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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오헌식 (증언자-오세영)
이름: 관리자
2013-09-16 11:03:45  |  조회: 2606


060118A 오헌식 / 2006. 1. 18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오헌식), 사진2(증언자:오세영)

피랍자
성명: 오헌식 (吳憲湜)
생년월일: 1899년 4월 8일생(서울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용산구 남영동 14번지
피랍일: 1950년 8월 1일경
피랍장소: 서울시 마포구 북아현동
직업: 서울 지방법원 영등포 경찰소 주재 치안관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매
외모 및 성격 : 깔끔한 외모, 원만한 성격

증언자
성명: 오세영(1936년생)
관계: 아들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한강 다리 폭파로 피난을 못 가고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친척집에 일가족이 피신해 있다가 그 지역 좌익들에게 발각, 8월 1일경 두 세 명의 내무서원이 찾아와 피랍자에게 총을 겨누고 조사할 것이 있다며 연행해 간 뒤로 소식 없음. 피랍자는 당시 고위공무원으로 사상범들을 재판하던 서울 지방법원 영등포 경찰소 주재 치안관 이었음.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피랍자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납북자 명예회복>









“ 아버지와 같이 묶였던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얘길 했대요. 아버지는 고문 당해서 그런지 발이 상당히 안 좋으셨대요. 그 때 여덟 명씩 묶었는데 한 줄에서 한 명만 탈출해서 다 쏴 죽인대요. 그러니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고 하고 간 거야.

“도리어 군인이면 나았을지 몰라. 우리는 고급 공무원인데 자식들도 공부해야 되는데 일절 몰라. 지금이라도 서류라도 찾아볼라 하면 ‘안보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거야. 도움이야 십 원 하나 있을 수 없고 그러니 가난하게 사는 거야. 나가서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동서기를 하든지. 공부 마치기도 힘든 겁니다.”

직업 및 활동

<서울지방법원 영등포 경찰서주재 치안관(재판관)근무, 현재 근거 자료를 찾고 있으나 전쟁중 소실된 것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음>

Q: 전쟁 당시 어떤 일을 하셨는지?
A: 아버지는 서울지방법원 영등포 경찰소 주재 치안관(재판관)입니다. 그 전에는 경기도 연안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1949년에 서울로 전근 왔어요.

Q: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셨던 것인지?
A: 저희 아버지 같은 경우는 영등포, 안양, 포천, 의정부 등 대 여섯 개 지방을 맡아요. 맡아서 순회 다니면서 경찰이 잡아온 사람들, 주로 공안 사범들을 재판했어요. 지방 법원에 가보면 비슷한 일을 했던 사람들 기록이 있는데 아버지 것은 지금 없어요. 찾는 중입니다. 기록이 1962년부터 갖고 있대서 그 전 것은 찾기가 힘들대요. 그래서 인사발령을 내려면 뭐가 있어야 되는데 서류가 옛날 것이라서 찾는 게 어려운 모양이에요.

납북 경위

<한강 다리 폭파로 피난을 못 가고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친척집에 일가족이 피신해 있다가 그 지역 좌익들에게 발각, 8월 1일경 두 세 명의 내무서원이 찾아와 피랍자에게 총을 겨누고 조사할 것이 있다며 연행해 간 뒤로 소식 없음>

Q: 어떻게 납북이 되셨는지?
A: 우리는 6.25 전쟁이 나고 한강 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피난을 못 갔어요. 그러면 그 때 저의 부친의 경우 주로 담당 사건이 공안 사범이에요. 정확히 얘기하면 빨갱이냐를 색출하는 작업이었는데, 그런 일을 했으니 아무래도 죄수들이 석방돼서 보복하러 찾아올 거 아닙니까. 그래서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친척집으로 가족들이 모두 피했어요. 그 때는 빨갱이들이 동네마다 설치고 장대 들고 다니고 집집마다 사람 내놓으라고 하고, 갖은 나쁜 소리를 다할 때니 우리가 도망갈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도망갈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다른 데 가도 그 동네에 또 빨갱이가 있다 이거야. 못 보던 가족이 와 있는데 신고 안 하겠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잡힌 거야. 정치 보위부인지 내무서원인지 두어명 와서 권총을 딱 들이대는 겁니다. 우리가 쫓아가면 오게나 합니까? 가면 소리지르고 (가라 하고) 그 때부터는 알 길이 없는 거죠. 1950년 8월 1일경이에요.

