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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채록

납북자-이승관(증언자-이연상, 이헌상)
이름: 관리자
2017-01-26 11:09:16  |  조회: 1658


이 승 관( 李承寬)
2016. 2. 22. 채록


피랍인
생년월일: 1915년 11월 9일
출생지: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당시 주소: 서울 아현동 463번지 18호
피랍일: 1950년 7월 하순
피랍장소: 자택
직업: 상업 (양곡 도매)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4남매
외모/성격: 깐깐하고 강직한 성격


증언자
성명: 이연상, 이헌상
관계: 장남, 차남
증언성격: 직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동네 인민군 앞잡이가 아버지에게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따르지 않자, 전직 경찰이라는 사실을 꼬투
리 잡아 밀고함.
• 인민군 앞잡이가 내무서원 두 명을 데리고 와 집을 알려주는 것을 봤고, 내무서원 두 명이 집으로 와서
아버지를 경찰서로 데려감.
• 경찰서로 끌려갔다가 마포형무소로 옮겨졌는데 마포형무소가 폭격을 당하는 바람에 돌아가셨을 거라고
추측.


직업 및 활동
<경찰직으로 근무하다 미곡 도매상을 함>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이연상 답_ 이연상 이구요. 제 생년월일은 1936년 3월 29일, 음력입니다. 납북자가 제
아버님 되십니다.
이헌상 답_ 저는 이헌상 입니다. 생년월일은 1942년 10월 1일생, 양력으로요. 그리고
제가 차남입니다.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이연상 답_ 1915년 11월 9일 이구요. 성함은 이승관. 출생지는 경기도 화성시, 그때
는 화성군인데 송산면이라고. 제가 어머니 임신하셨을 때 서울로 이사 와서 그때부터 서
울에서 쭉 살았어요. 저는 6·25 나자마자 할아버지가 피난가라고 해서 피난 갔는데 저
희 어머니가 7월 7일에 출산하셨으니까 만삭이었고요. 그래서 어머님은 못 나가시고.
1936년에 서울 올라오셔서 아현동 463번지 18호에서 계속 살았죠.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이연상 답_ 아버님이 해방 전에는 중국에 가 계시다가 해방되고 나서 한국에 오셔가지고
경찰관 생활을 했어요. 한 6개월 하다가 박봉이라 그만두시고 상업을 하셨죠. 경성직업
학교라고 졸업은 못하고 중퇴하셨죠.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이연상 답_ 할머니, 할아버지 계셨고 저희가 4남매였는데 막내는 6·25사변 중 출생했
어요. 그래서 4남매가 되었죠. 다 한 집에서 살았죠.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이연상 답_ 주로 상업에 종사하셨기 때문에 그런 정당 활동은 없으셨어요.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 등의 특징은?
이연상 답_ 외모는 사진에 있으니까 보시면 알겠지만 깐깐하고 강직한 성격이셨죠.

까지 1km가 안돼요. 한 500m밖에 안돼요. 그런데 그 당시에 마포경찰서 울타리가 판
자 울타리였습니다. 정문은 전찻길 쪽에 있고 뒷문이 판자 미닫이였어요. 나는 친구들
하고 놀면서 쫓아갔죠. 아버님이 오랜만에 서울에 왔으니까. 그런데 그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더라고요. 그때 아버님이 아차 이게 끌려가는구나 하고 느끼신 것 같아. 그 두 사
람이 아버지 양쪽에서 걸어가고 팔짱은 안 꼈어요. 그러니까 미닫이문까지 딱 들어갔어
요. 저도 들어갔는데 한 서너 발짝 가니까 아버지가 뒤를 휙 돌아보시더라고요. 그 때 같
이 간 사람이 발로 내 가슴을 차요. 가라고. 그 때 아버님이 ‘너 빨리 가서 집에 가서 얘기
해라.’고 했어요. 다른 얘기는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니까. 내가 넘어지면서 울었어요.
그래서 내가 집에 가서 얘기를 하니까 이미 늦은 상태죠. 그때가 마지막이었어요.
문_ 납치자의 용모 및 신분 확인은?
이헌상 답_ 검은색 옷차림이었어요. 군복을 염색을 했는지 아무튼 자연복인데도 검은색
옷차림. 신사복은 아니고 편한 옷차림이었어요.


