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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자-김근호 (증언자-황영선,김영일)
이름: 관리자
2013-09-16 11:04:26  |  조회: 3258


060121A 김근호 / 2006. 1. 21 채록
// 첨부: 문서 오른쪽 상단 차례로 배치 사진1 (피랍자:김근호), 사진2(증언자:황선영 김영일)

피랍자
성명: 김근호(金根鎬)
생년월일: 1907년 음력 3월 8일 (강화 출생)
당시 주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23번지
피납일: 1950년 7월 26일
피납장소: 서울시 종로구 가회동 123번지(자택)
직업: 배재학당 이사장, 동양기선㈜ 운영
당시 직계가족/부양가족: 배우자, 자녀 3남 4녀
외모 및 성격 : 건장한 체격에 사교적임

증언자
성명: 1.황선영(1910년생) 2.김영일(1935년생)
관계: 1.배우자. 2.장남
증언 성격: 직접증언 V 간접증언

증언 특이사항 (납치주체, 납치상황 및 원인)
조선사업을 하면서 배재 학당 이사장을 겸했던 피랍자는 지방 좌익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인근 동료의 집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가족을 걱정해 다시 집으로 돌아 왔음. 이후 7월경 자택에 차압이 시작되고, 곧이어 7월 27일경 한 사람이 찾아와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피랍자를 내무서로 연행해 감. 소련, 중국 등지의 상황과도 피랍 경위가 거의 일치하며, 공산 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정화 방법으로 납치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

증언자 요청사항
(對정부) 납북 인사 명혜 회복과 보다 명확한 사실 규명 및 역사 기록








“공산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사회정화 방법으로 생각해요. 사상이 다르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 운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소련에서의 숙청이라든가 중국 문화 혁명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캄보디아 학살 문제 등이 너무나 공통적이에요. 소련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가 소련 비밀 경찰에 잡혀가면서 '걱정 마, 잠깐 다녀올께' 한 뒤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한 것이 우리와 너무나 흡사해요.”

“나는 지금 상당히 울분을 느끼는 것이 과거사 이런 얘기를 하면서 당시의 여러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하신 지도자들을 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이에요. 그러한 분들이 계셨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그 분들이 당시 어떤 활약을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인지 그것을 밝히고 나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나올 거에요. 나는 사실 그런 것으로 인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바르게 인식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를 막 해도 되냐구요?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가 그런 말을 안 하는 데 있는 거에요.”


직업 및 활동

<조선 사업, 배재학당 이사장을 하면서 당시 교육계에 역할을 함>

Q: 아버님께서 어떤 활동들을 하셨나요?
A(김영일): 아버지는 참 재밌는 분이셨어요. 아버지가 하셨던 주 사업 중에 하나는 농산물에 관한 회사가 있었고, 땅도 좀 있으셨고, 또 인천에 가면 배 회사가 있었어요. 일종의 연락선인데 그것이 당시로 얘기하면 민족자본으로서 지어진 가장 큰 배였었어요. 200톤 규모니 요즘엔 작은 배지만 당시 우리나라 경제 규모로서는 가장 큰 배였어요. 거기에서 일을 하셨고, 또 사회활동을 좋아하셔서 배재 학당의 선교사들이 다 미국으로 가게 되니까 그 때에 아버지가 운영을 맡으셨어요. 1939년 그 때부터 아마 운영하셨을 거에요. 요즘 학교재단하고는 다른 것이 당시는 사재를 많이 쓰셔서 운영하셨어요. 철원 근처의 26만평의 땅을 기부도 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려운 분들이 와서 자식들 학교에 보내 달라고 와서 부탁도 많이 하시고, 그래서 항상 그렇게 바쁘시게 지내셨어요.

Q: 아버님이 교육에 좀 뜻이 많으셨나 봐요?
A(김영일): 우리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있었던 것은 일본이 명치유신을 계기로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강대국이 되었고 우리 나라는 그걸 못해서 형편이 어렵다고 판단하셨어요. 결국
새로운 교육이 없었다는 거에 초점을 두신 거죠. 그렇잖아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교육이라는 걸 많이 강조를 하는데, 아버지는 당시 교육을 한국의 축, 현대화의 축이 되어야 된다는 절실한 느낌을 갖고 일하셨어요.

