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이봉규(증언자-이주홍)
이름: 관리자
2017-01-24 12:10:48  |  조회: 1392

160216 이 봉 규 ( 李奉奎)

2016. 2. 2. 채록

피랍 정보 등재 명부:
-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 (공보처 통계국 , 1952)
-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 (대한적십자사 , 1956)


피랍인
생년월일: 1916년 8월 18일
출생지: 전남 보성군 득량면
당시 주소: 서울 인의동 법원관사
피랍일: 1950년 7월
피랍장소: 인의동 법원관사
직업: 서울 고등법원 판사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2남 2녀
외모/성격: 키가 작은 편이고 멋쟁이였음. 안경 착용. 활달하고
친구가 굉장히 많았음.


증언자
성명: 이주홍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일본 중앙대 법대를 졸업하고 서울 고등법원 판사로 재직 중 정치보위국에서 나온 두서너 명에 의해 법원
관사에서 끌려감.

• 많은 지식인이 필요했던 김일성의 명령에 의해 납치된 것으로 추정. 이후 어머니와 형무소 등을 돌아다
녔으나 찾지 못함.



직업 및 활동

<납북자 이봉규씨는 1916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서울 중동 중학교, 일본 중앙대 법대
2학년 재학시 조선 변호사시험에 합격, 대학교 졸업 후 일본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나 만
주로 발령이 나서 포기를 하고, 다시 일본에서 행정고시를 합격한 후, 충청도 괴산 군청
군수로 재직하다가 서울 고등법원 판사와 대법관 서리 임명을 받음.>



문_ 본인의 성함과 생년월일은?

답_ 이주홍입니다. 생년월일은 43년 4월 15일, 양력이요. 음력으로는 42년 12월 10
일 입니다.


문_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제가 장남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과 생년월일, 출생지는?

답_ 성함은 이봉규. 생년월일은 1916년 8월 18일 생으로 되어있습니다. 출생지는 전
남 보성군 득량면으로 되어있어요.


문_ 납북 당시 거주지역과 출신학교는?
답_ 보성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그 다음에 서울에 올라오셔서 중동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일본 중앙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셨습니다.


문_ 납북자의 직업은?

답_ 서울 고등법원 판사였다가 1950년도 초에 김병로씨에 의해서 대법관 서리까지 임
명을 받았죠. 서류상으로는 안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답_ 어머니와 제 밑으로 3남매가 있고요. 여동생, 남동생, 여동생 해서 2남 2녀입니다.


문_ 납북자의 경력은?

답_ 경력은 일본 중앙대학교 졸업하시고, 졸업 전에 대학교 2학년 때 조선 변호사시험
에 합격하셨답니다. 그리고 중앙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일본에서 사법고시를 합격해
서 일본사람들이 조선이 아니고 만주로 발령을 냈어요. 그래서 만주에 가고 싶지 않아
포기 해버리고 종로구에서 초대 대법관 김병로씨와 이인씨가 변호사 간판을 내고 하는
데 거기에 같이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어요. 2년 정도 하다가 별 볼 일이 없으니까 다시
일본으로 들어가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오셨어요. 그러고 나서 충청도 괴산 군청 군수
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해방되면서 김병로씨가 아버지는 원래 행정이 아니고 법 쪽이 아
니냐고 해서 다시 끌어올려서 판사를 하게 됐죠.


문_ 납북자의 사회활동(대한청년단 등)은?

답_ 그런 것은 없었어요.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의 특징은?

답_ 성격은 활달하고 친구가 굉장히 많으셨어요. 술도 잘 하셨고 담배도 잘 피우셨다고
해요. 담배는 7살 때부터 피웠다는 이야기를 할머니로부터 들었어요. 그런 것 밖에 잘
모르죠. 그리고 주일이면 저희들을 데리고 창경원 이라든지 그런데 가서 사진도 찍고 야
외활동도 하고 경마장에 가서 경마 구경도 하고. 외모는 키는 작은 편이었어요. 그리고
상당히 멋쟁이였다고 보죠. 활달하시고. 안경을 쓰셨고요.