납치 이유
<이웃의 인민군 앞잡이가 자신들에게 협조 안한다는 이유로 밀고함>


문_ 납치 이유는?
이연상 답_ 할아버님 친구가 한약방을 했다고요. 거기 아들이 양아들인데 동국대학을
다녔어요. 그러다가 인민군이 들어오니까 완장을 차고 앞잡이 노릇을 하고 그래서 저희
아버지를 끌어다가 일을 같이 하려고 했는데 얘기를 안 들으니까 사상적으로 나쁜 놈이
라고 밀고를 해서 연행을 하고 경찰서에 들어간 이후로는 일체 소식을 몰라요.
문_ 피난을 가지 않으신 이유가?
이연상 답_ 아버지는 피난을 갔었죠. 그리고 저하고, 사촌 형하고, 작은아버지하고 남자
셋이 피난을 갔다고요. 피난을 갔었는데 인민군이 들어와서 민간인을 해치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 사정이 괜찮다 해서 가족을 추슬러서 같이 나오려고 그랬는데 함께
가려던 우리 고모부가 사정이 바쁜 양반이라 하루하루 늦추는 바람에 멈추다가 결국은 붙
들려가게 된 거죠. 일찍 오셨으면 괜찮았을 텐데. 집 안까지 들어온 게 아니고 체포하러
왔다고 한 것도 아니고 잠깐 얘기할 게 있다고 하며 불러내서 멋도 모르고 가자고 하니까.
가다 보니 경찰서까지 들어가니까 아차 내가 붙들려 온 거구나 하고 그때서 느끼신 거죠.


납치 후 소식
<마포경찰서에서 마포형무소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형무소가 폭격을 당하여
죽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뿐 아무 소식을 듣지 못함>


문_ 전쟁 중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이연상 답_ 할머니 할아버지는 노령이고 어머니는 갓 출산해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고
저나 작은 아버지나 사촌형은 남쪽에 피난 와 있었으니 속수무책이었죠.
이헌상 답_ 그 다음 날인데요. 어머니가 우리 막내를 낳으시고 집에서 계시는데,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입장이잖아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무방비 상태로 계시고. 어머니
가 그 다음날 경찰서를 갔어요. 갔는데 그 마포형무소가 앞에 있었어요. 거기에 넘겼다
는 거에요. 거기에 넘기고 나서 형무소가 폭격을 당했어요. 그 다음부턴 생사를 모르는
거에요. 어머니도 형무소까지 가셨다가 먼지만 뽀얗게 맞고 집에 돌아오셔서 그 뒤로는
무방비 상태였죠. 찾는 것도 그게 마지막이었죠. 마포형무소 자체가 폭격 당했으니….
문_ 당시 납북 피해가족 단체 결성에 참여했는지?
이연상 답_ 그런 건 전혀 없었어요. 단체가 있다는 얘기도 못 들어봤고, 이미일 이사장
님이 창립 총회할 때에나 관심을 가지고 그랬지 그 전에는 납북자 가족끼리 정보교환을
한다던지 그런 건 일체 몰랐어요.
이헌상 답_ 폭격을 당했으니 거기서 돌아가신 걸로 알았다고요. 그러니까 더 이상 어디
쫓아가서 알아 볼 데도 없고.