납북 경위

<피랍자는 지방 좌익이 기승을 부리는 통에 인근 동료의 집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가족을 걱정해 다시 집으로 돌아옴. 이후 7월경 자택에 차압이 시작되고, 곧이어 7월 27일경 한 사람이 찾아와 잠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피랍자를 내무서로 연행해 감>

A(황선영): 확실히 언제라고는 못하겠네. 지금 100살이 가까우니깐 다 잊어버려. 집에 있었는데 붙잡아 가는 게 아니라 말 좀 물어보고 올 거라면서 그냥 데리고 갔어. 아무 걱정 말라고 그러고. 그냥 하루는 보내고 그 이튿날부터 우리 막내를 업고 가보고, 큰 아들이 가보고 그래도 없대. 공연히 왔다 갔다 그날 다니던 데만 돌아다니다가 그만뒀어.

A(김영일): 제일 먼저 군인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들어 오고, 얼마 안 있다가 군인들이 들어 오고, 그 다음에 보안부대라는 게 들어왔습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들은 우리나라로 얘기하면 경찰 같은데, 유니폼이 좀 달랐어요. 군인들은 누런 색이었고, 그 사람들은 녹색 비슷한 것을 입었어요. 견장 같은 건 다 똑같은데 유니폼 색깔이 달랐어요. 아마 그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정화 해야 된다는 구체적인 안을 지시한 것 같아요. 그 앞에서 일한 사람들은 대부분이 동네에 있던 사람들이에요. 견장을 갖다가 빨간걸 칠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녀서, 저희 아버님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당분간 피해 계셨어요. 삼청동에 있는 회사 동료 집에 가서 계셨죠. 그러고 제가 여기서 거기를, 거기서 집을 왔다 갔다 했어요. 당시 아버지는 완전히 맥이 빠지신 상태 같았고, 결국은 다시 집으로 오시더라구요.
우리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너무나 가족적이고, 자식과 부인에 대해 끔찍하셨어요. 아마 그래서 다시 집으로 오시게 한 것이 아닌가 싶고. 여하튼 그 사람들의 와서는 차압을 시작했어요. 뭘 다 붙이고, 물건을 꺼낼 수가 없게 했어요. 날이 가면 갈수록 공포심이 조성이 되더라구요. 그러던 중 7월 27일로 기억을 하거든요. 문을 두드려서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요 근처에 잠깐 가시자고 데려 갔어요. 그게 아마 근처 파출소일 거에요. 거기 사람들을 많이 데려다 놨어요. 어떤 사람은 물어보고 심의를 해가지고 내보낸 사람들도 있고. 그 중에 한 사람을 통해서 아버지가 우리한테 먹고 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차고 있던 시계를 풀어서 집으로 보내셨어요. 그리고 다시는 소식을 못 들은 거죠. 다만 이북으로 다들 데리고 갔다는 얘기만 있고. 그 증거로는 그 때 같이 가다가 서울 시내에서 도망친 사람도 있고,
의정부 근처에서 도망 온 사람들도 있고 해요.

납치이유

<공산 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정화 방법으로 납치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

A(김영일): 공산주의 체제의 기본적인 사회정화 방법으로 생각해요. 사상이 다르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 운영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소련에서의 숙청이라든가 중국 문화 혁명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캄보디아 학살 문제 등이 너무나 공통적이에요. 소련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가 소련 비밀 경찰에 잡혀가면서 '걱정 마, 잠깐 다녀올께' 한 뒤로는 다시 볼 수 없다고 한 것이 우리와 너무나 흡사해요. 거기서 시작해서 이북에서도 똑같이 한 거죠. 지금 이북에서 너무나 강한 통제를 하다 보니 사실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지지 않아 내용이 전파가 안 되는 거지. 나는 지금 북쪽에서 상당히 참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요. 나중에 통일이 된다고 한들 500만 명이 죽어 나갔다고 해도 우린 알 수 없는 거죠.

납치 후 소식

<소식 없음>

Q: 가족을 찾으려는 노력은?
A(황선영): 납치된 사람들 모여있는 데 가고 그랬지. 그래도 찾을 수 없지

Q: 북한으로 갔다는 것은 어떻게?
A(황선영): 세상이 다 떠드니 그냥 가만히 있어요 납치된 사람들 집에 가면 울고 불고,
한바탕 찾으려고 야단을 쳐도 찾을 수 없고. 당시 (피랍자가) 가회동도 많았어요.

