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사업증언채록

증언채록

납북자-손영진(증언자-손영애)
이름: 관리자
2017-01-24 12:42:19  |  조회: 1355


피랍 정보 등재 명부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
( 공보처 통계국 , 1950)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
( 공보처 통계국 , 1952)
6•25 동란으로 인한 피랍치자 명부
( 내무부 치안국 , 1954)
실향사민 등록자 명단
( 대한적십자사 , 1956)

피랍인
생년월일: 1924년경
출생지: 모름
당시 주소: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115번지
피랍일: 1950년
피랍장소: 서대문 사거리
직업: 미 대사관 직원
직계/부양가족: 부모, 배우자, 4남매, 누나 2, 동생 1
외모/성격: 활발한 성격. 왜소하지는 않은 편.


증언자
성명: 손영애
관계: 딸
증언성격: 직접증언 간접증언


특이사항(납치주체/상황/원인)
•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만주에 가서 기술을 배우고 와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다 신촌 집 뒤에 방공호에 숨어
지냈는데 누나가 총에 맞아 병원으로 갔다가 누나의 시댁에 모시고 나오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붙들려 감.
• 동행하던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젊고 씩씩해 보이는 납북자만 끌고 감. 미아리고개에서 며칠 동
안 시신을 찾고자 했으나 찾지 못함.


직업 및 활동
<YMCA 체육코치 및 서북청년단 단장을 역임>
<연희전문학교를 나와 만주에서 기술을 공부하고 들어와 미대사관에서 근무하였음.>
문_ 증언자의 성함, 생년월일 및 납북자와의 관계는?
답_ 저는 손영애입니다. 납북되신 분은 저희 아버지구요. 저는 음력으로 1947년 2월 8
일생이에요.
문_ 납북자의 성함, 생년월일, 출생지 및 거주 지역은?
답_ 아버님 성함은 손영진이구요. 생년월일은 제가 기억이 안 나고, 사셨던 곳은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 115번지. 살아 계셨으면 93세십니다.
문_ 납북자의 당시의 직업과 출신 학교는?
답_ 아버님이 학교는 제가 알기로 연희전문학교를 다니셨다고 하고요. 옛날 문교부장관
백낙준씨의 급사도 하시고. 그렇게 생활하셨대요. 그리고 아버지가 나중에는 중국, 만
주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시고 그래서 중국어도 잘 하시고 언변이 좋고 수단이 좋으셨대
요. 그래서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어요. 거기에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 거기 출입증이 있어요. 얼핏 듣기로 기술자…. 중국에서 기술을 배
워서 2대 독자 외아들이고 9남매 중 아버지 혼자 살아남아서 군대를 안 가고 그랬어요.
그 당시 아버지가 미 대사관에 근무하실 때가 27살쯤 되셨죠.
문_ 납북 당시 가족 구성원과 수는?
답_ 그 당시 제가 3살인가 4살 때였고 동생으로는 쌍둥이 남매가 있었대요. 그리고 뱃
속에 아기가 또 있었고요, 6·25당시에. 아버지가 저하고 쌍둥이는 아셔도 뱃속에 아
기는 모르시고요.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동기간에 의리도
있고 챙기고 해서…. 아버지하고 누나들(고모들)이 있죠. 그 당시에 9남매에서 다 죽고
아버지의 누나가 둘, 동생이 하나 이렇게 있었어요. 아버지가 외아들이시고. 전쟁 당시
에 누나 한 분도 행방불명 되셨어요.
문_ 납북자의 경력 및 사회 활동은?
답_ 청년단은 모르겠어요. 그냥 적십자 회원증은 있더라고요.
문_ 납북자의 외모 및 성격 등의 특징은?
답_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성격이 아주 활발하고 그렇게 알고 있어요. 외모도 왜소하거나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납북 경위
<집 근처에 방공호를 파고 이웃들과 숨어 지냈는데 납북자의 누나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총에 맞자 납북자의 아버지와 함께 밖에 나갔다가 서대문 사거리에서 인민군에게 끌
려감.>
문_ 6·25 전쟁 도발 전 당시 상황은?
답_ 동네 분위기가 좋았대요. 지금 집이 세브란스병원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래서 앞마
당에 우물도 있고, 고목나무가 마당에 있고요.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이 나요. 동네 분위
기가 이웃끼리 재미있게 지내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직장 다녀오시면 저를 안고 우리
영애 같은 딸만 낳아라 하고 안고 다니시면서 동네 어른들한테 가서 그랬다고 해요. 지
금 세브란스병원이 들어서면서 그 집을 연세대에 팔고 영등포로 이사 갔어요. 그 때가
제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이었던 것 같아요. 전쟁 끝나고 몇 년 후에.
문_ 피난은?
답_ 처음엔 안 갔다가 나중엔 가셨대요. 아버지가 신촌 집 뒤에 방공호를 팠대요. 그 속
에 동네 사람들하고 다 같이 들어갔겠죠. 그렇게 잘 숨어 있었대요. 근데 둘째 고모 한
분이 남편이 공군 조종사였어요. 그래서 고모부가 나갔어요. 그러니까 군인 가족은 바로
총살이라고 해서 고모더러 너는 친정에 가서 숨어 있으라고 그랬대요. 고모가 친정에 와
방공호 속에 우리 아버지하고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엄마하고 같이 있었는데 그 고모가
어느 날 화장실을 갔다 와 장독대에서 손을 씻다가 총알 파편이 네 군데를 뚫고 맞은 거
에요. 갈빗대 네 군데를 맞고 안방에 가서 피를 흘리니까 가만히 있어야 할 텐데 아버지
가 뛰쳐 나오신 거에요. 누이동생 때문에 할아버지하고, 아버지하고 병원에 데리고 다니
는데 병원에서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요? 가슴하고 네 군데에 파편을 맞았으니까 못 고
치고 죽었어요. 죽어도 시댁에 가서 알려야 된다고 그래서 시집이 효자동이었는데 거기
사돈어른 댁에 가서 고모를 내려놓고요. 사돈댁이 지금 바깥에서 인민군들이 난리니까
아버지더러 좀 있다가 가라고 그러셨대요. 아버지는 신촌에 남은 식구들 걱정이 되니까
나간다고 하시고. 그래서 다친 것처럼 빨간 약을 바르고 싸매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온
거죠. 나오는데 서대문 사거리쯤에서 인민군들이 붙들어 간 거죠.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
으니까 그냥 가시라고 하고 거기서 할아버지하고 아버지하고 생이별을 한 거죠. 아버지
는 인민군들에게 강제로 끌려가고 할아버지는 집으로 가시라고 해서 이별이 된 거죠.

