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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민족기억연구소 발행 대중교육잡지(pamięci) 기고문
이름: 관리자
2014-09-12 13:41:43  |  조회: 2471
  


  ---------------------------------------------  아래는 기사의 국문 번역문입니다. --------------------------------------------


  20세기의 사건

 

   한국인 명부

 

   마렉 헨데렉 (Marek Hańderek)

 

  "폴란드와 한국의 역사적 운명에는 많은 공통점이 존재한다. 양국은 강하고 호전적인 이웃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또한 상반되는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원치 않는 공산주의로부터 고통을 경험했다."

 

  상기 내용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Korean War Abductees' Family Union, KWAFU)의 김은혜 국제업무담당관에게서 받은 이메일 내용의 일부를 인용한 것이다. 당시 나는 폴란드 국가기념연구소(IPN) 대표 발제자로서 서울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의 발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소련에 의해 자행된 강제이주와 납치, 살해와 관련한 폴란드인들의 희생사례'가 발표주제였다. 나는 한국에 머물면서 김은혜 담당관이 양국의 역사적 상황을 적절하게 비교했다고 생각했다. 사실 폴란드와 한국이 지리적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기에, 일부 사람들만이 알고 있겠지만, 양국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식민지배에서 주권획득까지

 

  서해와 동해 사이의 한반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두 강대국의 그늘 아래에 놓여있었다. 오랜 세기에 걸쳐 중국과 일본은 지역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한반도는 마치 큰 물고기 사이에 있는 새우와 같아서 그 상황을 '간어제초(間於薺楚)'와 같은 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난 세기 한국인들에게는 동쪽의 새로운 대어(大漁)가 침략야욕을 품고 다가온 것이다.


  일본은 1904년부터 1905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정치적 강대국으로 점차 자리잡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결과로 한국은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고, 결국 1910년에는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항복을 받아낸 1945년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배기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일본에 점령당한 한국의 경험은 폴란드가 123년간 겪었던 식민지배 경험과 비슷했다. 일본의 주요 특징적인 정책으로는 경제개발을 위시한 수탈과 공용어로써의 일본어 도입, 역사왜곡과 일본군으로의 강제징용 등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식민지배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들의 무장투쟁과 평화적 시위는 유혈 진압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919년의 삼일운동과 중국상해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수장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후에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한국인들은 주권국가 수립의 가능성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기대와 다르게 흘러갔다.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주둔했다. 특히 소련군의 보호 아래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은 한반도에 자신들의 질서를 구축한 후, 반도전역의 적화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일성의 공산주의 진영은 유엔이 권하는 총선거를 반대하였고, 결국 1948 5월에 남한에서만 총선이 이루어졌다. 3개월 후,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었고,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했다. 이에 대항해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1948 9월에 김일성을 수장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독재자였던 요제프 스탈린과 중국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1950 6 25일 대한민국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고, 전쟁은 오늘까지 휴전상태로 남게 되었다. 전쟁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참혹하게 희생되었고, 범죄행위들도 자행되었다. 그 범죄행위의 피해자 가족들이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주최로 지난 해 서울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모였던 것이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에 의해 납치된 한국의 시민들과 아이들의 가족들인 것이다. 가족회 회원들은 지금까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96,013명의 납북인사 명단과 자료를 확인했다. 10만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납북 이후 6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이러한 범죄행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현실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학교의 역사수업에서도 가르치지 않고 있고, 어떤 정치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기도 한다.

 

  서방의 침묵

 

  휴전 이후, 한국의 납북자에 대한 진상규명 노력이 수그러든 시기가 공교롭게도 '소련이 폴란드에 자행한 카틴(Katyń) 숲 학살범죄 진상규명'에 대한 서방의 침묵시기와 맞물린다는 점이다. '소련이 카틴 숲에서 폴란드 장교들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1940)'을 유엔에서 규명하기 위해 준비한 제안발의를 미국의회 외교위원회가 1953년 중반에 포기한 것이다. 레이 메이든(Ray Madden) 의원이 이끄는 카틴학살 특별조사위원회는 폴란드 포로에 대한 소련군의 학살범죄행위를 밝히는 임무를 맡았었다. 위원회는 1951년 가을에 결성되었는데, 당시 미국은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에 대항할 적당한 선전도구를 찾고 있었다


카틴 숲의 사건은 북한이 미군포로를 대거 처형한 일을 연상시키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의 사망과 한반도에서의 휴전협정 조인은 미소관계의 해빙 기회를 불러 일으켰고, 이에 따라 미국 정치권은 폴란드 장교들에 대한 소련의 학살문제 진상규명 노력을 포기했던 것이다. 앞서 한반도 휴전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 지던 시기에 UN측의 미국은 한국의 민간 납북인사들의 송환노력을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납북인사 송환문제는 휴전협정과 일부 전쟁포로석방의 대가로 희생을 치른 셈이었다.