납북 경위

<피난을 가려고 하는데, 서울에 있는 작은 아버지가 안 오시는 바람에 찾으러 가려고 하
다가, 인의동 법원관사에서 정치보위국 직원들에게 잡혀갔다고 들음.>


문_ 6·25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답_ 분위기에 대해서는 저는 잘 몰랐고요. 아버지가 그 당시에 굵직한 사건을 담당하셨
다고 하는데요. 민사도 아니고 형사를. 그 당시에 판사로 있었던 분들이 아버지를 상당
히 존경했다고 그럽니다. 일본에서 제대로 4년 코스를 밟고 합격을 했기 때문에. 호남
지방에서 일곱 명이 중대 법대를 갔는데 거기서 합격한 사람은 아버지 한 사람 밖에 없
었어요.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다 조선 변호사 시험을 통해 올라왔지요. 당시의 일곱 명
중에서 제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서너 사람밖에 안되요. 초대 광주 은행장이었던 진강현
씨 그리고 전남대 법대 학장이었던 손석우씨. 아, 이선재 변호사도 있군요. 그리고 나머
지는 잘 모르겠네요.


문_ 6ㆍ25전쟁 당시 피난은 안 가셨는지?

답_ 피난을 가려고 나왔는데, 서울에 이문규씨라고 작은 아버지가 계셨어요. 이 분이 안
나오니까 아버지가 찾으러 가려고 하는 도중에 정치보위국에 잡혀갔다고 들었어요.

문_ 납치시기와 당시 증언자 나이는?

답_ 그건 잘 모릅니다. 7월이라는 것만 알고 있죠. 한 중순이나 되겠죠. 그 당시에 저는
8살밖에 안됐을 때니까 잘 모르죠.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갔을 때입니다.


문_ 납치장소는?

답_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확하지는 않으나 인의동 법원관사에서 납치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 전에는 천연동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김병로씨에 의해서 대
법관 서리가 되셨고, 동시에 관사로 이사를 했죠. 천연동 집을 이문규씨께 드리고요. 그
리고 이제 거기서 얼마 살지도 못하고 붙잡혀 가셨어요. 보성에서 저희 조부님이 천석꾼
이었어요. 이사했다고 그러니까 화차에다가 쌀 절반, 장작 절반을 가득 싣고 와서 주셨
는데 한 톨도 못 먹고 다 뺏겨버렸죠.


문_ 누가 납치했나?

답_ 누구라는 건 잘 모르는데 한 서너 명이 와서 저희들이 잘 모시겠다고 하면서 데려갔
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문_ 납치 방법 (협박, 목격자 등)은?

답_ 그런 것은 잘 모릅니다. 그 당시에 현장에 있지 않아서요. 저희 어머니가 저희들한
테도 속상하니까 이야기를 잘 안 해주세요. 그 다음에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서
순천까지 걸어서 피난을 갔어요.


문_ 납북자가 남긴 말은?

답_ 그런 것은 없었어요.


문_ 납북 당시 납치된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답_ 그렇죠. 어머니랑 그래서 찾으러 다녔죠. 형무소고 어디고 막 돌아다니고 찾고 난리
였죠. 그러나 찾지도 못하고 면회도 못하고 그랬어요.


납치 이유

<지식인에 속하니까 김일성의 명령을 받고 납치해갔다고 생각함.>


문_ 납치된 이유는?

답_ 김일성이 남한에 있는 지식인들을 모셔오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되었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지식인에 들어가니까요. 그 사람들이 잘 모시겠다
는 뜻은 무엇인가 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납치 후 소식

<아버지가 납북된 후 어머니와 형무소 등 여러 곳을 돌아다녔으나 찾지도 못하고 면회도
못함. 작은아버지가 지금의 감사원인 심계원에 계셔서, 국방부 담당부터 장군들까지 이
야기해 수소문 했지만 알 수가 없었음.>


문_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 주변의 소문 등은?

답_ 전혀 못 들었어요. 접촉이 없었다고 보죠.