남은 가족의 생활
<식구들이 친척집에 흩어져서 학비를 벌어가며 어렵게 생활하였음>


문_ 적십자사, 정부나 관청 등에 신고는?
이연상 답_ 저희가 어려서 신고도 할 생각을 못했고 생활이 어려워서 저는 고모 집에 가
있고 동생은 외갓집에 가 있고 다 식구가 다 분산되어 겨우겨우 연명해나가는 정도고요.
학교도 제가 대학을 10년을 다녔습니다. 등록금이 없으니까 가정교사 해서 6개월 벌어
서 학기 등록하고, 이런 식으로 경제상황이 엉망진창이죠. 그러니까 사회활동이나 단체
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어요. 다만 군인 나갈 때 당시에는 납북자인지 월북자인지 구분
이 잘 안되잖아요? 그래서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월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억설도 있
고 그러지만. 제가 군대에서 장교생활을 했습니다. 장교가 되려면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되고 연고가 있으면 장교에서 불합격되고 그랬어요. 그런데 경찰서에서 가끔 신원조회
라고 할까 그런 조사를 하는데, 저도 관심이 있으니까 치안본부에 비밀서류 같은 거, 보
거나 공개하면 안 된다는 서류인데, 수사계통에 있는 사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우리 아
버지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냐고 물어보면 납북된 건 확실한데 당시 할머니 성명, 나이
이런 게 다 틀리더라고요. 경찰서에 보고하는 대로만 기록을 남겨놓으니까요. 그런 상
태지 우리가 찾을 생각이나 돌아오실 가망이 있다는 생각도 못했어요. 아주 저명인사 같
으면 끌고 가지만 별로 쓸모없는 평범한 시민이니까 귀찮으니까 그 이전에 총살시켰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태까지 살아왔어요. 데려가야 부담스러우니까.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이연상 답_ 할머니가 86세, 할아버지가 8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할아버지가 1960년도
에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1964년도에 돌아가셨어요. 나머지 가족들은 다 따로따로 살
았어요. 어머님은 그 집에 사시다가 나중에 우리가 모시고 살고. 어머니는 2008년도에
87세에 돌아가셨어요.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은?
이연상 답_ 특별한 얘기는…. 어머님도 결혼하고 나서 실질적으로 부부생활 한 게 몇 년
이 안돼요. 아버지가 초반에 중국에 가서 계셨고 해방된 뒤에도 사업하신다고 왔다 갔다
하시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같이 산 기간은 얼마 안 된다고요.
문_ 남은 가족의 납북자와의 추억?
이연상 답_ 추억이 별로 없고 제가 공부를 잘 했는데 시험 보면 학부모한테 소견을 써오
라고 그래요. 그래서 100점 만점에 98점을 맞으면 “만점을 못 맞아서 유감입니다.” 이
렇게 소견을 써주고 (웃음) 뭐 제가 중학교 입학한다고 하니까 축하한다고 설렁탕 한 그
릇 사주고 그랬어요. 부자간에도 접촉할 일이 별로 없었고 아버지도 장사한다고 바쁘니
까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할 기회가 없었어요. 생활도 넉넉하지 않으니까 가족 간에 회
식을 한다든가 하는 것도 없었고 집에서 어쩌다 마주치면 그런 정도지 그냥 덤덤하게 지
냈어요. 그래서 특별한 애정 같은 것을 못 느껴요. 어머님도 마포형무소 폭격됐을 때 아
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고, 가정주부로 뭐 그런 거에 대해서 악착같은 성품도 못되
고, 또 시부모 밑에서 시집살이 하느라 부대껴서. 또 아버지가 안계시니까 생활을 하셨
어야 했지요. 아현 시장에서 나물 가져다 팔고 생계유지에 급급하셨고. 시부모에 아이
들 넷에 톱밥 얻어다가 불 때서 밥해야 하고 그 이외에는 어떤 여념이 없는 거예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이연상 답_ 전혀 없었어요. 제가 장교생활도 하고 그랬으니까. 한번 경찰서 가니까 농담
을 하더래요, 순경이. 제가 고려대를 나왔는데 고대는 데모꾼 빨갱이가 많은데 너희 아
버지도 월북하고 그런 거 아니냐?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느냐 이랬죠. 그런 일 말고 연
좌제로 인한 피해는 전혀 없었어요.