 

  민간 차원의 조사

 

  19519월에 이미 납북인사가족회가 조직 등록되었고, 가족회의 주된 목표는 납북인사의 송환이었다. 당시의 이름은 '625사변피랍치인사가족회(Korean War Abductees' Family Association, KWAFA)'였다. 가족회의 초대회장은 실업가였던 장기빈 회장이었는데, 그 역시 딸 중 하나가 피랍되었다. 가족회 회원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는데, 납북인사의 98%가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어머니들과 아내들이 남성들의 귀환을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가족회의 규모는 이내 커졌고, 1954년에는 만 8천명의 가족들이 납북인사들의 송환을 촉구했다.


  1950년대 가족회의 활동은 왕성했다. 납북인사들의 자료와 명단을 정리했고, 수많은 성명발표와 청원을 통해 송환을 촉구했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유력정치인들과 국제적십자연맹,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에도 문제해결을 호소했다. 동시에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과 많은 정치인들이 가족회의 활동을 지지했다. 정치인들의 경우에도 가족들이 납치당했거나, 동료들을 잃기도 했다. 피랍인사 가운데 정치인이 169명이었고, 그 중 수십 명이 국회의원들이었다. 또한 800여명의 교수와 교사들, 2,800명을 넘는 기술자들과 600명에 가까운 의사들이 피랍된 것은 북한의 두 가지 주요한 납치 의도를 보여준다. 첫째는 북한의 산업과 과학, 교육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인력확보에 있었고, 둘째로는 김일성 정권에 저항할 수 있는 반공주의 성향의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은 스탈린에 의해 카틴 숲에서 의도적으로 살해된 폴란드의 반소세력과 애국 지식인의 사례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1960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이듬해 벌어진 군사정변 이후, 납북인사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이 어려워졌고, 남한 내 납북인사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 또한 사그라졌기에 가족회에게는 힘든 시기가 시작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군사정권은 가족회의 활동을 불허했다. 실제로 북한은 젊은 납북인사 가운데 일부를 대남간첩으로 활용했기에 납북인사가족들 중 일부는 국가보안법상 감시를 받아야 했다. 만일 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면 해당 가족들은 군사시설 접근금지, 국가고위직 수행불가, 심지어 이민금지와 같은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가족회에 대한 통제는 1990년대 초에 와서야 해제되었는데, 이는 폴란드의 민주화보다 2년이 앞선 1987, 한국의 민주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와 맞물린다.

 

  망각(忘却)과의 싸움

 

  폴란드 인민공화국 시절, 강요된 거짓말로써 감금과 같은 수단을 사용하여 통제하고 위협했던 일을 폴란드 제3공화국 민주정부가 현재에 와서 중지하고, 카틴 숲 학살사건을 재조명하며 신속히 학술적 연구를 시작했던 상황을 볼 때, 대한민국의 납북인사 문제도 오랫동안 학술과 정치분야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어린 시절 피랍된 인사들의 가족들 중 일부는 김대중 대통령 정부(1998-2003)가 민간인 납치문제를 부정했던 것을 탄식했다. 북한이 반세기 동안 지속했던 범죄 사실을 드러내는 일이 당시 정부에게 있어 정치, 경제적 접촉을 통한 통일을 지향하는 햇볕정책에 손상을 줄 수 있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납북인사 가족들은 2000년에 가족회의 활동을 재개했고, 명칭을 다소 변경하여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로 이름 지었다.


  가족회는 한국과 국제사회에 납북인사들에 대한 사실을 다시금 기억하게 하는 길고도 어려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이 납북인사들의 행방을 밝히도록 국제사회가 압력을 가하게끔 노력하고 있다. 납북인사들의 90%가 피랍 당시 31세 이하였기 때문에 이중 일부는 여전히 생존하고 있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 가족회는 세미나와 전시회, 기념행진 등을 조직해 왔고, 사료집 발간과 납북인사 명부작성 등을 진행하고 있다. 2010 3, 가족회는 국회에서 납북피해진상규명과 관련한 특별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가족회 회원들은 조만간 납북범죄 진상규명과 관련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잊혀졌던 납북인사들이 한국역사에서 되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경험한 일을 계기로 폴란드 국가기념연구소(IPN)가 가족회의 마지막 목표달성을 위해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마렉 하인데렉(Marek Hańderek) - 사학전공, 폴란드 국가기념연구소 대중교육담당

번역 - 김규남(한국외국어대학교 외래교수)

 


* 사진설명

1) 1951년 한국정부가 작성한 납북인사 명부

2) 1950년 공산주의 북한으로 호송되는 한국의 민간인들

3) 1954년 가족회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하는 호소문' 낭독

4)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5) 1954 3 11일 서울에서 열린 가족회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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