당시 시대 상황

Q: 왜 곧바로 피난을 가시지 않았는지?
A(김영일): 그 때는 서울은 괜찮았어요. 6.25 전날 밤에 대포 소리가 나더라고. 그러더니 아침에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달려요 북쪽으로 가는 소리가 나더니 이틀 인가 있더니 이북 군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 탱크를 타고 군인들이 행진을 하고. 우리도 가서 구경하고 그랬어.
여기서는 사실 큰 접전은 없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용산 근처에서 국군들이 후퇴하다가
미쳐 못하고 다리 부근에서 서로 심하게 총을 쏘고 했다고 해요. 그 당시 패잔병들이 몰래 민간인이 사는 집에 찾아와서 옷을 달라고 해서 입고 도망치고 했었어. 무명 용사들이지만 용산 근처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은 국군도 많고 그랬어.

Q: 그러면 언제 피난을 가셨는지?
A(김영일): 7월에 아버님이 납치당하시고, 그리고 우리는 집을 떠났어요. 한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화도 시골 집으로 갔어요. 가는 도중에 P51 미국 비행기가 정찰을 해서 민간인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가고 했어요. 나는 6.25때 미국 사람들의 인상이 나쁘지 않아요. 그 때 당시 열렬한 반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민간인이 이북 사람들의 무기고에 불을 던지고 했어요. 그러면 전투기들이 거기 와서 쏜다고. 그런데 큰 폭격이 있기 전날은 비행기가 와서 종이를 떨어뜨려요. '내일 폭격이 있으니 어는 지역 시민은 피해라. 총 사령관 맥아더 원수' 이렇게 써서. 요즘 과거사 문제를 살필 때, 미군들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하는데, 물론 그런 일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거를 하나씩 꼬집어 강조하기 시작하면 당시의 모든 그림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겁니다. 그게 큰 문제에요. 제가 요즘 한국 영화를 보다 보면 공산주의자가 갖다 준 밀가루를 먹은 것을 부역했다고 죽이는 사건을 기록했는데, 나는 그것을 봤기 때문에 말하는데 물론 그런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만 얘기하면 남쪽에서 다 양민을 학살한 거로만 되잖아. 우리가 시골 갔을 때 보면, 이북사람들이 도망가면서 시골사람들이 뭘 안다고 그걸 창으로 해서 전부 죽였다고. 그러면 부패가 되잖아. 가족이 시체를 찾아야 되니 시체의 목을 잘라 물에 &#50492;어서 알아보고 했다고.
그런데 그런 얘길 하나도 안 해. 남쪽의 정부가 죄 없는 사람을 다 죽여버리고 이런 식으로만 매도하고.

Q: 서울로 돌아 오신 때는?
A(김영일): 인천상륙하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해서 우리 가족이 서울까지 걸어왔어요. 물론 희망 사항이었지 그 땐 이미 이북 사람들이 데려갈 사람은 다 끌고 간 때였고, 그 사람들이 우리 집을 사무실로 만들어 썼더라고. 높은 건물은 무조건 폭격 대상이 됐으니 민간 큰 집에 사무실을 만들어 썼어요. 미국사람이 차마 그것을 폭격하지 않을 것이라며 명동성당을 무기고로 쓰기도 했으니.

납북 후 남은 가족의 생활은?

<원래 가지고 있던 재산을 팔아 피랍자의 배우자가 자녀 7남매를 양육함>

A(황선영): 그 땐 자식 7남매가 모두 고만고만했죠, 막내는 한 달 된 갓난아이였고. 처음에는 또 무서워서 장남은 일찌감치 고등학교 나왔을 때라 또 잡아갈 까봐 미국으로 보냈어요. 빚도 지고, 집 팔아 가지고 그냥. 먹고 사는 거는 그냥 좀 부족하게 먹고 애들 공부시키고 딸들은 여기서 다 대학 해 가지고 시집 보냈어요 마음고생이 많았지 뭐. 그래도 애들이 큰 걱정은 안 일으켰고, 나 하나 힘들면 되니까 그렇게 살았어요. 살아서 다 좋은 일 보고 애들이 다들 잘해요.

A(김영일): 생활은 저희 집이 원래 재력이 좀 있었으니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처음엔 그냥 지냈어요. 그 다음엔 어머니가 재산을 팔면서 7남매를 공부시키느라 고생하셨죠.

