟁 전에 보성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6월 27일에 (종로로) 들어왔어요. 저는 당시 너무 어려서 전쟁이라는 것도 잘 모르고 학교를 계속 나오라고 하니까 학교를 계속 다녔죠. (그 때) 나머지 식구들은 다 아버님이 사두셨던 압구정 집으로 내려갔어요. 당시엔 압구정이 시골이었어요. 그 때 가족들은 인원이 둘째 형, 누이동생, 어머니, 장조카(외조카), 아버님이 계셨는데 첫째, 둘째 누이는 시집을 간 상태였어요. 그렇게 혼자 집에 남아있으며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저희 선생님은 중국에서 전쟁을 겪으셨던 분이라 학생들한테 전쟁에서는 먹는 게 중요하고, 긴장하지 말고 차근차근 하라고 일러주셨어요. 그러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6시쯤에 ‘펑’ 하며 한강다리 끊는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저는 부랴부랴 선생님 말씀대로 집안에 있던 쌀을 다 가방에 넣어서 압구정으로 갔죠. 가던 중에 펑펑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어요. 저는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려고 기다리는데 인민군이 보이더라고요. 제가 배를 타고 압구정으로 건너가서 보니 친척들이 한 200여명 찾아 와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밥 세끼를 다 먹이지는 못하고 점심에는 호박을 주고 그랬어요. 그 때 매형이 인민군이 발행하는 통행신분증을 갖고 있어서 서울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소식을 알려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압구정에) 계속 계시다가 보니까 당시 큰 형님 댁 사돈집에서 아버님을 눈여겨 본 거에요. 그러더니 빨간 완장을 찬 지역 사람들이 들어와서 아버님을 찾더라구요. 결국 아버님은 여기나 거기에나 잡혀가기는 같을 것 같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셨어요. 우선 어머니를 먼저 올려 보내셨고 그 때 저는 압구정에 있었는데 저는 얼굴이 까맣게 타서 농사꾼인줄 알았지만 작은 형은 계속 얼굴이 하얀 편이라 언제나 인민군에서 의심을 하곤 했어요. 그러고 누이가 서울과 압구정을 왔다 갔다 했어요. 남자들은 나이만 되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밖에 가질 못했거든요. 그렇게 아버님이 9월 달에 (서울로) 가신지 간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아버님은 서울에서 변장을 하고 매형을 찾으러 돌아다니셨어요. 우리 매형은 6.25전에 종로4가 동회장을 하고 민보 청년단장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놈이 찔러서 정치 보위부, 경찰에 붙잡혀 간 거에요 6.25 터지고 충청도로 도망갔다 조용해져서 다시 왔더니 잡아 간 거죠. 동대문 시장 대로변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애국공사라고 해서 페인트 공장을 하다 납치를 당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위가 납치되어 가서 그 근처에 가서 어디로 납치되어갔나 하고 (알아보려고) 슬슬 다니다가 매형 집 앞에서 잡혀갔어요. 거기다 정치 보위부에서 장면박사 사무장을 했다 한 것이 문제가 돼서 바로 잡은 거죠. 누가 일러서 잡혀 들어가신 거였어요. 처음에 정치 보위부로 잡혀가셨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잡혀가셨죠. 거기에서 손톱을 다 뽑아냈대요. 그런 고문을 당하셨어요. 그렇게 잡혀 들어간 걸 왔다 갔다 한 누이가 압구정에 와서 알려줬어요.
납치이유
<전쟁 전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장면 박사 선거 사무장을 했던 것을 밀고 당해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됨>
A: 정치 보위부에서 장면박사 사무장을 했다 해서 바로 잡은 거죠. 누가 일러서 잡혀 들어가신 거였어요.