문_ 납치 후 적십자사나 정부 등에 도움을 구하거나 신고는 했는지?

답_ 안 했습니다.


문_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답_ 저희 작은아버지가 지금의 감사원인 심계원에 계셨어요. 모든 국방부 담당부터 장
군들한테까지 이야기해서 수소문 했지만 알 수 없다는 답변밖에 못 들었죠.


문_ 납북 피해가족 단체 결성에 참여했는지?

답_ 아니오. 어머님은 납북되고 나서 피난하여 순천으로 와서 교편생활을 했어요. 순천
여고 교사를 하다가 광주여고 교사를 하고, 나중에는 전남여고에서 정년퇴직을 하셨죠.


문_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답_ 생각은 있었지만 제가 활동을 못 하니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제가 아버지보다 똑똑
하질 못하니까 못했습니다. 그 당시에 신문을 본다던지, 자료를 찾아서 봤을 텐데 그런
걸 전혀 찾아본 적도 없고요. 사촌들이 신문 같은 것을 찾아보고 가끔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가 판결을 내리면 누구도 반박을 못 했다고 그러대요. 오제도 검사랑 많이 싸웠다
는데 그 이유가 그 사람은 무조건 빨갱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아버지는 인간 됨됨이를 봐
야 된다고 하면서 판결을 내렸다고 해요. 그 당시에 인맥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김병로
씨, 이인씨 라든지 정부 각 부서에도 인맥이 넓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은?

답_ 추억은 주말마다 놀러 다녔다는 것 밖에 모르죠. 주로 창경원에서 사진도 찍고. 그
런데 사진도 다 없어져버렸어요. 그 다음에 마장동에 가서 마권을 사서 경마도 하고요.
주로 가족이랑 같이 갈 때도 있고 어머님만 빠질 때도 있고. 창경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
면 어머님이 많이 빠져있어요. 어머니가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셨어요.


문_ 그 당시 어머님 건강은 괜찮으셨는지?

답_ 그 당시에는 건강하셨죠.


문_ 동생들도 아버님에 대해 기억하시는지?

답_ 기억 잘 못할 거에요. 제 밑에 동생들이니까 어려서요. 여동생이 세 살 차이고 그 다
음이 다섯 살 차이에요. 막둥이 동생이 49년생이니 6·25무렵에 돌이었죠.


문_ 할아버님, 할머님은 언제 돌아가셨어요?

답_ 돌아가신 지 30년도 더 되었어요.


문_ 납북자의 부모님이 납북자에 대해 하신 말씀은?

답_ 별 말씀은 안 하셨어요. 언제든지 오실 걸로 알고, 돌아오시면 잔치한다고 농사를
지으면 찹쌀이라던지 콩, 팥을 꼭 보관해 놓으셨죠.


호적 정리
<작년에 호적 정리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호적 정리 작년에 했습니다. 실종신고, 도움을 받아가지고 했어요.


연좌제 피해
<가끔 형사들이 와서 아버지에 대해 묻는 정도였고, 박정권이 끝나고 난 뒤는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크게 피해보지는 않았지만, 가끔 가다가 형사들이 와서 물어 보는 일이 있었죠 사


남은 가족의 생활

<어머니는 교편을 잡으시다가 15년 전 돌아가셨고, 여동생 둘은 미국으로, 남동생은
뉴질랜드로 이민가 있고 장남인 이주홍 회원만 남아있다. 당시 다른 사람에 비하면
큰 어려움은 겪지 않았음.>


문_ 납치 후 남은 가족의 피난생활, 생계, 양육 등은?
답_ 그 당시에 피난할 적에는 어머니하고 작은아버지하고 같이 1·4 후퇴 때 부산으
로 열차를 타고 가신 걸로 알고 있어요. 그 다음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여수로 해서
순천으로 들어왔죠. 저는 이미 순천에 있었고. 그 때가 1951년도인가 그럴 거에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순천에 계시다가 보성에 계시다가 왔다 갔다 하셨죠. 경제적
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큰 어려움은 없었죠. 어머니가 교직에 계셨고, 할머니
할아버지 도움도 많이 받았고.