납치 이유
<아무 말 없이 끌고 가 정확히는 모르나 젊고 씩씩해 보여 납북된 것으로 여겨짐.>
문_ 납치 이유는?
답_ 그건 모르죠. 할아버지도 그건 모르죠. 왜냐하면 아버지가 젊고 씩씩해 보이고 그러
니까 써먹으려고 끌고 간 것 같아요. 중국말도 잘 하고 하니까 데려간 것 같다고 할아버
지 할머니는 말씀을 하셨어요.
문_ 납치 당시 납치자 또는 납북자가 한 말은?
답_ 따로 한 말은 없구요.


납치 후 소식
<미아리 고개에서 시신을 일일이 확인해보았으나 찾지 못했으며 그 후 아무 소식도 못 들음.>


문_ 전쟁 중 납북된 가족을 찾기 위한 노력은?
답_ 할머니 할아버지가 진짜 진지도 제대로 안 잡수시고 미아리 고개에서 웬만한 사람은
다 죽이고 쓸 사람은 데리고 갔다는 소릴 들으시고 미아리 고개에 가서 일주일 동안 시
체를 덮어 놓은 걸 다 들춰보셨대요. 그런데 그 시체 속에서 아버지를 찾지 못하니까 우
리 아들은 그 놈들이 써먹으려고 데려갔다고 우리들한테 말씀을 하셨죠. 그 이후로는 전
혀 소식을 못 들었죠.
문_ 아버님이 잡혀가시는 상황을 간단하게만 말씀하셨나요?
답_ 네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서대문 사거리에서 뭐라고 하고 끌고 가면 반항이라도
했을 텐데 그냥 붙들어가니까 반항도 못하시고요. 할아버지는 노인네니까 그냥 가시라
고 했대요. 그래서 동네사람들도 하는 말이 그 놈들이 할아버지는 연세가 있으셔서 집으
로 가시라 그러고 아드님은 써먹으려고 그랬을 거라고.