납치 후 소식
<함께 수감, 납북되던 중 탈출했던 사람들로부터 서대문 형무소, 미아리를 경위해 38선 근처, 만포진 탄광이 있던 지역까지 끌려 갔던 것을 전해 들음>
A : 그런데 그 이후 아버님 소식은 그때 인천 상륙한 이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을 열어놓고 나가라고 했대요. 그때 다들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는데 그 당시에 도망 나온 사람이 있어서 아버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러고 아버지는 손발이 다 묶여서 미아리로 해서 후퇴하셨대요. 그 이후에 38선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있었어요. 당시 저희 집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효제동 민보단장이었던 사람이 아버님하구 같이 묶여갔대요. 그런데 그때 38선 근처에서 잠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 민보단장이던 사람이 영감님 뜁시다 하길래 아버님은 뛰기 힘들 것 같아서 난 못 가겠다 하고 단지 민보단장이던 사람의 손목의 끈만 풀어주고 그 사람만 길 옆에 있는 높은 풀숲 속으로 굴러서 도망갔대. 따발총을 쐈지만 다행히 맞질 않고 도망 나온 거지.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아. 아버님이 거기까지는 사셨구나’ 알았지. 그런데 그 이후에 평양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있어서 알려줬어. 그 사람은 평양사람이었어. 평양이 고향이었는데 당시 아버지하고 같이 묶였대. 약간 휴식만 하고 갔는데 만포진까지 갔대요. 그런데 그때 거기에 탄광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저희는 세 번 아버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그 당시 저는 아버지가 어디로 잡혀갔는지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군대를) 갔는데 전혀 알 수가 없더라구요. 내 희망은 아버지가 계시는 북한에 가서 만포진까지 그 탄광에서 뭘 했는지, 혹시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아보는 거야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아들 김병기는 곧바로 군대에 가고, 남은 가족들도 다행히 집안에 재산이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었음, 그러나 의사 출신의 납북자의 둘째 딸은 아버지 소식을 듣고자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다가 서울 수복 후 아군에 잡혀가 행방 불명 됨>
A: 그렇게 돼서 나는 50년 12월에 군대를 가고 군대에서 6년 후 제대를 했어. 종로4가 재산이 있었어. 그래서 따로 고생은 진짜 안 해봤어. 다행히 당시 다들 어른이라서 고생하질 않았던 거야. 식구들이 아주 어리진 않아서 생계는 괜찮았는데 어머님이 아들 둘이 군대를 가서 신경을 많이 쓰셨지.
A:둘째 누이가 의사 출신이에요. 고모 중매로 만나서 결혼한 둘째 매형이 이북사람이었어요. 결혼을 했긴 했는데 신통치 않게 생각하지 않아서 같이 살지는 않았어요. 애도 안 낳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누이가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울에 있는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군이 들어오고 나니까 둘째 누이가 그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잡혀갔어요. 그래서 제 누이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게 한이 되요. 그렇게 잡혀가고 무소식이예요. 그 당시에 제가 군대에 가 있어서 몰랐어요.
정부의 노력
<기대가 없어 신고조차 않았음>
Q : 신고는 하셨나요?
A : 신고는 전혀. 신고는 해 봤자 도와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하지도 않았어요. 정말 저는 아버님 소식만 알 수 있다면 김정일한테 절도 할 수 있어요. 나 혼자에요. 이젠 식구들도 다들 포기했어요. 사실 아버지가 잡혀가지 않으셨으면 군대를 가지 않았겠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호적정리
<장자 김용진 명의 호주 상속>
정부에게 바라는 말
<생사확인, 사망 시 사망일자 확인 및 유골 송환>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생존해 있으시라고는 믿지 못합니다. 오로지 생존해 계시면 106세가 되십니다. 그래서 그건 기대하지 않지만 아버님 하늘나라에 계시면 꿈에서라도 보여주세요. 유골이 어디 묻혔는지만 알면 캐서 어머님하고 합장시켜서 아버님 산소에 묻혀드릴께요. 부디부디 꿈에라도 나타나 주세요. 돌아가신 날짜만으로 알아도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제사를 지내드릴께요. 제가 한되고 원 되는 게 그것 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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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랍자
성명: 김병기 (金秉基)
생년월일: 1984년 음력 5월 1일생(서울 종로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피랍일: 1950년 9월 15일
피랍장소: 종로 4가 제일극장(現 평화극장)앞 인도
직업: 상업(도윤 상회, 불로 상회 운영), 前 장면 박사 선거 사무장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 3녀
외모 및 성격 : 키가 크고 건강함. 온순한 성격
증언자
성명: 김용준(1932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V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전쟁 직후 압구정(한강 이남)으로 피난을 했다가 인근 좌익의 의심과 움직임에 9월경 다시 서울 자택 쪽으로 들어옴. 마침 미아리에서 상업을 하며 민보단 단장이었던 사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에 소식이라도 얻으러 나갔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발각, 과거 장면박사 선거사무장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됨. 이후 함께 수감, 납북되던 중 탈출했던 사람들로부터 서대문 형무소, 미아리를 경위해 38선 근처, 만포진 탄광이 있던 지역까지 끌려 갔던 것을 전해 들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사망 시 사망일자 확인 및 유골 송환
“그때 인천 상륙한 이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을 열어놓고 나가라고 했대요. 그 당시에 도망 나온 사람이 있었는데 아버님하구 38선 근처까지 같이 묶여갔었대요. 그 사람은 38선 근처에서 감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풀숲 속으로 굴러서 도망을 나온 거였어요. 그 이후에 또 아버지하고 같이 묶였다가 도망 온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말이 평양까지 가서는 약간 휴식을 하고 만포진까지 갔대요. 거기에 탄광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 소식이 전부에요. 내 희망은 아버지가 계시는 북한 만포진까지 가서 그 탄광에서 뭘 했는지, 혹시 살아계시는지, 만일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아보는 거에요.”