Q: 밀고를 당한 것인지?
A: 그거는 저희도 모르죠. 그 때 당시는 서로 대립하던 시대고, 우리가 무서워서 관사에 살질 못했어요. 가면 암살당하는 거니까 밖에 조그만 집을 얻어서 출퇴근만 했었죠. 그러다 결국 잡히고 난 뒤는 알 길이 없어요. 귀동냥, 입동냥으로 해서 서울시립도서관에다 가뒀다고 해요. 그 앞에 가보면 가족들이 참 많아요. 3층인가에 조그만 창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로 잡힌 사람이 한 사람씩 얼굴을 내밀고 막 뭐라고 쓰고 해요. 가족들 보라고. 혹시나 자기 가족이 얼굴을 비칠까 해서 항상 가족들이 엄청 많았어요. 그러나 그 때 당시 저희 입장에서는 말도 못하고 또 가족이 다칠까 봐 더 염려도 됐고. 그렇게 가봤지만 아버지는 못 봤어요. 나중에 수복되고 집에 와 보니 아무 것도 없어요. 기르던 강아지도 없어지고, 집안에 들어와 뒤지고 서랍 다 열어놓고, 집에 있는 서류란 서류는 전부 가져간 거야. 사진도 없고, 재판서에서 서기들하고 찍은 것도 한 장도 없어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다 가져간 거죠.

Q: 집안 물건도 많이 강탈해갔나요?
A: 그 때야 (물건이야 뭐 가져갔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죠. 저희 아버지가 살아있느냐 죽었느냐가 더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가족의 심정이란 게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홧병이 나고 저희들은 언제나 아버지가 돌아오실까 해서 문소리만 나도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것 같고 그러니 좌우간 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죠. 1950년 8월 1일 쯤 돼요

Q: 납치과정에서 폭력은?
A: 아버지한테 총을 겨누고 가서 조사할 것 있다고 가자고. 누구인 줄은 벌써 알죠. 누구 아닙니까 하면서 이름 딱 부르면서 손들어 이거야. 식구들 울어도 그 사람들이 오게 합니까 어디.

납치이유

<대한민국 고위공무원으로 특히 사상범들을 재판하던 치안관이었음>

A: 우리는 전쟁 중에 강제 납치된 거고, 대한민국에서 공무원 생활하는 각 층의 사람들이 잡혀 간 거야. 잡아갔으면 다른 사람들이야 거기 워낙 인력이 없으니 고급 인력들은 갔다가 썼겠지. 그러나 사법부나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자기네 잡아 넣고 하던 사람들인데 그걸 쓰겠어요? 그래서 저는 그 동안 일찍 죽었을 거라 이거야. 고문에. 여기서 검 판사 하던 사람들을 곱게 모시겠어요? 자기네하고 상극인데. 납북이유는 자기네들 공산당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유 민주주의를 택해 고급공무원을 한 사람은 잡아간 거죠. 그러나 제가 알기론 공산당도 이상하게 하는 놈들이에요. 막스 이론에 근거한 것도 아니고 결과적으로는 자기네들 이데올로기와 다르면 죽이는 거에요. 어떻게 죽이느냐? 구덩이 파놓고 죽이는 거에요. 인천 상륙 작전해서 들어올 때 저희는 군인들을 쫓아 서대문 형무소로 갔어요. 가봤더니 없고 그동안 밖에 죽여 놓은 것이 시체가 40구 정도 되더라구. 그리고 거기 살아있는 사람 얘길 들으니 고문도 심했고. 이북으로 끌고 갔다는데, 그 때 밀리면서 식량 사정도 안 좋았다는데
살려나 줬겠습니까?