남은 가족의 생활
<쌍둥이 동생 남매는 폐결핵으로 죽고 장녀와 뱃속에 있던 유복자는 생존해 있음. 어머니
가 34살에 일찍 병으로 돌아가시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생활했는데 할머니도 이웃

주민 집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몇 년 후 할아버지도 돌아가시자 14
세의 장녀가 가장이 되어 막내 동생 학비를 벌고 어렵게 생활함.>


문_ 피난은?
답_ 그러고 나서 갔대요. 수원인가 어디까지밖에 못 갔다고. 아들 없는 상태에서 나머지
가족들이 며칠 더 있어도 괜찮을까 했는데 그 다음에 인민군이 쳐들어와서 그 땐 어쩔
수 없이 할아버지하고 할머니하고 다 같이 수원 어디까지 피난을 갔다고 하시더라고요.
가면서 동생 남매는 제대로 먹지 못해서 폐결핵으로 다 죽었죠. 유복자는 태어났죠. 걔
는 지금 살아있고요.
문_ 남은 가족의 피난, 생계, 양육 등은?
답_ 그 집을 팔 때 학교에서 영등포에 집이 좋지는 않은데 집 두 채를 산 것 같아요. 하
코방 이지 그 때는. 그래도 세는 놓고 그런 식으로 산 것 같아요. 할머니하고 살다가 엄
마가 병이 드셨어요. 남편을 기다리다가. 늑막이 안 좋아 폐결핵으로 34세에 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 제가 14살인가, 12살인가 그 정도 됐을 거에요. 엄마가 시부모님하고 같
이 살다가 아프니까 집 하나를 팔아서 썼겠죠. 그렇게 하고 피난 갔다 와서 저희 할머니
가 어떻게 생각하면 속상한 게 남 좋은 일 하다가 돌아가셨어요. 동네에 이북에서 넘어
온 남자가 있었어요. 아저씨, 아저씨 했죠. 그 사람이 재혼해서 여자를 얻어 둘이 살았
는데 할머니가 우리 아들은 납북되서 넘어갔으니까 그 아저씨를 그렇게 아들같이 생각
하고 대했단 말이에요. 그랬는데 그 분이 어떻게 해서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 아줌마
가 우리 집에 와서 할머니가 천주교를 믿으셨는데 묵주기도를 해주시면 무섭지가 않더
래요. 우린 어렸을 때 몰랐는데 그 아줌마가 매일 저녁이면 우리 할머니를 모시러 오는
거에요. 주무실 때 기도해달라고요. 그래서 할머니가 그 집에 가서 기도를 해 주시는 거
에요. 할머니는 당신이 어디 딸네 집에 가시려고 해도 옷을 장 위에다가 꺼내놓으시고
차비도 놔두시고 그랬어요. 그 날 저녁에도 한 보름쯤 됐어요. 그런데 그 날 따라 가시
는 게 싫어요. 그래서 할머니 이제 그만 가라고. 우리도 어린데 매일 거기 가서 주무시
니까 싫더라고요. 거기 가서 주무시는 거 그만하시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젊은 여자
가 남편이 죽고 나서 신경 써야 했는데 예전엔 전부 연탄을 썼잖아요. 구들방이 꺼진 거
에요. 그걸 모르고 저녁에 불을 갈아 넣은 것 같아요. 이튿날 여섯 시가 넘었는데도 할
머니가 안 오셨어요. 그래서 가서 할머니 할머니 하니까 안에서 신음소리가 나는 거에
요. 할머니 할머니 하고 문을 따고 들어갔더니 저희 할머니는 옆으로 드러누우셨는데 이
미 돌아가셨어요. 그 아줌마는 입이 딱 붙어서 신음소릴 하는 거에요.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 거에요.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시고. 울면서 뛰어 나왔더니 동네 사람들이 다 나왔
죠. 할아버지가 와서 무슨 소릴 하냐고 해서 할머니 돌아가신 것 같다고 했죠. 그 당시
영등포경찰서에서도 오고 증언도 했어요. 그 여자는 병원에 실려 가서 살아나왔어요.

