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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최광욱(증언자-최창림)
이름: 관리자
2017-01-24 14:29:58  |  조회: 1638




56 2부 증언자료 57
160222A 최 광 욱 ( 崔光昱)
2016. 2. 22. 채록
피랍 정보 등재 명부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
( 공보처 통계국 , 1950)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
( 공보처 통계국 , 1952)
6•25 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
( 내무부 치안국 , 1954)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
( 대한적십자사 , 1956)
( 미등재 )

피랍인
생년월일: 1909년 5월 4일
출생지: 황해도 황주
당시 주소: 서울 종로구 가회동 11-100
피랍일: 1950년 9월 22일 새벽
피랍장소: 자택
직업: 없었음. 일제강점기 때 군용 조합 등에 관여함.
직계/부양가족: 배우자, 3남매
외모/성격: 성격이 과격한 편이고 욕심이 많고 결심이 대단함.


증언자
성명: 최창림
관계: 장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북한 거주시 농토가 많았으며 일제강점기 때 군용조합 등에 관여를 하였고, 토건 사업을 했으며, 반정부
운동에 자금을 댐. 1948년 황해도 해주에서 남하하기 전에는 황해도 신문사 지국장을 했는데, 남은 재
산을 처분한 것 때문에 지주, 반동분자로 몰려 1948년 황해도 해주에서 가족이 월남함.
• 가회동 집의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세 명의 정치보위부가 집 안을 수색하여 끌고 감. 이북에서 넘어와 반
동분자로 잡아갔을 거라고 추측함.
• 사리원에서 봤다는 소문 이외에 소식을 들을 수 없었음.


직업 및 활동
<농토가 많았으며 일제강점기 때 군용 조합 등에 관여를 하였고, 토건 사업 등을 함. 반
정부 운동에 자금을 댐. 1948년 황해도 해주에서 남하하기 전에는 황해도 신문사 지국
장을 하였음.>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1936년 4월 21일. 음력입니다. 그래서 금년으로 2달 뒤면 80세가 돼요. 납북자
아버님의 6남매 중 장남입니다. 제가 10살 때 해방이 되었고. 내 이름은 최창림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답_ 아버님은 1909년 5월 4일. 음력으로. 단오 전날입니다. 성함은 최광욱. 출생지는
황해도 황주입니다. 1948년 5월 10일 내가 여기 왔습니다. 오니까 그날이 UN 감시 하
에 총선거 하는 날이었어요. 우리가 쫓겨난 거니까 가족이 한꺼번에 오지 못했어요. 나
하고 아버님하고 내 밑에 남동생. 그 동생이 여덟 살이었어요. 그리고 그 밑에 동생이
여동생인데 다섯 살 된 것 같아요. 남하한 뒤 거주는 서울에서 살았어요. 종로구 가회동
11-100 입니다.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학교는 제가 잘 모르는데 고향에서 다녔으니까, 서당을 다니신 것 같아요. 아버지
출신지는 황주입니다. 남하하기 전에는 황해도 신문사 지국장을 하셨고. 아주 농토가
많았죠.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답_ 내가 알기로는 일제강점기 때 군용 조합이나 그런데 전부 관여하셨어요. 아버님이
가지고 있던 큰 집들이 몇 개가 있었는데 기와집에 2층을 지었거든요. 밑에 정원이 있고
뒤에 방공호가 있고 창고랑 계사가 있고, 토밭이 있고 그러니까 만 평이 넘었어요.
문_ 아버님의 사회활동은?
답_ 반정부 운동하는 돈을 다 댔어요. 삐라를 다 뿌리고. 아버님 친구 아들이 했는데 아
버님이 댄 걸로 알고 있어요. 토건 사업도 했어요. 일종의 건축업이죠. 하수도 같은 거
만들 때 지금은 플라스틱으로 관을 만들지만 그 때는 시멘트로 만들었어요. 그걸 만들어
서 하수도 넣는 사업 같은 거에요.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 등의 특징은?