납치 후 소식

<납북되던 중 도망한 청년을 통해 파주 금촌까지 간 것은 파악했으니 그 이후 경로는 알 수 없음>

Q: 들려오는 소식이라도 없었는지?
A : 같이 여덟 명씩 묶였던 경찰이 우리 집에 와서 얘길 했대요. 아버지는 고문 당해서 그런지 발이 상당히 안 좋으셨대요. 그래서 공습할 때 튀고 하는데 저희 아버지는 53세 늙은이니까 뛰질 못하고 했는데 총살 당했을 지 모른다 이거에요. 그 사람은 파주 금촌서 탈출했대요. 그 때 여덟 명씩 묶었는데 한 줄에서 한 명만 탈출해서 다 쏴 죽인대요. 그러니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하고 간 거야.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재산을 줄여가며 연명함. 가족을 잃어 맺힌 한 때문에 피랍자의 아내는 홧병이 걸리고, 자식은 심장 질환을 겪는 등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심함>

A: 소식이 없죠. 있을 수도 없고. 그러니 정부에 대한 서운함이 많죠. 국가 공무원이라는 것은 국가의 시책을 따라서 일선에서 국가가 시키는 데로 움직이는 것이 공무원인데 특히나 공안 사범을 다루는 법조계의 공무원은 늘 위험이 따른다고요. 그런데 왜 오늘날까지 찾아주지 않나 이거에요. 내가 화부터 나고 울분부터 나고 하소연부터 나는데 정부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구요. 예를 들어 일본은 몇 명 안되지만 수상이 북한까지 날아가고, 미국은 군사들 유해를 지금까지도 찾고 있어요. 그러면 우리 나라는 이게 뭐냐 이겁니다. 정부가 한강 다리 끊어놓고 우리는 도망 갈 수도 없게 해놓고 방송에는 '서울 시민은 안심하고 돌아가십시오. 국군이 격퇴하고 있다'고 방송하고, 그리고 28일 날 한강 다리를 끊어놨어요. 다리를 끊어놓으니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저희 부친 같은 사람들은 언제 잡혀갈 지 모르니 길에 나설 수도 없어요. 왜냐면 빨갱이 천지가 돼가지고 감옥에서 다 나와 잡으러 다니고 몽둥이 들고 다니고 하니. 걔네들이 더 무서운 거에요. 인민군이 뭘 압니까? 걔네들이 앞장 서서 다니는 거에요. 그러니 숨어 지낼 수 밖에 없죠. 숨어 지내도 그 동네에 가면 또 그 동네 빨갱이가 있으니. 요즘엔 빨갱이 하면 만화 같은 이야기로 생각하지만 그 때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러니 오늘날까지 56년이란 반세기를 식구들이 맘 조리고 여자들은 남편 그리워하다 홧병 나지, 가정 몰락하지, 돈이 어딨습니까?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하다가 돈 떨어지니 아이들 학교 가는 것도 어렵지. 우리도 있는 것 가지고 한 동안은 버텼어요. 연안에서 쌀이 올라오고 해서. 그러나 그 담부터는 학교는 가야겠고, 우리 누님은 회상에 타자치는 것으로 들어가서 월급 받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살 수 없잖아요. 그러니 집 팔아먹는거죠. 집 팔아 먹고 여기저기 전전하니 어머니께서 홧병나지 않겠습니까? 우리야 공부하라 해도 공부가 됩니까? 그 때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없었어. 사는 것이 참 다 구차해서 얘길 안 해서 그렇지 오늘 날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대단한 거야. 도리어 거지가 돼서 얻어먹고나 다니면 몰라. 이건 제대로 멀쩡하던 집안에서 이렇게 됐으니 환장할 노릇이지 어머니, 옛날 노인이야 자식 키우는 것만 알지 뭘 하겠어요. 그러니까 팔아먹기 시작하는 거죠. 집 팔아서 쌀 사먹고, 집에 가구가 성한 게 없었어요. 끌고 다니면서 부딪치고 깨지고 그래서. 참 우리 어머니 종교의 힘으로 버티지 않았나 싶고. 나 같은 사람은 어리지만 정신력으로 버틴 거죠. 내가 살아남아서 저 놈들 원수를 갚아야 되겠다 하고.