“둘째 누이가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울에 있는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군이 들어오고 누이는 그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잡혀갔어요. 그 후 누이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게 한이 되요”
전쟁 당시 납북자의 직업 및 활동
<종로에서 도윤 상회, 불로 상회 등을 운영하면서 정치활동도 겸함. 제헌 국회의원이었던 장면 박사의 선거 사무장을 했고, 한국 민주당을 창설하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했음 >
Q :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A : 그 당시 아버지는 종로 5가에서 도윤 상회. 또 불로당, 불로 양주장. 불로상회를 친구분하고 같이 하셨어요. 그리고 불로 버스도 운영했어요. 그 당시에는 상회라면 주식 회사였어. 아버지가 한약재를 강원도에서 들여와서 중국으로, 대만으로 보내는 무역을 했어. 물물교환 이라는 걸 했는데. 그 당시 강원도 쪽에 마차로 끌고 가서 강원도까지 끌고 가는 건 고급 무역회사야. 왜놈이 쓰던 차로 트럭도 있어서 그 차로 강원도에 일주일에 와서 한 번 (짐을)풀고 했어요. 그러면서 또 저희 아버지는 사람을 두고 맡기고 (당신은) 나가 다니면서 정치적인 일을 많이 했어. 한국민주당 창설도 하고 했고….. 6.25전쟁 전 해방 되기 직전에는 국회의원 부위원격인 경성부의원을 했어요. 그러면서 다리도 놓고 굶는 사람들에게 쌀도 주고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일본말도 곧잘 하셨는데 그래도 친일은 아니셨어요. 언제나 한복만 입고 그러셨어요. 우리나라 역사학자 한 분을 도와 주시기도 했구요. 또 장면 총리. 천주교신자인 그 사람을 뒤에서 밀어주셨어요. 그 당시 그분은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셨어요. 발이 넓으신 분이셨거든요.
Q : 장면 박사님의 제헌국회의원 재임 때 사무장을 하셨던 건가요?
A : 네. 그 당시엔 김병기 하면 다들 잘 알았어요.