그 당시 반상회를 하고 그러면 우리 집 걱정 때문에 통장 반장이 다 우리 안방에 모여서
그 여자보고 우리를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하라고. 당신도 죽었을텐데 영애 덕분에 산 거
아니냐고 했어요.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만 알겠다고 해놓고 나중에는 어디로 가버렸
지. 남편 그렇게 되니까. 그렇게 그 사건은 끝났고요. 할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셔서 동네
사람들 꿈에 나와서 억울하게 죽었다고 동네 어른들이 그러시더라고요.
할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나니까 엄마도 그렇지만 진짜 대들보가 끊어진 것 같았죠. 제
가 할아버지하고 살았는데 엄마하고 동생하고 이렇게 되니까 저희 고모부가 그 당시 집
을 팔아서 어떻게 하고 우리 동생은 삼촌한테 보내고 우리 할아버지는 큰 딸이 있으니까
큰 딸한테 보내고 저는 자기가 맡겠다고 했어요. 고모부가. 그렇게 해서 식구를 분산하
려고 그랬던 거에요. 그걸 제가 싫다고 했어요. 나는 그냥 쌀을 좀 대주던지 그러면 동
생하고 할아버지하고 집에서 살겠다고 그래서 집 하나는 팔았는지 그랬고 방 두 개를 세
줬어요. 그리고 조금만 도와주면 살겠다고 그랬죠. 그렇게 6·25 지나고 나서 공군 조
종사였던 고모부가 와보니까 자기 색시가 죽었잖아요? 딸 하나 있어요. 걔도 지금 살아
있죠. 집에 고모부가 한 번 오셨어요. 자기도 부인이 죽고 그러니까 오기도 쉽지 않았던
걸로 알아요. 우리 집에 쌀 한 가마를 보내줬어요. 그 때는 쌀이면 최고지 뭐. 그래서 그
당시엔 다 어려웠는데 뭘 했겠어요? 그래서 할아버지하고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2년 후
에 또 돌아가셨죠. 남매가 남아서 고아가 됐죠. 그나마 방 두 개를 세 줬는데 주인이 어
리니까 돈을 안 내잖아요. 내가 파출소까지 쫓아갔지. 돈을 안 준다고. 그랬더니 경찰
이 왔는 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랬는데 동네 아저씨가 집을 팔라고 그러는 거에요. 그 때
제가 16살쯤 됐나? 그렇게 좀 컸어요. 그래서 내가 이 집을 팔아서 전세를 두 개 얻어서
하나는 월세를 놔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학교는 초등학교 나오고 엄마 돌아가시니까 중학교를 다니기가 그래요. 제가 좀 크면서
야간으로다가…. 그래도 엄마가 계셨으면 엄마가 판본 방직이라는 곳에서 사무를 보셨
어요. 사촌 오빠가 재무과장으로 계시고. 그 당시 괜찮은 곳이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저
를 못 가르친 바람에 야간으로라도 배워야겠다 그래서 공립 야간 학교를 다녔죠. 그러고
동생은 끝까지 책임졌죠. 제가 사실은 더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동생 뒷바라지 하느라고
말았어요. 남동생을 중학교라도 가르쳐야 되겠다 생각해서 가르쳤어요. 그래서 제가 집
을 팔아서 전세 두 개를 얻었어요. 하나는 월세를 놓고 그러면서 제가 공장에 들어가기
시작했죠. 그런데 야간에 일하는 게 힘들어서 나중에 그만두고 제약회사를 들어가게 됐
어요. 거기 다니면서 동생은 제가 중학교까진 보내야 되지 않겠나 해서 보내놓고요. 그
동안 저희 외삼촌이 사업을 하셨는데 많이 도와주셨어요. 약값도 대고. 외삼촌이 영등
포에서 한일 주물 사장으로 잘 사셨어요. 둘째 외삼촌이 엄마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걸
대셨어요. 우리 크고 나서 큰외삼촌이 쌀도 사주시고. 외갓집에서 저 결혼할 때도 외숙
모가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셔서 결혼도 하게 됐고요. 동생이 하나니까 동생도 중학교 졸
업하고 외삼촌이 기술 가르치라고 그래서 데려다가 가르쳐서 잘 배웠어요. 일찍 서울에

서 사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망했는데 제가 잘 나갈 때 가족협의회에 뭐 좀 해라 그랬는
데 지금은 내가 도와줘야 될 형편이 됐어요. 지금은 어려워요. 그런데 그 전에 제가 이
단체를 알았더라면 동생이 후원을 했을 수도 있는데. 건강은 해요. 할머니가 돌아가시
면서 유복자 손주 잘 키우라고도 하셨고 아버지를 닮아서 그런지 배짱이 보통 배짱이 아
니에요. 그래서 34살 때부터 조선소의 기계 관련 사업인데, 주식회사로 120명을 거느
리고 그러다가 외환위기 때 부도나서 쓰러졌어요. 동생은 지금 예순 일곱이에요.


연좌제 피해
<없었음>
문_ 연좌제 피해는?
답_ 그런 건 없었어요. 아버지가 군대를 안 가셔서 그런가? 전혀 없었어요.