문_ 나머지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답_ 전부 다 학교는 나왔죠. 그리고 여동생 둘은 현재 미국에 이민 가 있고요. 남동
생은 뉴질랜드 가서 있고요. 저 혼자 여기에 외롭게 있습니다.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답_ 어머님은 15년 전에 작고하셨죠.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은?

답_ 뭐 별다른 말씀은 안 하셨어요. 속상하니까.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은 단지 아
버지가 형사 담당을 많이 하셨고 국회 프락치 사건 이라던지, 그런 굵직한 사건을 많
이 맡았고 김병로씨에 의해서 대법관 서리까지 임명을 받았다는 것, 그래서 법원 관
사로 이사를 했다는 정도밖에 몰라요.


문_ 납북 이후 납북자의 지인 분들이 찾아오셨는지?

답_ 그런 사람도 없었어요.


문_ 납북 이후 납북자의 지인분 들에게 도움은?

답_ 없었어요, 내 기억엔. 옛날 속담이 딱 맞더라고요. 정승집 강아지가 죽으면 문
상객이 많고 정승이 죽으면 없다는 식으로, 본인이 안 계시니까 별다른 도움을 못 받
았죠. 어머니가 찾아가서 이야기도 못하시고, 부탁을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저 끙
끙 앓고 있었죠.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원망하는 마음도 들지만 편안하게 계시면 좋겠으며 후손들은 다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
고 싶음.>


문_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은?
답_ 할 말이 너무 어렵고 많고 그래요. 한도 맺히고. 아버지가 계셨으면, 정상적으로 활
동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면 내가 이렇게까지 안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어머님도 원망을 많이 하고 계시죠. 돌아가시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니까 편안하게 계
시면 좋겠다는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남매가 있는데 그 남매가 잘 생활하
고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이고. 아들은 아우디코리아에 차장으로 있다가 이번에 BMW
에 부장으로 발령을 받았어요. 그리고 딸은 여의도 증권회사 차장으로 있고요. 각자 분
가해서 잘 살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그러면 걱정이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문_ 아버님이 계시다면 뭘 해드리고 싶으세요?

답_ 계신 것만 해도 즐겁고 좋죠, 사실. 그러면 우리 형제가 이민도 안 가고, 다 여기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쓸쓸하지도 않고. 더 많은 형제가 있
었을 수도 있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70 납북자-강신원(증언자-강석문)
관리자
17-01-26 1968
169 납북자-최준경(증언자-최수길)
관리자
17-01-26 1957
168 납북자-유원순(증언자-유재민)
관리자
17-01-26 1932
167 납북자-이순임(증언자-이종철)
관리자
17-01-26 1945
166 납북자-정관만 (증언자-정학운)
관리자
17-01-26 1821
165 납북자-권두한(증언자-권오건)
관리자
17-01-26 2143
164 납북자-염준모(증언자-염세환)
관리자
17-01-26 2353
163 납북자-여도관(증언자-여승)
관리자
17-01-26 1476
162 납북자-윤병구(증언자-윤형섭)
관리자
17-01-26 1407
161 납북자-이승관(증언자-이연상, 이헌상)
관리자
17-01-26 1658
160 납북자-송기준 (증언자-송정일)
관리자
17-01-24 1718
159 납북자-최광욱(증언자-최창림)
관리자
17-01-24 1638
158 납북자-김주완 (증언자-이옥순)
관리자
17-01-24 1392
157 납북자-오상용 (증언자-오동일)
관리자
17-01-24 1223
156 납북자-손영진(증언자-손영애)
관리자
17-01-24 1383
155 납북자-유재옥 (증언자-유남종)
관리자
17-01-24 1277
154 납북자-이봉규(증언자-이주홍)
관리자
17-01-24 1391
153 납북자-유동연(증언자-유영한)
관리자
16-12-19 1306
152 납북자-차명상(증언자-차건호)
관리자
16-12-19 1202
151 납북자-최진, 최휘(증언자-최인숙)
관리자
16-12-19 1525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