호적 정리
<1980년대 중반에 호적 정리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이연상 답_ 호적정리를 제가 정리하면 살인행위다 이래서 장남이지만 안하고 있다가 몇
년도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애들도 커가고 이러는데 할아버지가 호주로 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도저히 안 되겠어서 행정서사를 찾아갔더니 자기네들이 이웃사람이 입증하는 거
있죠? 인우 증명인가 그거 하면 된다고 그래서 80년대 중반인가 가서 호적정리를 했어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에서 납북자 가족의 생계 지원을 위해 취한 조치는?
이연상 답_ 전혀 없었죠. 그런 예산도 없지 않아요? 누가 지원받는다는 사람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저희는 주로 친척들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큰고모 댁에서 도움을 받
고 동생은 외갓집에서 도움을 받고 동생들도 외삼촌이 많이 도와주셨죠.


정부에 바라는 말
<요즘 젊은 세대가 전쟁의 무서움을 모르는 게 안타까우며 이들에게 살아있는 반공교육
이 이루어져 전쟁과 공산당에 대한 경각심이 길러졌으면 함>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이연상 답_ 우리는 6·25라는 걸 겪은 세대라 공산당 이라는 게 얼마나 무섭고 사악한
지 알지만 정치인이나 젊은 세대들 보면 너무 공산당을 동일 민족이라는 것만 강조하고,
소위 적화사상이 많이 퍼진 것 같아서 우리 같은 납북자 입장에서 억울하고 화가 난단
말이에요. 그런 것이 올바르게 후세들에게 전달되어서 우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
하고 공산당이 무섭구나 하는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이 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
다. 지금 세월호 사건도 지나치게 정부에 대한 투쟁수단으로 악용되고 있잖아요. 그런
게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이헌상 답_ 제가 거제도에 전쟁기념관을 가봤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납치를 당하셨는지
이북에서 노동을 하실지 모르겠지만 전쟁기념관 가서 느낀 게 뭐냐면 그 수용소에서 서
로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게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과연 그런 반공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교육이 거제도에서 공개적으로 초중고 대학생들에게까지 일반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들었어요. 우리가 비참하게 자랐어요. 비참하게 살아서 정말 누구 국화빵
하나 먹는 거 얻어먹지도 못하고. 저도 공기관에 들어갔지만, 거래소 들어갈 때도 신원조
회가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잘 마치고 나왔어요. 그런 데에서 아무 지장 없이 지냈기 때
문에, 그런 부분은 우리 형제들이나 자식들한테 떳떳해요. 그래서 다시는 전쟁이라면 치
가 떨려요. 제가 시골에 갔을 때, 할아버지가 한학 공부를 하셨는데, 제가 글방에서 조교
노릇을 했어요. 피난 생활을 그렇게 했어요. 가서 눈칫밥도 먹고, 한문 가르쳐주면, 보리
한 되, 쌀 한 되, 이렇게 받아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6, 7년 연명을 했어요. 그런 것을
생각 할 때는 전쟁이 정말 무서운 거예요. 지금 저희가 납북 가정이라고 경제적인 여건이
나 뭐나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가 웬만큼 커서 자식들 잘 가르친 것만 해도 고맙죠.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생존하셨으리라는 희망은 없고, 다만 영혼이라도 편히 쉬셨으면 하는 맘>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연상 답_ 지금 살아계셔도 연령으로 봐서 100세가 넘으실 거니까 살아 계실 리는 만
무하고 돌아가셨더라도 하늘나라에 계실지 지옥에 계실지 모르지만 한이 많은 생을 끝
내셨을 테니까 영혼이라도 축복받는 곳에 가 계셨으면 좋겠어요. 생존해서 상봉할 거란
건 시대적으로 너무 지나서 기대도 안하고 기대해 봤자 헛기대고 그렇게 생각해요. 다만
이미일 이사장님 같은 분이 사재 털어서 키우신 거 아닙니까? 이런 유지들이 나와서 우
리가 납북자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유엔에도 가시고, 통일부에서도…. 이런 복지가
들이 많이 나와서 이런 불행한 사태가 다시 발생하지 않는 그런 사회가 왔으면 하는 것
이 희망입니다. 항상 이사장님에게 고맙게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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