답_ 아버님이 성격이야 조금은 과격하고 욕심도 많으시고 그런데 결심은 대단하시고. 예
를 들면 38선 넘어올 때 안내원 둘하고 나는 걸어오는데 두 놈, 세 놈 같은 건 내가 일본
사람 목검 있죠? 그걸로 내가 쓰러뜨릴 수 있다 그럴 정도로…. 운동도 많이 하셨어요.
문_ 6·25전쟁 도발 전 당시 남한으로 온 이유와 상황은?
답_ 지주이고 반동분자이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다른데 가라, 그렇게 추방하는 겁니다.
그럴 때 아까 말씀 드렸지만 북쪽이 아니고 남쪽이 해주 근방이에요. 거기 안가고 사리
원에 남아서 못가지고 나온 거, 차압 못한 것 그걸 좀 처분했어요. 그랬더니 너희들은
우리 명령을 어겼다고 하여 아버님을 잡으러 왔어요. 그러니까 어머님이 저한테 지금 밖
에 형사가 세 명이 와 있다. 그러니까 보따리를 주면서 너 이걸 가지고 서사리원으로 가
라고 했어요. 거기에서 해주까지 가는 철도가 있어요. 그 때 아버님이 재령에 가셨었는
데, 이모부, 큰 언니의 남편이 의사였어요. 아버지가 재령에서 오실 때가 됐으니까 집
에 들어오지 말고 누구하고 넘어가라 그러시더라고요. 그 때가 1948년 아마 4월 말쯤
될 거에요. 5월 초인가. 그래서 서사리원에 가서 나는 노는 척 하면서 보따리 들고 동생
둘 데리고 있으니까 아버님이 왔어요. 지금 집에 형사가 와 있으니까 집에 오지 말고 가
시라고 아버지한테 전하니까 대뜸 기차를 타고 해주로 왔어요. 그래서 숲에서 보니까 길
이 있는데 그게 38선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자동차가 지나가는데 지금이다 그래서 한 사
람씩 튀어 넘어 오니까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잘 왔다고 마중 나왔더랬어요. 보니
까 다음날이 선거 날이더라고요. 그래서 장단에서 기다리는데 아버님이 가질 않으시는
거야. 어머님하고 약속을 한 거에요. 어머님이 막냇동생이 두 살 됐을 때인데 걔를 업
고 오기로 한 날이 오늘인데, 그날따라 잠을 자는데 총소리가 나고 그랬어요. 근데 넘어
온 사람들 얘기로는 ‘어떤 어머님하고 애기가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님은
‘아마 엄마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그래
서 개성으로 오니까 개성에는 피난민 수용소라고 그래서 거기에서 텐트에서 소독도 하
고 그러고 일주일 있었어요. 일주일 기다리다가 봐도 안 오니까 서울로 왔죠. 서울에서
돈암동 갔다가 우이동으로 갔어요. 우이동 가서 있는데 한 달인가 얼마 있다가 막냇동생
업고 어머니가 오셨어요. 그래서 만났습니다.


납북 경위
<집 다락방에 숨어있었는데 정치보위부 3명이 와 대문을 두드린 후 집 안을 다 뒤져서 끌
고 감>

문_ 50년도에 전쟁이 났는데 피난은?
답_ 못 갔죠. 그때 당시에 밤새도록 포 소리가 났는데 우리는 믿었어요. 육남매중 제일
큰 애가 15살인데 걔를 놓고 내가 어딜 가냐 이거에요. 그래서 못 갔어요.
문_ 납치 시기와 증언자 나이는?
답_ 1950년 9월 22일 새벽에. 그 당시 저는 15살이었어요. 가회동 11번지 100호에
서. 난 못 봤어요.
문_ 납치자의 용모 및 신분 확인은?
답_ 정치보위부. 세 명이 왔대요.
문_ 납치 방법은?
답_ 안방에 문을 열면 다락이 있었어요. 거기 숨어 계셨어요. 가회동 파출소에 있었다
고 하여 가보자 해서 가보니까 벌써 없어요. 그래서 퍼뜩 생각나는 게 삼청공원이라, 바
로 밑의 여동생하고 지금 감사원 자리, 그 삼청국민학교 자리 있는데 가니까, 초저녁에
들어간 사람들을 수백 명을 쏴 죽였어요. 무서우니까 아버지 옷이 아니야, 아버지 없어,
그래서 그냥 왔는데 종로경찰서 밑에 경찰서장이 낙원동에 있었거든요. 거기서 시체 나
온 거 찾아다니고 해도 그 때면 뭐 얼굴 봐도 모를 때라 못 찾았죠.


납치 후 소식
<사리원에서 봤다는 소문 이외에 없음>
문_ 탈출해서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 또는 주변의 소문 등은?
답_ 어디서 봤다는 사람은 있는데 끌려가는 걸 사리원에서 봤단 사람도 있고 그런데 풍
문이지 정확하게는 모르죠.


납치 이유
<이북에서 넘어와 반동분자로 잡아갔을 거라고 추측함>
문_ 납치 이유는?
답_ 내가 추측컨대 물론 아버지가 이북에서 넘어와서 반동분자로 잡아가기도 했지만 가
회동 우리 집 뒤에 바로 임꺽정을 쓴 홍명희라는 분이 있어요. 그 사람이 북한에서 수상

을 했거든요. 그 사람 동생이 있었어요. 낮에도 한복을 입고. 홍명희는 그 때 월북을 했
는데. 아이고 이게 호랑이 굴에 들어온 것 같다고 아버님이 그랬어요. 그래서 이따금씩
가서 시국에 대해 물어보면 ‘아이 내가 그런 거 압니까. 내가 학자니까 공부나 하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인민군이 들어온 뒤 이승엽이 서울시장을 하니까 부시장을 하더라고요.
그 사람의 가족이 북으로 싹 넘어갔어요. 그 사람들이 이왕 가는 김에 붙잡아 가야겠다
하고 갔는지 예비검색대 걸려서 넘어온 놈이니까 반동분자니까 잡아가야 된다 이랬는지
모르겠어요.
문_ 납치 당시 납치자 또는 납북자가 한 말은?
답_ 아무것도 없고 그냥 대문 두들겨서 문 여니까 집 다 뒤져서 끌고 갔다는 거죠.