납북 경위
<전쟁 직후 압구정(한강이남)으로 피난을 했다가 인근 좌익의 의심과 움직임에 9월 경 다시 서울 자택 쪽으로 들어옴. 마침 미아리에서 상업을 하며 민보단 단장이었던 사위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에서 정보를 구하러 나갔다가 정치보위부원에게 발각, 과거 장면박사 선거사무장을 했다는 이유로 연행돼 가서 연락 두절됨>
Q: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아버님이 쉰 일곱 살에 아들에게 넘겨주시려고 압구정 정자 주변으로 2700여평 정도의 집을 사두셨어요. 큰형부부를 그곳에서 관리를 하게 두셨는데 그 다음해 6.25전쟁이 발발됐죠. 그래서 피난을 그곳으로 간 거에요. 저는 6.25전쟁 전에 보성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인민군이 6월 27일에 (종로로) 들어왔어요. 저는 당시 너무 어려서 전쟁이라는 것도 잘 모르고 학교를 계속 나오라고 하니까 학교를 계속 다녔죠. (그 때) 나머지 식구들은 다 아버님이 사두셨던 압구정 집으로 내려갔어요. 당시엔 압구정이 시골이었어요. 그 때 가족들은 인원이 둘째 형, 누이동생, 어머니, 장조카(외조카), 아버님이 계셨는데 첫째, 둘째 누이는 시집을 간 상태였어요. 그렇게 혼자 집에 남아있으며 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저희 선생님은 중국에서 전쟁을 겪으셨던 분이라 학생들한테 전쟁에서는 먹는 게 중요하고, 긴장하지 말고 차근차근 하라고 일러주셨어요. 그러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아침6시쯤에 ‘펑’ 하며 한강다리 끊는 소리가 들리는 거에요. 저는 부랴부랴 선생님 말씀대로 집안에 있던 쌀을 다 가방에 넣어서 압구정으로 갔죠. 가던 중에 펑펑 하는 소리가 계속 들렸어요. 저는 배를 타고 다리를 건너려고 기다리는데 인민군이 보이더라고요. 제가 배를 타고 압구정으로 건너가서 보니 친척들이 한 200여명 찾아 와 있었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밥 세끼를 다 먹이지는 못하고 점심에는 호박을 주고 그랬어요. 그 때 매형이 인민군이 발행하는 통행신분증을 갖고 있어서 서울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소식을 알려주고 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압구정에) 계속 계시다가 보니까 당시 큰 형님 댁 사돈집에서 아버님을 눈여겨 본 거에요. 그러더니 빨간 완장을 찬 지역 사람들이 들어와서 아버님을 찾더라구요. 결국 아버님은 여기나 거기에나 잡혀가기는 같을 것 같아서 다시 서울로 올라가셨어요. 우선 어머니를 먼저 올려 보내셨고 그 때 저는 압구정에 있었는데 저는 얼굴이 까맣게 타서 농사꾼인줄 알았지만 작은 형은 계속 얼굴이 하얀 편이라 언제나 인민군에서 의심을 하곤 했어요. 그러고 누이가 서울과 압구정을 왔다 갔다 했어요. 남자들은 나이만 되면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밖에 가질 못했거든요. 그렇게 아버님이 9월 달에 (서울로) 가신지 간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아버님은 서울에서 변장을 하고 매형을 찾으러 돌아다니셨어요. 우리 매형은 6.25전에 종로4가 동회장을 하고 민보 청년단장을 했어요. 그랬더니 어떤 놈이 찔러서 정치 보위부, 경찰에 붙잡혀 간 거에요 6.25 터지고 충청도로 도망갔다 조용해져서 다시 왔더니 잡아 간 거죠. 동대문 시장 대로변에 지금은 없어졌지만 애국공사라고 해서 페인트 공장을 하다 납치를 당하셨어요.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위가 납치되어 가서 그 근처에 가서 어디로 납치되어갔나 하고 (알아보려고) 슬슬 다니다가 매형 집 앞에서 잡혀갔어요. 거기다 정치 보위부에서 장면박사 사무장을 했다 한 것이 문제가 돼서 바로 잡은 거죠. 누가 일러서 잡혀 들어가신 거였어요. 처음에 정치 보위부로 잡혀가셨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잡혀가셨죠. 거기에서 손톱을 다 뽑아냈대요. 그런 고문을 당하셨어요. 그렇게 잡혀 들어간 걸 왔다 갔다 한 누이가 압구정에 와서 알려줬어요.
납치이유
<전쟁 전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장면 박사 선거 사무장을 했던 것을 밀고 당해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됨>
A: 정치 보위부에서 장면박사 사무장을 했다 해서 바로 잡은 거죠. 누가 일러서 잡혀 들어가신 거였어요.