호적 정리

<실종으로 처리>

정부의 노력

<없었음>

Q: 신고는?
A(김영일): 당시 신고할 수 있는 건 다 했어요. 결국은 그 때 분들은 이젠 다 잊은 거 같아요. 근래 납치된 사람들 가지고도 정부가 별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Q: 정부의 노력은 없었는지?
A(김영일): 제가 기억하기엔 유엔 기관에서도 나와서 조사하고 했어요. 이름, 직업, 어떻게 납치됐고 이런 기본적인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 같았어요. 그것이 나중에 유엔 보고서 같은 데를 보면 하나의 통계로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아마 그게 전부였던 것 같아요.

연좌제 피해

<피랍자의 둘째 딸이 해외에 갈 때 신원조회 과정에서 아버지가 납북된 것으로 논쟁이 있긴 했으나, 그 외 큰 어려움은 없었음>

정부에게 바라는 점

<납북 인사 명혜 회복과 보다 명확한 사실 규명 및 역사 기록>

A(황선영) : 지금 나라에서 그런 거 뭘 해주겠어요, 지들끼리 싸움들이나 하지. 그런 거 지금 생각이나 하겠어요? 생각을 안 하지. 그 사람들은 생각 안 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게 억울하게 간 걸 생각하면….

A(김영일): 나는 지금 상당히 울분을 느끼는 것이 과거사 이런 얘기를 하면서 당시의 여러 한국에 좋은 일을 많이 하신 지도자들을 무시한다는 거. 예능계를 시작해서 문인, 교육계, 사업이다 여하튼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희생이 됐는데 그런 사람들을 전적으로 무시했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죠. 나는 첫째는 그러한 분들이 계셨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봐요. 그 분들이 당시 어떤 활약을 했고,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한 것인지 그것을 밝히고 나면 거기에 대한 대책이 나올 거에요. 나는 사실 그런 것으로 인해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 바르게 인식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A(김영일): 또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김대중 대통령부터 아주 이상스런 전제로 남북관계를 시작했다고 봐요. 제가 모든 읽은 책들을 봐도 이북은 절대 전쟁을 못합니다. 능력이 없어요. 그 사람들이 군대를 움직일 수 있는 기름의 비축량이 일 주일도 안 되요. 굴을 파고 거기다 탄약을 넣어 뒀는데, 탄약은 써야 합니다. 그걸 넣어두면 습기가 생겨 터지지 않아요.
이북은 지금 그런 상태라구요. 지금 그 사람들이 탄약을 무슨 돈으로 삽니까? 그리고 거기 무기라는 것이 20년씩 된 건데, 숫자로만 보면 탱크들이 몇 천대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거기의 3/1정도는 남한에서는 쓰지도 않아요. 고철로 버리는 거고, 또 3/1은 잘 움직이지도 않아요. 그런데 마치 이북에서 큰 위협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그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꾸 도와줘야 한다고 하는데, 원조를 주는 건 괜찮습니다. 왜냐면 원조의 경우 쌀이 어디로 가는지 남쪽에서 가서 모니터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부 차관을 주고 있어요. 최소의 이자로. 그걸로는 여기서 모니터링을 할 수가 없어요.
그건 받아서 자기 맘대로 쓰는 거죠. 그런 모순점이 있어요. 우리 나라가 군사정부 시절에는 '이북에서 쳐들어올 가능성이 많은데, 우리가 군인이니 이를 대처할 능력을 잘 알아' 그러고 김대중 정부부터는 '군사 위협이 있는데 우리가 전부 해결할거야, 그러면 평화와 번영을 이룰 수 있다'는 정치가들의 논리가 있는 거죠. 그런 것이 상당히 걱정이 돼요.

Q(황선영) : 그런 얘기를 막 해도 돼?
A(김영일): 그런 얘기를 막 해도 되냐구요? 지금 우리나라의 문제가 그런 말을 안 하는 데 있는 거에요.

피랍자에게 전하는 말

A(황선영) : 여보, 꼭 한번 만나서 하고 싶은 얘기나 했으면 좋겠어요.

A(김영일): 아버지는 항상 저희 안에 계십니다. 보고 싶을 때는 우리 자신을 보고, 우리 손자 아이를 보며 아버지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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