남은 가족의 생활
<그 집을 접수한 국방부의 총무과장에게 동네 사람들이 증언자를 위탁한 적이 있고, 어머
니가 국제시장에서 노점을 하는 등 고생함>
문_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지?
답_ 그건 없었죠. 단지 가회동에서 월북한 집이 3집 있었는데 집이 비어있으니 그 중 한
집을 국방부의 총무과장, 육군 대령이 접수하고 살았어요. 1·4 후퇴 때 동네에서 이북
에 넘어간 사람 말고 잡혀간 사람은 아버지뿐이 없는데 육남매를 다 데리고 피난 갈 수
없으니 나를 그 사람한테 동네에서 의탁을 했어요. 그래서 나는 군인들 따라 부산으로
피난 갔었죠.
문_ 남은 가족의 피난, 생계, 양육 등은?
답_ 고생 많이 했죠. 어머님이 부산에 내려와서 날 찾기 전에 거기에서 노점도 하고 그
랬어요. 국제시장에서.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나는 피해가 전혀 없었어요.


호적 정리
<호적 정리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막 끝났어요.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답_ 어머님은 금년이 만 3년이니까 아흔 네살에 돌아가셨습니다.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은?
답_ 많이 있죠. 우리 아버님이 9월 4일날 잡혀가시기 전에 쌀을 구하러 나가야겠다고.
그런데 가다가 돌아오시는 거에요. ‘여보 오늘은 안되겠어.’ 그래서 ‘왜요?’하고 물으니,
‘오늘이 9월 4일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구사일생이라는 거 몰라?’ 그러
셨어요. 예감을 하셨나 봐요. 그래서 결국 쌀도 못 구하시고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말씀
을 하시고. 또 고향에 계실 때 우리 집에 온실이 있었어요. 온실이 있다는 건 화분이 많
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경찰서장이나 군수나 교장선생님이나 이런 분들이 취임하면 꽃
을 우리 집에 가지러 오고 그분들이 인사를 드리러 오니까. 그런 생각만 나요.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를 어떻게 그리워했는지?
답_ 첫째는 아침마다 아버님 잡수시던 밥이에요. 밥을 퍼놓으시고. 대문을 안 잠그시
고. 그 다음에 조그만 집에 있지 말고 어디든지 아들 집에 편하게 살지 하고 자식들이 그
러니까 난 여기가 좋다고만 하셨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에서 납북자 가족의 생계 지원을 위해 취한 조치는?
답_ 없었어요. 국군포로도 그렇지만 납북자들 보내달라는 말 한 마디 없었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어느 정권이든 그게 참 정부로서는 할 일을 못했고 우리는 절대 수도를 포기하
지 않는다고 거짓말했고.


정부에 바라는 말
<북한 정권을 너무 모르는 현 사회가 안타까움>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뭐 정부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납북자에 대해 신경을 못 쓰니까 나는 사회가 너무 북
한을 몰라요. 북한 정권을 몰라요. 정말 그건 경험하면 안 됩니다. 끝입니다. 그걸 모르
는 게 안타까워요.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답_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임종하셨을 때 국장을 하던,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지게에다 매장을 하던 죽음은 거룩한 겁니다. 그런데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누가 임
종을 했으며 혹시 여유가 있으면 가마니라도 덮어드렸는지, 그게 제일 맘이 아파요. 근
데 그렇게 조상 묘를 잘 하시던 아버님인데…. 지금 형제들은 누님, 아직 83이에요. 살
아있고. 나 또한 좋은 사람 만나서 잘 살고. 내 밑에 여자동생은 지금 일산에서 잘 살고
있고 그 밑에 동생도 서울 상대 나와서 ROTC 1기 했습니다. 걔가 군복 입은 채로 삼성
물산에 공채 1기로 갔는데 군복입고 왔다고 이병철씨가 뽑았는데 그 해 조선일보 공채
로 들어가서 김대중 고문하고 입사 동기에요. 경제부장으로 편집국장, 논설실장을 아마
한 사람이 아마 조선일보 창간 이래로 처음일 거에요. 1941년생이니까 금년에 일흔 여
섯이고. 그 밑에 정희는 결혼 안했어요. 그러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잘 살고. 막내는 지
금 일흔 한 살인데 걔가 교회에서 장로로 있고 천우사에 같이 있었어요. 외국 선박 에이
전트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개인 사업하고 있어요. 아버지는 안 계셨지만 빈손으로
일어나서 삼형제가 괜찮게 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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