납치 후 소식
<함께 수감, 납북되던 중 탈출했던 사람들로부터 서대문 형무소, 미아리를 경위해 38선 근처, 만포진 탄광이 있던 지역까지 끌려 갔던 것을 전해 들음>
A : 그런데 그 이후 아버님 소식은 그때 인천 상륙한 이후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문을 열어놓고 나가라고 했대요. 그때 다들 무서워서 나가지 못했는데 그 당시에 도망 나온 사람이 있어서 아버님이 어떻게 지내셨는지 얘기를 해주셨어요. 그러고 아버지는 손발이 다 묶여서 미아리로 해서 후퇴하셨대요. 그 이후에 38선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있었어요. 당시 저희 집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살던 효제동 민보단장이었던 사람이 아버님하구 같이 묶여갔대요. 그런데 그때 38선 근처에서 잠시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 민보단장이던 사람이 영감님 뜁시다 하길래 아버님은 뛰기 힘들 것 같아서 난 못 가겠다 하고 단지 민보단장이던 사람의 손목의 끈만 풀어주고 그 사람만 길 옆에 있는 높은 풀숲 속으로 굴러서 도망갔대. 따발총을 쐈지만 다행히 맞질 않고 도망 나온 거지. 그 사람 얘기를 듣고 ‘아. 아버님이 거기까지는 사셨구나’ 알았지. 그런데 그 이후에 평양에서 도망 나온 사람이 있어서 알려줬어. 그 사람은 평양사람이었어. 평양이 고향이었는데 당시 아버지하고 같이 묶였대. 약간 휴식만 하고 갔는데 만포진까지 갔대요. 그런데 그때 거기에 탄광이 있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저희는 세 번 아버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그 당시 저는 아버지가 어디로 잡혀갔는지 알수 있지 않을까 해서 (군대를) 갔는데 전혀 알 수가 없더라구요. 내 희망은 아버지가 계시는 북한에 가서 만포진까지 그 탄광에서 뭘 했는지, 혹시 살아계시는지,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아보는 거야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아들 김병기는 곧바로 군대에 가고, 남은 가족들도 다행히 집안에 재산이 있어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었음, 그러나 의사 출신의 납북자의 둘째 딸은 아버지 소식을 듣고자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다가 서울 수복 후 아군에 잡혀가 행방 불명 됨>
A: 그렇게 돼서 나는 50년 12월에 군대를 가고 군대에서 6년 후 제대를 했어. 종로4가 재산이 있었어. 그래서 따로 고생은 진짜 안 해봤어. 다행히 당시 다들 어른이라서 고생하질 않았던 거야. 식구들이 아주 어리진 않아서 생계는 괜찮았는데 어머님이 아들 둘이 군대를 가서 신경을 많이 쓰셨지.
A:둘째 누이가 의사 출신이에요. 고모 중매로 만나서 결혼한 둘째 매형이 이북사람이었어요. 결혼을 했긴 했는데 신통치 않게 생각하지 않아서 같이 살지는 않았어요. 애도 안 낳고 그런 상황이었는데 누이가 아버지 소식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울에 있는 인민군 여맹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군이 들어오고 나니까 둘째 누이가 그 여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경찰에서 잡혀갔어요. 그래서 제 누이는 어디에서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게 한이 되요. 그렇게 잡혀가고 무소식이예요. 그 당시에 제가 군대에 가 있어서 몰랐어요.
정부의 노력
<기대가 없어 신고조차 않았음>
Q : 신고는 하셨나요?
A : 신고는 전혀. 신고는 해 봤자 도와주지도 않을 것 같아서 하지도 않았어요. 정말 저는 아버님 소식만 알 수 있다면 김정일한테 절도 할 수 있어요. 나 혼자에요. 이젠 식구들도 다들 포기했어요. 사실 아버지가 잡혀가지 않으셨으면 군대를 가지 않았겠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아.
호적정리
<장자 김용진 명의 호주 상속>
정부에게 바라는 말
<생사확인, 사망 시 사망일자 확인 및 유골 송환>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 생존해 있으시라고는 믿지 못합니다. 오로지 생존해 계시면 106세가 되십니다. 그래서 그건 기대하지 않지만 아버님 하늘나라에 계시면 꿈에서라도 보여주세요. 유골이 어디 묻혔는지만 알면 캐서 어머님하고 합장시켜서 아버님 산소에 묻혀드릴께요. 부디부디 꿈에라도 나타나 주세요. 돌아가신 날짜만으로 알아도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제사를 지내드릴께요. 제가 한되고 원 되는 게 그것 밖엔 없습니다.
번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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