호적 정리
<몇 년 전에 사망 신고함.>
문_ 납북자 호적 정리는?
답_ 지금 사망으로 되어 있어요. 몇 년 전에 사망으로 신고한 것 같아요.
문_ 남은 가족들의 현재 생존 여부는?
답_ 저하고 동생하고 살아 있는 거죠.
문_ 남은 가족들이 납북자에 대해 묘사한 말들은?
답_ 어머니, 아버지가 혼내주려고 자녀들 훈화할 때 아버지가 벽 속에다가 저를 감추고
자신을 대신 때리라고 하면서 막고 그렇게 하셨다는 거. 굉장히 자상하셨다고 들었어
요. 어머니, 아버지는 중매로 만나셨대요. 우리 엄마가 참봉 딸이라고 했던가 그랬는
데 외할아버지가 철도 공무원이셨고 중매로 만났다고요. 새절에서 빨래터에서 빨래를
널고 있는데 할머니가 가서 보라고 했나 봐요. 그런데 엄마가 좀 뚱뚱하셨대요. 아버지
가 색시가 조금 뚱뚱하다고 얘길 하니까 외아들이고 맏며느리인데 뚱뚱하면 어떠냐고
그랬대요.


정부의 노력
<없었음>
문_ 정부에서 납북자 가족의 생계 지원을 위해 취한 조치는?
답_ 없었죠. 할머니 할아버지하고 어린 남매가 아들이 납치됐다 하니까 밀가루 배급인
가? 그런 거 정도는 있었어요. 많이는 아니더라도 어쩌다가 극빈자라고 해서 받긴 했어
요. 엄마가 반장을 했는데도 잘 모르겠네요.


정부에 바라는 말
<납북자가 90세가 넘었을 현재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여 유골이라도 돌려받았으면 하
는 마음이며 건립중인 기념관이 완공되어 후손들이 역사적 사실을 잘 알게 되면 좋겠음.>
문_ 현 정부, 대한민국 사회에 바라는 점은?
답_ 어렸을 때는 보상도 생각하고 그랬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바라는 건 없어요.
그 당시만 해도 15년 전만 해도 아버지가 일흔 일곱이셨을 때니까 살아계셨을 수도 있
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없고 지하에 계
신 분들이 도와주셔서 그런지 저희 잘 살았고 제가 결혼해서도 그렇고 저희 아들 딸 다
잘 되어서 지금은 그런 게 없어요. 단지 나이가 먹으니까 눈물이 더 나는 거야.


피랍인에게 전하는 말
문_ 피랍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
답_ 보고 싶죠. 딸을 낳아도 영애 같은 딸 낳으라고 하던 아버지 이제는 보고 싶죠. 지
난 번에 영상 채록 한다고 그래서 작년에 잠깐 편지를 쓴 거에요. 아버지 보고 싶은 얘기
를. 내가 그냥 생각 나는 대로 썼다고.
“사랑하는 아버지. 돌아가신 할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딸을 낳아도 우리 영애 같은 딸만
낳으라고 하시며 저녁에 퇴근하시면 딸을 안고 동네방네 자랑을 하셨던 아버지. 너무 보
고 싶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께서도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세월이 너
무 흘러 살아 계실 거라고 믿지는 않겠습니다. 혹시나 살아 계시다면 꿈에서라도 아버지
모습 한 번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저에겐 너무 생소했습니다. 그래서 막상

아버지에게 영상편지를 쓰려 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더 이어 나갈 수 없군요.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아버지를 많이 그리시다가 34세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어요. 그리고 저는
14세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유복자가 된 어린 동생과 함께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제 저도 살아 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아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아버지께서 납북되신 것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살
아계시다면 감사하고 돌아가셨다면 하늘나라에서 저희 남매를 지켜봐 주시고 편안히 잠
드세요. 2015년 2월 10일 아버지 딸 영애.”
제가 보면 살아 계시다는 건 희박하잖아요. 그래서 지금은 진짜 정부에서 유골이라도 돌
아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기념관이라도 세운다고 하니까 우리는 아니더라도 대
한민국에 길이 길이 남을 후손들이 이런 역사가 있었구나 하는 걸 볼 수 있게 되어서 그
것만이라도 지금은 만족하지 않나 그런 생각입니다. 지금은 고아원이 잘 되어 있잖아
요? 저희 피난 다녀와서는 그런 것도 없었잖아요. 지금은 어쨌든 지난 세월, 이렇게 저
렇게 해서 잘 살은 거 감사하고요. 할머니가 내 생에는 못 만나고 너희들은 어리니까 너
희들 크면 남북통일이 되어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저도 만나기
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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