Q: 어머니는 어떠셨어요?
A : 지금하고 달라서 옛날 노인네는 남편하고 자식밖에 모릅니다. 특히나 저희 아버지가 성격이 차분하고 가정적이었어요. 그러니 많이 생각나셔서 울고 까무라치고, 나중엔 병이 생기니까 저희가 아버지 생각 고만하라고도 했어요. 종교의 힘으로 매일 기도하며 사셨죠. 이제는 생각도 없지만 저도 첨엔 많이 힘들었어요. 어디 나갔다 오면 아버지가 꼭 와 계신 것 같아. 그러니 어린 마음에 죽겠죠. 어머니 앞에서 얘기할 수도 없는 거고. 허탈함과 그런 것이 맘에 쌓여서 나이 드니까 심장병이 생기더라고. 아버지가 고문당하신 거 생각하면 자다가도 팍팍 일어나게 되고. 그 악몽이 끔찍해요. 왜 학살하냐 이거냐. 사람을. 자기네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거기서 끝나야지. 서로가 달라서 대립상태면 그만이지 거기서 끝나야지 왜 구덩이 파놓고 죽이냐고. 그러니 이쪽에서도 그랬을 것 아니에요? 쌍방이 이러다 보니 엄청난 사람들만 죽은 거지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 신고는 대한 적십자사밖에 없는 거야. 받아주는 데고 거기밖에 없고, 의지할 때가 거기 밖에 없는 거지..

Q: 정부의 지원이나 노력은?
A: 없지. 하나도 없지. 도리어 경찰이나 군경이면 나았을지 몰라. 우리는 고급 공무원인데 자식들도 공부해야 되는데 일절 몰라. 지금이라도 서류라도 찾아볼라 하면 안보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이거야. 도움이야 십 원 하나 있을 수 없고 그러니 가난하게 사는 거야. 나가서 청소하는 사람도 있고, 동서기를 하든지. 공부 마치기도 힘든 겁니다.

호적정리

<행방불명으로 정리>
A: 호적은 세대주를 나로 해서 법원에 신청해서 10개월 만에 나왔어요. 왜냐면 아이들이 크는데 호주에 할아버지 성명이 나와있어서 제가 법적 절차를 받아서 했죠. 지금은 그냥 납북자, 행방 불명으로 돼 있지. 가짜로 적당히 죽었다 하지 않아. 그대로 써 기록에 넣은 거지.
연좌제 피해

<전화 도청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눈으로 드러나는 연좌제 피해는 없었음>

A: 있었겠지. 연좌제도 알게 하는 게 있고, 모르게 하는 게 있는데 내 직감에 전화 도청 같은 건 당한 걸로 알아. 내가 개인회사 다닐 때 집에 와서 전화하면 띵 하는 소리가 난다고. 그러면 전화 많이 하는 사람들은 알잖아. 그래서 내가 어떤 놈이 감시하는 지는 몰라도 잡히면 죽는다고 소리지른 적이 있어. 당하는 것은 모르는 거지. 알게 합니까? 그러나 와보니 못 살이 종교적인 집안이지 뭐 트집잡을게 없으니.

정부에게 바라는 말

<피랍자 생사확인 및 유해 송환, 납북자 명예회복>
A: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 오늘날까지 왔는데 지금에 와서 정부에 말하고 싶은 건 왜 그 동안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았는지 고급 공무원이 잡혀갔으면 뒷 처리를 써야 하는데 신경 밖이라 이거에요. 관심을 안 가졌어요. 정부는 나름대로 대립상태여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부터는 남북화해로 햇볕 정책을 하고 정주영씨가 많이 가져다 주면서 물꼬를 텃는데 그러면 그 때부터 라도 얘기를 하고, 납북자 가족에게 왜 신경을 안 썼나 이거야. 납북자 가족 중 법조인만 106명이 잡혀가고 통 토탈이 8만 명이 넘어요. 1950년대 정부 통계가 나온 것이 있습니다. 50년대 공보처 통계국에서 나온 자료를 보면 강제 납치 피해자가 한 2500명, 1952년 대한민국에 정부에서 작성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걸 조사를 해 놓고 자료를 공개를 안 했어요. 어디다 박아놓고 찾아가면 없다 모른다고 답변한거야. 이번에 다 받아냈지만. 그리고 또 대한적십자사에는 피해자들한테 신고만 받았어요. 거기서 끝나는 거야.그러면 우리 가족들은 혹시나 남북 적십자회담이 잘돼서 소식이 오질 않을까 하는데. 그때 당시는 그래도 희망이 있었어. 지금은 저희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107살인데 살아계시겠어요?우리가 바라는 건 왜 회담할 때 유해라도 찾아달라고 말도 못하느냐 이거야? 살아있는지 생사확인이나 해 주고 해골이라도 받아야 자식 된 도리로 제사라도 지낼 꺼 아니냐고. 이것을 1세대에서 못하면 아이들은 못해요. 우리도 힘든데 우리 아이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데 누가 하겠어요. 알지도 못하고. 6.25 전쟁 말만 들었지. 실제로는 무슨 만화 같은 얘기냐 이거에요. 내가 지금 71살인데 국가에 애원하는 거에요. 좀 회담 때가서 잘 얘기해서 살펴주십시오 하고
Q: 더 하고 싶은 말/
A: 앞으로 저희가 정부에 요청하는 것들 잘 이뤄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알고 있는 걸로 압니다. 바쁘셔서 잊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애타는 납북 가족들 환희에 넘치는 날이 못돼도 유해라도 찾을 수 있은 길을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정부에서는 지금 통일부와 산자부에서 서로 주관을 미루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통령께서 말씀을 해 주셔야 합니다. 바쁘신 줄 알지만 하루빨리 우리 납북자 가족의 부모 그리는 마음을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Q: 아버님에 대해 드는 생각은?
A: 참 충실하셨다 이거죠. 이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정부에서 무관심하게 56년의 세월을 끌었을 줄 알았으면 왜 일선에서 열성적으로 공무원 생활을 했나고 묻고 싶어. 잡혀가서 거기서 끝난다면 어느 놈이 국가 공무원을 하겠냐 이겁니다. 잡혀가면 그만이다 이거야. 사법계통사람들이야 남아 있겠어요? 다 죽였겠지. 그래도 나는 개인적으로 명절 때 밥 한 그릇 떠놔요. 나도 한이 돼서 시체는 없지만 이름이라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합장시켜드렸어요. 참 한심하죠.

Q: 아버님께 하고 싶은 말?
A: 아버지. 돌아가셨겠지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고 현재 정부에다 간곡히 부탁해 유해라도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버지 발자취를 찾아서 늦게나마 명예회복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식의 성의 부족보다 정부 시책 때문에 여태껏 대립상태에 있어서 할 수 없었지만, 죽은 영혼이나마 어머니 만나셔서 평안히 두 분께서 못다하신 인연을 근심 없고 병 없고 질투 없는 하늘 나라, 좋은 곳에서 영원히 함께하시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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